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법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사법부패에 대한 끈질긴 믿음
영국의 어느 연구소가 발표한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 지수 순위에서 우리나라가 전 세계 167국 중 155위라는 조사결과가 있었다고 한다(조선일보 인터넷판 2023. 03. 09.자, “한국 공적 기관 신뢰 167국 중 100위… 특히 사법 시스템 신뢰 155위”). 군(132위), 정치권(111위), 정부(114위)도 역시 낮았지만 2013년 146위에서 9계단 하락한 사법 시스템 신뢰지수는 거의 꼴찌라는 것인데, 우리나라 전체 순위는 상위권인 29위라는 것이다. 민간에 대한 평가는 상위에 있지만 정부 기관 그 중에서도 특히 재판기관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다. 삼성그룹의 고 이건희 회장은 1995년에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라고 말했다가 집권자들에게 밉보인 적이 있다는데(동아일보 인터넷판 2020. 10. 26.자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기업은 2류”), 그나마 행정부가 조금 더 낫다는 위 조사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법에 대한 인식은 5류라는 추론도 가능하겠다. OECD도 2013년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을 인용하여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가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27%에 그쳐 회원국 국민의 평균 신뢰도 54%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는 것이니(법률신문 인터넷판 2015. 08. 12.자, “OECD 한국 사법신뢰 최하위권”), 통계가 가질 수 있는 왜곡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사법 시스템에 대한 턱도 아닌 비방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필자와 같은 변호사들을 포함한 사법 종사자들이 무능하거나 부패하거나 둘 다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게 말이 되는가.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기 위하여는 공부 잘하는 학생 중 극히 소수가 어려운 사법시험, 로스쿨 입학시험을 거쳐 엄격한 직업교육을 받아 법률인이 되었으니 이들이 멍청해서 법률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다고 국민들 다수가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법종사자들의 지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신뢰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학업성적이 우수한 인재는 대체로 행실도 바른 편일 것이니, 이들이 지식이 없어서, 실력이 없어서, 멍청해서 법률을 운용하지 못한다고, 다수의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로스쿨 들어가기 얼마나 어려운가. 로스쿨 도입의 명분과 상관 없이 3년 내내 변호사 시험에 매진하고 나서도 통과하기 어려운 자격시험을 거친 인재들이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지 무능하여 사법 운용을 엉터리로 한다고 국민들이 생각한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비록 다른 영역에 대한 식견이 없더라도 선대로부터 전승되고 국민의 대표가 만들어낸 법에 충실한 것은 웬만한 인재라면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거의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사법 부패에 대한 믿음이 뿌리 깊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부패를 가리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가 사법 종사자들의 세계에서 기원한 것으로 쉽게 소명할 수 있다. 최근 철근을 제거하고 시공한 ‘순살아파트’ 붕괴 사건이 대형 스캔들이 되었다. 건설 종사자들의 절대적 부족과 감리 시스템의 오작동이 근원이 되었던 이 사건과 관련하여 발주처인 LH공사의 부패 의혹이 제기되었다. 언론은 주저 없이 ‘전관예우’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외쳤다. 과거 일부 검사, 판사직을 사직한 변호사들에 대한 직업적 특혜를 주었다는 사법부 종사자들의 행태에 대한 의혹을 지칭하는데 쓰였던 술어가 사법 시스템과는 큰 관계 없는 영역에서 주저 없이 튀어나온 것이다. 공적인 기구의 구성원들이 퇴직자들을 원호하기 위하여 공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대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평등과 공정에 대한 믿음을 저해하고 보다 나은 서비스를 차별한다는 것이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런 행위를 하는 조직인이 개인적 이득을 얻거나 말거나 관계 없이 조직은 부패한 것이다. 대형 조직의 부패를 가리키는 용어의 원천으로 사법 시스템이 지목될 정도이니, 사법 시스템이 부패했다는 믿음을 대중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대중의 인식은 어느 정도 편향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위 법률신문 기사에서 보듯이, “세계사법정의프로젝트 조사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법원 재판은 민사사법정의 분야에서 7위, 형사사법정의 가운데 재판의 신속성과 효율성 부분에서 3위를 차지해 국제적으로 최상위 수준”이며 “조사 대상 중 OECD 가입국인 35개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 사법부의 법치주의 순위는 8개 지표 종합 11위로 일본(13위)이나 미국(19위)보다 높았다”는 법원 당국자의 반론도 틀린 것은 아니다. 비록 2022년 민사 13위, 형사 17위, 종합 19위로 하락한 것으로 나오지만, 우리나라 법원은 매우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법원 당국자 말대로 신뢰도 조사는 단순한 인식조사이기 때문에 재판의 수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대중의 인식은 그것일 뿐 실제와는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법부패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약이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표본이 다르기에 대중이 우리나라 사법이 부패했다고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 대부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사법제도가 운용되고 있다는 현실과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부분의 제도 운영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이라도, 언론과 대중의 눈에 띄는 일부 사건에서 대중의 신뢰를 잃으면, 전반적인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는 당연히 추락하게 되어 있다. 맑은 물에 잉크 몇 방울 떨어지면 전체 물이 탁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우리나라 통상적인 재판은 비교적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필자를 포함하여 사법 종사자들이 많이 느끼는 바이다. 재판만 그러한 것도 아니다. 모든 영역에서 행정은 매우 효율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일부 사건에서의 잘못은 전체 사법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손상한다. 아무리 부패한 것은 일부일 뿐 전체적으로 잘 운용되고 있다고 변명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보고 대책을 강구하면 실패한다. 지난 세기의 마지막 세계 전쟁에서 젊은이들에게 돌아오지 못할 자살특공 출격을 강요한 전체주의 체제와 싸우던 미국 해군은 전투기 승무원의 생존성 개선 방안을 연구했다. 전투 출격에서 돌아온 비행기를 대상으로 어느 부위에 대공 중기관총의 총탄이 집중되었는 지를 조사해 보니 꼬리날개, 중앙 몸통, 양쪽 날개에 총탄을 많이 맞았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해군은 총알을 많이 맞은 위 부분에 강판을 추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 월드라는 통계학자는 여기에 반대하였다. 그에 따르면 다른 부분에 총탄을 맞은 비행기는 추락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비행기에서 총탄 자국이 확인되지 않은 조종석과 엔진 부분을 강화하여 생존성을 높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손상이 있어도 비행능력을 파괴하지 않는 부품을 보강할 것인가 아니면, 손상되면 기체가 생환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강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명백히 답이 후자이다. 문제는 손상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강하는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생존자 편향(survivor bias)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러한 표본 추출의 오류와 그에 기초한 잘못된 대책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 사법제도에 대한 평가와 대책도 예외가 아니다.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운용되던 사법제도가 최근 후퇴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민사재판이 느려지고, 세칭 검수완박의 결과 형사사법의 운용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대책으로 신속한 기일 지정과 수사권 재조정 같은 해결방안이 거론되고, 식당에서 MSG 치듯이 판사를 증원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전투출격에서 돌아온 비행기에서 총탄자국 있는 부분을 보강하자는 처방과 비슷하다. 이것은 사법제도의 신뢰성과는 상관이 없다. 사법제도에 대하여 대중이 실망하는 사건은 효율적이고 신속한 처리를 요하지 않는다. 충분한 절차보장이 부여되어야 하고, 그에 기초하여 신중하게 사실이 인정되어야 하는 그런 사건들이다.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마당에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사법제도를 운영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그런 사건들은 예외적인 사건들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특이한 사건들이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예외를 규정하는 것이 주권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대부분의 사건에서 소송대리인이나 변호인이 전직 고관이라고 하여 재판과 수사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지라도, 소수의 사건에서 그러하거나 그러하다는 의심이 들만 하다면,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냥 사법 종사자들은 부패집단이 되는 것이다. 마치 치명적인 부위에 총탄을 맞아 돌아오지 못한 전투기처럼, 전체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이 확립되는 것이다.
소송서류의 공개가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전관예우 내지는 사법 부패에 대한 믿음을 해결할 것인가. 당연히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사법 과정을 공개하는 것이다. 공개의 대상은 법원의 판결 뿐만 아니라 기록까지 포함될 필요가 있다. 당사자가 어떠한 주장, 입증과 신청, 청원을 하였는 지, 이에 대하여 상대방 당사자는 어떻게 반응하였는 지, 판사는 어떻게 결정하였는 지까지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헌법과 법률은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고 하여 재판의 공개를 보장하고 있다. 이것은 잘 존중되지 않고 있다. 헌법 제109조, 법원조직법 제57조 제1항. 헌법재판소법 제34조 제1항. 현재의 실무는 사생활이나 개인정보 보호를 구실로 재판의 방청을 허용하는 정도이며, 판결은 당사자를 익명화하여 공개한다. 재판의 공개를 요구하는 이유가 사법의 부패를 방지하라는 것인데, 그것을 제한함으로써 사법의 정당한 운용에 대한 신뢰를 법원은 스스로 깎아 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송을 제기하고 제기 당한다는 것은 공적인 영역으로 나서고 불가피하게 끌려들어가는 것이다. 사생활이나 개인정보가 중요하다고 한들 누가 어떤 재판을 받고 어떻게 처리되었는 지는 국민이 알 수 있어야 한다. 법원의 기록이 전자적으로 관리되고, 당사자와 소송대리인이 접근할 수 있는 체제가 이미 확립되어 있는 지금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상세 주소 같은 사적인 정보를 포괄적으로 거를 수 있는 시스템은 즉각 구현할 수 있다. 또 당사자가 비밀로 유지하고 싶은 서류는 법원이 비공개 결정을 하고 그렇게 취급하면 된다. 헌법과 법률이 국가안보, 안녕질서, 풍속을 해할 염려가 있을 때에는 비공개로 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헌법 제109조 단서, 법원조직법 제57조 제1항 단서, 헌법 재판소법 제34조 제2항. 공개하지 않는 것이 적당한 지 여부를 판단하라고 판사가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법원 전자 기록에 대한 공중의 접근(PACER: Public Access to Court Electronic Records) 시스템이 그것이다. 동료 법률인들에게 https://pacer.uscourts.xn--gov-of0o/ 찾아 들어가 보라고 권한다. 판결을 비롯한 재판서 뿐만 아니라 소장, 답변서, 준비서면, 각종 신청서, 증거서류 등 법원에 제출되는 모든 서류가 공개된다. 비록 페이지당 0.1달러에 대한 수수료를 받지만 단일 문건에 대한 최대 수수료는 3달러이고 4분기에 30달러 이하의 수수료가 발생하면 그 분기의 수수료는 면제되어 75%의 PACER사용자가 면제를 받고 있다고 한다. 직업적으로 또는 이에 준하여 사법기록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익자부담을 관철하는 한편, 재판에 일시적으로 관심을 가진 일반 시민에게는 기록에 대한 접근권을 경제적 빈곤에 의하여 실현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는 대량 불법행위(mass tort)를 일으킨 기업의 파산 사건에서 피해자들을 찾는다는 광고링크를 따라 위 사이트에 들어가 해당 기업의 Chapter11(기업회생) 파산 사건을 둘러 보면서 심지어는 대리인인 변호사가 판사에게 보낸 작은 메모까지 공개되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사법종사자들은 특정 소송대리인과의 친분과 안면을 고려하여 ‘전관예우’ 같은 사법 부패를 실행하기가 지극히 힘들어지겠다. 동료 법률인들이 실시간으로 감시하는데 특이하게 누구를 편들어 주거나 차별한다는 평판이 퍼진다면 직업적 성공은 물건너가게 된다.
이와 같은 기반이 있으니 학자들은 소송기록을 분석하여 법학 논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카고 지역을 관할구역에 포함하는 북부일리노이지방법원 동부지원에 1998년에 접수된 기업회생 사건기록에 나타난 사실을 분석하고 이를 단서로 관련자를 인터뷰한 자료를 기반으로 중소기업회생 사건의 대부분이 기업인들이 자신의 인적 자본을 잠깐 지키기 위하여 점거(lock-in)을 하는 방식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Douglas G. Baird and Edward R. Morrison, “Serial Entrepreneurs and Small Business Bankruptcies,” http://ssrn.com/abstract=660301, p.8. 소송기록의 공개가 있으니 법조 운영실태에 대한 합당한 분석이 가능하다. 일반적인 법관계층이나 특정 법관에 대한 연구도 가능해지겠다. 이것은 나아가 사법 부패의 예방을 위한 대책을 이끌어내는데 더 기여하겠다.
공개되는 소송기록이 일방적으로 교수들의 사법제도 연구에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교수들도,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사건과 관련한 문서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법학 교수가 사건에서 문제되는 법률과 사실에 관한 해석을 포함한 의견서를 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낸 의견이 합당한 것인 지, 변호사의 직무범위에 포함되는 것이기에 법률에 위반하는 것은 아닌 지 동료 법학자들이나 변호사들도 시민들도 지지의견, 반박의견을 낼 수 있다. 교수가 의견서를 내고 적지 않은 수입을 얻은 것이 일방 당사자를 변호하여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것인 지 여부가 일상적으로 드러난다. 법원 사건에 관하여 자신 있게 의견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언동을 조심하게 된다. 이것은 법관을 포함하여 사법제도를 운영하는 쪽에도 도움을 준다. 전자기록에 오른 문서파일의 다운로드 데이타를 분석하면 그들이 담당하여 처리하는 사건에 대한 관심도가 어느 정도인 지를 인지할 수 있다. 어느 지역, 어느 계층의 사람이 관심있는 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소송기록을 열람하고 있는 의사나 공학자들의 의견도 책임 있게 수용 또는 무시, 거부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유용하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정상적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사태는 비정상적이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사람이 개를 무는 것과 같은 예외적인 사건이다. 병원에 가면 의사들 덕에 아픈 사람이 상태가 좋아지고 목숨을 건져 나온다. 그렇지 못한 경우도 물론 있다. 사람은 전지 전능하지 않다. 실수를 하는 것은 인간적이기도 하다. 의사도 사람인 이상 모든 것을 즉각 인지하고 평가할 수 없다. 또 즉각 조치를 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은 늘 발생한다. 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과 토목기술에 의하여 창조된 건물과 교량, 터널 같은 구조물은 사람을 편하고 안전하게 보호할 것으로 가정된다. 그런 사태가 유지되는 것은 정상적이다. 그러나 현장에 만연한 부패관행으로 인하여 설계, 건축, 유지보수상의 결함으로 인하여 다리도, 백화점 건물도, 대학 체육관도, 아파트 주차장도 무너진다. 전세금을 임대인에게 주고 거주하는 임차인들은 주택을 잘 사용하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전세금을 잘 받아 나오는 것으로 가정된다. 임대업자의 갭투자에 묻지마식의 보증금 대출 및 보험제도가 내포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자산가치가 하락하게 되면 임차인은 전세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대출금 채무만 짊어진 채 거리로 나갈 위기에 처한다.
이런 모든 예외상황과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 불가항력이라던가 시스템의 후진성 때문이라는 항변은 통하지 않고, 의사나 설게자와 같은 전문가들이나 임대인은 거의 무조건 형사책임을 진다. 원칙적으로 고의가 있어야 처벌 받는다는 근대형법의 교리는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과실범에도 공동정범이 성립할 수 있다는 창조적 법이론까지도 법원은 창조해 냈다. 해외에 있는 보이스피싱 주범을 잡을 의사도 능력도 희박하니 그저 이들의 살아 있는 도구로 이용되었던 국민과 외국인들을 잡아서 처벌한다.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선전으로 언론의 센세이셔널리즘에 선동된 대중을 달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은 시스템의 개선으로 사고를 줄이는 것에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죄가 되는 지 논란 있는 사건에 대한 소송기록이 전면적으로 공개되어 일반 국민과 전문가들이 열람하고 의견을 낸다면 억울하게 처벌 받는 사람을 확실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고 공자가 말했다고 한다. 소송기록 공개는 대중과 전문가의 지혜를 집적하게 해 준다. 햇볕은 최고의 방부제이다. 재판과 소송기록의 공개도 그러하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바, 법조윤리교육, 법조윤리협의회와 같이 교육과 전관예우 감시도 나름 기능을 하겠지만 부차적이다. 그 효과가 소송기록 전면적 공개에는 미치지 못한다. 소송기록 공개는 법관만을 감시하지 않는다. 재판에 참여하는 당사자나 변호사의 매너와 실력도 평가할 수 있게 해 주니, 규칙을 준수할 인센티브를 생산한다.
배심제도
재판의 부패를 방지하는 또 하나의 안전판은 배심제도이다. 국민들로부터 무작위로 선정된 배심원이 유무죄의 사실인정, 위자료 등 손해 산정과 같은 판단을 내린다. 대배심은 범죄 수사의 개시 여부와 조사의 시행, 기소 여부의 결정과 같이 지금까지 검찰이 담당했던 기능을 지휘한다. 미국의 배심제도는 뉴스나 영화와 같은 매체를 통하여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바이고 최근 일본도 도입하였고 프랑스도 중한 범죄에 대하여는 배심재판이 의무화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노무현 대통령 시절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국민참여재판이라는 형식으로 합의부 관할의 범죄 일부에 대하여 인정되고 있으나, 피해자가 배심재판을 반대하는 성범죄 등의 경우 기타 다른 기술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 배제할 수 있고, 또 배심의 결론에 판사가 기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불완전하다. 그렇지만, 10여년의 시행과정에서 나름 정착하고 있는 국민참여재판에 전관예우나 배심원의 부패가 문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재판과 수사에서 사실인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인정이 허구에 기초한다면 법령의 적용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한들, 재판은 에러가 된다. 그러나 법학교과서나 판례는 사실관계를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법령과 판례, 이론에 대하여만 가르친다. 그것은 본래 법률가들의 몫이 사실인정이 아니라 법률의 적용이기 때문이다. 배심제 하에서 다툼이 있는 쟁점에 대한 사실인정의 최종 권한은 배심원으로 대표되는 국민들에게 유보되어 있고 법률가들의 사명은 그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쟁점을 추출하여 증거법칙에 의한 제한에 따라 배심원들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다. 사실판단의 정당성을 국민에게서 구하는 것은 법원의 부담을 경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판단의 최종 책임이 판사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일정한 관점에 적합한 현상들을 모아 통일적인 모습으로 짜 만든 사유구성물인 이념형(Ideal Type)은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법서를 많이 읽은 이들은 이것이 실존하는 사실이거나 그래야 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사회통념”을 판단기준으로 들이대지만, 현실은 이에 어긋나는 사태가 훨씬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학습능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모범생으로 성장하며 규범의 준수를 내재화해 온 법률인들은 사실인정의 책무를 전담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다. 세상사는 다양한 것인데 이념형이라는 허구를 사실로 고양하게 된다. 그런데 사법이란 이념형에서 벗어난 구체적 사실에 대하여 그에 합당한 구제를 주는 것이다. 그게 아닐 것이면 획일적인 관료적 지배에 만족하지 무엇하러 법치를 하는가. 그러한 사실 즉 “억울함”은 동네사람들이 더 잘 본다. 이념형에 어긋나는 구체적 사실의 인정은 그만한 권위를 가진 자가 할 수 있는데, 직업법관은 그러하지 못하다. 그것은 주권자인 국민만이 가능한 것이다. 편견 없이 사실을 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관료가 아니다. 사실인정을 잘하기 힘든 직업법관이 “독립”하면 잘못하면 모범생들이 상상하는 이념형에 사로잡힌 독단에 얽매일 수 있다.
배심재판에 대한 비판의 하나는 그로 인한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다. 재판 한 건 한 건을 비교해 보면, 독립한 지위를 누리는 법관들이 소송지휘와 사실인정을 포함한 사법절차 전체를 직접 수행하는 편이, 배심원후보군을 유지하고 배심원을 선발하고 이들을 잠시라도 수용하여 교육하고 실제 재판에 관여하게 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초과지출을 구성한다. 배심재판이라고 해서 판사나 법원 직원 월급을 주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심제를 택한다고 하여 모든 재판을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관계의 확정에 다툼이 없는 사건에 대하여 절차를 개선한다면 얼마든지 배심재판에 투입될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검찰과 피고인 사이에 유죄인정을 전제로 양형 합의를 할 수 있게 하여 준다면 대부분의 형사사건은 공판을 열 필요가 없어진다. 물론 변호인의 조력과 법원의 감독을 전제로 해야 하겠다. 배심재판을 한다고 하여 법관을 증원하고 조직을 확대할 필요는 없다.
한편 전문적 법률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재판 심리에 참여하여 판사를 대신하여 올바른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의문을 표할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재판의 수준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이다. 배심원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쟁점을 정리하고 규칙에 맞게 판단을 구하는 사항을 배심원에게 제시하는 것이 판사의 역할이다. 그것만 해도 판사의 직무는 차고도 넘친다. 현재와 같은 판사 만능의 재판제도에서도 논란이 되는 재판은 수도 없이 생산된다. 예를 들어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무조건 믿는 바보로 가정된다. 채무자가 어떤 사유로든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제반 사정에 비추어 변제할 의사와 능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있는 것처럼 가정하여 채권자를 속이고 금전을 편취하였다고 너무나도 쉽게 인정해 왔다. 지금은 시정되었지만 선금을 받고 성매매를 하다가 달아나버린 여성을 사기죄로 처벌한 일조차 있었다. 일반 국민의 법감정은 그런 식이 아닐 것이다.
재판 만능의 실무에서 사회의 다른 영역의 전문성, 자율성은 존중되지 않는다. 한국의 판사는 사업도 하고 의학도 하고 정치도 한다. 경영상의 판단이라고 아무리 항변한들 기업인들은 업무상 배임죄로 처벌 받는 경우가 많다. 구성요건인 ‘이득’의 이전 여부가 경제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경제성 판단을 판사가 한다. 의사들의 전문성도 존중되지 않는다. 원인을 알기 힘든 질환이나 상병으로 발생한 결과에 대하여도 의료진에게 주어진 자원의 유한성이라던가 인간으로서의 한계로 인하여 어쩔 수없는 일이었다는 항변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의사들은 자주 손해배상을 하고 구속되어 형사 재판을 받기도 한다. 나중에 무죄로 확정된다고 한들 몇 년 동안 소송에 시달린 손해는 보상 받지 못할 위험이 크다. 어떤 경우에는 정당의 자율성도 후퇴한다. 야당 당수를 제명하는 재판은 오래 전 유신독재 시절에 나온 적이 있는데, 요즘에도 비슷한 사태가 있었다. 심지어는 외교상의 결정에 맡길 사안에까지 재판이 나온다.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을 썼다고 발언한 분도 있었다. 어떤 영역을 법률로 재단하는 것이 옳은 지 옳지 않은 지는 사실 정치적 결단이다. 그것은 전문가 집단인 법률가들보다는 정치인들이 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 사법에 정치인들이 나설 수 없는 것인데, 그 역할은 일반 국민들에서 무작위 선정된 배심원들이 직업 판사들보다 훨씬 잘 수행할 것이다.
배심에 맡길 영역은 형사 공판에 제한되지 않는다. 민사, 가사 사건에서 배상책임 유무를 판정하고, 위자료 뿐만 아니라 재산상의 손해를 규범적으로 결정하는데 배심재판을 활용할 수 있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사건에서 과연 금전적 손해가 있는 지, 그렇다면 그 금액은 얼마인지는 법률가로서도 절망하는 영역이고, 그저 법원 판사들은 나름대로 정한 ‘기준’에 맹목적으로 자기 스스로 기속되어 사람들의 법감정에 동떨어진 판결을 내리고 있지 않던가. 손해배상이 거대조직의 불법을 억제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저런 눈치를 보아야 하는 법관보다는 배심원들이 훨씬 잘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영역이다.
수사와 기소에 관한 결정도 배심제를 활용할 수 있다. 정의의 실현에도 적정 한도가 있다. 검찰을 지휘하는 대배심은 처벌 가치가 없다거나 다른 영역의 자율성에 맡기기 위하여 수사와 기소가 필요 없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반대로 처벌가치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경찰, 검찰이 수사를 않고 뭉개는 사건에 대하여 수사와 기소를 명할 수 있고 직접 기소를 행할 수도 있다. 적어도 대배심이 수사와 기소를 결정하는 사안에 대하여는 청탁수사라거나 정치적 기소라는 비난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경찰, 검사들이야 평소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이니 대부분의 사건에 관하여 대배심을 설득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니 그저 이들의 행위를 추인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라는 비판도 있을 지 모르나,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정책적 결단이 필요한 예외적인 사건들이다. 대략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기도 하는 이런저런 문서위조와 같은 잡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것이 전직 장관이든, 전직 대통령 후보인 야당 대표이든, 현직 대통령의 인척이든 대배심은 나름의 기준과 여론에 맞추어 수사와 기소 여부를 정할 것이다. 물론 대배심도 법원의 감독과 지원을 받아야 하겠지만, 정당성의 원천은 어디까지나 사법권력의 기원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에서 찾아야겠다.
증거수집과 디스커버리
미군정기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그 후에도 한국의 정치에 개입하였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1949년의 국회푸락치 사건의 방청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재판장 OOO은 검찰 측 요구에 따라 변호인 측의 증인신청 13건 및 기타 여러 가지 요청을 기각한 반면, 검찰 측 증인신청은 모두 인정하고 게다가 직권으로 경찰 스파이와 끄나풀까지 모두 증인으로 인정했다. 법정에서 재판장 스스로 가장 노골적인 유도심문을 했다. 실제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판결을 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증거를 주관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이 재판은 조선시대의 재판을 거의 빼닮은 꼴이었다. 사건의 최종 논고나 판결은 독방에서 피고의 자백에 근거해 작성한 검사의 기소장이 거의 예외 없이 채택되었으며, 공판정에서의 변론은 무시되었다. 재판은, 다시 말하면, 판결에 정부 관리의 도의적인 판단과 견식이 큰 역할을 하고, 재판 진행과 행정부의 결정과의 사이에 분명한 선이 그어질 수 없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법원의 민주적 기능을 위한 어떤 효과적인 훈련이나 준비의 결여가 이곳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 그레고리 헨더슨, 이종삼, 박행웅 옮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314
헨더슨이 회고한 바로부터 우리 형사재판은 많이 나아진 것이라고 믿는다. 존경 받을 만한 선배, 동료 법률인의 투쟁과 노력에 힘입어 사회적 이목을 끄는 대형 사건에서는 어느 정도 피고인의 방어권이 공식적으로 존중되고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웬만한 사건에서 일단 변호인 측의 증인신청 잘 안 받아 주지 않는다. 검찰이 신청하는 증거는 거의 받아 준다. 수사기관의 유도신문에 의하여 ‘조서문학’(한애라, “조서문학,” 법률신문 인터넷판 2019. 12. 19자)으로 윤색된 전문증거인 조서의 증명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에게 재판장이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유도신문을 하기도 한다. 증거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배심제를 채택하지 않은 이상 당연한 위험이다. 수사기관에서 자백하였던 일은 최근까지 유죄의 증거로 채택되어 왔다. 공판정에서 피고인의 하소연이나 변호인의 변론이 진지하게 경청되고 있다는 인상은 들지 않는다. 사소한 사건에서 실질적으로 피고인의 주장이 우월하게 경청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느낌이다. 그나마 검찰은 가진 기록도 피고인 측에게 잘 공개하지 않고 있다. 수사의 단서가 되는 진정, 고소, 범죄인지 단계에서부터 문건을 시간 순서대로 편철하여 전부 송치하고 검찰도 기소 후에 기록 일체를 법원으로 송부하던 과거 시스템이 오히려 나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수사기관이 통신자료, CCTV, 금융거래 자료를 광범위하게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것은 개인의 사적 영역에 대한 과도한 침해가 되고 있다. 영장에 기재된 범죄혐의와 관계 없이 휴대전화에서 우연히 발견된 영상자료가 피의자나 참고인을 압박하는데 쓰이거나 실제로 기소되기도 한다.
민사재판은 또 어떤가. 문서, 특히 처분문서의 증거력을 우위에 두는 것이 정형화된 방식의 사실인정에는 편의한 점을 수긍할 수 있지만,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어느 문서나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그 생산배경에 관한 사람의 기억은 문서의 증거력을 보충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한다. 법률상 작성과 교부 또는 보관이 강제된 문서 예를 들어 일지, 보고서 같은 것도 사실과 다르게 기재되기도 하고 비용상의 이유로 생략되기도 하는 것이 관료조직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작은 기업이나 개인에게는 흔한 일이다. 어떤 경우에는 당사자 본인의 기억 이외에는 마땅한 기억이 남겨져 있지 않을 수 있다. 증인의 진술과 당사자본인신문결과는 민사재판에서도 제출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증인과 당사자본인신문을 배척하고 오로지 다른 기관에 대한 사실조회나 감정촉탁에 의한 사실인정에만 의존하는 민사재판은 당사자들에게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하였다는 감정을 유발하게 된다. 충분히 수긍할만하다. 당사자에게 법정에서의 하루를 보장하는 것은 재판의 공정함에 대한 신뢰를 생산한다. 실체적 진실발견에 도움이 되는 것 그 이상이다. 차라리 민사재판에서 재판기일 속행 세번, 증인 신청 각 한두명씩은 받아 주었던 예전의 방식이 훨씬 나았던 것 아닌가.
물론 모든 사건에 대하여 이런 식의 사법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현재의 법원 형편상 어렵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다.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 판사가 기일을 열고 주장을 정리하고, 증거 신청을 받고, 증거 조사를 하는 과정을 일관하여 진행한다면 사건이 폭증한 현실에서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해결방안은 있다. 미국인들이 운용하는 디스커버리 제도 하에서 당사자는 상대방이 가진 자료를 내 놓으라고 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뒤져 탐색할 수 있고 상대방은 증거를 보존할 의무가 있다. 또 상대방 당사자 본인 또는 이에 준하는 임직원들에 대하여 법정 외 신문을 할 수 있는 디스커버리 제도는 한쪽 당사자에게만 편중되어 있는 증거를 수집할 수 있게 해 주어 적정한 재판을 가능하게 한다. 또 당사자들이 자주적으로 변론을 준비하게 되므로, 법원의 부담을 줄인다. 이 과정을 진행하다가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쟁점이 정리되고 증거가 수집되어 쌍방을 대리하는 법률전문가들은 적절히 화해, 조정을 이룰 수도 있다. 결정적인 인식의 차이가 나는 사실관계에 대하여는 정식의 공개재판에서 증인, 감정증인의 신문을 통하여 배심원 및/또는 판사의 판단을 받는다. 여기에 이를 때까지의 지루한 과정을 진행하는 것은 당사자이고 소송대리인이지만 판사 역할의 중요성은 감소하지 않는다. 과정을 감시하고 반칙을 저지른 당사자를 제재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 기업 사이의 분쟁이 미국의 준사법기관에 제기되어 해결된 사례(아시아경제 인터넷판 2023. 4. 26.자, “기업이 美서 제소당하는 사례가 급증하는 시대”)는 권리침해를 받았다고 느끼는 기업인들이 디스커버리 제도를 선호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제도가 도입되어 있지 않은 지금 산업재산권이나 영업비밀 침해를 증명하기 위해 기업이든 소비자 피해자이든 어쩔 수 없이 형사고소에 의존하여야 한다. 경찰, 검찰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권리구제가 이루어지는데, 공공의 안녕이라는 보다 높은 사명이 있는 수사기관이 모든 피해자가 만족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청탁수사, 정치검찰이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검찰의 기소 대부분이 유죄판결로 귀결되고 형사재판에서 확정된 사실은 민사재판에서 원칙적으로 뒤집지 않는다는 판례(대법원 1985. 10. 8. 선고 84누411 판결 등 다수)를 실무가 맹종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당사자들은 형사사건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어 경찰국가, 검찰국가를 만들어가는데 법원이 일조하게 된다.
글로벌화의 요청
배심제도나 디스커버리제도, 진보적인 도산제도 도입 논의가 제기될 때마다 나오는 반론이 있다. 우리와 법체계를 달리하는 미국인들이 운용하는 것이므로 도입에 신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열등의식일 지도 모르겠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대기업 뿐만 아니라 중견기업도 전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벌이고 있고 미국의 제도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사법절차에 관련된 실질적 리스크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법률가들에게 생소한 제도라면 우리의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하여 한국의 법률가와 사법시스템이 제공할 수 있는 편익은 거의 없게 된다. 톱클래스의 인재들이 모이는 대형 로펌이 전관예우가 노골적임을 은근히 시사하며 형사사건에서 지속가능성을 찾는 것은 요즘 말로 많이 ‘구리다’는 느낌이다.
도대체 법체계가 다르다는 것이 그다지 타당성이 없는 전제이다. 우리가 일제 침략자들을 통해 받아들였다는 프랑스, 독일의 민사법, 형사법이든 미국인들이 계승하여 발전시킨 영국의 법이든 모두 로마법의 영향 하에 발전하여 왔다. 미국인들이 제정하는 성문법은 우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점에 비추어 대륙법은 성문법 영미법은 불문법이라는 명제는 틀렸다. 지능범죄라고 불리는 사기 배임 같은 재산범죄의 구성요건은 사실 우리가 불문법 국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소비에트 이전의 러시아에서도 배심제는 시행되었으니 그것을 법체계를 달리하는 영미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디스커버리는 미국인들이 20세기에 개발한 것이니 독특한 면이 있겠다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맞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김주영, “디스커버리제도는 진정 우리 민사소송법체계와 맞지 않는 것일까,”법조신문 인터넷판 2022. 9. 26.자. 이것은 20세기, 21세기에 미국인들이 개발해 쓰고 있는 F16, F35전투기를 우리가 도입해서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미국인들에게 원천이 있는 첨단 기술을 우리 기업은 도입하여 대포, 탱크, 전투기를 만들어 유럽에 수출할 정도까지 되어 있다. 산업계의 성취로 작지만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제국이 되어버린 21세기 대한민국에 걸맞는 위상의 사법제도를 우리는 가져야 마땅하다. 우리 법조의 인적 자원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의 법학교육은 크게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세계화는 이미 우리나라 모든 계층에 퍼져 있다. 간신히 중산층에 매달려 있는 계층에서도 자녀들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국제학교와 영어유치원에 보낼 정도로 애처롭게 노력한다. 노동현장과 농촌은 외국에서 온 인재를 제외하면 운영되지 못한다. 오히려 필자를 비롯한 개업 변호사 같은 중간층의 법률인들만이 이러한 흐름에서 뒤떨어져 소외되어 있는 듯하다. 이 정도라면 리먼브러더스 사태 직후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에서 시행을 검토했듯이 법원에 제출되는 문건을 영어로 제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과 싱가포르가 국제상사중재의 거점이 될 수 있듯이, 우리의 우수한 사법자원들이라고 하지 못할 바가 무엇인가.
맺음말
대부분의 판사, 검사는 사법제도의 운영에 헌신적이다. 통상적으로 사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처리되고 있으며 실체적 진실에 기반하여 적절한 처분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가정해도 좋다. 문제는 소수의 예외적인 사례에서 두드러진다. 맑은 물에 잉크 몇 방울 떨어지면 전체가 탁하게 되는 것처럼, 다수가 선의라도 소수의 부패가 있으면 전체가 부패한 것처럼 다루어진다. 설령 선의에 기인한 제도 운영이라도 그 제도 자체에 결함이 있다면 만족할만한 결과를 생산하지 못한다. 사법부패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제도의 개혁이 필요하고 그것은 글로벌화에서 찾아야 한다. 재판지연을 해결하기 위하여 판사를 늘리고 상고법원을 설치하는 것은 앞에서 본 생존자 편향의 오류에 비추어 사법신뢰 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도에 결함이 있으면 그것을 고칠 일이지, 법조윤리협의회 같은 감시기구나 법조윤리 교육 같은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첫댓글 이거 제가 쓴 글 아닙니다
옮긴 글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