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9년, 즉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제자인 이함형(1550~1577)에게 준 편지가 있다. 이함형은 당시 부부 금슬이 매우 좋지 않아 부인과 동침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정을 안 69살의 스승이 20살 젊은 제자 이함형에게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고는 겉봉에다 “길에서는 절대 뜯어보지 마라(路次物開看)”는 글을 썼다. 당시 안동에서 고향인 순천까지 가는 동안 이함형은 스승의 당부대로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편지 내용이다.
공자(孔子)는 이르기를,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뒤에 예의(禮義)를 둘[錯] 곳이 있다.” 하였고,
자사(子思)는 이르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서 시작되니, 그 지극한 데 이르러서는 천지(天地)에 밝게 드러난다.” 하고, 또 이르기를, “《시경》에 ‘처자 간(妻子間)에 정이 좋고 뜻이 합함이 금슬(琴瑟)을 타는 듯하다……’ 하였는데,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부모가 편안하실 것이다.’ 하셨다.” 하였습니다. 부부의 인륜이 이토록 소중하거늘 어찌 정이 흡족하지 못하다고 해서 소박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학》에는 ,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끝이 다스려진 경우는 없으며, 후하게 대할 자에게 박하게 하고 박하게 대할 자에 후하게 하는 자는 있지 않다.” 하였고,
《맹자》에선, 그 말을 거듭하여 “후하게 대할 자에게 박하게 하면, 박하게 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 사람됨이 박절하면 어찌 부모를 섬길 수 있으며, 어찌 형제와 종족과 마을에서 처신할 수 있으며, 무엇으로 임금을 섬기고 대중을 부리는 근본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공이 금슬이 좋지 않아 탄식한다는데, 무엇 때문에 이러한 불행이 있게 되었습니까. 가만히 보면 세상에 이런 걱정이 있는 자가 적지 않으니, 부인의 성질이 나빠 교화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못생기고 슬기롭지 못한 경우도 있고, 남편이 광포하고 방종하여 행실이 없는 경우도 있고, 호오(好惡)가 정상과 어긋나는 경우도 있는 등 그 다양한 유형을 다 들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대의(大義)로 말해 보면, 그중에 성질이 나빠 교화하기 어려운 자가 실로 소박 당할 죄를 자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편에게 달려 있습니다. 남편이 반성하여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노력하여 잘 처신하여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않는다면 대륜(大倫)이 무너지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이며 자신도 박절하게 굴지 않는 데가 없는 처지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른바 성질이 나빠 교화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대단히 패역한 짓을 저질러 명교(名敎)에 죄를 지은 자가 아니면 마땅히 합당하게 선처(善處)하여 성급하게 결별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대개 옛날에 쫓겨난 부인네들은 그래도 달리 시집갈 길이 있어 칠거지악을 범한 부인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부인네들은 대체로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하여 일생을 마치게 되니, 어찌 그 정의(情義)가 맞지 않다고 하여 길가는 사람처럼 대하거나 원수처럼 보아 한 몸이던 부부가 반목하게 되고 한 자리에 들던 부부가 천 리(千里)나 떨어져서, 가도(家道)는 출발점을 잃고 만복의 경사를 누릴 근원을 끊는 짓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대학》의 전문(傳文)에 “자신에게 허물이 없어야 다른 사람을 탓한다.” 하였으니, 여기에 대하여 내가 일찍이 경험한 것을 얘기하겠습니다. 나는 두 번 장가들었지만 줄곧 불행이 심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해 마음을 박하게 하지 않고 노력하여 선처한 것이 거의 수십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동안 몹시 괴롭고 심란하여 번민을 견디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어찌 감정대로 하여 대륜(大倫)을 소홀히 해서 편모(偏母)에게 근심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질운(郅惲)이 말한, “아버지도 부부 문제에선 아들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이 도리를 문란하게 하는 간사한 말이니, 이 말을 핑계 대면서 공에게 충고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공은 마땅히 반복하여 깊이 생각하여 징계하고 시정하도록 하십시오. 이 문제에 대해 끝까지 시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학문한다 하며 어찌 실천한다 하겠습니까.
이함형은 대문에서 편지를 읽고 하인에게 대청에 초석을 깔고 소반위에 정한 수 한 그릇을 떠놓게 한 뒤 부인을 불렀다. 부부는 정한 수를 마주하고 서로 재배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그날부터 부부는 금슬 좋은 사이가 되었고, 후손도 번성했다. 훗날 퇴계가 세상을 뜨자 이함형 내외와 자손들은 친자식과 다름없이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출처 : 2015년도 퇴계학부산연구원 시민문화강좌 26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귀한 작품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