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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3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11,28-30
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 나를 무겁게 하는 짐의 정체를 먼저 알아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이를 위해 안식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성당에 다니기 위해 오는 사람 대부분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당 다니면서도 마음의 평화인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내가 내려놓아야 하는 ‘무거운 짐’의 정체를 잘 모르는 게 아닐까요?
영화 ‘디스 파이널 아워스’(2013)의 줄거리입니다.
이야기는 호주 퍼스를 배경으로 하며, 지구를 멸망시킬 재앙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 12시간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는 생명을 잃은 운석이 북대서양을 강타하여 지구 전체를 천천히 휩쓸고 있는 세계적인 불 폭풍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주인공은 제임스입니다.
제임스는 임신한 애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는 것도, 자신의 애인이 죽은 것도, 그 태중의 아기가 죽는 것도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저 술을 마시며 광란의 파티를 하다 죽고 싶어 그녀를 떠납니다.
종말의 혼란 속에서 제임스는 아버지와 헤어진 채 어른들에게 끌려가는 어린 로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도와줍니다.
그녀는 아버지 옆에서 종말을 맞고 싶다고 제임스에게 아버지를 찾아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임스는 생의 마지막을 아이를 도와주다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광란의 파티에 갑니다. 거기에는 참다운 우정도 없고 거기에서도 어른들이 로즈를 마지막 노리갯감으로 쓰려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제임스는 로즈를 데려 나와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합니다.
로즈가 말한 아버지 집으로 갔더니 온 가족이 두려움에 자살한 상태였습니다.
제임스가 로즈와 함께 떠나려 하자 로즈는 그것을 거부하고 아빠 곁에 머물겠다고 말합니다. 제임스는 아이를 보며 마지막 시간에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와 머문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누구와 함께 죽음을 맞고 싶은가 생각하다 자신의 짐처럼 여겨 떠났던 임신한 애인을 찾아 나섭니다.
도중에 차도 고장이 나지만 뛰어서 그녀가 있는 해변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용서를 빌고 그녀와 꼭 껴안은 채 바다에서 밀려오는 불 폭풍을 맞습니다.
이때 여자가 말합니다.
“아름다워!”
사랑하는 사람과 맞는 죽음은 더는 공포가 아니고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안식입니다.
제임스는 자신의 무거운 짐이 임신한 애인, 자기가 책임져야만 하는 가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짐을 벗어던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안식은 없었습니다.
자기가 짐이라고 여겼던 것은 사실 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제임스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랑의 의무를 다할 필요가 없이 즐기다 죽어도 된다고 말하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짐은 외적인 책임이 아닙니다. 바로 원죄에 물들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아니라 외적인 무언가를 내려놓으려 하기에 영원히 안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마음을 약속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은 새로운 마음을 넣어주러 오셨습니다. 그것도 짐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마음보다는 가볍습니다.
이전의 마음은 온유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해 화가 나 있고 나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해 분노로 차 있습니다.
겸손하지 못해 감사하지 못하고 하느님과 나에게 짐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불만을 품고 원망합니다.
제임스는 로즈라는 아이를 통해 이 새로운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전에 짐처럼 보였던 가족이 이젠 죽음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는 안식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가끔 자신 안에 마귀가 산다고 말하는 이들이 찾아옵니다.
안수로 그것들을 내쫓아 달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자신 안의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것 때문에 몸도 아프고 삶도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그 마귀들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짐은 ‘외로움’입니다.
하느님도 없고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믿는 척은 하지만, 실제로 자기를 믿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게 마귀 탓이라고 하며
진짜 무거운 짐을 부인입니다.
그 무거운 짐이란 자신을 외롭게 만든 하느님과 가족에게 화가 나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부터 내려놓아야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장착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원한다면 사제가 시키는 것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성당에 매일 나와서 ‘하.사.시.’ 30분 읽고 성체조배 하며 그 내용을 묵상하라고 합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마귀가 나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마귀와 자기를 그렇게 만든 환경이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만 없애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식을 위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불만스럽고 화가 나 있는 마음을 먼저 내려놓읍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3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마태오 11,28-30
다들 얼마나 힘드신가요?
여러 측면의 지표들이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시느라 다들 얼마나 힘드신가요?
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이 안보이고, 기대할 것은 없고...
어디 그뿐인가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입고, 그 상처 부여안고 눈물 흘리고...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복음 11장 28~30절)
우리가 그분께로 다가갈 때 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활짝 열린 두 팔로 환대하시고, 꼭 안아주시고, 고생 많다며 등을 토닥여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순식간에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주로 부릅뜬 눈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여차하면 진노하시고 징벌을 내리시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하느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며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표현하시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긴 하시는데, 거저 주시지는 않으시겠답니다.
당신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겠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그 큰 고통에다, 그 숱한 짐을 지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특히 죽음과 내세에 대한 공포로 더욱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우리 짐을 가볍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두가 외면한다 할지라도 나만은 너를 외면하지 않겠다, 나만은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 지고 가고 있는 많은 짐들을 순식간에 없애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나눠지시겠다고 하십니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결국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인 마음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없애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거기다 고통의 끝판왕인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언제나 고통과 십자가를 이고 지고, 손에 들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단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에 못 이겨 신음할 때 우리 옆에서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당신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복된 그 날까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인내하면서 살아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2주간 수요일 강론>
(2023. 12. 13. 수)(마태 11,28-30)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을 해설할 때, ‘무거운 짐’은 유대교 율법을 뜻한다고 해설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해설은 이천 년 전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고,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대교 율법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거운 짐’과 ‘멍에’는 ‘생로병사’로 표현되는 ‘인생고(人生苦)’입니다.
“유대교 율법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리스도교 교회법이라는 무거운 짐이 새로 생기지 않았는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스도교 교회법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잘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 같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 때,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 15,10-11).”
유대교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는 지켜야만 살고 안 지키면 사형을 당하거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글자 그대로 ‘무거운 짐’이었고, ‘멍에’였지만, 그리스도교 교회법은 그런 짐과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또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부축해 주고 도와주는 조력자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십계명’은 무거운 짐도 아니고 멍에도 아닙니다.
십계명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마태 19,17-19).
예수님의 여러 가지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나에게 오너라.”는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아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에서 ‘안식’은, 모든 억압과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포함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얻어 누리게 될 구원, 생명, 평화,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뜻하는 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거나 사람들을 억압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마태 20,25-28).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짐과 멍에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신앙인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십자가가 지금 당장에는 무거운 짐과 멍에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끝까지 지고 가면, 십자가는 결코 짐과 멍에가 아니라, 온갖 짐과 멍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성인 성녀들과 순교자들이 이미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앞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서로 대칭을 이루면서 ‘안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요구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것은 ‘사랑’과 ‘자비’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슨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양으로서, 양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멍에와 짐을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고서 잘못 해설하는 이들이 많은데, 표현만 보고 뜻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내 멍에는 ‘편안함’이고, 내 짐은 ‘가벼움’이다.”, 즉 “나의 가르침은 너희를 멍에와 짐에서 해방시키고, 너희에게 편안함과 가벼움을 준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과 멍에를 가벼운 짐과 멍에로 바꿔 주시는 분이 아니라, 짐과 멍에 자체를 없애 주시는 분입니다.
<안식이란, 짐과 멍에가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누구든지 살다보면 ‘힘든 일들’을 겪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의 죄와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보속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죄와 잘못 때문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닌 것이라면, 주님을 믿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본인 탓이 아닌 일들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가서
“불필요한 짐과 멍에를 내려놓아라.” 라고 충고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짊어진 것도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 내려놓으라는 말만 하는 것은,
‘사랑 없는’ 잔인한 짓이고, 그런 말은 ‘빈말’일 뿐입니다.
우리는 ‘힘든 일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이웃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것, 또는 대신 지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