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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최영호 (영산대학교)
Ⅰ. 머리말
Ⅱ. 박열에 대한 기존 평가
Ⅲ. 해방 후 정치범 출옥과 박열
Ⅳ. 재일한인 민족단체와 박열
Ⅴ. 한반도 신탁통치문제와 박열
Ⅵ. 본국귀환 문제와 박열
Ⅶ. 맺음말
* 이 논문은 2007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
구되었음 (NRF-2007-361-AL0001). 심사자들의 세밀한 지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재외한인연구 제36호
(2015. 6) 1-40
2 재외한인연구 제36호
Ⅰ. 머리말
박열(朴烈)은 일제강점기에 한인 사상범으로서는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투옥
을 당했던 인물로, 한반도의 식민지배 종결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에 기여할 지
도자로 주목을 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해방직후 한인 대중들은 그에게 출옥
후 조국에 귀환하여 현실적인 정치적 지도자로 나설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러
한 기대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지 않았고 도리어 일본사회에 계속 머물면서 각종
논설을 통하여 한국과 일본의 정세를 비평하는 한편 이상주의적인 한일관계를 논
● 요 약 문 ●
이 논문은 역사적인 어프로치를 통하여 박열의 해방직후 행적을 실증하고 그가 새로
운 한일관계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파악하고 있다. 1945년 조국해방으로
부터 1949년 박열이 남한에 귀국하기까지를 분석대상 시기로 하며 특히 그가 출옥하는
1945년 10월부터 「민단」이 결성되는 1946년 10월까지의 1년 동안을 집중 조명하고 있
다. 이 논문의 첫 번째 과제는 해방직후 한반도 국가건설 과정에서 재일한인 사회의 로
컬리티(locality)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과제는 해방직후 한일관계 변화에
대한 박열의 대응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본문에서는 박열에 대한 기존의 평가들
을 살펴보고, 한일관계와 관련이 깊은 사건을 정치범 사상범의 석방 문제, 재일한인 사
회의 민족단체 문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 본국귀환 문제로 나누어, 각각의 사건에 대
해 박열이 각각 어떻게 관여했는지, 가능한 자료에 입각하여 실증하고 있다. 박열은 해
방직후 재일한인 로컬리티를 대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현실정치에 속박당하는 일이 없
이 소신대로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려고 했으며 인간으로서 신의와 정의를 지키려고 노
력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박열을 운동가 혹은 정치지도자로서 평가하기보다는 지식인 혹
은 사상가로서 평가해야 한다.
주제어 : 박열, 재일한인, 로컬리티, 정치범석방, 조련, 건청, 신탁통치, 귀환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3
Ⅰ. 머리말
박열(朴烈)은 일제강점기에 한인 사상범으로서는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투옥
을 당했던 인물로, 한반도의 식민지배 종결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에 기여할 지
도자로 주목을 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해방직후 한인 대중들은 그에게 출옥
후 조국에 귀환하여 현실적인 정치적 지도자로 나설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러
한 기대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지 않았고 도리어 일본사회에 계속 머물면서 각종
논설을 통하여 한국과 일본의 정세를 비평하는 한편 이상주의적인 한일관계를 논
하는 가운데 일본인과의 화목과 인류애를 강조해 갔다. 그는 1948년 8월 대한민
국 정부수립을 축하하기 위해서 「민단」단장의 자격으로 서울을 공식 방문했다.1
1919년 10월에 한반도를 떠나 일본에 들어갔다가 1922년 11월 임시정부 요인과
의 접선을 위해 일시 서울에 들어왔던 것을 감안하면 그는 26년 만에 비로소 고
국을 찾은 셈이다.2 나아가 그가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에 돌아온 것은 1949
년 4월에 「민단」단장 연임이 실패한 직후였다.
이 논문은 박열의 해방직후 행적을 통하여 그가 새로운 한일관계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자리매김 하고자 한다. 1945년 조국해방으로부터
1949년 박열이 남한에 귀국하기까지를 분석대상 시기로 한다. 특히 그가 출옥하
는 1945년 10월부터 「민단」이 결성되는 1946년 10월까지의 1년 동안을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38도선을 계기로 분단이 굳어지고 좌우
이념의 대립이 격화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한일관계라 함은 국가적 차원에서
해방 전의 종주국-식민지 관계로부터 독립적인 관계로 변환해 가는 과정에 있었
다. 또한 민족적 차원에서는 한반도 일본인의 전면적인 추출과 재일한인의 대규
모 귀환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민족 구도가 다시 설정되는 시기였다.
이 논문의 첫째 과제는 정치학 연구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해방직후
한일관계에서 재일한인 사회의 로컬리티(locality)를 실증하고자 하는 일련의 연
구작업으로서, 박열의 해방직후 행적을 통해서 재일한인 사회의 로컬리티 성향을
또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해방직후 재일한인 사회는 본국지향적 성향을 강렬하
게 띠고 있었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국가체(nationality) 움직임에 대한
지역적 내지 국지적인 성향을 보였다. 필자는 국가체의 중앙 움직임에 대해 전반
적으로 호응해 가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재일한인 사회의 독특한 측면을 노정하는
1 박열은 1948년에 한국에 들어와 국회 연설과 고향 방문 등을 실시했다 (북한연구소,
1974. “실록 박열 <하>,” 북한 28: 321; 김인덕. 2013. 극일에서 분단을 넘은 박
애주의자 박열. 서울: 역사공간. 161-163쪽.
2 일본의 공안당국 자료에는 박열은 1947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된
후 정부수립 때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국무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러
한 ‘암행설(暗行說)’은 여타 기록과 대조할 때 신빙성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
坪井豊吉. 1975. 在日同胞の動き:在日韓国人(朝鮮)関係資料. 東京: 自由生活社,
[坪井豊吉. 1959. 在日本朝鮮人運動の槪況(法務研究報告書第46集3号)의 복각판].
252쪽.
4 재외한인연구 제36호
움직임을 로컬리티라고 하는 용어로 포착해 오고 있다. 해방직후는 한반도에 민
족 주체적인 국민국가가 설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와 같은 조
직적인 실체가 모호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재일한인 사회는 바
람직한 국민국가 건설의 방향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한반도의 정치적 움직임에 대
해 연동(連動)을 보여왔다. 이러한 국가체에 대한 지역성을 로컬리티라고 하는 몽
롱한 용어로서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3
이 논문의 두 번째 과제는 역사학 연구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해방직
후 박열의 주요 동향을 미시적으로 자료를 통해 밝히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해방
직후 한일관계 변화에 대한 박열의 대응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논의 전개
상 먼저 박열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살펴보고, 한일관계와 관련이 깊은 사건을 정
치범 사상범의 석방 문제, 재일한인 사회의 민족단체 문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
본국귀환 문제로 나누어, 각각의 사건에 대해 박열이 각각 어떻게 관여했는지, 가
능한 자료에 입각하여 실증하고자 한다. 재일한인 사회의 조직 활동에 대해서는
「민단」 등 보수적인 성향의 민족단체에서 그가 어떠한 활동을 보였는지 다른 논문
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기 때문에4 이 논문에서는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
치고,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ㆍ「건청」(조선건설촉진청년동맹)ㆍ「건동」(신조선건
설동맹)과의 조직적 관련성과 인물 평가를 찾아내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해방직후의 한일관계라고 하면 주로 재일한인 단체가 담당한 매개적 역할, 즉
본국사회와 일본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의 한일관계에 관한 선행 연구는 기본적으로 재일한인 단체의 활동에 관
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한일관계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로써
3 최영호. 2000. “일본 패전 직후 참정권문제에 대한 재일한국인의 대응,” 한국정치학
회보 34(1): 195-211; 최영호. 2005. “한반도 국가건설과 관련한 재일본조선인연맹
의 활동,” 한일연구 16: 277-308; 최영호. 2008. “해방직후 재일한인 민족교육의
특징과 한계: 조련의 ‘본국’ 로컬리티 성향 교육을 중심으로,” 한일민족문제연구
15: 99-135; 최영호. 2008. “재일코리안, 그 Locality 역사에 대한 소묘,” 로컬리
티의 인문학(한국민족문화연구소소식지)2: 2; 최영호. 2009. “재일조선인ㆍ한국인 사
회의 ‘본국’ 로컬리티: 초기 민단의 경우,” 로컬리티 인문학 창간호: 259-297; 최
영호. 2012. “한반도 신탁통치문제의 로컬리티: 해방직후 재일조선인 사회를 중심으
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0: 341-377.
4 김태기. 2014. “아나키스트 박열과 해방 후 재일한인 보수단체,” 한일민족문제연구
27: 91-139.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5
점령군 군속으로서 광범한 자료와 체험에 근거하여 1951년에 재일한인 단체에
관한 통사를 정리한 와그너의 작품을 들 수 있다.5 그가 해방직후에 예견한 재일
한인의 정주지향성이나 소수민족으로서의 서술은 오늘날에도 연구계에 높은 시사
성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귀환하지 않은 자들을 일본사회의 마이너리티로 보는
나머지, ‘해방민’으로서의 운동에 대한 이해가 적었고 이들의 조직 행동을 일본사
회의 질서문란행위로 보는 시각으로 이어지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해방
직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일본에서는 1950년대 중반 이후부
터, 한국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일본 치안당국의 조사 자료를 사용하여 재일한
인 단체의 동향을 재정리하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부터였다.6 1970년을 전후하여
재일한인 단체와 개별 연구자들이 해방직후 시기의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7
198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민중신문이나 해방신문 등 재일한인 사회를 대변
해 온 신문들을 자료집으로 공개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단체 자료
와 신문을 통한 실증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8 1990년대에 들어서 점령군
자료를 활용한 연구가 일본에서 왕성해졌고,9 이에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도 1990
5 Wagner, Edward W. 1951. The Korean Minority in Japan, 1904-1950, New
York: International Secretariat,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6 篠崎平治. 1955. 在日朝鮮人運動. 東京: 令文社; 坪井豊吉. 1959. 在日本朝鮮人運
動の槪況(法務研究報告書第46集3号). 東京: 法務研修所; 坪江汕二. 1965. 在日本
朝鮮人槪況, 東京: 巖南堂; 전준. 1972. 조총련연구(아세아문제연구소공산권연구총
서11). 서울: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신영철. 1974. 조총련, 서울: 한국정경
연구회.
7 鄭哲. 1967. 民團. 東京: 洋々社; 鄭哲. 1970. 在日韓国人の民族運動, 東京:
洋々社; 李瑜煥. 1971. 在日韓國人60万; 民團ㆍ朝總聯の分裂史と動向. 東京: 洋々
社; 朴慶植. 1976.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第1卷. 東京: 三一書房; 朴慶植. 1976.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第5卷. 東京: 三一書房; 金慶海. 1979. 在日朝鮮人民族敎育
の原點. 東京: 田畑書店.
8 朴慶植(編). 1983. 朝鮮問題資料叢書:第九巻解放後の在日朝鮮人運動Ι. 東京: アジ
ア問題研究所; 朴慶植. 1984. 朝鮮問題資料叢書補卷:解放後の在日朝鮮人運動Ⅲ.
東京: アジア問題研究所; 朴慶植. 1989. 解放後在日朝鮮人運動史, 東京: 三一書房.
9 小林知子. 1992. “GHQによる在日朝鮮人刊行雜誌の檢閱,” 在日朝鮮人史研究 22:
84-98; 金太基,. 1997.戦後日本政治と在日朝鮮人問題 : SCAPの対在日朝鮮人政策
1945~1952年. 東京: 勁草書房; 朴慶植. 2000.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戰後編>
第3卷, 東京: 不二出版.
6 재외한인연구 제36호
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소장 연구자들에 의한 다양한 연구가 나오고 있
다.10
해방직후 시기의 재일한인 단체에 관한 선행연구에서는 전반적으로 당시 조직
적 규모나 자료 생성능력이 월등하게 뛰어나 있던 「조련」에 치우쳐 있었으며, 상
대적으로 조직력이 미약했고 단체 자료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민단」이나
「건청」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의 연구자를 중심으로 하여 2000년 이후에 연구가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11 박열의 행적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도
일제강점기 투쟁과 옥중 생활에 관한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반
하여, 해방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성주현12ㆍ최영호13ㆍ김인덕14의 연구 등에
서 부분적으로 언급되는데 그쳤다. 이러한 연구 상황의 변화에 비추어 볼 때, 박
열기념사업회가 뒤늦게나마 2014년 11월에 이르러 해방직후 시기에 초점을 맞추
고 박열의 활동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검증을 시도한 것은 연구사적으로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15 다만 현 단계에서는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종합적
으로 정리한 논저가 없는 만큼, 기존의 평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편린(片
鱗)과도 같은 해방직후 시기의 기록들을 짜 맞추어 가는 형태로 그의 행적을 추
적할 수밖에 없다.
10 임영언ㆍ김인덕. 2011. “재일코리안 연구,” 윤인진 외 재외한인 연구의 동향과 과제.
서울: 북코리아. 200-274쪽.
11 김태기. 2000. “한국정부와 민단의 협력과 갈등관계,”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전남대
학교 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소,) 3(1). 60-97; 崔永鎬. 2012. “終戦直後の在日朝鮮人ㆍ
韓国人社会における‘本国’指向性と第一次日韓会談,” 李鍾元など 歴史としての日韓国交正常化Ⅱ:脱植民地化編. 東京: 法政大学出版局. 237-265쪽.
12 성주현. 2010. “해방 후 원심창의 민족운동과 통일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65:
245-272.
13 최영호. 2012. 341-377.
14 김인덕. 2013. 136-171쪽.
15 경상북도 문경시에 소재한 박열의사기념관은 2014년 11월 21일 개관 2주년을 맞아
박열의 해방 후 행적을 규명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박열의 해
방직후 행적에 대해 발표했다. 최영호. 2014. “해방직후 한일관계와 박열의 정치적 위
상,” 박열의사기념관. 광복이후 박열의 사상과 활동(박열의사기념관 개관2주년 기념
학술회의). 51-82쪽.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7
Ⅱ. 박열에 대한 기존 평가
박열은 출옥 직후에 집필한 여러 정치평론들을 모아서 한반도로 귀국하기 전에
박열문화연구소를 통하여 일본어 소책자로 여러 편 발행했다.16 그 가운데 그가
비교적 장문을 수록하고 있는 평론집 신조선혁명론은 1948년 일본에서 출간되
었고 한국에서는 1989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해방직후 한일관계
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기록한 바 있다. 패전 일본에 대한 그의 생각
은 군국주의 일본이 완전히 멸망했으며 점령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일본으로 태
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무엇보다 그는 패전 후 연합국의 점령 하에 들어간 일본
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완전히 패배했다고 보았다. 반면에 해방된 한반도는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각종 내우외환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
고 있다고 보았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국제적 갈등이 심각하며 경제적으로도 궁
핍한 상황이지만 지혜롭게 38도선 분단의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
다고 말했다.17
그런데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한일관계를 구축해 가기 위해 취해야 할
우리 민족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는 일본에 정주하고자 하는 재일한인의 입장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본인에 대해 민족적 감정을 초월한 ‘이웃 사랑’으로 대
해야 한다고 했고, 민족반역자에 대해서도 “3천만 동포 모두에게 죄가 있다”고
하며 이를 엄격하게 구분하거나 처단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 새
로운 한일관계 정립을 앞두고 결국 그는 극도로 비관적인 국가관과 함께 보수적
16 오늘날 교토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단행본 목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박열의 저서가 있
는 것이 확인된다. 朴烈. 1948. 政党人に望む. 東京: 朴烈文化硏究所. 1-20쪽; 朴
烈. 1948.神戸事件の教訓-我等は子弟を如何に教育すべきか. 東京: 朴烈文化硏究
所. 1-26쪽; 朴烈. 1948. 新しき指導者青年諸君. 東京: 朴烈文化硏究所. 1-34쪽;
朴烈. 1948. 新朝鮮革命論. 東京: 中外出版. 1-144쪽; 朴烈. 1949.世界の焦点新
朝鮮の建設. 東京: 朴烈文化硏究所. 1-42쪽; 朴烈. 1949. 政治哲学の急務. 東京:
朴烈文化硏究所. 1-36쪽.
17 박열. 1989. 신조선혁명론. 서울: 범우사. 23-26쪽; 65-67쪽.
18 박열, 1989. 96-98쪽; 115-123쪽.
8 재외한인연구 제36호
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인류애에 입각한 민족 공존의 사상을
전개함으로써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민족관을 제시하기도 했다.
해방직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박열에 관한 평가를 내린 것으로 김종범(金鍾範)
의 평가를 꼽을 수 있다. 김종범은 과거 1920년대에 박열과 함께 아나키스트 운
동에 관여한 바 있는 인물이다. 그는 박열이 출옥하기 직전에 한반도 출신의 혁
명투사들을 묘사하는 글을 쓰면서 그 가운데 박열에 관한 평론을 기록했다. 그는
박열이 출옥하자마자 곧 귀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장래 조선에 큰 파문을 일으
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그는 박열을 가리켜 “표면상으로는 매우 온순해 보
이고 말이 적은 편이지만 의지는 강직하고 극기심이 강하고 열정적이며 대담한
한편 덕성이 후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19 또한 박열이 츌옥한 아키타 형무소의
소장, 후지시타 이이치로(藤下伊一郞)가 1946년 10월에 펴낸 팸플릿 소책자 박
열선생의 편영(片影)에도 박열이 높이 평가되어 있다. 후지시타는 다소 과장되게
묘사하기는 했지만 당시 박열을 둘러싸고 변화해 가고 있던 재일한인 사회의 분
위기를 대변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지시타는 자신의 과거를 사죄하는 뜻으로 자
신의 아들(藤下昌)을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시켜 박열의 양자로 입적하게 한 것
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박열을 가리켜 “신생 조선의 지
도자로서 누가 적입자인가 하고 물으면 나는 바로 박열이라고 대답하고 싶다”고
했다. 그것은 박열이 민족의 다양한 의견을 포용할 만한 도량을 갖고 있고 불굴
의 정신력과 수양을 쌓은 인격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20
해방직후의 박열에 관한 평가가 가장 많이 담겨 있는 책은 1949년 10월에 박
열장학회가 펴낸 각계 인사가 본 박열이다. 주로 남한의 정계와 언론계에서 당
대 지도자급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총 32명이 고국에 돌아온 박열에 대해
환영사와 덕담을 이 책에 실었다. 만약 김구가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도 이
책에 이름을 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의 맨 앞부분에는 대한민국촉성국민
회장 오세창ㆍ부통령 이시영ㆍ사회당수석 조소앙이 박열의 환국을 환영하고 천황
19 김종범ㆍ김동운. 1945. 해방전후의 조선진상(제2집): 독립운동과 정당及인물 [돌베
게문고5: 현대사자료집1 (1984년복각)], 서울: 조선정경연구사. 184-185쪽.
20 藤下伊一郞. 1946. 세계적 영웅 운명의 승리자 박열선생의 편영. 東京: 신조선건설
동맹중앙본부. 7쪽.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9
제 반대 투쟁을 칭송하는 휘호를 실었으며, 전 감찰위원장 정인보가 ‘우리의 보
배’라고 하며 박열을 높이 평가하는 머리글을 실었다.21 전반적으로 박열의 과거
투쟁을 찬양하는 글과 그의 환국 후 장학회를 통한 교육 사업을 칭송하는 글이
대부분인데, 이 외에도 국회부의장 김동원,22 전 법무부장관 이인,23 조선일보사
장 방응모,24 국회의원 김상돈,25 일반인 우경,26 등이 해방직후 재일한인 사회에
남긴 박열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실었다.
1996년에 한국에서 출판된 박열 평전에서 저자 김삼웅은 박열이 해방직후
‘무정부주의자’였고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한국사회에서 일반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고 기피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박열의 신념체계를 한 마디로 정의
하여 “민족독립의 기치를 들고 아나키즘의 지팡이를 짚고 허무주의의 의상을 입
은 행동하는 민주주의였다”고 말했다. 해방 후 박열의 정치적 입장은 통일된 자
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있었고 그것은 투철한 민족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
다.27 이처럼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해방직후 박열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다지
없다고 할 수 있고, 간혹 해방직후 박열에 관한 평가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해방 이전의 천황제 반대운동과 투옥 생활의 연장선에서 해방직후 활동까지 포괄
하여 그를 찬양하는 견해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재일한인 사회에서는 해방직후 박열의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나타
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도 극명하게 나뉘고 있다. 뒤에 보다 상세히 언급하
는 바와 같이 우파적 성향의 청년 단체 「건청」은 박열을 고문으로 추대하면서 그
를 높이 추앙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건청이 점령당국의 검열을 받지
않고 등사판으로 발행한 한글판 기관지 조선신문 제2호(1946년 1월 20일자)에
21 오봉빈(편). 1949. 각계 인사가 본 박열. 서울: 보성사. 2-6쪽.
22 오봉빈(편). 1949. 15-17쪽.
23 오봉빈(편). 1949. 20-21쪽.
24 오봉빈(편). 1949. 24-25쪽.
25 오봉빈(편). 1949. 59-62쪽.
26 오봉빈(편), 1949. 69-72쪽.
27 김삼웅. 1996. 박열평전. 서울: 가람기획. 13-18쪽.
10 재외한인연구 제36호
는 “민족혼의 일대 선각자 박열 선생이 1946년 1월 1일에 정식으로 건청에 가맹
하셨다”고 대서특필되어 있다.28 또한 1946년 8월 30일에 창간된 일본어판 신문
新朝鮮新聞은 창간호 특집 기사에서 박열을 가리켜 조국의 운명을 짊어진 ‘조
국 재건의 사도(使徒)’라고 평가하고, 그에 대해 “인정이 깊고 정의(情義)에는 약
하지만 자존심이 강하여 남에게 굴하지 않으며 남을 깊이 신뢰하면서도 쉽게 신
뢰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29 또한 앞의 각계 인사가 본 박열 가운데
「민단」 의장이던 김광남(金光南)은 유일하게 재일한인으로서 가담하여 박열의 업
적을 높이 평가하는 말을 남겼다. 이때 그는 박열이 「민단」에 크게 이바지 했을
뿐 아니라 “민족 정의의 상징이며 나라의 보내, 민족의 자랑”이라고 했다.30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박열의 해방 전 천황제 반대 투쟁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찬양하면서도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를 비판하는 재
일한인 사회의 소리가 적지 않다. 「조련」을 비롯한 좌파 성향의 조직에서 활동하
던 사람들이 좌우이념 대립 과정에서 ‘친일파’ 단체에서 조종당하고 있는 박열을
비판한 것은 물론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박열의 해방 후 행
적에 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초창
기 「민단」의 임원을 역임한 정철(鄭哲)은 훗날 1970년에 펴낸 저서에서 아나키스
트들의 해방 후 행적을 비판하는 가운데 박열에 대해서도 강렬하게 비판하고 있
다. 그는 해방과 함께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운동이 사실상 끝났고 일본인 아나키
스트들과의 연대도 약해졌다고 했다. 게다가 아나키스트들이 전반적으로 해방 전
에 겨냥하고 있던 투쟁의 대상이 해방 후 이제는 사라졌다고 착각한 나머지 반탁
운동을 통하여 공산주의자에 대한 반대활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다.31 또한 민족주의적 성향의 재일한인 평론가 김일면(金一勉)도 1973년 저서에
서 박열이 해방직후 정세의 변동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며 그럴 만한 식
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오랜 투옥 생활의 결과로 박열은 독
28 조선신문(제2호). 1946-01-20.
29 新朝鮮新聞. 1946-08-30.
30 오봉빈(편). 1949. 44-50쪽.
31 鄭哲. 1970. 61-63쪽.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11
단적인 성격에다가 극단적인 애증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관계가 편협하여 지
도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건국과정에서 박열이 지도력을 발
휘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열은 일본에 남아 정치 평론을 통
해 자신의 생각을 알리는가 하면 우파적 단체를 지도하면서 재일한인 사회에 민
족주의적인 이념을 확산하는데 그쳤다. 이처럼 그를 현실적인 정치가로 볼 경우
에는 해방직후 한반도와 일본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현실을 지나치게 암울하게 평
가한 반면 현실적인 전망이나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고, 실질적으로 반공운동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연약함과 모순됨을 보이기도 한 인물로 평가하기 쉽다. 하
지만 관점을 바꾸어 박열을 하나의 지식인으로 평가한다면, 그는 현실정치에 속
박당하는 일이 없이 소신대로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려고 했으며 인간으로서 신의
와 정의를 지키려고 노력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박열은 운동가로서보
다는 문필가로서 해방직후에 재일한인 사회에 널리 영향력을 끼쳤다. 옥중 생활
에서뿐 아니라 출옥 이후에도 다양한 매체에 수필과 평론을 게재하여 그의 문장
력을 재일한인 사회에 널리 알린 결과, 해방직후 시기에 시재문재(詩才文才)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33
Ⅲ. 해방 후 정치범 출옥과 박열
해방과 패전을 통해 한국과 일본에서 정치범이 석방된 것은 식민지와 종주국의
관계, 즉 주종관계로서의 한일관계가 이제 끝났고 새로운 관계형성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8월 14일 오후 늦게 일본정부의 포츠담선언 수락에 관
한 소식이 서울(京城)의 언론사에 전달되었고 총독부와 조선군관구에도 알려졌다.
8월 15일 정오 일왕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조서(詔書)를
32 金一勉,. 1973. 朴烈. 東京: 合同出版. 237-238쪽.
33 韓國新聞社. 1975. 韓國新聞縮刷版1945~1963年度. 東京: 在日本大韓民國居留民團.
551쪽에 수록되어 있는 민족공론 1949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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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했고 그 뒤를 이어 조선총독도 유고(諭告)를 발표했다. 이어 8월 16일 오전
서울에서는 수 천 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치범들이 서대문형무소를 나와
거리 행진을 주도했다.34 이처럼 한반도에서는 일본 패전과 함께 전격적으로 정
치범 석방이 이루어진 반면, 일본에서는 점령군의 진주와 일본의 항복으로부터
한 달이 훨씬 지난 10월이 되어서야 정치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SCAP(연합국
군사령부)은 점령체제 정비와 무장해제에 역점을 두었고 정치범의 석방에 대해서
는 그다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9월 10일 「언론자유보장」, 9월 24일 「정
부의 출판통제금지」, 9월 27일 「출판언론자유의 확대」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 가
운데서 일본정부에 대해 정치범 석방을 지시했다.
10월 4일 SCAP은 「인권지령」을 내려 일본정부에게 구체적으로 10월 10일까
지 정치범을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정치적 시민적 및 종교적 자유에 대한 제한
의 철폐」35라고 되어 있는 각서를 통하여, SCAP 민간첩보국의 국장 쏘프
(Thorpe, E.R.) 준장은 10월 10일까지 정치범 전원을 석방하고 인권 유린의 상
징이 된 특별고등경찰제도를 전면적으로 폐지할 것을 명했다. 이어 10월 15일까
지는 내무대신과 경찰청장, 전국의 경찰서장을 파면할 것, 그리고 전국의 감옥의
기록을 보존해 두고 상세히 그 내용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일본 사
법성은 그 다음 날로 전국의 검사국과 형사국에 대해 「정치범을 즉시 석방할 것」
을 통보했고, 내무성은 10월 6일 경찰청의 특고부(特高部)와 검열과(檢閱課) 그리
고 각 지방의 특고과(特高課)와 외사과(外事課)를 폐지하도록 통보했다.36 SCAP
에 의한 민주화 조치 이후 비록 곧 바로 석방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정치
범 수용소에는 점차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미 10월 1일 서방 언
론사 기자들이 미군 장교복을 입고 후추(府中)의 정치범 수용소를 방문하고 나서
이를 세상에 보도했고 그 다음날에도 연합군 종군기자 3명이 이곳을 방문했다.37
34 森田芳夫. 1964. 朝鮮終戦の記録. 東京: 巌南堂書店. 67-77쪽.
35 CAPIN-93, 1945.10.4. Removal of Restrictions on Political, Civil, Religious
Liberties. 竹前栄治(編). 1993. GHQ指令総集成: SCAPIN第2巻. 東京: エムティ
出版 속에 수록되어 있다.
36 每日新聞. 1945-10-07.
37 ギラン(Gilland, Robert). 1955. “德田を釋放させたのは私だ:府中刑務所での劇的冒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13
일본 사법성은 10월 5일 조만간 정치범 약 3천 명 정도를 석방하겠다고 발표하
기에 이르렀고,38 그날부터 일부 정치범의 외출이 자유로워졌으며 점령군 가운데
서 정치범 수용소를 방문하는 자가 나왔다.39 패전 이후 일본에서 정치범이 석방
되기 시작한 것은 10월 8일부터이다. 이날 비로소 센다이(仙台) 형무소에서 정치
범 히지카타 요시(土方與志), 클라우젠(Max Clausen) 등이 석방되었기 때문이
다.40
재일한인 가운데 진보적 인사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정치범 출옥을 위한
조직적 움직임을 보였다. 도쿄에서는 일찍이 9월 24일 김두용(金斗鎔)을 중심으
로 하여 조선장학회 건물 안의 「조련」 준비위원회 사무소에서 송성철(宋性徹) ㆍ
조희준(曺喜俊)ㆍ박은철(朴恩哲)ㆍ남호영(南浩榮)ㆍ김정홍(金正洪) 등이 간담회를
열고 곧 바로 다음날 「조선인정치범석방위원회」를 결성했다. 이어 오사카에서는
10월 초에 도쿄에서 돌아온 송성철을 중심으로 하여 김민화(金民化)ㆍ송경태(宋
景台) 등이 「조선인정치범석방위원회 關西지부」를 조직했다.41 이들은 정치범 형
무소를 차례로 방문하면서 형무소 안에서 해방을 축하하고 파티를 열기까지 했
다.42 후추형무소에 감금되어 있던 공산주의 지도자 시가 요시오(志賀義雄)와 마
쓰모토 가즈미(松本一三)는 일본 패전 후 형무소에 처음 찾아온 것이 김정홍과 배
철(裵哲)이었다고 회고했다.43 이것은 10월 1일 서방 언론인의 방문 이전에 이미
「조선인정치범석방위원회」 구성원들이 후추형무소를 방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일한인 단체 「조선인정치범석방위원회」가 「조련」의 전국적 조직화 동향에 힘을
얻어 투옥 중인 정치범들과 활발한 연계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일본인 단체 「
険,” 文芸春秋. 1955年10月号: 114.
38 朝日新聞. 1945-10-06.
39 竹前栄治. 1988. 日本占領:GHQ高官の証言. 東京: 中央公論社. 124-125쪽.
40 朝日新聞. 1945-10-10.
41 坪井豊吉. 1975. 81-82쪽.
42 樋口雄一. 2014. 金天海ㆍ在日朝鮮人社会運動家の生涯. 東京: 社会評論社. 91-95
쪽.
43 志賀義雄. 1980. “苦難の獄中から解放へ,” アカハタ. 1980-10-01; 井上学.
2013. “1945年10月10日‘政治犯釈放’,” 三田学会雑誌 105(4): 249-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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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석방위원회」도 정치범 석방과 후속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
라 10월 6일 「해방운동희생자구원회」가 재건되었고 10월 8일에는 「자유법조단」
이 재건되었다.44 10월 10일 오전 후추형무소에서 김천해(金天海)ㆍ이강훈(李康
勳) 등 한인 정치범을 포함하여 16명이 석방되었다. 이때 정치범 출옥을 환영하
기 위해 마중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한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조련」준비위원회가
조달한 트럭을 타고 이곳에 나타났다.45
다음은 박열의 출옥과정을 살펴보자. 「인권지령」이 발표된 직후, 한현상(韓晛
相)은 박열의 석방을 예견하고 서둘러 도쿄에서 아키타(秋田)를 찾아갔다. 한현상
은 1900년에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자로 1920년대 아나키즘 운동을 통해 박열의
동지가 된 사람이다. 그는 이때 또 다른 동지 장상중(張詳重)과 함께 아키타시 가
와시리(川尻)에 소재한 형무소를 방문하여 수감 중인 박열과 20년 만에 해후했다.
한현상은 면회 후 도쿄로 돌아오자마자 10월 15일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열
리는 「조련」전국대회 첫날 집회에 참석하여 박열의 근황을 전했다.46 이날 회의
가 끝나고 수많은 재일한인 참가자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가운데 당시 「조련」
준비위원장 조득성(趙得聖)은 김천해와 이강훈을 데리고 사법성 건물을 방문하여
박열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때 조득성은 위원장 직책을 사용했으며 김천해와 이
강훈은 부위원장 직책을 각각 사용했다. 「조련」위원장이 정식으로 선출되지 않은
시점에서 「조련」 준비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10월 10일에 출옥해 나온 두 사
람을 부위원장으로 한 것이다.47 한현상과 장상중은 10월 하순 또 다시 아키타를
찾아가 박열의 출옥 광경을 지켜보았다.48
일본정부는 박열을 정치범이나 사상범으로 간주하지 않고 대역죄(大逆罪) 범죄
자로 간주하여 정치범과는 다른 별도의 형무소에 감금했을 뿐 아니라 패전 후에
44 井上学. 2013. 245-247.
45 李康勳. 1987. わが抗日独立運動史(倉橋葉子訳). 東京: 三一書房. 244쪽.
46 小松隆二. 1986. “在日朝鮮人の軌跡:65年の在日生活の聞き書き,” 三田学会雑誌
78(6): 84-85.
47 吳圭祥. 2009. ドキュメント在日本朝鮮人連盟1945-1949. 東京: 岩波書店. 12-13
쪽.
48 小松隆二. 1986. 85.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15
서도 정치범보다 뒤늦게 석방시켰다. 박열의 출옥 과정에 대해서는 아키타 사키
가케신보(秋田魁新報) 1945년 10월 28일자 기사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되었
다. 10월 27일 오전 일찍부터 「조련」 아키타현 지방본부장 정원진(丁遠鎭) 등 4
명이 형무소 밖에서 박열의 출옥을 기다렸다. 그들은 팔에 「在日本朝鮮人聯盟秋
田縣본부」라고 적힌 완장을 차고 있었다. 이윽고 아침 8시 반 경 옥문이 열리고
박열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깥에 나왔다. 그는 형무소 근처의 미군 점령군 숙소
를 찾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다음 아키타시 오마치(大町)에 소재한 사키가케신
보 회사에 들러 간단한 인터뷰를 가졌다. 이윽고 박열 일행은 아키타역에서 12시
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오다테(大館)역으로 이동하여, 오후 2시 반 경 오다테
역전 광장에서 거행되는 「박열 출옥 환영대회」에 참여했다. 이 모임에는 수많은
재일한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참여하여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49 박열은
오다테에 소재한 정원진의 집과 사찰 경내에 머물면서 얼마동안 요양생활에 들어
갔다.50 박열이 출옥 직후 사키가케신보를 방문했을 때 이 신문사의 기자와 나눈
대담에서 그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출옥에 따른 소감과 장래의 포부를 밝힌 것으
로 되어 있다.
“嚴冬 후의 陽春이니 이 날을 맞이하여 바람조차 부드럽게 부는 바로 그
날이외다. 옥중 생활 22년간 가운데 사흘 동안 병상에 누웠던 것을 제외하면
이상하다고 할 만큼 건강은 양호한 편이다. 출옥 후 어떻게 지낼 것인가에 관
하여 특별히 생각한 바는 없다. 다만 새로운 시대를 맞아 이제까지의 체험을
살려서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을 위하여 일하고 싶다. 모든 조선 사람들이 바
라는 일에 헌신하여 소가 되어달라고 하면 소라도 사양하지 않고 소가 되겠
다. 말이 되어달라고 하면 말이라도 되고 싶다. 그러나 일본에 대하여 특히
적대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51
49 김인덕. 2013. 139쪽.
50 秋田魁新報. 1945-10-28. 당시 기사에 따르면 박열이 출옥한 후 거처한 정원진의
주소는 大館町 一心院 南17번지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11월 중순 「건청」 결성대
회에 보낸 자신의 주소는 大館町 玉林寺後 61번지로 되어 있었다. 청년 1호(1945년
12월). 8쪽. 이를 통해 박열이 출옥 후 일시 아키타에 머물 때 정원진의 집에서 사찰
경내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51 秋田魁新報. 1945-10-28.
16 재외한인연구 제36호
그리 길지 않은 인터뷰 내용에서 출옥 당시 박열이 품고 있던 생각 가운데 재
일한인 사회의 로컬리티를 설명할 수 있는 3가지 중요한 특징을 뽑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출옥 즉 해방에 따른 벅찬 감격, 둘째는 앞으로 조국 건설
에 헌신하겠다는 다짐, 셋째는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유지 희망이 그것이다. 첫째
와 둘째는 해방직후 재일한인 사회는 물론 한반도에서 박열의 이름을 높이고 민
족적 지도자가 되어 가면서 더욱 빈번하게 사용되는 대사가 되었다. 날짜는 분명
하지 않으나 박열이 아키타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일본의 신문사에 대해 보도문을
내보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첫째와 둘째의 언설이 주종을 이루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박열 자신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여러 동포들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의 일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52 그런데 세 번째로 그가 강조한 것은 한반도와는 정서상 다른 것으로
해방직후 한일관계에 관한 인식과 관련이 깊다. 장기간에 걸친 옥중 생활이나 도
회지에서 벗어난 한적한 지방에서 패전을 맞은 일 등으로 해방직후 한일관계의
변동에 관한 그의 현실 인식이 정확하지 않았고 아직은 자신에 대한 대중적 기대
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인터뷰 내용을 통해 당시의 그를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이 기사 속에 나타난 박열의 생각에서는 해방직후 재
일한인 지도자급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이른바 한반도 해방민과는 약간
견해를 달리하는 한일관계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조련」 준비위원
회가 초기 강령에서 “일본국민과의 호양우의(互讓友誼)를 기함”을 채택했던 것53
과 같이 조국해방이라는 현실 앞에서도 일본인과의 민족적 공생관계를 전면에 내
세운 것이다. 결국 출옥 직후 박열의 생각에서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자유를 억
압당하고 노동력 착취를 당한 피징용 한인의 입장보다는 일본사회에 오랫동안 거
주해 온 일반 재일한인의 입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전반적으로 한반도 국가체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재일한인 사회
나름대로의 특수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로컬리티라고 표현하고
싶다.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해방직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재일
52 “박열씨 일본신문에 대한 성명,” 신조선 창간호(1946년 7월). 1-3.
53 朴慶植. 1989. 55쪽.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17
한인 사회에서는 일본인 사회와 공존해야 하는 입장에서 일본인과의 우의를 중시
하는 견해를 내보이는 경향이 대체로 강하다. 이에 반하여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
인이나 일본에 강제 연행된 한인의 경우에는 단호한 역사인식에 기초한 한일관계
를 우선시하는 만큼 일본인과의 우의를 강조하는 견해는 대체로 재일한인의 정서
만큼 강하지 않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일본 거주 한인과 한반도 거주
한인 사이에 간혹 불협화음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해방직후에 일어난 대표적인
불협화음 사례로 1945년 11월 8일에 부산항에 입항한 「조련」 특파원들이 한국사
회가 일본인에 대해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 일본에서 가지고
온 「보고서」 중에서 “일본국민과의 호양우의를 기함”이라는 문구를 삭제한 일을
꼽을 수 있다.54 아무튼 박열의 출옥 직후 한일관계에 관한 인식에서는 한반도
거주 일본인의 추방과 같은 엄연한 정세변화에 관한 현실인식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와 함께 일본에서 쌓아 온 일본인 동지와의 끈끈한 우정이라는 울타
리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현실인식의 한계와 조건이 그
로 하여금 해방직후 한일관계에서의 정치적 위상을 약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작
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한일 양 민족의 호양우의에 관한 박열의 주장은 그의 출
옥 후 각지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도 군중들 앞에 그대로 표출되었다.
박열은 출옥 후 3주가 지난 시점에 야마가타(山形)의 환영대회에 초대되었다.
박열에게 환영대회를 제의한 「조련」 야마가타현 지방본부 위원장은 제희성(諸禧
成)이었고 그도 천황에 대해 대역(大逆)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제2의 박열사건」에
연루되어 단기간 옥고를 치른 바 있다.55 그는 박열을 초대하여 11월 20일 야마
가타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가조칸(霞城館) 건물에서 환영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박열은 자신의 장기간에 걸친 과거 옥고는 세계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활동이었다고 말하고, 이제까지 쓸쓸하게 감옥에서 벽과 간수만을 상대로 하여
지내 온 자신이 장래에 무엇을 할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며 말문을 열었
다. 일본 지도자 가운데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고 있는 움직임에 대해서 이
것은 비겁한 행위라고 비판하고, “죽을 용기가 있다면 새로운 일본을 재건하기
54 최영호. 1995. 재일한국인과 조국광복 : 해방직후의 본국귀환과 민족단체활동. 서
울: 글모인, 184쪽.
55 재일본조선인연맹. 1945. 보고서, 東京: 재일본조선인연맹총본부.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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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분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과 조선은 문화
적으로 같은 선조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동지 가운데 3분의 1이 일본인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양 민족이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한일 양 민족 뿐 아
니라 전 인류가 공존공영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서는 “외
국인인 내가 말하기는 적절하지 않겠지만” 이라는 전제를 깔고 일본국민들이 지
나치게 천황을 존경할수록 위험성이 커진다고 말하고, 일본의 전체주의나 제국주
의를 다른 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하며, 자신은 천황제 자체를 절대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또한 패전 후 일본이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가
운데 고급 관료들이 비리를 일삼는 것을 비판하고, 이에 반하여 민중들이 살기
위해 암거래하는 것을 침소봉대 하여 질서문란으로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대응이
라고 비판했다.56
이어 1945년 12월 7일 오전에 도쿄 중앙의 히비야 공원 음악당에서 「박열 환
영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조련」임원들이 중심이 되어 개최한 것이며 박열은
이 행사를 계기로 하여 아키타를 떠나 도쿄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도
과거의 옥중생활을 회고하고 이제는 자신이 ‘자유민’이며 ‘세계시민’으로 일본제국
주의 ‘악마’가 타도된 것을 일본 민중들과 함께 기뻐한다고 했다. 다만 장래의 정
치적 전망에 대해서는 분명한 의사를 밝힐 만한 입장이 되지 못한다고 했고 앞으
로 건국 운동에 심부름꾼이나 병졸(兵卒)로서 일하겠다는 겸허한 뜻을 밝혔다.57
야마가타에서 행한 연설에 비하며 도쿄의 환영대회에서는 일본 민족과의 호양우의
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지만, 여전이 그는 ‘일본 민중’이라는 표현을 통
해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동지로서 민족적 우의를 주장했던 것이다.
1946년 2월 26일 박열은 도쿄 수이도바시(水道橋)의 한 식당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일본 민족과의 호양우의를 강조하고 나아가서 일본 국
가에 대해서도 관대한 자세를 보였다. 자신을 학대한 과거 일본 군국주의에 대해
서 혐오하고 있지만 이제는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대하고자 한다고 말
했다. 그는 “과거 압제가 있었음으로 이것을 흥분제로 삼아 굳은 단결을 할 수
56 山形新聞. 1945-11-21.
57 每日新聞. 1945-12-08.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19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고맙게 여긴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은 옥중에서 천황제와
씨름하여 결국 승리했다고 하고, 이제는 천황제가 조선에 미치지 않는 만큼 ‘천황
말살’을 주장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또한 이제 조선인은 해방되었기 때문에 일본
인과 외국인 관계가 되었고 따라서 일본 내정에 간섭할 필요도 없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신생 일본을 위해서 힘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또한
박열은 이은(李垠) 왕에 대한 생각도 피력했는데 그를 전쟁범죄자로 보지는 않지
만 일본 황족과 함께 멸망하든지 하나의 개인으로 귀국하든지 그의 의사에 달렸
다고 말했다.58
한편 오사카의 「박열 환영대회」는 1946년 6월 26일에 나카노시마(中之島) 공
회당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때는 박열이 이미 우파진영에 몸을 깊숙이 담고 있었
던 시기였고 반탁운동과 함께 반「조련」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이 행사는 마침
「건동」서일본총본부 (본부장 金烈)가 주최했으며 따라서 「조련」의 반대공작이 심
한 가운데서 열리게 되었다. 이 시기의 박열은 출옥 직후에 보였던 민족 투사로
서의 강렬한 이미지가 퇴색되고 반면에 재일한인 우파단체의 거두로서의 거친 이
미지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59
Ⅳ. 재일한인 민족단체와 박열
해방직후 한반도에서 각종 정치 집단이 결성된 것과 같이 재일한인 사회에서도
「조련」과 「건청」을 비롯한 각종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각종 단체는
궁극적으로 해방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내보이고 있었지만 단체원의 구성이나
성향에 따라 행동 방향을 달리 하게 되었고 점차 전국적으로 규합하는 과정에서
이념적인 성향을 분명히 해 갔다. 따라서 각종 민족단체의 설립은 한반도 국가체
형성의 기초가 된 일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반도의 좌우 이념 대립을 떠받
치는 그릇이 되기도 했다. 해방직후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민족단체 결성 움직임
58 時事新報. 1946-02-28.
59 “박열선생 민중대회,” 신조선 2호(1946년 8월). 32-35.
20 재외한인연구 제36호
은 점령체제와 일본정부에 대해 해방된 한인들이 공식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
한 것을 의미한다. 박열에게 있어서 해방직후 민족단체와의 관계는 그의 정치적
태도와 성향을 일반에게 알리는 통로가 되었고 그의 이념과 생각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매체가 되었다. 출옥 후 날이 갈수록 민족단체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
는 자신이 ‘민족적인 영웅’이 되어 있음을 점차 자각하게 된다. 여기서는 박열이
출옥 직후 어떻게 재일한인 사회에 등장하고 재일한인 단체와 어떠한 관계를 형
성해 갔는지 「조련」ㆍ「건청」ㆍ「건동」 순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해방직후 재
일한인 사회에서 가장 먼저 결성되고 1949년까지 가장 활발하게 조직 활동을 전
개한 「조련」을 거론하고 이 단체와 박열이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왔는지 살펴보
자.
현 시점에서 해방 이후 재일한인 단체의 일차적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은 「조련」 준비위원회가 1945년 9월 25일에 발행한 한글판 회보 창간호이다.
이 자료는 해방 후 재일한인 단체의 생성과정을 기록하고 있고 질서 있는 귀환과
잔류를 호소하면서도 정치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60 이
어 10월 15일 「조련」 전국대회 첫날 모임에 맞추어 발행된 민중신문 특집호는
김천해와 이강훈의 출옥 소식을 전하면서도 박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
다. 이 신문은 「일본 각 형무소에서 출옥한 조선정치범 제씨」 명단에 약 140명
정도의 이름을 게재했는데 그 가운데는 아직도 수감 중인 박열의 본명 박준식(朴
準植)도 포함되어 있었다.61 이것은 당시 재일한인 진보적 인사들에게 있어서 박
열은 여전히 망각된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아키타를
다녀온 한현상이 이날 「조련」 전국대회 모임에서 비분강개한 모습으로 박열의 존
재를 알렸고 이에 따라 「조련」 준비위원회가 집회 후 바로 졸속적으로 박열 석방
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게 된 것이다.
박열이 아키타에서 도쿄로 거소를 옮긴 12월 초 시점에 이미 「조련」은 재일한
인 사회를 대표하는 단체가 되어 있었다. 다만 이 시기에 여전히 「조련」 내부에
는 다양한 이념을 가진 조직원들이 혼재해 있었고 조직의 전개방향을 두고 암중
60 최영호. 2008. 한일관계의 흐름 2006-2007. 서울: 논형. 158-159쪽.
61 민중신문(특집호). 1945-10-15.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21
모색하는 단계에 있었다. 따라서 중앙조직의 임원들은 대거 남한 사회에 파견되
어 자생단체인 「인민공화국」을 포함하여 한반도 정세변화 현황을 파악하고 있었
다. 「조련」은 1945년 12월 7일 「박열 환영대회」를 주관하면서 박열을 조직 안에
끌어들이려는 모습을 보였고, 1945년 말 시점까지는 박열과의 사이에서 반목(反
目)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46년에 들어서자 한편으로 박열은 전면에 나서
우파단체인 「건청」과 「건동」을 지도하고 반탁운동을 주도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
으로 「조련」은 내부 규합을 거치면서 찬탁 방향으로 조직의 방침을 굳히게 된다.
그 이후 「조련」과 박열 사이에는 반목이 계속 깊어져 갔다. 1946년 10월의 제
8회 「조련」 중앙위원회 회의에 제출된 「총무부경과보고」는 이처럼 「조련」과 박
열 사이에 반목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62
한편 본래 박열의 민족주의적이고 교육적인 성향은 우파적 청년단체 「건청」에
어울리는 것이었고 이러한 관계는 일찍이 박열이 출옥한 후 20일도 채 안 되는
시점에 현실로 드러났다. 도쿄 주변에 거주하는 우파적 성향의 재일한인 청년들
은 11월 16일 도쿄 다무라쵸(田村町)에 위치한 비행회관(飛行会館)에서 「애국투
사 출옥환영 연설회」를 겸하여 「건청」의 결성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에 박열이 이
를 축하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청년 1호에 게재된 축사에 따르면 박열은 이
때 이미 “제군과 함께 일심동체가 되어 조국과 민족이 당면한 문제 해결에 매진
하겠다”고 결의를 밝힌 것으로 되어 있다.63 이어 1946년 1월 1일에는 박열이
정식으로 「건청」에 가입하여 이후 반탁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갔다.64 이외에
도 그는 도쿄 아오야마(靑山)에 소재한 옛 육군대학 건물 2층에서 「건국대학강좌
」를 개설하고 학장이 되어 정치, 경제, 문학, 사회에 관한 강의를 주도했다. 이
강좌는 「건청」이 조직원 훈련을 목적으로 재일한인 청년을 대상으로 하여 1946
년 2월 25일부터 개설한 것이다.65 이 강좌에는 박열과 이강훈 이외에도 후세 다
62 박열은 조련의 정치범 석방운동으로 출옥한 사람이다. 천황만 죽이면 조선인 해방되겠
지 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애인 金子文子와 폭탄을 던지려고 애쓴 사람으로, 인
물이 어떠한 지는 차치하고 해방 선각자라고 해서 12월 7일 도쿄에서 환영 인민대회
까지 열어 주었더니 어느덧 반동단체의 거두가 되어 이승만 ㆍ김구에도 뒤지지 않을
반역자이다. 朴慶植(編). 1983. 86쪽.
63 청년 1호(1945년 12월). 1-2.
64 조선신문. 1946-01-20.
22 재외한인연구 제36호
쓰지(布施辰治)ㆍ구로다 히사오(黒田寿男)ㆍ가타야마 데쓰(片山哲)ㆍ가와카미 간
이치(川上貫一)ㆍ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郎) 등 당대 유명한 일본 정치 사상가
들이 강사로 초청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매일 오전에는 조선어 강좌가 운영되기
도 했다. 그리고 일본방송협회(NHK)의 요청으로 「건청」 사무실 안에 방송실을
두고 매주 월요일 밤 8시부터 1시간 동안 조선의 역사ㆍ고사(故事)ㆍ민속 등에
관한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66
박열의 반탁 운동이 활발해지고 반「조련」활동이 분명해지자 우파성향을 가진
연장자들이 그를 옹립하여 반공 성향의 단체를 조직해 갔다. 이 조직화 과정에
아나키스트, 중립적인 민족주의자, 「친일파」라는 죄명으로 「조련」에서 내쫓긴 사
람들이 「조련」에 반대하는 것을 공동 목표로 하여 모여들었다.67 이들은 「건청」
본부건물 안에 따로 사무실을 두고 「건동」의 결성을 준비했다. 마침 남한에 다녀
온 이강훈과 원심창이 김구와 이승만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반탁 움직임
을 전하면서 재일한인 사회에서 우파 단체 결성의 움직임은 한층 고무되었다.68
이어 2월 8일 도쿄 나카노(中野) 공회당에서 「건동」 결성대회가 열렸고, 박열을
위원장으로 하고 이강훈과 원심창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결
성대회에서 「건동」이 내건 7가지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건국 의식을 함양한다. ② 우리는 세계의 대세에 호응하며 사해동포,
세계협동을 규약한다. ③ 우리는 민족의 자주성을 무시하는 신탁통치에 반대한다.
④ 우리는 근로 대중의 진정한 동지가 된다. ⑤ 우리는 재일동포의 현실적 여러
문제를 민첩하게 해결한다. ⑥ 우리는 성실한 각 분야의 운동을 지원한다. ⑦ 우
리는 조국건설의 대강(大綱)과 그 구체안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한다.69 전반적으
로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의 행동강령이지만, 이 가운데 세 번째 신탁통치에
65 청년 2호(1946년 1월). 12쪽의 광고.
66 朴慶植. 1989. 73-74쪽; 洪萬基. 1975. “解放後の混乱期を戦った建青創設回想録
(15),” 韓国新聞. 1975-03-29.
67 權逸. 1987. 權逸回顧錄. 東京: 權逸回顧錄刊行委員會. 108-112쪽.
68 이강훈은 건청이 주관하는 ‘건국대학강좌’에서 고국의 정치적 움직임에 관한 강연을 실
시했다. 이강훈. 1946. “故國消息 多難한 政界,” 청년 2호. 5-6.
69 坪井豊吉. 1975. 246-247쪽.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23
반대하는 내용만은 이 단체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건동」의 조직원들은 「건청」과 함께 격한 논조로 반탁을 주장하는 정보를 지
속적으로 재일한인 사회에 발신했다.70 「조련」이 2월 하순에 들어 임시전체대회
를 열어 정치적 방향을 결정하자 우파 단체는 「조련」에 대한 폭력 행사를 증폭시
켰다. 점령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 뒤늦게 1946년 7월 「건동」이 발행한 기관
지 신조선 제1호와 제2호, 그리고 검열은 거쳤지만 발행되지 않은 제3호를 통
해서도 계속하여 반탁을 주장하면서 「조련」과 선을 그었다. 제3호에는 발간에 앞
서 검열을 받는 과정에서 이강훈과 김정주(金正柱) 등이 수필 원고를 통해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연합국에 의한 식민지 재분할의 의도’라고 격렬하게 비판한 까닭에
검열당국에 의해 송두리째 삭제명령을 받기도 했다.71 박열은 「건동」의 위원장
직책을 맡으면서 지방조직을 확대해 가는 한편,72 기관지 신조선과 각종 전단
지ㆍ성명서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공과 반탁을 주장해 갔다. 신조선 제1호에
는 박열이 재일한인 학생들에게 조국에 헌신하는 마음을 강조하는 글,73 박열 자
신의 옥중에서 쓴 시,74 서울의 대동신문사에 보내는 인사 편지,75 미소공동위원
회 결렬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성명문,76 「건동」지방조직의 결성을 축하하는
글,77 등이 실려 있어 마치 박열의 개인 평론집과 같은 구성이다. 그런데 신조
70 鄭栄桓. 2013. 朝鮮独立への隘路:在日朝鮮人の解放五年史. 東京: 法政大学出版局.
161-163쪽.
71 小林知子. 1992. 87.
72 「건동」의 지방세력은 시종 「조련」이나 「건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미약했다.
다만 1946년 4월에 결성된 도쿄 서북부의 三多摩지방본부(浅川지방본부)는 「조련」에
서 탈퇴한 사람들이나 박열에게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어 「건
동」 중앙세력의 강력한 버팀목이 되었다. “新朝鮮建設同盟三多摩本部結成式狀況,” 朝鮮
新聞. 1946-04-18; 金鍾在ㆍ玉城素. 1978. 渡日韓国人一代. 東京: 図書出版社.
127-128; 오기문. 1982. 오기문회고록. 한민족. 81-82쪽.
73 박열. 1946. “재일동포 학도들에게,” 신조선 1호(1946년 7월). 13-15.
74 박열. 1946. “박열씨 옥중시가,” 신조선 1호. 21-22.
75 박열. 1946. “대동신문사 사장에게 멧세-지,” 신조선 1호. 22.
76 박열. 1946.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에 관한 성명,” 신조선 1호. 24.
77 박열. 1946. “건동淺川지부 결성식의 동지 제현에게 드림 멧세-지,” 신조선 1호.
24-26.
24 재외한인연구 제36호
선 제2호에는 박열의 글로서는 단 하나의 정치 평론만이 게재되었다. 비교적 긴
문장으로 구성된 정치 평론에서 그는 점령군의 시책과 사회주의적 사고를 포용하
자고 하고 일반 노동자의 생활 향상을 위한 국가건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78
이외에도 박열은 「건동」 위원장으로서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삼의사 유골봉환을
거행했다. 「건청」이 폭 넓은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고 각 지역에서 민족교육에 나
선 것과는 달리 「건동」은 하부조직이 미약한 가운데 중앙조직 주도에 의해 강렬
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행사에 집중했다.79 여기서는 박열의 활동 가운데 유골
봉환 활동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반탁운동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따로 다루고자
한다. 한국의 연구계에는 김구의 활동과 관련하여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삼의
사 유골봉환 과정이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2013년 2월에 백범학술원이 이 행
사와 관련한 사진들을 대거 공개하면서 1946년 6월 15일 부산 도착과 부산 추도
식에서부터 7월 6일 서울 국민장에 이르기까지의 이미지가 잘 전달되고 있다.80
이에 반하여 일본에서 삼의사 유골 봉환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1945년 12월부터 두 달 남짓 남한에 다녀온 이강훈과 원심창은 김구로부터
신임장을 받고 재일한인 유지들을 모아 별도의 조직을 만들고 이봉창ㆍ윤봉길ㆍ
백기정의 유골을 찾아냈으며 이를 남한에 봉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유골을 찾아내는 데에는 「조련」 지방조직 구성원의 역할이 컸고 봉환 의
식을 거행하는 데에는 「건청」 중앙조직의 역할이 컸다.81 일본과 한국에서 유골
봉환의 전 과정에 관여한 이강훈은 이 활동을 통해 한반도와 재일한인 사회에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박열은 「건동」의 위원장 또는 「건청」의 고문으로서 비록 도
쿄 행사에만 관여하게 되지만, 후술하는 반탁운동과 함께 삼의사 유골봉환 사업
을 통하여 서울의 임시정부 세력으로부터 신임을 얻게 되었다. 서울의 국민장이
끝난 직후에 김구가 「건동」에 보낸 것으로 보이는 서신에 따르면, 김구는 박열을
78 박열. 1946. “민주주의의 前途,” 신조선 2호(1946년 8월). 4-8.
79 朴慶植. 1989. 75-79쪽.
80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2012. 백범김구기념관 개관 10주년 기념 백범김구사진자
료집. 서울: 백범김구선생기념시업협회. 15-16쪽; 218-233쪽.
81 “三烈士追悼會開催,” 朝鮮新聞. 1946-03-10.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25
‘자유사회주의자’라고 높이 평가하고 “조국과 동포를 위해 각자의 주의를 버리고
오직 독립 일로로 매진하겠다”고 하는 그의 애국심을 칭송했다.82
「건청」의 기관지 청년제3호는 순국열사추도를 특집으로 하여 발행되었다.
이 잡지에는 1946년 2월 19일 오전 도쿄 간다(神田)에 소재한 교리쓰(共立)강당
에서 열린 추도식 풍경이 잘 나타나 있다. 「건동」은 「순국열사유골봉안회」라고
하는 조직을 임시로 구성하여 이 행사를 주관하게 했고, 「건청」, 「국제신문사」,
「고려문예사」, 「재일본학생동맹」, 「재일조선상공회」 등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건청」위원장 홍현기의 동생인 홍만기는 이 잡지에 추도식 참관기를 기록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홍현기 위원장의 개회사, 애국가 제창, 제주(祭主) 이강훈 등
의 분향, 건청 합창단의 ‘순국열사 추모가’ 헌창, 홍현기 위원장의 삼의사 약력
낭독, 이강훈의 추도사, 박열의 추도사 등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83 이 때
박열은 추도사를 통하여 자신이 조국의 건설에 노력하겠다는 것과 오늘날 한반도
분열을 획책하는 무리와 싸워나가겠다는 것을 강조했다.84
Ⅴ. 한반도 신탁통치문제와 박열
해방직후 한일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는 일본과 조선이
점령체제 하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나서지 못하는 가운데 발생한 사건으로 전후
한일관계를 국제적으로 규정짓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와 함께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는 한편으로 일본열도와 한반도에 걸쳐 좌파적 이념 집단이 국제공산주의 지
도 아래 뭉치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파적 이념 집단이 반공(反共)
을 목적으로 하여 공식적으로 제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과 남한의 대중
단체들이 반탁운동을 계기로 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추종하면서 반공
82 김구. 1946. “삼열사를 返藏하고: 재일동포에게 보냄,” 신조선 1호. 28-29; 김인
덕. 2013. 149쪽.
83 홍만기. 1946. “조선순국열사추도회근기,” 청년 3호(1946년 3월). 20-22.
84 박열. 1946. “추도사,” 청년 3호. 16-18.
26 재외한인연구 제36호
이데올로기에 기울어 갔고 양 지역의 점령 체제도 이러한 움직임을 조장해 갔다.
이에 반하여 해방과 함께 한인 사회에 강렬하게 찾아들어 온 좌파적 이념은 반체
제 이념으로 전락해 갔다. 남한과 더불어 재일한인 사회에서도 좌우 이념을 대표
하는 조직 사이에서 대립과 충돌이 격화되었으며 조직 내부에 있어서도 이념을
달리하는 조직원들 사이에 분규가 발생했다. 특히 반탁운동에 가담한 일제강점기
의 잔존세력과 구 지배계급의 정치적 목적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친위대 기능을
했으며 테러리즘을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장했다.85
출옥 후 아직 한반도에 귀환하지 않은 박열은 반탁운동을 계기로 하여 재일한
인 사회에서 우파적 성향의 민족단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문
제를 통하여 재일한인 사회에서 우파세력들이 부상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이들
이 「민단」으로 결집되어 갔다. 박열이 박탁운동 속에서 우파 성향의 청년단체에
게 폭력을 휘두르도록 직접 지휘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는 이들 청년단체들
을 비호하고 나섬으로써 결과적으로 폭력 사태를 간접적으로 조장하는 존재가 되
었고 이에 따라 그의 ‘평화주의자’로서의 순수한 이미지는 점점 퇴색되어 갔
다. 해방직후 재일한인 사회에서 좌파 「조련」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우파 단체에
속한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많았던 상황에서 볼 때, 그는 반탁운동을 계기로 하여
재일한인 대중들에게 ‘존경스러운’ 지위를 잃어갔다.
여기서는 재일한인 사회에 반탁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을 간단히 언급하고 이
운동에 박열이 어떻게 관여했는지 관련 자료를 살펴보자. 재일한인 사회에서 신
탁통치 문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2012년 논문에서
검증한 바 있기 때문에.86 여기서는 박열의 행적과 관련되는 사항만을 정리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945년 12월 말에 보도된 모스크바 외상회의의 한반도 신탁통
치 결정 소식은 재일동포 사회에도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건청」의 조직
원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공산당의 방침이 결정되기 전에는 「조련」 조직원들까지
도 연합국에 의해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87
85 김행선. 2004.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서울: 선인. 212-217쪽.
86 최영호. 2012. 341-377.
87 「조련」 중앙본부의 정보부장 남호영은 훗날 자신이 임원이면서도 「조련」이 신탁통치안
을 지지해 가는 움직임에 대해 양심을 가책을 느끼게 되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權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27
조선공산당이 태도를 바꾸어 찬탁으로 방침을 변경하고 이러한 방침을 「조련」 중
앙본부에 전달한 것이 1946년 1월 4일의 일이다.
한편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고 조직력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던 「건청」은 반
탁운동을 적극 전개하면서 이를 조직 활성화의 기폭제로 활용했다. 「건청」은 1월
1일 박열을 지도자로 영입하고 중앙본부 강당에서 신년축하회를 개최하면서 반탁
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날짜는 명확하지 않으나 ‘단기 4279년 1월’을 발송
시기로 하고, 위원장 명의로 각 지부장에게 발송한 「근하신년」이라고 하는 한글
등사판 문서는 아마도 재일한인 사회의 반탁운동을 알리는 최초의 자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설날 본부 축하회에 있어서 우리는 신탁통치안을
절대로 반대하고 완전한 자주독립까지 전심전력 힘쓰고 싸우기를 맹서했다”라고
되어 있다.88 조선신문 창간호는 태극기가 게양된 가운데 열린 신년축하회에서
식순에 따라 애국가 제창, 고국요배(故國遙拜), 순국의사에 대한 묵도, 박열의 축
사, 위원장 등의 인사말, 일반 내빈의 축사, 박열 주창에 의한 ‘독립만세’ 삼창,
위원장 주창에 의한 ‘청동(靑同)만세’ 삼창 등이 진행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89
1월 21일에는 도쿄의 교리쓰(共立)강당에서 「건청」이 주최하는 민중대회가 열
렸다. 이 민중대회 회장에는 B4 크기 용지 3장의 「결의문」이 등사판으로 인쇄되
어 참가자들에게 배포되었다.90 등사판으로 제작된 「건청」 기관지 청년 제2호
는 조선신탁통치반대 특집호라는 부제를 달고 이 민중대회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
했다. 이부윤(李富潤)의 참관기에 따르면 서종실 부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대회
는 감사의 묵도, 애국가 제창, 홍현기 위원장, 박열, 이해룡 문화부장ㆍ김용태 선
전부장 의 연설, 박근세 선전차장의 결의문 낭독, 조선독립만세 삼창으로 이어졌
다. 대회가 마친 후 곧 이어 SCAP 사령부 건물에까지 시위행진이 전개되었다.
逸. 1987. 114쪽.
88 朝鮮建國促進靑年同盟本部委員長. 1946. “근하신년” (1946년 1월). 이 문서에는 「건청 」이 서울의 김구를 비롯한 각 정당에 의한 반탁운동 소식을 접하고 일본에서도 반탁운
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도쿄의 반탁운동이 서울의 운동에 의
해 촉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89 조선신문. 1946-01-10. 靑同은 건청의 또 다른 호칭이다.
90 「건청」은 이 결의문을 일부 수정하여 동일한 내용으로 청년 2호의 표지 뒤에 2면에
걸쳐 게재했다.
28 재외한인연구 제36호
박열 등이 택시를 타고 대열을 선도하는 가운데 한인 대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면
서 애국가를 부르고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SCAP 사령부 건물에서 박열과
「건청」 위원장은 결의문을 전달했다. 이어 시위대는 「건청」 본부 사무실이 있는
구 육군대학 건물까지 이동했으며 박열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
고 해산했다.91
박열은 반탁운동을 계기로 하여 우파 단체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남한
에서는 일찍이 12월 28일에 임시정부세력이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반탁결
의문을 채택했으며 같은 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다.92 박열
은 재일한인 사회에서 반탁 운동에 적극 나선 것을 인정받아 나중에 이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박열이 서울의 임시
정부 세력과 긴밀하게 연계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
며 일본 공안당국의 자료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탁통치 문제가 대
두되기 직전인 1945년 12월 김구에 의해 재일한인 사회의 선무사(宣撫使)로서
서울에서 도쿄로 파견된 한도봉(韓道峰)이 박열의 참모 내지 비서가 되어, 암약을
통해 재일한인 사회에서 반탁운동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서울의 임시정부 세력
과 박열을 연결시켰다고 한다. 그 결과 1946년 10월에 도쿄 고엔지(高円寺)에 「
대한국민의회 주일변사공처」를 설치했고, 1947년 4월에는 서울의 임시정부 국무
회의에서 박열이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두 차례에 걸쳐 국무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결국 남한에서 총선거와 함깨 제헌국회가 개설되자 1948년 6월 그는 임시
정부 국무위원을 사임하고 주일변사공처도 폐지했다고 한다.93
아무튼 「건청」이 1946년 1월 25일에 발행한 기관지 청년 제2호에는 박열이
직접 작성했다고 하는 「유혈(流血)의 선언」이 게재되어 있다.94 발열은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한 마음으
로 곧 바로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급조한 문장으로 다소 조잡한 시구(詩句)가
91 李富潤. 1946. “朝鮮信託統治反對民衆大會,” 청년 2호. 16-19.
92 이동현. 1990. 한국신탁통치연구. 서울: 평민사. 81-114쪽.
93 坪井豊吉. 1975. 251-252쪽.
94 박열. 1946. “조선신탁통치의 결정을 보고 읊은 유혈의 선언,” 청년 2호. 7-12.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29
나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고국에 대한 박열의 애틋한 애정이 잘 표현되
어 있으며 신탁통치 결정으로 인하여 조선독립이 유린되는 것에 대해 비분강개하
고 있는 그의 마음 상태가 잘 묘사되어 있다.
Ⅵ. 본국귀환 문제와 박열
재일한인과 재조일본인의 귀환문제는 민족적인 차원에서 한일양국의 전후 재정
비를 의미하는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식민지 조선이 해방되면서 재일한인과 재조
일본인은 본국귀환의 움직임에 휩싸이게 되었다. 재일한인의 경우에는 해방 전에
200만 명 정도의 인구를 나타냈으나 점령당국의 귀환 대책이 종료되는 1946년
12월 시점에는 60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고국으로 이동했다.
한편 재조일본인의 경우에는 일본패전 직전에 군인을 포함하여 120만 명 정도가
한반도에 거류하고 있었으나 해방 후 한반도 사회의 반일 감정 격화와 미군정의
추출 명령으로 1946년 2월 시점에는 극소수만이 한반도에 남았고 거의 일본으로
귀환해 갔다. 이와 같이 해방직후 시기에 일본열도와 한반도 사이에서 대규모 민
족 이동이 전개된 것은 전후 한일관계의 구축에 있어서 양 민족 간의 관계를 규
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박열의 경우에도 1949년에 한반도로 귀환한 일은
한편으로 그의 민족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행동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적
지도자로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남북의 정치가들로부터 이용을 당하고
비운의 일생을 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박열이 구체적으로 재조일본인의 귀환 문제에 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
었는지 이를 언급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식민지 지배에 관한
그의 강렬한 비판의식에서 볼 때, 재조일본인이 한반도에서 귀환하거나 추출당한
일은 식민지 지배의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찬
가지로 일반적인 재일한인의 귀환 문제에 대해서도 식민 지배의 귀결로서 자연스
럽게 받아들이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귀환하는 것을 당연한 처사로 여긴 것이 아
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볼 경우 박열은 재조일본인 가운데도 ‘일본인 민중’이
30 재외한인연구 제36호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인식 범위의 확대를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그
가 아무리 ‘보편적인 인류애’를 주장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민족주의의 범위
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본국 귀환 문제에 대한 그의 거취와 관련해서 그는 출옥 후 자신이 구체적으
로 언제 한반도로 귀환할지 밝히지 않았으며 재일한인 사회에 남아서 정세 변화
를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가 출옥 직후부터 본국 귀환 문제에 대해 이렇듯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찍
이 1945년 12월 7일의 도쿄 환영대회에서 그는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국에 돌아갈 것인가, 일본에 남아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고국의 독립문제가 명하는 대로 진퇴를 결정할 생각이다. 8월 15일 이후
나는 독립국의 국민이다. 이방 사람으로서 어떻게 일본 내정문제에 간섭하겠는가.
나는 새로운 명령을 받아서 조선독립을 위하여 헌신할 뿐이다”라고 했다.95
박열은 1949년 「민단」 단장 연임에 실패한 직후 재일한인이나 남한 사람들에
의한 공식적인 환송식과 환영식도 없는 가운데 쓸쓸하게 고국으로 들어왔다.
1949년 5월에 서울에 왔다가 이윽고 김구가 암살되는 등 혼란스러운 남한 사회
를 목격하고 또 다시 도쿄로 들어갔다가 1949년 겨울에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96 이와 같은 그의 조국귀환 움직임에서 볼 때, 이승만 정부가 박열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포스트를 제의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승만의
입각 제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열이 이를 거부했다”고 하는 견해는 과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수많은 논저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그가 이승만 대통령
에 의해 초청을 받아 남한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승만의 초청’을 입증
할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남한에 귀환하는 과정이나 일본에 다
녀오는 과정에서 주일대표부를 통한 비자도 없이 그리고 정식으로 제공되는 선박
이나 비행기를 이용하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선박을 이용하여 현해탄을 건넜다고
하는 점에서 볼 때,97 ‘이승만의 초청’ 설은 그 신빙성이 희박하다.
95 每日新聞 1945-12-08.
96 북한연구소. 1974. 329.
97 金一勉. 1973. 238쪽.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31
아무튼 박열은 1947년 2월 도쿄에서 장의숙(張義淑)과 결혼하여 그 이듬해 아
들 영일(榮一)을 낳았고 그 다음해에는 딸 경희(慶熙)를 낳았다. 이 때 박열은 재
일한인 사회 뿐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유명한 인사가 되어 있었으며 점령당국으로
부터도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박열 개인의 이름 아래 많은
기부금과 배급물자가 모였고 사적인 단체로 「박열후원회」와 「박열장학회」가 조직
되어 사실상의 비공식 재단으로 기능했다.98 그와 그의 가족은 남한에 들어온 후
한 때 계동에 있는 한학수(韓學洙)의 집에 머물렀다. 한학수의 집은 그의 할아버
지 한규설이 기거한 고풍스럽고 넓은 가옥이었고 이 집 사랑방에서 해방직후 고
려민주당이 결성되기도 하여 유서 깊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박열
이 오래 거주하지는 못하고 대원호텔로 거처를 옮겨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99
1949년에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남한에 귀국한 이후 박열은 일본에서부터 운영해
오던 장학회를 서울에서 다시 열고 그 기관의 대표 직책을 사용하면서 소일했다.
그는 마포 형무소를 방문하기도 했고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남한 각지를 시찰하거나 환영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100 1949년 7월
12일 서울 명동의 경제구락부에서 안호상 문교부 장관을 비롯하여 80명에 이르
는 정계ㆍ언론계 인사들이 「박열장학회」개원을 축하하는 모임을 열었는데, 이것
은 사실상 박열의 환국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모임이었다.101
Ⅶ. 맺음말
이상으로 재일한인 사회의 로컬리티를 지도자 박열의 행태를 통하여 그려보았
다. 자연스럽게 재일한인 사회에서도 구성원 개개인이 각각의 성향에 따라 서로
98 金一勉. 1973. 236쪽.
99 김삼웅. 1996. 197-198쪽; 在日本大韓民国民団東京新宿支部. 2009. 民団新宿60年
の歩み. 東京: 港北出版印刷株式会社. 112-113쪽; 民団新宿支部. 2009. 民団新宿
60年の歩み:雑草の如く抜いた同胞の歴史. 東京: 彩流社. 121-125쪽.
100 오봉빈(편). 1949. 99-116쪽.
101 김인덕. 2013. 166쪽.
32 재외한인연구 제36호
다른 행태를 보였으나, 본 논문에서는 박열 개인의 출옥 이후 행적을 통해 재일
한인 사회의 단면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가 몸소 관여한 사상범 석방문제를 비롯
하여 민족단체 결성 문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 본국귀환 문제 등은 한반도 국
가체 형성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한반도의 대중과는 달리 ‘민
족의 공존’을 보다 선명하게 제시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의 대중과 같이
국민국가 건설에 대한 강력한 염원을 표출함으로써 재일한인 사회의 로컬리티 성
향을 여실히 나타냈다. 한반도 국가체와 관련된 문제들은 정치적 이념과 얽혀서
재일한인들에게 조직적으로 행동방향의 선택을 강요했고 이에 대해 박열은 자의
적으로나 타의적으로 하나의 방향을 선택함과 아울러 이러한 방향으로 재일한인
사회를 지도해 갔다. 박열이 선택한 방향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적 성
향의 정치단체가 내세우는 방향과 대체로 일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를 지지
하는 세력과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 분명히 나뉘게 되었다. 그는 재일한인 사회에
서 정치적 이념 대립의 한 가운데 위치하는 인물이 되어갔으며 한반도 정치 분열
에의 연동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해 가야 했다.
해방직후의 현실적인 정세 변동에 비추어 볼 때, 박열은 전략적 판단과 정치참
여 방법에서 많은 한계를 보였다. 그는 해방 전 투옥 생활의 후광을 받아서 해방
후에도 독립투사로서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울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전략적인 선택에서 망설이면서 현실주의 정치에
이용당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한일 양 민족간의 대립과
좌우 이념 대립이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입지를 세우지 못하고 한
반도 정치의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존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희망하고 주
장했던 한일 양 민족의 화해는 한국사회의 반일 분위기 확산과 일본사회의 조선
인에 대한 반감이 증폭되어 가는 가운데 현실적으로 악화 일로를 걸었다. 출옥
직후에는 그가 일본 국가에 대해 ‘내정간섭’ 하지 말고 일본인과 ‘화해’할 것을
주장했지만, 그가 일본을 떠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재일한인의 민족교육 움직임
이 일본정부로부터 간섭을 받아 식어갔고 재일한인의 대표적인 단체 「조련」이 일
본정부와 점령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기에 이르렀다.102
102 1949년 8월 6일, 박열이 동지 오봉빈과 함께 대구를 방문했을 때 경상북도 도지사 회
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때 재일동포의 현재 상황을 묻는 질문에 대해, 박열은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33
만약 박열을 현실적인 정치가 내지 조직적 지도자로서 평가한다면, 그는 점령
체제 하에서 일본의 사회 안정과 국가 독립을 추구하려고 했던 요시다 시게루(吉
田茂) 등 일본 정치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재일한인 사회의
유력한 단체인 「조련」과 「민단」으로부터도 소외를 당하거나 이용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103 게다가 그의 염원과는 달리 많은 재일한인들이 극도의 무질서를 보
이면서 재일한인 사회 전체가 점령당국과 일본정부로부터 소외를 당하게 되었다.
나아가 박열은 귀환해서도 남한사회에서 국가건설 과정에 직접 참가하지도 못했
으며 결과적으로 반공에 의한 분단을 우선시 한 이승만 세력에 의해 이용을 당했
고 말년에는 북한의 김일성 세력에게도 체제 선전을 위해 이용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는 분명히 ‘실패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서 박열을 해방정국의 민족현실을 고뇌하는 하나의 지식
인으로 평가한다고 하면, 질곡과 억압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재일한인의 입장에서
한일 양국과 양 민족의 화해를 염원했고 혼탁한 현실 정치 상황에서도 고결함을
유지하고자 했고 후세들에 대한 민족교육에 매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할 수 있다.104 해방직후 지식인의 민족현실 인식을 조직의 지도자나 현실적인
정치가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여 이해하려고 해서는 지식인 사상의 주체성을 무시
“일본경찰과 충돌사건 등 불상사가 많은데 우리로서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해서 투쟁하
고 있다, 해방직후에는 우리의 지위가 높았는데 요즘에 와서는 조금 사정이 달라졌다.
현재 재일동포 가운데 20%가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 80%는 부랑생활을 하고 있다, 일
본 형무소 복역자의 20% 혹은 25%가 한인이다” 라고 답했다. 오봉빈(편). 1949. 114
쪽.
103 1949년 9월 2일, 박열은 서울에서 이활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만나 대담을 나누는
가운데 재일한인에 관한 박열의 생각이 나왔다. 그는 해방 후 재일동포들이 갑자기 전
승국민처럼 되어 특별대우를 받았다, 예를 들면 일본인에 대한 배급까지 빼앗아 우리
한인에게 특별배급을 하고 치외법권을 행사하고 실력 없이 월권행동까지 했다. 한편
불량배까지 생겨서 일본 관민에게 미움을 사고 나아가 점령당국에게서도 신용과 위신
을 잃게 되었다. 일본인의 신임을 커진 반면에 재일한인의 신임은 점점 떨어져 학대를
받게까지 되었다. 오봉빈(편). 1949. 137쪽.
104 위의 기자회견에서 일본 재무장 전망을 묻는 물음에 대해, 박열은 “이제 와서 무기도
갖게 되고 인원도 증강되었다”고 하면서도, “대일문제에 있어서 장차 일본을 원수로
삼든지 또한 친선관계를 맺든지 간에 많은 교섭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는 과거 침략주의 일본을 미워할지언정 신생 민주국가로 갱생한 오늘의 일본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악감정을 가질 이유는 없다”고 했다. 오봉빈(편). 1949. 114-115쪽.
34 재외한인연구 제36호
하기 쉽고 통시대적인 교훈을 찾아내기도 힘들다.105 해방직후 박열이 내세운 주
장과 이론은 비록 재일한인 다수가 처한 현실적인 정치상황에서 빛을 발하지 못
하고 해방정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지만 그가 여러 기회를 통하여
누누이 제기한 휴머니즘과 평화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가
치를 제공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해방직후 박열은 현실 정치의 지도자나 운동가
였다고 평가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민족주의적인 사상가 내지 평론가로서 지식인
의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105 임헌영. 1985. “해방직후 지식인의 민족현실 인식,” 강만길ㆍ김광식 외저. 해방전후
사의 인식 2, 서울: 한길사. 405-406쪽.
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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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l 최영호 39
<Abstract>
Locality of Korean Community in Japan that
Bak Ryeol Showed soon after the Liberation
Choi, Young-Ho (Youngsan University)
This study adopts a historical approach to find Bak Ryeol’s activities
as a national leader of Korean community in Japan, and to hold of his
location on the new rel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around 4 years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n peninsula. It especially reveals his words
and deeds intensively during the period from the discharge from Akita
Prison on October 1945 to inauguration of Head of Mindan (Korean
Conservatives Organization) October 1946. The first object of this study
is to make sure a locality of Korean community meeting the nationality
tendencies of Korean society that Bak Ryeol also showed in his
literatures. And the second object is to reveal how he dealt with
Korean transformation such as freedom of political prisoners,
organization of nationalistic groups, trusteeship of Korean peninsula,
and repatriation to homeland referring to existing evaluations of his
respondence. He, as a symbolic spokesman of locality of Korean
community in Japan, tried to seek national independence and humane
justice without restraints from real political circumstances. He should
be recognized as an intellectual or a philosopher rather than an
agitator or a political leader.
40 재외한인연구 제36호
Key Words : Bak Ryeol, Koreans in Japan, Locality, Freedom of
Political Prisoners, Choryun(Korean Association in
Japan), Kunchung(Youth League to Expedite the
Foundation of Korea), Trusteeship, Repatriation
n 논문접수일 : 2015. 4. 14. 심사완료일: 2015. 5. 30. 게재확정일: 2015. 6. 18.
n 필 자 소 개 : 최영호 - 영산대학교/교수. 1993년 도쿄대학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취득. 해방
직후의 한일관계에 주목하면서 사료에 입각한 실증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이메일주소: choiygho@ys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