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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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골룸바(Columba)
축일 6월 9일
콜(Colm), 콜럼(Colum) 그리고 콜름실(Colmcille)로도
알려진 성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아일랜드
더니골(Donegal)의 가탠에서 왕가의 후예들인
페들리미드와 에트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마도
위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세례를 받았고,
모빌에서 교육받고 여기서 부제가 되었다.
런 후 그는 렌스터(Leinster)에서 수학하였으며,
클로나드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그곳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에는 성 모비의 지도하에
글라스네빈으로 갔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인하여 543년경에 이 도시가
소개되었을 때, 그는 얼스터(Ulster)로 가서
아일랜드의 거의 모든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성당에서 설교하고 수도원을 세우면서
약 15년을 지냈다. 그런 후 563년경에
이 지역을 떠났다.
여기에는 상당히 큰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아일랜드에 도착한 성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의 시편(핀니안 소유) 사본을
처음으로 복사하였는데, 이것이 성 핀니안
(Finnian)과 논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핀니안이 이 사본을 요구하자, 국왕 디아르메이드는
콜룸바의 사본은 핀니안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콜룸바는 디아르메이드에게
칼을 뽑게 되었는데, 이것은 콜룸바와 함께
성소를 찾아온 콘노트의 쿠난이 디아르메이드의
부하에 의하여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양가 사람들의 끝없는 혈전이
벌어졌는데, 큘 드렘느 전투에서는 약 3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 텔타운에서 개최된 시노드
(Synod)는 콜룸바에게 책임을 물어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 결과 콜룸바는 아일랜드를 떠나기로 결정하였으며,
수많은 외인들을 개종시킴으로써 죽을 때까지
보속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하여 563년에 그는 12명의 친척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연안에 있는 이오나로 갔으며,
여기서 수도원을 세웠는데 아일랜드 교회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픽트족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전념하였으며, 브루드 국왕을 개종시켰고,
마침내 픽트랜드 전역을 복음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큰 성과가 나온 이면에는 큰 기적이 하나 있었다.
네스 강에는 큰 괴물이 살고 있었는데, 콜룸바가
성호를 긋고 기도함으로써 이를 퇴치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졌고, 기적에 대한
명성으로 인하여 수도원의 방문자들이 줄을 섰다.
콜룸바가 서방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오나 출신 수도자들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회칙은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회칙이
정착되기 전까지 전 유럽에서 통용되었다.
그는 성령의 기쁨을 안고 살은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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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다이아나(Diana)
다이아나는 '빛의 여신'이란 뜻이다.
성녀 체칠리아(Cecilia)
축일 6월 9일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이탈리아 내의 수도회 활동을
위하여 한적한 곳을 찾았을 때 성 도미니코
(Dominicus, 8월 8일)는 볼로냐를 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망하던 훌륭한 대학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수도원을 지었으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것은 그 땅을 소유하고 있던 안달로가(家)의
위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달로의 무남독녀인 디아나의
간절한 호소에 굴복하였다. 성 도미니코는 사적으로
그녀의 동정서원을 받아들였고 가능하면
수도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었다.
얼마동안 그녀는 자기 집에 그대로 머물면서
회개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도미니코 수녀회의
수도원을 짓기로 집안사람들을 설득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그녀의 부친은 완강히 거부할 뿐 아니라
그녀가 수녀회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집을 나와서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온 가족이 몰려와서
강제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 온 그녀는 독방에 갇혀 지냈으나 또 다시 집을
탈출하여 록사나(Roxana)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작센(Sachsen)의 요르단(Jordan, 2월 15일)이
안달로와 그의 아들들을 설득시켰을 뿐만 아니라,
도미니코 수도원을 짓는데 도움까지 베풀도록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1222년에 로마(Rome)의
성 식스투스(Sixtus) 수녀원에서 온 4명의 수녀들과
함께 볼로냐의 성녀 아녜스(Agnes)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 중에 체칠리아(Caecilia)와
아마타(Amata, 2월 20일)가 있었다.
이 두 수녀의 생활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높은 성덕으로 유명하였다.
체칠리아는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매우 뛰어난
여성이었다. 그녀는 17세 때 성 마리아(Maria) 수녀원에
들어갔다. 디아나는 1236년 1월 9일에 35세의 일기로
운명하였고, 체칠리아는 설립자 성 도미니코를 오랫동안
도왔다. 그들은 사망 후에 성녀 아녜스 수녀원에
나란히 안장되었고, 1891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함께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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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리카르도(Richard)
축일 6월 9일
성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는
잉글랜드(England) 사람으로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의 안드리아 교구의 초대주교였다.
그는 로마(Rome)에서 안드리아로 와서 주교로
선출되었고, 교황 성 젤라시오 1세로부터 몬테
가르가노에 성소를 봉헌토록 위촉받은 3인의
고위 성직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올바른 듯한 전설에 의하면,
1118년 전에 안드리아에는 영국인 주교가 있었고,
그는 1179년에 라테라노 공의회(Council of Laterano)에
참석하였으며, 성 에라스무스와 폰티아누스
(Pontianus)의 유해를 치비텔라에서 안드리아로
이장했다는 것이다. 성 리카르두스는 안드리아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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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미아노(Maximian)
축일 6월 9일
성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또는 막시미아노)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시라쿠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대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지도하에
로마(Rome)에 있는 성 안드레아(Andreas) 수도원에서
수도승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교황 펠라기우스(Pelagius)와 대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동로마 황제에게 파견된 교황사절로서 활동하였다.
교황 대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다시 로마로 소환하여
함께 일하다가 591년에 그를 시라쿠사의 주교이자
시칠리아의 교황사절로 임명하였다.
그는 시라쿠사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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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빈첸시오(Vincent)
축일 6월 9일
성 빈첸시오(Vincentius)는 가스코뉴(Gascogne)에 살던
부제였는데, 그는 이방인들의 축제를 중단시킨 죄목으로
아쟁에서 체포되어 지방 관리의 손에 넘겨졌다.
그는 사지가 땅에 묶이는 형벌을 받았고
또 이 상태에서 무수한 매를 맞은 뒤에 참수치명
하였다. 그의 유해는 마스 다장네에 안장되었다.
이 사실은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푸아티에(Poitiers)의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가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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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빠치피꼬(pacifico)
축일 : 6월 9일
빠치피꼬 라모따는 피에몬트의
노바라 출신으로서, 그가 어렸을 때에
부모가 선종하였다. 따라서 그는 노바라의
베네딕또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은후,
21세 되던 해에 프란치스칸이 되었다. 그후
사제가 된 그는 주로 이태리 내에서 설교자로서
활동했는데, 이것이 성공함으로써 선교사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윤리신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1475년에는 이를 발간하였다.
1480년, 그는 체라노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크리스챤에 대한
적대심이 강한 지역의 선교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르디니아로 갔을 때 중병을
얻어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자신의 유언에 따라 체라노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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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실베스테르 벤투라(Silvester Ventura)
축일 6월 9일
빗질하고 표백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던
실베스테르의 세례명은 벤투라이다.
중년의 나이에 그는 요르단이란 어느 수도자의
영향을 받고, 40세에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에
있는 카말돌리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전혀 교육받은 바 없던 그는 주로 부엌일을 하면서
지식을 쌓은 결과 놀라운 영적 지혜가 싹트기
시작하여 유식한 많은 이들이 그의 권고를 듣고자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의 원장도 자주 그의 충고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계속하여
겸손과 절제 그리고 다른 신심덕을 높이 쌓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읽을 줄도 모르던 그가
성무일도를 매우 정성스럽게 바치게 된 것이다.
그의 수도자들은 그토록 감미롭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낭독하는 그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곤 하였다.
이 착한 평수사는 자신이 예고한 날에 하느님
품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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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안나 마리아 타이지(Anne Mary Taigi)
축일 6월 9일
안나 마리아 타이기(Anna Maria Taigi)는
1769년 5월 29일 이탈리아의 시에나(Siena)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약종상이었는데 사업이
망하여 가난에 찌들게 되자 로마(Rome)로
이주하였다. 안나의 부모는 가정부로 들어갔고
안나 자신은 가난한 어린이를 교육하는 단체에
보내졌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그녀는 소녀 가장이
되었다. 면사 공장에서도 일했고 귀족 집의
하녀로도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처녀로 성장하면서
옷을 탐하고 아름다움을 쫓으려다가 마침내
1790년에 도미닉 타이지(Dominic Taigi)란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으나, 그 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사제에게 총고백을 하고나서 마음을
일신하였다. 그녀는 수년 동안 천주의 종 수도회의
안젤루스(Angelus) 신부에게 고해를 보고 또
영적 지도를 받았는데, 늘 갓 회개한 사람처럼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헛된 것을 끊어버리고
세속적인 모든 쾌락을 추호도 탐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나는 바느질 품삯으로 남편의 적은 수입을 도왔고
가정에 충실하였다. 한편 영신적으로는 굉장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놀라운
기적까지 허락하셨고, 탈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예언하는 힘을 주셨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탄의 간교와
영적인 무미건조함으로 큰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1837년 6월 9일 68세의 일기로 운명하였고,
1920년 5월 30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
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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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프렘(Ephraem)
축일 6월 9일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Nisibis) 태생인
성 에프라임(또는 에프렘)은 어느 이방인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양친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됨에 따라 18세 때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니시비스의 성 야고보(Jacobus)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후일 이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에
성 야고보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시리아의 문헌에 의하면 350년의 페르시아 침입 때
그의 기도 덕분으로 니시비스가 해방되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나, 363년에 요비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니시비스가 재차 페르시아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는 로마 땅인 에데사 근교의 동굴에 거처를
정하고는 신자들에게 설교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제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곳에서
그의 저서 대부분을 저술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370년에 카이사레아(Caesarea)로 가서
성 바실리우스(Basilius)를 찾았으며,
돌아오는 길에 372년과 373년 겨울의 냉혹한 기근을
덜어주는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그는 에데사에서 운명하였다.
성 에프라임은 성서적 근원을 밝히는 비중 큰
저서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교의 및 수덕 생활에
관한 수많은 글을 시리아어로 남겼다.
또한 그는 이단을 반박하는, 특히 아리우스(Arius)
이단과 영지주의를 공격하는 중요한 논리를
서술하였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외에도 그는 복되신 동정녀에
대하여도 신심이 깊었는데, 그가 마리아의 원죄
없음을 단언하였기 때문에 흔히 ‘원죄 없으신 잉태’의
증인으로도 불린다. 또한 그는 공식 예절에 찬미가를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 교육에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전례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업적은 일찍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그리고
라틴어로 번역되어 자주 사용되었는데,
그의 니시비아어 찬미가와 절기에 따른 찬가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하여 그는 ‘성령의 하프’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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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율리아노(Julian)
축일 6월 9일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는
시리아에 노예로 팔려온 서방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자유를 회복한 후에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에서 성 에프라임(Ephraem, 6월 9일)의 지도하에
수도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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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펠라지아(Pelagia)
펠라지아는 펠라지오의
여성형으로 '바다'란 뜻이다.
축일 6월 9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에
의하면 성녀 펠라기아(또는 펠라지아)는 안티오키아에
살던 15세의 소녀였다. 군인들이 그녀의 집에 와서
그녀를 체포하여 범하려고 하였다.
이때 그녀는 지붕에서 뛰어내려 운명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안티오키아 지방민들의 순결의
상징이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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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리무스(Primus)
프리모는 '첫째'란 뜻이다.
성 펠리치아노(Felician)
축일 6월 9일
80세의 성 프리무스(Primus)와
펠리키아누스(Felicianus, 또는 펠리치아노)는
형제지간으로 로마의 귀족이었으나 그리스도인이
되어 자선활동을 하는 등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특히 감옥을 즐겨 방문하여 죄수들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란 신분이
드러나게 되자 오랜 동안 피신해 있다가 결국은
체포되었다. 그들이 이교도의 신에게 희생 제사
드리기를 거부하자 즉시 투옥되어 매를 맞았으며,
관리들은 그들을 아주 천천히 죽이기 위하여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참수하였다고 한다.
640년 교황 테오도루스(Theodorus)가 그들의 유해를
산 스테파노 로톤도(San Stefano Rotondo)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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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쿠스 미카엘 부셰
(Henricus Michael Buche, 또는 헨리코)
축일 6월 9일
헨리코는 '고향' 또는 '강함'이란 뜻이다.
헨리쿠스 미카엘 부셰
(Henricus Michael Buche, 또는 헨리코)는
'신기료장수(Shoemaker)' 혹은 '좋은 사람 헨리쿠스'란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벨기에 룩셈부르크
(Luxembourg)에서 태어나 그곳의 아를롱(Arlon)에서
신기료장수를 하다가, 1645년에 프랑스 파리(Paris)로
이사하여 같은 일을 하면서 살았다.
그는 파리에서 ‘구두장이회’를 조직하여 엄격한
규율 밑에 주민과 여행자들에게 봉사하였다.
이 회원들은 일을 열심히 할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하였으며, 감옥과 병원을
찾아 위문하고 연례 피정을 갖기도 하였다.
이 회는 날로 번창하여 다른 도시에 지부를 두기도
하였다. 그는 하찮은 일에서도 주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릴 줄 아는 사람으로 공경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