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 선생 문상을 다녀왔다. 밝게 웃는 영정 사진 앞에서 큰 절 두번 올렸다.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평안하소서!’ 마음 속으로 인사했다.
제단 좌우에 버티고 선 대통령과 총리의 근조화환.. 복도에 늘어선 국힘당 정치인들과 현정부 장관들의 화환이 나를 낯설게 만들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장기표 선배 영안실에서 낯선 느낌을 받아야 하다니..
장 선배와는 86년도(?)에 홍성교도소 바로 옆 독방에서 일년 가까이 징역을 같이 살았다. 자연히 이런저런 사연이 많을 수밖에 없다.
88년 가을,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뤄진 덕분에 특별사면을 받아 출소도 같은 날 했다. 당시에 내가 남가좌동 살 때인데, 도봉구 끝자락에 있는 선배 집 옆으로 이사오라고 했다. 말씀은 비서실장 역할을 하라는 것인데, 내가 비서 체질이 아니어서 완곡히 사양했다.
한동안 남가좌동 내 조그만 신혼집 다세대 주택에서 민중당 창당 논의를 했다. 장기표, 김문수, 정태윤 등이 정기적으로 회합했다. 이재오 선생은 우리 집에서 못본 것 같다.
나는 민중당 노선에 반대했다. 그래서 회합 장소는 제공했으나,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나는 김근태의 민주대연합 노선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타고난 성정도 김근태에 더 끌렸다. 장기표의 ‘유아독존’적 성정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나는 솔직히 장기표 선배의 마지막 10년의 행보는 잘 모른다. 내 일에 바빠서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창당과 출마를 어지럽게 반복했다는 기억만 있다. 국힘당 계열에 입당하여 총선 출마했다는 것도 잊어먹었다. 당시에도 ‘이 양반, 왜 이렇게까지 하시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간 것 같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다시 기억을 되살렸다.
사회적 영향력이 별로 없는 행보였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 아직 살아있다’를 알리려는 몸짓 정도? 마지막 10년의 정치역정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점이 안타깝고 아쉽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베스트로만 살겠는가..
사람에게 어찌 베스트만 기대하는가..
사람은 원래 지고지순하지 않는 존재 아닌가.
자기 욕심이라는 발부리에 스스로 넘어지는 게 사람 아닌가.
무슨 민주화운동단체가 발표한 성명을 봤다. 장기표가 이천 민주운동기념공원‘에 묻히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혀를 끌끌 찼다. 한심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래 가지고 무슨 운동을 한다고.. 말 자체는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최대한 품을 넓혀야지.. 장기표마저 저쪽으로 넘겨줄려고 하나.. 장기표가 안타깝고 아쉽기는 하지만,우리 운동사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데..
남이든 북이든, 진보든 보수든 최대한 넓게 품는 쪽이 이긴다. 장기표의 빛나던 시절만 떠올릴 일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내 생각이다.
조영래도 가고, 김근태도 가고, 장기표도 가고.. 이렇게 한 시대가 간다. 저승에서 서로 회포들 푸시라..
(내 생각을 비판하면, 그건 당신이 옳기 때문이다.)
첫댓글 민주노총, 전교조, 주사파 등을 망국 10적으로 규정하고, 국가보안법을 옹호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기관이 된 노동권력에 맞서 단호히 투쟁하겠다”며 광화문에서 태극기 집회를 열던 장기표가 죽자 국민훈장을 주고 이천에 있는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묻는단다. 일제 때 독립운동하다 친일파로 변절했지만 나중에 반공을 외쳤다고 국립묘지에 묻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의 열사들에겐 날벼락이겠다. 민주화운동 과거팔이 지긋지긋하다.ㅡ이은탁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