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연곡사향각(題燕谷寺香閣)
연곡사향각에 쓰다
태능(太能, 1562~1649)
수만 권의 경전은 손가락질 같아서
손가락 따라서 하늘에 있는 달을 보지만
달이 지고 손가락 잊어도 아무 일 없으니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게나
百千經卷如標指(백천경권여표지)
因指當觀月在天(인지당관월재청)
月落指忘無一事(월락지망무일사)
飢來喫飯困來眠(기래끽반곤래면)
온갖 경정에 쓰여 있는 교리는 그저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수단에 불과한 것
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면 뭐 하나. 달은
진리 또는 본질이요, 손가락은 경전 또는 수행법이다. 수단이나 도구에 집착하
지 말고 목적이나 본질을 추구하라는 뜻으로 손가락만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 스님은 진리건 경전이건 모두 다 헛된 것이라 말한다.
깨달음의 결지는 생각과 분별 모두 다 버리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듯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말이다. 구례 지리산 자락 연곡사에 가면 소요당의 글씨는
없어졌지만 지금도 그의 부도(浮屠: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가 있다.
[작가소개]
태능(太能) : 불교인물, 조선시대 『소요당집』을 저술한 승려.
분야 : 불교
성격 : 승려
성별 : 남
출생일 : 1562년(명종17)
사망일 : 1649년(인조 27)
저작 : 소요당집
<정의> 조선시대 『소요당집』을 저술한 승려. 개설성은 오씨(吳氏). 호는 소요(逍遙). 법명은 태능(太能). 전라남도 담양 출신. 서산대사휴정(休靜)의 전법제자(傳法弟子)이자 소요파(逍遙派)의 개조(開祖)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3세에 백양산(白羊山)의 경치에 감화 받아,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계(戒)를 받고 출가하였다. 그 후, 속리산과 해인사 등지에서 부휴(浮休)에게 경률(經律)을 익혔는데, 부휴의 수백 명의 제자들 중, 태능·충휘(沖徽)·응상(應祥)이 법문(法門)의 삼걸(三傑)이라 불렸다. 그는 묘향산으로 휴정(休靜)을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화두를 물었다. 문답한 뒤, 휴정은 의발(衣鉢)을 전하고 3년 동안 지도한 뒤,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하게 하였다. 그 뒤 휴정에게 다시 탁마한 후, 크게 깨달았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의 서성(西城)을 보완하였으며, 지리산의 신흥사(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다. 1649년 11월 21일 법문과 임종게를 설하고 나이 87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학문세계와 사상>
그는 선(禪)과 교(敎)를 하나의 근원에서 파생한 두 가지 흐름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취하였는데, 이러한 사상과 경향은 서산대사와 일맥상통한다. 『소요당집서(逍遙堂集序)』에서는, 서산대사의 뛰어난 제자들 중에 오직 그만이 선지(禪旨)를 통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본래청정(本來淸淨)하고 자재하며 완전한 일물(一物)인, 우리의 자성(自性)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참된 주인공으로서 작용하는데, 이 참 주인공을 자각한 사람만이 온전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특히, 선(禪) 사상이 실참실수(實參實修)를 통한 체험에 있음을 실감하고, 상징적인 비유를 통하여 개념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바로 그 실상을 실감하도록 하는 선종의 방법으로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며, 철두철미하게 불교를 주체적으로 깨닫도록 하고자 노력하였다.
뛰어난 제자로는 현변(懸辯), 계우(繼愚), 경열(敬悅), 학눌(學訥), 처우(處愚), 천해(天海), 극린(克璘), 광해(廣海)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소요파(逍遙派)로 불리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저서>로는 『소요당집』 1권이 있다.
<상훈과 추모>
사리를 연곡사·금산사(金山寺)·보개산(寶蓋山) 세 곳에 나누어 모시고 부도(浮屠)를 건립하였다. 그를 흠모한 효종은 1652년(효종 3)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경석(李景奭)을 시켜 비명(碑銘)을 지어 금산사에 세우게 하였다.
<참고문헌>
소요당집(逍遙堂集)『한국불교사상사(韓國佛敎思想史)』(숭산박길진박사화갑기념사업회,원불교사상연구원,1975)『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신문관,191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능(太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