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11일, http://benign.ye.ro
제목 : 제2의 황선홍, 그리고 다카하라
황선홍이 떠났다. 너무도 아쉬운 마음 표현할 길 없어 글 몇줄 적어보려했던 어제, 뜻밖의 일을 만나 끄적이지 못했다. 대신, '황새슛' 사진을 대문에 걸어놓았을뿐.
그렇지만, 서운한 마음은 여전하다. 언젠가는 유니폼을 벗을 선수였지만 막상 그렇게 떠난다고 선언하는 모습을 보니 팬의 한 사람으로 만감이 교차할수 밖에. 하지만, 그에 대한 감회는 내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해줄 것이 분명하니, 난 다른 얘기를 해볼까 한다. 한때 '제2의 황선홍'으로 불렸던, 어느새 슬슬 잊혀져가고 있는 스타에 대한 이야기. -----------------
2003년 2월 10일.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동양에서 건너온 스물네살짜리 공격수가 800분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던 바이에른 뮌헨의 '고릴라GK' 올리버 칸을 상대로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냈기 때문이다. 이 골의 주인공은 이제 갓 분데스리가 3번째 경기에 출전한 일본인 다카하라 나오히로.
오늘 나는 '제2의 황선홍'으로 불리다 2002년 월드컵을 고비로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이동국과 현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일본인 스트라이커 다카하라의 엇갈린 현재를 한탄하는 글을 쓰려 한다. 10대 시절부터 한일 양국의 미래로 불려왔던 두 선수의 명암이 너무도 뚜렷이 갈려버리기 시작한 지금, 한국이 지난 한 세기 내내 지켜왔던 일본에 대한 '스트라이커 비교 우위'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내 고민이 괜한 것이길 바라면서 잡다하게 끄적여볼 참이다.
-------------------------------- 98년 포항스틸러스에 입단한 이동국. 포철공고 시절부터 '초고교급 스타'로 분류될만큼 축구계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그는 데뷔 첫해 기대에 걸맞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이때 포항 구단에는 황선홍이 있었고, 이때문인지 언론에서는 이동국에게 "제2의 황선홍"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것은, 명백한 '찬사'였다.
그러나 이동국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98년 프랑스월드컵 직후. 차범근 감독에 의해 최연소 대표로 발탁된 이동국은 한국 축구 수모의 날이었던 네덜란드전(0-5 패)에 후반 교체투입돼 과감한 중거리슛을 선보임과 동시에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국 축구 추락의 수혜자가 이동국었다는 사실. 모두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매스미디어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동국은 만인의 기대를 한몸에 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수려한 외모까지 갖춘 그는 1승 달성에 실패한 한국대표팀에서 거의 유일한 '희망'으로 꼽히며 본격적인 자신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기 시작한다.
이동국의 진가가 대중앞에 처음 입증된 것은, 98년 10월에 열린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당시 김은중과 투톱을 이뤘던 이동국은 "유사 이래 최강의 투톱"이라는 오버섞인 찬사를 등에 업고 골행진을 계속하며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특히 일본과의 결승전 후반 30분께 터뜨린 그림같은 180도 터닝슛은 여전히 인구에 회자될만큼 멋진 것이었고 그가 충분히 한국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음을 재확인시키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시작은 한편으로 비극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한국축구의 '유일한 희망봉'으로 점찍힌 이동국은 이후 히딩크 감독 부임때까지 거의 모든 각급 대표 경기에 소집/출전하는 강행군을 거듭한다. 포지션 특성상 휴식없는 잦은 출전이 부상 유발의 원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동국은 매 대회때마다 '부상을 달고 다니며' 경기에 나섰다. 황선홍을 J리그로 보낸 소속팀 포항 역시 간간이 팀에 복귀하는 그에게 기대지 않을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4년간 지독히 혹사당하고 만다. * 98년(6월프랑스월드컵,10월아시아청소년대회/레바논,12월아시안게임/북경)-99년(2월던힐컵/베트남-4월세계청소년대회/나이지리아,10월올림픽지역예선/순회)-2000년(1월4개국친선대회/호주,2월골드컵/캐나다,9월시드니올림픽/호주,10월친선토너먼트/UAE,10월아시안컵/레바논)-2001년(4월4개국친선/이집트) : 부상을 제외하면 각급 거의 모든 대회에 출전했다. 매시즌 K리그 경기에 출전해야했던 것과 2001년 1월부터 5개월간 독일 분데스리가에 몸담았던것까지 감안하면 또래 선수 가운데 기록적인 혹사라 불릴만하다.
결국 그는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로 더 이상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았다. 2년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할 때도 고질적인 부상을 달고 있는 상태였다. 오죽하면 주위에서 "쉬기 위해 독일로 임대되는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을까. 때문에 그는 자신의 성장을 꿈꿀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고 동기부여의 기회가 됐어야할 독일무대는 그에게 '자신감'이 아닌 '벽'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전언에 따르면, 해외생활에 대한 고달픔만 안고 돌아왔다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잦은 부상으로 '고뇌'의 시간이 길었던 황선홍의 경우가 오히려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 "우리 젊은 선수들은 더 나이들기 전에 밖(해외)으로 나가야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황선홍의 J리그 진출이 만약 1년만 더 늦춰졌더라면 한솥밥 먹던 이동국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모두 이런 이유때문이다.
독일에서 돌아온 그가 개인적인 '시험기'를 거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도 안타깝다. 대표팀 탈락 이후,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놓치면서 병역 혜택마저 받지 못해 또래 스타선수들과 달리 군복을 입게 된 상황이라 당분간은 큰 도약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 젊은만큼 반전의 시간은 넉넉하다는것을 본인 스스로 잊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설기현, 차두리, 정조국 등이 잘해내고 있기는 하지만 '원조 제2의 황선홍'인 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할 정도는 못되니 말이다.
여기에 다카하라 이야기를 끼워넣으려는 것은, 적어도 지난 몇년간 아시아 축구계에서 이동국에 비해 저평가되던 그의 성장이 상대적으로 너무 부럽기만한 탓이다. 98아시아청소년대회-99세계청소년대회를 거쳐 2002년 아시안컵까지 일본의 스트라이커로 이동국과 맞섰지만 매번 이동국에게 '최고' 타이틀을 빼앗겼던 다카하라. 2002년 월드컵 출전이 좌절된것까지(이동국과 달리 질환/폐동맥 혈전증이 이유였지만) 이동국과 비슷해 더욱 흥미로운 비교상대였던 그는 이동국이 독일에서 한국으로 복귀하며 패배의 쓴잔을 마실 무렵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로 임대돼 고작 7경기에 나서 1골 기록이라는 평범한 성적표를 들고 역시 5개월여만에 원소속팀 주빌로 이와타로 돌아와 다시한번 좋은 비교대상이 돼줬다.
그러나 지난해를 기점으로 둘의 상황은 역전된다. 부상을 딛고 일어선 2002년, 소속팀 주빌로 이와타를 J리그 정상에 등극시키며 득점왕을 거머쥔 다카하라는 지난 1월 이적료 250만불에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로 이적해 성공시대를 열었고 10일 바이에른 뮌헨전에서는 데뷔골을 터뜨린 것이다. 슬럼프를 딛고 일어서는 법을 알아낸 다카하라이기에 앞으로의 성공가도를 예감할 수 있어 샘이 난다. 우리의 이동국은 계속 내리막길만 걷지 않았는가. 게다가 이젠 공격수 포지션에서마저 쟁쟁한 경쟁상대가 나타나다니.
90년대 후반 일본의 나카타 히데토시가 유럽 무대에서 대성공을 거둘때만해도 "그래도 공격수에서만큼은 일본이 우리한테 안돼지"라고 되뇌였는데 이젠 그 혼잣말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이 눈앞에 닥친 것이다. 물론 설기현, 차두리 등이 유럽에서 꾸준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데다 과거 미우라(이탈리아), 조 쇼지(스페인), 니시자와(잉글랜드) 등이 유럽무대 진출 초반 반짝 활약하다 이내 수그러든 기억도 있긴 하지만 이동국과 다카하라의 엇갈린 그래프를 바라보는 심정을 위로받기엔 왠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이동국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무모할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내겐 "포스트 황선홍"의 임자는 이동국뿐이다. 황선홍의 역할은, 그가 해내야만 한다 믿고 있는 나에게는.
다시 4년 뒤에는 '일본 공격의 자존심'으로 추앙받는 다카하라를 멀찌감치 떨궈놓은채 득점행진을 이어갈 이동국의 모습을 기대한다. 전성기 황선홍의 존재감을 그에게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서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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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형욱씨도 이동국 어지간히 좋아하는군요. 이제 이동국에게 다시금 무대가 마련되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잘해줄 거라 믿습니다. ...다카하라는 개인적으로 탐나는 공격수지요. +_+ 제가 일본선수 중에 좋아하는 선수 세 명이 나카타 다카하라 오노입니다.
비슷한얘기가 또있죠...윤정환과 나카타
고종수와 나카타 아니었나요?
둘다와 비교될만큼 나카타는.. 위협적인 선수같네요^^
윤정환 나카타 보다는 그래도 고종수 나카타가 원래 비교대상이었다고 보여지는데..^^;;;
윤정환과 나카타도 비교할수 있겠죠..96년도 윤정환의 대활약,,,나카타는 무명...97년도 나카타의 활약..윤정환은 부상때문에 길게 쉬었던 해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