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 사건 해결에 실마리가 되는 목소리 분석 등 소리를 제대로 분석하고 알리는 데 분주한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 배명진 교수 (52세). 최근 서울시와 사운드 테마파크를 조성하기로 한 그에게 소리 이야기를 들어 봤다.
소리 연구자로 유명하신데요. 소리 공학이란 무엇인가요?
소리는 귀뿐 아니라 떨림 (촉감) 으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소리는 진동을 포함하거든요. 음악 치료는 귀로만 듣고 하지만, 소리 치료는 공명을 활용해 물리적인 접근도 가능합니다. 물체마다 고유 진동수라는 게 있어요. 소리가 각 물체에 부딪칠 때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면 큰 떨림이 생기는데, 이를 공명이라고 해요. 초음파 가습기, 물로 된 안경 닦이도 공명 현상을 이용한 것입니다.
몇 헤 전에 유관순 열사 목소리를 재현하셨잖아요. 특별한 계기라도 있나요?
일본에서 미켈란젤로, 모나리자 목소리를 재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방송 프로그램에서 위인 목소리를 재현해 달라고 요청했지요. 이순신, 세종대왕, 유관순, 신사임당 중에서 대상자을 선정하다가, 신체 골격을 알아야 목소리 재현이 50% 정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죠. 유관순 열사는 몸과 얼굴 형태 등이 잘 보이는 사진이 남아 있어서 시작했습니다. 우선 신체조건이 비슷한 350명의 목소리를 담고 목 길이, 코 모양, 얼굴 형태 등을 분석해서 재현했죠. 얼마 뒤 생존해 있는 유관순 열사 남동생의 세 딸 목소리를 들었는데, 재현한 목소리와 비슷해서 저도 놀랐어요. 그 목소리는 유관순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아무리 재현을 잘해도 실제 목소리가 아니라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온라인에 진짜 유관순 열사 목소리가 맞느냐고 항의하는 댓글이 많았어요. 위인 동상은 실물과 얼마나 비슷한지 크게 문제 삼지 않으면서, 왜 소리에만 엄격할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조금 서운해서 댓글로 항의하려다 "소리에 관심 가져 줘서 고맙습니다." 그러고 말았어요. 한번은 동화책을 만들었는데요. 엄마 목소리를 저장하면 전체 나래이션을 그 목소리로 바꿔서 들려주는 거였어요. 획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실패했어요. 목소리는 비슷한데, 개인만이 지닌 고유한 말투가 달랐거든요.
소리 분석이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도 하던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소리 분석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 중 70대 어부가 남녀 대학생을 해친 사건이 기억에 남아요. 피해 여성 휴대전화에 119로 전화 건 기록이 남았는데 마지막 1.2초에 "어디서 무전이니?" 하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국과수에서는 "누구 목소리인지 알 수 없다." 라고 결론을 내렸는데요. 구속이 풀리기 며칠 전 수사팀이 분석을 의뢰해서 목소리를 비교해 보니 어부였죠.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고,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에 강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소리 연구자로 살면서 생긴 습관도 있으신가요?
영화를 볼 때 영상보다 소리에 관심이 가요. 예전에 <태극기 휘날리며> 를 보는데 '진짜 같은 전쟁 소리가 한 번 나와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영상도 영상이지만 실제 같은 소리를 들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효과가 있어요. 또 딸과 통화하다 보면 "어", "그래" 처럼 별 뜻 없는 말만 해도 오래 통화하고 싶어요. 목소리를 오래 느끼고 싶은 거죠. 이걸 응용해 목소리 정감도 프로그램도 만들었어요. 이처럼 생활 곳곳에서도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습관이예요.
서울시와 사운드 테마파크를 만드신다고요.
사실 저는 소리박물관을 만들고 싶었어요. 지난 15년 동안 소리에 대한 연구 발표로 해외에 나갈 때마다 박물관을 많이 봤어요. 최근 우리나라에도 참 많아졌더군요. 저는 체험 중심의 살아 있는 박물관을 계획했는데, 투자 비용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세계 최초의 사운드 테마파크를 생각했습니다. 자연 자체가 소리 학습장인 거죠. 서울 상암동 노을공원에 세울 계획인데,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 소리 학습장으로는 최적의 장소예요. 모든 소리가 합쳐진 게 바로 바람 소리거든요.
사람에게 좋은 소리가 따로 있나요?
숲 소리를 분석하면 좋은 소리가 많이 나옵니다. 사람에게 자연의 소리가 중요하다는 증거죠. 그래서 사운드 테마파크도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귀의 구조는 무조건 받아들이게 돼 있어요. 입으로는 말하고 귀로는 듣기만 하는 거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는 옛말은 과학적으로 성립이 안 됩니다. 하지만 듣기만 하고 말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이죠. 옛날에는 갈대숲에서 말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하던데요. 갈대숲 소리는 모든 소리가 합쳐진 백색 소리 (white sound) 입니다. 파도, 비, 폭포에서 백색 소리가 많이 나오는데요. 소리는 있지만 의미가 없어서 뭔가를 생각하고 집중하는 데 효과적이죠.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아날로그 소리를 그대로 수록한 게 LP 판입니다. 그 속에는 녹음 환경 소리까지 들어 있는데요. 이게 CD 데이터로 바뀌면서 잡음이 제거된 겁니다. 예전엔 오케스트라가 모여서 녹음하면 주변 소리도 들어갔는데, 요즘은 각각 녹음하니까 잡음이 없어요. 그래서 디지털 소리가 밋밋한 겁니다. 환경 잡음은 평소 듣던 것처럼 자연스럽거든요. 그게 인간적인 소리 아닐까요.
익숙한 소리라면 도시 소음도 좋은 소리인가요?
도시 소음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귀의 달팽이관에 듣는 세포가 있는데, 저주파는 달팽이관 안쪽에서 느끼고 고주파는 바깥쪽에서 느껴요. 교통 관련 소리는 대개 2,000 Hz 정도에 몰려 안쪽에서만 느낍니다. 특정 부분에서만 저주파가 섞여 있어요. 달팽이관의 모든 세포가 느끼는 소리가 백색 소리고, 자연의 소리입니다.
앞으로 할 일도 많으시겠습니다.
귀는 10대 때 고주파를 듣는 달팽이관 바깥쪽부터 서서히 망가집니다. 나이가 들면 트로트처럼 막힌 듯한 음악을 즐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모든 사람이 편하게 온 몸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 체험관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리를 가까이 가져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거죠. 소리는 영원하니까요.
(강헌 선집 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