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因緣
<제17편 따뜻한방>
②코보라는남자-32
“할머니, 전, 금호동에 살적부터 용훈이랑 부부였어요. 그때 저는 여덟 살이고, 용훈인 아홉 살이었거든요, 여름엔 강에 가서 발가벗고 자맥질도 하고, 서로 끌안고 알몸을 비벼대며, 놀았던 게 즐거웠어요. 오호호. 제가 용훈이랑 헤어져 이십여 년 동안 오매불망했어요. 제가 조강지처 지흥엄마보다 먼저예요. 오호호.”
“철없을 때 불장난은 무효야! 초례청에 마주서고, 첫날밤 치러야 부부야!”
금순이 천복과 어렸을 적에 놀던 일을 쏟아놓자, 경산은 철부지 어릴 적 불장난은 무효라고 일축하자, 금순이 그냥 말지 않고, 말을 잇고 있었다.
“할머니, 그뿐이 아니었어요. 그해 여름엔 용훈엄마가 함지박에 물을 채워주자, 그 물속에 함께 들어가 놀았고요, 발가벗고 끌안은 채, 돗자리를 둘둘 말고 부부처럼 놀았거든요. 오호호.”
“그건 네가 꼬리친 거지, 우리 용훈인 성인군자야! 널, 가엾이 여기고, 널 따라줬을 뿐이니라.”
경산은 금순이 찧고 까불수록 냉엄하게 천복을 옹호하였다. 그런데 금순은 용훈의 이야기에 폭 빠지어들고 있었다.
“용훈이 군자인데, 고추가 일어서요? 그래서 저는 한 살만 더 먹으면, 용훈이 아길 가질 거라 기대했더랬어요. 오호호...”
“어렸을 땐, 호기심에서 가끔 있는 일이다. 넌, 어릴 적부터 남잘 좋아했구나! 여자가 색을 밝히면, 여러 남자 건너다니는 법이야. 그러면, 여자의 팔자가 순탄하겠어? 색주가나 매음부일 뿐이지.”
“어매, 할머니 잘못했어요! 전, 색주간 아니라도, 그 지경에 도달했어요.”
금순은 경산의 입에서 색주가, 매음부란 말까지 나오자 잘못했다고 빌었다.
이렇듯 한창 경산과 금순의 대화가 무르익는데, 천복이 넌지시 경산의 요 밑으로 손을 넣어보는 거였다. 방금 미지근하던 방바닥이 따끈따끈한 열기가 오르는 거였다.
그러는데, 널찍한 둘레상이 들어왔다.
때마침 정읍댁이 장날이라, 정희네에서 부엌일을 도와주고 돌아오는지 불쑥 나타났다.
“어머니, 금순이 아시지요?”
천복은 정읍댁이 들어오자, 금순을 입에 올리면서 묻는 거였다.
“서울? 금순이?”
그녀는 천복이 생경하게도 금순을 말하였지만, 금방 서울 금호동 도랑가에 살던 금순을 떠올리었다.
“어머님! 참, 이십여 년 만에 만나 뵙네요. 어머님도 아실 거예요. 저랑 용훈이랑 실과 바늘이란 걸요. 이제야 만나 다시 용훈이 색시가 됐어요.”
금순은 꼭 용훈의 여자라는 꼬리표를 붙여서 말하였다.
그러자 정읍댁은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서 문득 어릿하였지만, 금순이 달리어들어 손을 잡자, 그제야 입을 여는 거였다.
“느그가 금순이냐? 가만 본 게러 예즌 얼굴이네이 야가. 느그가 워띃기 울 용훈이럴 만넨 것이여?”
“몇 달 전 우연히 만났다가 용훈이 색시가 됐어요. 어머님, 여기 제 친구 대학동창인데, 용훈이랑 살겠다고 했어요. 오호호.”
게다가 금순은 종숙이까지 끌어들이어 용훈이 여자라고, 곁불을 지피기에 바빴다.
정읍댁은 금순의 말에 연신 비슷이 웃기는 하였으나, 모를 일이었다.
“무신 용훈이 으자덜이라냐? 느그넌 거동안이 시집더 안 갔간듸, 인쟈와서나 용훈이 색시가 댰냐? 으자 많으먼, 남제가 근력빠진디야.”
“어머님, 여자의 일생은 본래 그렇잖아요? 과거는 불문하고, 이제 저도 나이를 먹다 만난 용훈이만 사랑하면서 살려 해요. 여기 종숙이도 용훈일 사랑한다니까 기왕 만났으니, 엄벙덤벙이라도, 살아가려고, 다짐했대요. 오호호. 어머님, 남자 근력 안 빠지게 할 거예요. 오호호.”
그때 종숙이 정읍댁에게 다가가더니 인사하면서, 백제 언제는 혼인 날짜 잡아놨다더니, 용훈에게 시집왔다고 하였다.
“어머님, 저는 김종숙이에요. 오늘 용훈 씨한테 시집왔어요!”
“요기 뭔 조간이라냐?”
정읍댁은 두 여자의 혼란스러운 말들에, 들이어온 둘레밥상을 바로 펴놓고, 희한의 미소를 머금은 채, 부엌에서 연신 들오는 반찬과 밥그릇 국그릇을 앞앞에다 놓아주고, 천복의 앞에는 술병도 올리어놓았다.
둥근상에 밥상이 다 차려지자, 모두들 밥술을 뜨는데, 정읍댁은 술을 못하기에 천복은 그녀들과 술잔을 나누면서 명훈이가 떠오르자 묻는 거였다.
“어머니, 명훈이는 어디 갔어요?”
첫댓글 삶이 얼마 안남은 경산이기에 며느리와 손자, 지인들과 둘레상에 앉은 모습이 꿈같고
그 시간이 더욱 값져보입니다.
경산과 정읍댁이 어른이지만 장차 집안을 이어나갈 주인공은 천복이죠.
그러니 명훈도 군대 갔다가 와서 할일이 별로 없이 있으니 집과 논을 주고
할머니 어머니를 모시라고 했던 거죠. 그래서 일단 형제는 형이 집을 나오고
동생이 집을 지키고 할머니 어머니를 보살피는 것으로 하였으니 천복은
어찌보면 손님일 수 있지요. 그러나 할머니와 어머니가 생존하였으니
아직은 손님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이렇듯 경산을 찾아오면 되레
좋은 현상인데 그나마 경산이 세상을 뜨고 정읍댁이 세상을 뜨면
명훈과 천복도 형제의 의리를 지키면서 살겠지만 형제란 남이
되는 시초지요. 형제는 변함없으나 그 지식들이 장성하면
자연 독생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