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았어도 죽은 삶 죽더라도 사는 죽음
백마강추천 0조회 3914.04.16 20:15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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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도 후반에 들어섰고, 부활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즈음, 죽음과 부활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순절, 부활절이 반복되어도 죽음도 부활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죽음과 부활을 얘기한들,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도 잘 모른다. 같은 말이긴 해도, 사람들이 그 말로 이해하는 건 서로 다르기 일쑤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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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 라자로의 누이들 (코레지오의 작품, 1518년) |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이지만, 그 내용은 여전히 애매하다. 아니, 불편하다. 살아서 예수를 믿는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죽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영원한 생명에 대해 얘기를 나눴던 마르타도 죽었고, 그 여동생 마리아도 죽었다. 예수께서 살려내신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도 결국은 다시 죽었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는 예수 자신도 죽음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그러니 불편하다. 모두 죽는데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정면으로 대면하길 꺼려 한다. 대충 묻어두고 지나치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고,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원이자 토대니, 결국은 이를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과 부활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아무리 모호해도, 아무리 불편해도, 할 수 있는 만큼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는 무의미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야 한다(1베드 3,15).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죽음을 생명의 자연스러운 귀결 정도로 여겼지만, 차츰 생명과 죽음을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명과 죽음은 존재의 원천,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좌우된다고 본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졌다면,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다. 이미 죽은 거다. “야, 그게 사람이 사는 거냐?” 엉망진창인 삶을 두고서 하는 이런 말이 아마, 유비적으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이에 반해, 하느님과 관계가 제대로 유지되면,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어도, 죽은 게 아니다. 여전히 살아 있는 거다. 생명과 죽음은, 특히 인간의 경우, 생물학적 현상 그 이상의 사건이다.
그러면, 하느님과 관계를 제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나는 어떻게 부모님과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나? 내가 부모님의 뜻을 존중하며 살 때에 나와 부모님 사이에는 제대로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때, 하느님과 관계가 제대로 유지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살면,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진다. 존재의 근원인 창조주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다.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면에서, 내 삶은 엉망진창이 된다. 나는 살아있지만, 산 게 아니라,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생명의 원천과 단절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죽음과 생명과 관한 질문은 이제 좀 더 익숙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할까?” 사랑, 관심, 돌봄, 나눔, 대략 이런 내용의 삶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 관심, 돌봄, 나눔의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느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같은 삶의 모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했고, 그 뜻이 요청하는 삶을 최선을 다해, 죽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냈다. 그래서 하느님과 완벽한 일치를 이루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죽은 게 아니라 여전히 살아 계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럼 예수를 믿는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했던 예수를 믿는다는 건 우리도 예수처럼 그렇게 산다는 것을 뜻하지 않겠는가? 이것 말고 달리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럴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라자로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4).
우리는, 살았어도 우릴 죽게 만드는 수많은 집착과 욕심에서 해방된다. 참된 자유를 누리며, 진리와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거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따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충실히 살면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제대로 유지할 것이고, 살아서도 죽지 않고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여전히 태부족이지만, 살아서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우리 삶과 관련하여 뜻하는 건 이 정도 아닐까? “그런 건 예수님이니까 가능했지.” 여전히, 이렇게 대충 넘어가려는 마음이 드는가? 그렇다면, 예수는 우리와 도대체 어떻게 달랐는지 한번 살펴봐야 한다.
예수께서는 라자로가 묻힌 곳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께서는 “속이 북받치시어”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셨다(요한 11,35.38). 눈물을 흘렸다, 속이 북받쳤다.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슬퍼했다니, 어떤 때는 엄청 기뻐했을 것이고, 또 엄청 화도 냈을 게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서운함을, 어떤 때는 연민을,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느끼셨을 것이다.
우리도 똑같이 느끼는 그런 감정들이다. 사람이란 면에서는, 예수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처지였다는 말이다. 우리와 그리 다를 바 없었다는 얘기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11,21)
마르타는 오빠의 죽음과 관련해 이렇게 아쉬움을 토로한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마르타에게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는지 묻는다. 예수께서는 이 물음을 통해 이런 말을 전해주시는 게 아닐까?
“마르타야, 내가 함께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정말 중요한 건 내 말을 믿는 것, 곧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전력을 다해 실천하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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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높은 그만큼 여기저기서 교황께서 찾아와주시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당연하다. 내가 바라는 곳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왔다 가신다고 실제로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까?” 밀양 127번 송전탑 농성장 입구 페트병 화분에 진달래와 생강나무가 꽂혀있다. ⓒ한수진 기자 |
예수의 마음을 이렇게 헤아려보면서, 문득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 소식이 떠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신단다. 참 반갑고 기쁜 소식이다. 교황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높은 그만큼 여기저기서 교황께서 찾아와주시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당연하다.
“여기에 오셔야 한다.” “거기에 가면 안 된다.” 말들이 무성하다. 무관심보다는 훨씬 낫다. 하지만 어차피 제한된 시간에 교황의 방문 장소는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을 게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말할 수 없는 다른 여러 상황과 여건들이 방문 장소를 더욱 제약할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의 소리들이 많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리 있는 불만과 아쉬움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내가 바라는 곳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왔다 가신다고 실제로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까? 어떤 변화가 생길까? 교황의 방문 그 자체로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까? 예수께서 오셨다 가셨는데도, 세상이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데, 그런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 행동에 환호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환호만 하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그분 홀로 말하고 행동하고, 우리는 지켜보며 환호성만 올리는 건 정말 곤란하다. 그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세상을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다수의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손가락이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에, 행동에만 매달리지 말고, 그 말씀과 행동이 가리키는 곳을 볼지어다. 거기에, 예수가 있다. 그러니 다시,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일”이 아니던가. 온 마음과 몸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죽음도 불사하며 그 뜻을 살아내려고 했던 예수를 따르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게 중요한 거다.
이게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이란 귀중한 분을 맞을 합당한 준비,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럴 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다. 행복해하실 것이다. 이게 바로 죽음을 뚫고 부활하신 예수를 맞을 합당한 준비,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럴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다. 행복해하실 것이다.
다가오는 부활절을 준비하자.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명확하게 밝혀진 하느님의 뜻을, 있는 힘껏 살아내겠다는 다짐으로. 지금은 뿌옇더라도, 바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