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마태오 18,12-14
나의 잊혀진 작은 성체 조각들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결론으로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어떻게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는지의 그 방법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성당에도 많은 어르신이 교통수단이 없어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을 일일이 찾아서 모셔 오지 못하는 것이 저에게는 마음의 큰 부담이 됩니다.
지금도 그 방법은 계속 생각하고 있지만, 그분들을 직접 찾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저의 논문지도 교수였던 조르지오 마짠티는 본당 신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태리는 한 번 본당을 맡으면 굉장히 오래 있기에 신자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압니다.
따라서 누가 미사에 안 나오면 그분은 끝까지 찾아가셨습니다.
한 번은 지붕 위에서 작업하시는 분과 이야기하기 위해 당신도 지붕 위로 올라가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성당에 나오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양이 내가 사랑하는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당에 나오지 않으시는 분들의 얼굴을 아직 모릅니다.
그래도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들 한 사람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밥상을 엎으면서 부모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주는 선물에 감사해야 부모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그분의 살과 피로 주시는 성체를 영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제가 유학할 때 어떤 신부님이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구둣발로 쓱싹쓱싹 지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설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이 바로 그 땅에 떨어진
성혈 한 방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김창옥 강사가 요즘 알츠하이머 증상이 있어서 강의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니 본인 생각으로는 아버지에게 매일 가정 폭력에 시달린 어머니 구하지 않고 외면했던 어린 시절의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부모에게 완벽히 감사하지 못할 때 자녀에게 그 영향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만큼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자녀도 그 정도로 세심하게 사랑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아주 작은 것까지 감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언제나 부모를 기쁘게 해 주려는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나에게 해 준 모든 조각도 다 감사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모가 나에게 준 것을 사랑하지 않으며 부모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성체의 한 조각, 떨어지는 가루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작은 영혼들이 그분의 성체의 한 조각임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됩니다.
감사한 만큼 보답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주는 선물인 성체와 성혈의 조각들을
사랑하지 못하면 주인의 마음에 무감각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저는 백포도주보다 붉은 포도주를 미사에 사용합니다.
한 방울도 씻겨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노력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랑으로 성장하기를 청해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마태오 18장 12-14절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마술사가 되는 비결>
한국청소년상담실에서 한 일간지에 제공하는 작은 글귀를 보고 눈이 다 번쩍 뜨였습니다.
어느 고등학교에 자기가 맡은 반을 시험이든, 체육대회든 늘 1등에 올려놓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매해 3월 새 학년이 시작하는 날,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교사 생활 이십 년에 너희처럼 우수한 아이들을 맡는 것은 처음이다.
어제는 너희들 만날 생각에 잠도 못 잤다.
우리 올 한해 잘 해보자."
마술사가 되는 첫 걸음,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온다고 자기부터 믿는 것입니다 (중앙일보, 2003년 12월 4일자 참조).
위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부끄럽더군요.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 안에 감추어져있는 보물 같은 가능성,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눈여겨보기보다는 부족한 측면, 덜떨어진 측면만을 바라보면서 때로 무시하고 지레 포기하는 경향이 많았음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길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간 받아온 상처가 너무도 크다는 것에 깜짝 놀랍니다.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와 냉대 속에 살아온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사회를 향한 적개심도 대단하지요.
아이들 마음 구석에서는 어른들을 향한 분노로 이글거립니다.
그래서 보다 청소년들에게 다가갈 때는 보다 세심한 관심, 민감함을 통한 접근이 필요하지요.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서 하고, 가능하면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 칭찬의 말로 다가서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소위 문제청소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저지르는 문제행동은 "제발 나한테도 관심 가져줘"라는 강한 외침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삐딱하게 나가는 것은 "날 좀 더 사랑해주세요! 나한테도 눈길을 좀 주세요"라는 부르짖음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비행청소년들도 고분고분한 청소년, 제 갈 길을 잘 가는 범생이 청소년들 못지않게 소중한 청소년, 특히 예수님께서 다시금 이 땅에 오셨다면 가장 먼저 찾아 나설 한 마리 길 잃은 어린양이란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이 땅의 많은 착한 목자들이 건강하고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양들 백 마리 보다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어린 양, 병들고 말라서 돈 안 되는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2주간 화요일 강론>
(2023. 12. 12. 화)(마태 18,12-14)
<되찾은 양의 비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여기서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라는 말씀은, ‘잃은 양’을 찾을 때의 목자의 애타는 심정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고,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라는 말씀은,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따라서 ‘아흔아홉’이라는 숫자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실 상황을 반영한다면, ‘잃은 양’과 ‘잃지 않은 양’의 비율을 ‘1대 99’가 아니라, ‘99대 1’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실제 인간 세상에서는 성모님 한 분을 제외하고,
인류 전체가, 즉 ‘모든 사람들’이 ‘잃은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바로 ‘내가’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찾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나의’ 목자이신 분이, ‘나에게’ 오신 날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입니다.>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목자가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양을 잃었을 때 크게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인류 전체의 모습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크게 슬퍼하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각 개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성모님처럼 예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슬픔만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의 기쁨인가? 슬픔인가?>
예수님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잃은 양’을 찾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좋은 말처럼 보이긴 하지만, 자기 자신은 잃은 양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좋은 말도 아니고, 옳은 말도 아닙니다.
<위선자들이 그런 말을 잘합니다.>
‘내가 먼저’ 되찾은 양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회개하라고 권고할 때에도,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 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이 바로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
베드로 사도입니다.
“......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말하였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0-62).”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모두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바라보셨을 때,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 사도의 시선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 사도는 자기 자신이 바로 ‘잃은 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바로 ‘잃은 양’이구나.” 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잃은 양이라는 말을 14절의 말씀에 적용하면, 14절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루카복음 18장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1-14ㄴ).”
이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는, 둘 다 ‘잃은 양’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는 ‘잃은 양’이고, 바리사이는, 자기는 절대로 ‘잃은 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잃은 양’입니다.
만일에 그 바리사이가 예수님의 ‘되찾은 양의 비유’를 해설한다면, 어떻게 해설할까?
“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합시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바리사이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도 잘 바친다는 말은 사실일 텐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마태 6,1) 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그의 말은, 즉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일까?
겉으로만 보면 사실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주님께서 그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는 마음과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교만’과 ‘위선’ 때문에 그는 ‘잃은 양’인데,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되찾은 양’이 되기는 무척 어려운 상황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