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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zart, Le Nozze di Figaro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
피가로의 결혼 3막 '아름다운 그 시절은 가고'
Le nozze di Figaro ; "Dove sono i bei momenti" : Annette Dasch
Glyndebourne Festival 1994
거의 모든 배역이 주옥같은 멜로디의 아리아를 부른다
(음악바를 정지 시키시고, 유튜브를 누르시면 전곡이 시작됩니다)
Bernard Haitink/Glyndebourne Festival 1994 - Mozart, Le Nozze di Figaro
Figaro: Gerald Finley
Susanna: Alison Hagley
Count Almaviva: Andreas Schmidt
Countess Almaviva: Renée Fleming
Cherubino: Marie-Ange Todorovitch
Glyndebourne Opera Chorus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or: Bernard Haitink
Glyndebourne Festival
잘츠부르크에서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다 빈에 자리 잡은 모차르트가 대본작가 로렌초 다 폰테를 만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오페라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대본에 달려 있다.”고 호언했던 다 폰테. 그의 탁월한 언어 감각과 본능에 가까운 흥행 감각이 없었더라면 음악이 아무리 천재적이라 해도 그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모차르트 자신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모차르트 최고의 걸작 오페라로 꼽히는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 세 편의 대본은 모두 다 폰테의 손끝에서 나왔답니다.
예술가 경력으로 따지자면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전 유럽을 돌며 연주여행을 했던 모차르트의 출발이 훨씬 빨랐지만, 당시 빈에서 모차르트가 아직 충분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때, 다 폰테는 이미 살리에리 같은 최고 궁정 음악가의 오페라 대본을 쓰는 명사였지요. 그러나 젊은 시절에 칸트, 루소, 볼테르 등의 영향을 받아 뚜렷한 계몽주의 성향을 지녔던 다 폰테는 모차르트와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신분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 오페라
1782년에 작곡가 파이지엘로가 발표한 <세비야의 이발사>(파이지엘로의 작품보다 훨씬 유명한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1816)는 훗날의 리메이크 작품입니다)가 장기 흥행에 성공하자 모차르트는 그 인기에 힘입어 성공해볼 계획으로 ‘이발사’ 원작자인 보마르셰의 속편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자고 다 폰테를 설득합니다. ▶19세기에 그려진 <피가로의 결혼> 1막의 한 장면.
사실 이 작품이 연극으로 파리에서 초연될 무렵 당시 루이 16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작품의 상연을 전면 금지했었습니다. “참을 수 없이 끔찍한 작품이군. 절대로 상연하면 안 돼!” 국왕뿐만 아니라 귀족들 대부분이 치를 떨며 분개했지요. 가장 큰 이유는 기존의 신분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 작품의 정치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마르셰의 이 문학적 저항은 몇 년 후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현실화됩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이중의 장치를 지닌 작품입니다. 그 외피만을 본다면 TV 연속극과 비슷한 ‘부부싸움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지요. 전편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그처럼 난리법석을 떨며 갖은 난관을 뚫고 결혼에 성공했던 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 커플이 그 속편인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에게 눈썹을 치뜨는 전투적인 부부로 등장합니다. 이들과 대조를 이루는 커플은 결혼을 앞둔 피가로(전편에서는 이발사, 속편에서는 백작의 하인. 백작의 결혼을 성사시킨 공로로 하인이 되었습니다)와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입니다. 바람둥이 행각으로 아내 로지나를 수없이 좌절시켜 온 백작은 이제 수잔나에게까지 흑심을 품지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피가로는 수잔나 및 백작부인과 연대해 희극적인 계략을 써서 백작을 무릎 꿇게 만들고, 백작부인은 사과를 받아들여 남편을 용서합니다.
거짓말 릴레이, 성적 긴장과 정치적 긴장의 긴박한 줄다리기
그러나 <피가로의 결혼>은 부부관계 또는 남녀관계의 줄다리기를 보여주는 통속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속고 속이는 ‘거짓말 릴레이’ 안에 시퍼렇게 날이 선 계급의식이 숨어 있으니까요. 작품의 외피를 타고 흐르는 ‘성적 긴장’은 그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치적 긴장’과 결국 하나로 연결됩니다. 보마르셰의 원작 연극 5막에서 백작을 겨냥한 피가로의 독백은 신분사회의 뿌리를 뒤흔드는 새로운 시민계급의 분노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백작, 당신은 절대로 수잔나를 얻을 수 없어! 귀족의 신분, 부, 높은 지위, 품위… 그런 것들을 다 지녔다고 우쭐대지. 하지만 그처럼 다양한 특권을 얻기 위해 당신이 스스로 한 일이 대체 뭐가 있지? 세상에 태어나는 수고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잖아!”
<피가로의 결혼> 중 하녀 수잔나에게 흑심을 품고 접근하는 바람둥이 백작.
이 전복적인 발언에 왕실과 귀족들은 놀라 경기를 일으켰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은 상연이 금지된 작품이었기 때문에 대본작가 다 폰테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 5막의 독백을 애초부터 빼버렸지요. 그러나 이미 1막에서 유명한 아리아 ‘나비는 이제 날지 못하리 Non piu andrai’를 부르는 피가로는 표면상으로는 백작의 방자한 시동인 케루비노를 조롱하지만, 실제로는 백작을 비롯한 귀족계급 전체에 날카로운 분노의 화살을 겨누고 있습니다.
백작부인인 로지나 역시 원래 귀족이 아닌 시민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오페라의 4막 ‘정원의 밀회’ 장면에서 백작부인이 하녀 수잔나와 옷을 바꿔 입고 수잔나 대신 밀회 장소에 나가 백작을 골탕 먹이는 것은 무엇이든 멋대로 하는 귀족계급의 전횡에 대한 시민계급의 통쾌한 보복으로 해석할 수 있지요.
Bernard Haitink/Glyndebourne Festival 1994
작업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기 위해, 다 폰테가 대본을 쓰는 동안 그 대본을 따라가며 동시에 작곡을 하다시피 했던 모차르트의 음악은 매끄럽고 유연하고 힘이 넘칩니다. 모차르트는 파이지엘로의 로지나가 불렀던 1막의 E장조 카바티나를 모방해 <피가로의 결혼>에서 로지나의 2막 아리아 ‘사랑의 신이여, 위로해주소서 Porgi, amor’를 같은 조성과 같은 템포(라르게토)로 설정하고, 파이지엘로와 마찬가지로 클라리넷과 파곳으로 반주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가로의 결혼>이 1786년 빈에서 초연되었을 때, 몇 해 전 파이지엘로에게 그토록 열광했던 빈 청중의 반응은 냉담하거나 미적지근할 뿐이었지요. 그나마 가장 인기가 있었던 건 케루비노가 창문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에 수잔나와 부르는 듀엣이어서, 초연 때 케루비노는 어쩔 수 없이 연달아 두 번 창문에서 뛰어내려야 했답니다. 다행히도 이듬해 모차르트를 초청한 프라하의 청중은 <피가로의 결혼>의 절묘한 희극적 오케스트레이션에 감탄할 수 있는 음악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씹을수록 맛이 깊어지는 이 음악을 놀랍게도 그들은 한눈에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간략한 줄거리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 피가로와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는 서로 사랑해 결혼하려고 합니다. 수잔나는 자신을 좋아하는 백작이 ‘초야권’(신부의 결혼 첫날밤을 소유하는 영주의 권리)을 부활시키려 한다고 피가로에게 귀띔하고, 분개한 피가로는 백작부인, 수잔나와 함께 계략을 꾸며 백작을 혼내주기로 합니다. 수잔나는 백작에게 밤에 정원에서 몰래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고, 그 밀회 장소에는 수잔나로 변장한 백작부인이 나타납니다. 백작의 열렬한 사랑의 고백을 듣고 반지까지 선물로 받은 백작부인은 하인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진실을 폭로하고, 골탕을 먹은 백작은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합니다.
추천 음반과 DVD
음반으로는 우아한 성악진과 체사레 시에피라는 스타가 활약한 에리히 클라이버의 전통적 명연과 시대악기 연주의 상큼함과 베로니크 장, 파트리차 초피, 사이먼 킨리사이드의 성악진이 돋보이는 르네 야콥스의 음반이 훌륭합니다. 현재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로 평가받는 안토니오 파파노와 주요 가수들이 뭉친 런던 로열 오페라 실황 DVD도 눈을 즐겁게 합니다. 미모의 소프라노 안나 넵트레코가 출연하고 니콜라스 아르농쿠르가 지휘한 DVD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영상으로 현장의 무대감을 생생히 전달합니다.
[음반] 로렌초 레가초, 베로니크 장, 파트리차 초피, 사이먼 킨리사이드 등. 콘체르토 쾰른 및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 르네 야콥스 지휘, 2006년 녹음
[음반] 체자레 시에피, 리자 델라 카사, 힐데 귀덴, 알프레트 포엘 등.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및 빈 국립오페라합창단, 에리히 클라이버 지휘, 1955년 녹음
[DVD] 어윈 슈로트, 도로테아 뢰쉬만, 미아 페르손, 제랄드 핀리.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안토니오 파파노 지휘, 데이비드 맥비커 연출, 2006년 공연 실황
[DVD]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 도로테아 뢰쉬만, 안나 네트렙코, 보 스코프후스 등. 빈 필하모니와 빈 국립오페라합창단,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지휘, 클라우스 구트 연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2006년(한글 자막)
글 이용숙(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
다음은 유형종 음악 칼럼니스트가 <매일경제> ‘인문학 리포트’(2009.09.10)에 실은 글입니다.
로렌초 다 폰테
고향에서 쫓겨난 사제 출신의 풍운아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 1749-1838)는 고전주의 시대의 대본작가다. 모차르트 최고의 오페라 부파(이탈리아식 희가극)는 모두 그의 대본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도 다 폰테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대본작가 로렌초 다 폰테.
다 폰테는 1749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모친 사망 후 부친이 새파랗게 어린 여자와 재혼하자 이에 반발해 교회 활동에 전념하다 24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토록 증오했던 부친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사제 신분으로 유부녀와 눈이 맞아 사생아까지 얻었다. 이는 베네치아에서 큰 스캔들이 되어 30세의 한창 나이에 추방령을 받는다.
그의 발길은 북쪽을 향해 독일 드레스덴에서 오페라 대본을 번역, 수정하는 친구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 황실의 궁정 음악가로 일하던 살리에리를 소개받아 빈으로 가게 된다. 마침 뛰어난 대본작가를 찾고 있던 오스트리아 황제 조지프 2세는 창작 경험이 전혀 없다고 고백하는 다 폰테에게 “좋아. 그렇다면 우리는 처녀 뮤즈를 손에 넣은 셈이군.”이라고 격려하며 재능만 보고 그를 채용했다.
이때부터 다 폰테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외에도 그들의 라이벌이었던 스페인 출신의 솔레르를 위해 대본을 썼다. 덕분에 빈은 본고장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베네치아보다도 활발한 오페라의 중심지로 올라섰다. 그러나 1790년 황제가 서거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다 폰테는 해고되었고 유럽 전역을 전전하다가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겨우 오페라 제작자로 입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다시 일을 크게 벌이다 파산하고 말았다. 도피하듯 신대륙으로 떠난 그는 식료품점, 이탈리아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번 돈으로 70세가 되어서야 이탈리아 서적을 취급하는 책방을 뉴욕에 열어 안정을 찾는다. 컬럼비아 대학의 이탈리아 문학담당 교수로 임용된 것은 무려 76세 때였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늘그막에 평온해지자 다시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솟아올라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치마로사, 모차르트, 로시니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는 일에 매달렸다가 완전한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성 패트릭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으니 보람은 있었으리라.
모차르트를 위해 조역에 그친 천재
다 폰테의 대본을 보면 당대의 다른 작가들과 차원이 다르다. 오페라 부파라는 새로운 희가극 양식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으나 이탈리아 전통극 양식을 답습한 교과서적인 틀을 이미 탈피해 웃을 수만은 없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피가로의 결혼>은 귀족의 행태를 비아냥거리면서도 백작부인 로지나를 통해 쇠락해 가는 귀족사회에 은은한 빛을 비추는데, 그런 가운데 어린 미소년에게 살짝 끌리는 로지나의 모습까지 남긴 것은 인간의 본성을 꿰뚫은 천재성의 소산이다. <돈 조반니>는 호색한 주인공이 죗값으로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으로 했으니 희극의 범주를 넘어선 작품이다.
원작이 없는 완전한 창작인 <코지 판 투테>는 애인 맞바꾸기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그렇더라도 사회질서 유지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위해 참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코지 판 투테>의 경우 150년 가까이 부도덕한 오페라라고 방치되었다가 사랑의 본질과 그 갈등을 꿰뚫은 혜안을 뒤늦게 인정받아 지금은 현대적 애정 드라마의 규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무리 모차르트가 천재였더라도 인간에 대한 다 폰테의 통찰을 얻지 못했더라면 그처럼 극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선율을 술술 써 내려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이들 오페라의 잘 짜인 구성과 맛깔스러운 대사조차 모차르트의 공으로 돌리려는 오류가 있어 다 폰테의 업적은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최고에게만 열광하는 것이 대중의 속성이다 보니 다 폰테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보다 더 뛰어났던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더욱 돋보이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 폰테는 그냥 묻히기에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도 리더의 능력과 실적을 빛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공적을 묻어두는 사례가 흔하다. 그러나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뛰어난 한두 사람의 천재성만으로 성과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리더는 주변 어디엔가 있는, 자기 못지않은 인재를 찾아내고 인정하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 밤을 밝히는 것은 달빛 하나가 아니다. [유형종 l 음악 칼럼니스트ㆍ무지크바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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