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누군가를 새로 사귀는 일은 쉽지 않다. 아이들을 키울 땐 또래의 엄마들과 만남도 많았고 취미생활도 같이 했지만. 아이들이 모두 출가한 지금은 위층에 누가 사는지 새로 이사 온 아래층에 아이가 몇 인지도 모르고 산다. 공유할 게 없으니 먼저 다가가지도 않게 되고 가까이 지내던 이웃이 떠나가면 쓸쓸하고 공허해진다. 깊어가는 가을, 나의 삶을 안락하고 풍요롭게 해주던 이들이 그리워지는 저녁이다.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며 주민들의 머리 맵시를 책임졌던 미용실 원장이 건강을 이유로 젊은이에게 미용실을 넘겼다. 나이가 먹으면 모든 일이 다 그렇듯 미용도 장시간 서서 하는 일이라 60이 다 된 그녀에게 무리였는지 일하다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동네 사람들 모두 며칠 동안 그녀 걱정을 했다. 오랫동안 가족처럼 드나들다 보니 서로가 걱정하는 마음이 컸다. 생활력이 강했던 L원장은 퇴원 후에도 일을 줄여가며 미용실을 지켰다.젊은시절부터 사업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지만 남편은 계획적이지 못하고 버는 대로 지나치게 사치를 하며 다 써버리는 사람이라 했다. 남편을 믿지 못했다. 결혼 전 따놓은 미용기술을 이용해 자식과 자신을 위해 일을 시작했다. 아이도 다 키우고 어느 정도 재력도 일구고 나니까 건강이 망가졌다. 더 크게 병을 키우지 않기 위해 일을 그만둔 듯했다
한동네 살기에 오다가다 한 번쯤 만나려니 했는데 반년이 지나도록 그녀를 볼수 없었다. 어느 날 지인이 그녀 소식을 전해 왔다. 식당에서 어떤 남자와 식사를 하고 있기에 눈인사를 했더니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지인의 자리로 와 인사를 하더란다. "애들 아빠예요' 하며 식당을 나갔다고 했다. 20년이 되도록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남편을 보지 못했다. 원장은 편한 구설수에 오르고 쉽지 않았을 거다. 겪은 바로는 그녀는 반듯 하고 지혜로운 여자로 여겨졌다. 성실하고 슬기로운 그녀가 남편과 별거 하는 게 안타까웠다. 어쩌다 미용실에서 그녀 남편이 오랜만에 왔다 갔다는 말을 들으면 형제 일이라도 되는 듯 반가웠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그녀가 궁금 했다.
아파트 뒷길, 비닐하우스 농원이 보상 문제로 차일피일 미루던 철거문제가 해결을 본 듯했다. 준공을 앞둔 지하철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주변의 미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비닐하우스에서 농작물을 키우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채소가 자라던 땅은 공원이 되었다. 채소가 자라던 곳엔 붉은 메밀꽃이 가을을 수놓으며 오가는 사람들의 눈을 행복하게 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엔 하얀 메밀꽃이 밤에는 소금처럼 보인다고 했다. 메밀꽃은 하얀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붉은 메밀꽃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싱싱한 야채를 사기 위해 드나들던 C농원도 함께 사라졌다 상처한 농원 아저씨가 늦게 만난 젊은 아내와 함께 키우는 채소들은 싱싱하고 맛이 있었다. 알콩달콩 아내와 사는 모습이 행복해 보여 모두 그들의 결합을 축복하고 응원해 주었다. 어긋난 기대의 이기적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해와 불신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나 보다. 어느날 떠나버린 그녀의 빈자리가 허전했다
한바탕 꿈을 꾼 듯 아저씨는 혼자서 묵묵히 농원 일을 계속했다. 홀아비의 입성은 금방 티가 났다. 후줄근한 그의 차림이 처량 맞아 보였다. 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가재도구를 밖으로 모두 꺼내놓았다. 치우지 않고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싱크대며 냉장고, 옷장이 널브러져 있어 오가는 사람들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황혼 사랑처럼 그들이 공유했던 물건들도 갈 곳이 없어 보였다. 우리의 건강한 아침 식탁을 책임졌던 아저씨의 행방도 묘연했다. 식물을 잘 키우는 것도 기술이라며 자신감 넘치던 아저씨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어디를 가도 일은 할 수 있을 거라는 암시 같기도 했다.
운동을 위해 아침마다 이곳을 지난다. 가을이면 애송하곤 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 떠오른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ᆢᆢ)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ᆢᆢ)
겨울을 앞두고 불안감에 방황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지는 릴케의 <가을날>. 찬바람이 불 때면 더욱 쓸쓸하고 뼈속까지 외롭게 느껴진다
바람결에 반가운 얘기가 들려왔다. 미용실 원장이 그녀의 남편을 따라 갔다고 했다. 이젠 그녀가 남편 곁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냈으면 좋겠다.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날리며 군무를 추는 것 같다 농원 아저씨는 어디로 갔을까?
이마리나 동인지 목성들의 글자리. 참여 한국산문문학상 수상 mariah49@hanmail.net 나이 드니 감기도 큰 병이다. 새삼 건강의 소중함을 느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