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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 보이지만, 이건 한강의 노벨상 이야기다.
1.
맨슈어 올슨은 경제학 아이디어로 정치와 역사를 보는 시야를 넓혀준 20세기 경제학자다. 요즘으로 치면 애쓰모글루와 비슷한데, 나는 올슨이 더 깊고 날카롭다고 느꼈다. 올슨이 스웨덴에 대해 재밌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스웨덴은 대규모 복지국가인데도 왜 망하지 않는가?”
복지국가는 정부가 자원을 재분배한다. 여기서 부패와 비효율이 발생한다. 스웨덴은 대규모 재분배를 하는 나라인데도, 왜 경제적 효율이 유지되는가? (올슨, 스웨덴의 복지 오로라는 얼마나 밝은가?)
올슨의 답은 이랬다. 1) 스웨덴은 수출 주도 경제다. 경제의 성과가 해외 시장에서 결정된다. 2) 정부는 자원을 명시적 규칙에 따라 재분배한다(‘명시적 재분배’). 소득이 얼마면 세금이 얼마 / 보조금이 얼마, 이런 식이다. 그때그때 물밑 협상을 통해 자동차산업에 얼마, 농민에 얼마 이런 식(‘암묵적 재분배’)으로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가 조합되면, 재분배의 비효율은 크지 않다. 왜? 시장의 승자를 정부가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수출 주도 경제). 재분배의 승자도 정부가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명시적 재분배). 이러면 엘리트가 부패할 공간이 좁아진다. 올슨은 한 나라의 번영을 결정하는 열쇠가 ‘시장이냐 복지냐’가 아니라, ‘승자를 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없느냐)라고 지적한다. 스웨덴은 경제학자들이 끔찍해할 대규모 복지국가지만 승자를 정할 권한을 해외 시장과 명시적 규칙에 넘겨서 올슨의 테스트를 통과한다.
2.
라틴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에는 올슨의 테스트에 실패한, 덫에 걸린 나라들이 있다. 미얀마는 핵심 돈줄인 중국과의 국경무역을 군부가 통제하는 나라다. 무역을 하려면 군부 소유 기업이거나, 군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게 바로 ‘국내 엘리트가 승자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는 전형적 사례다.
개발 시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수입 대체 산업화를 추구했다. 이 전략은 원리상 ‘세계시장 경쟁력이 없는 국내 생산자’와 ‘국내 생산자를 보호하는 정치 엘리트’의 연합을 낳는다. 이런 구조에서는 인허가가 가장 가치 높은 자원이다. 올슨의 덫은 이 나라들을 가혹한 운명으로 이끈다. 승자를 결정하는 국내 엘리트들이 대규모 부패의 이익을 누리고, 이익이 크니 엘리트들이 조직화되어 지배력이 강고해지고, 보통 사람들이 부패와 비효율의 결과를 감당한다.
유럽에도 소위 ‘실패한 복지국가’로 불리는 나라들이 있다. 이런 나라들은 올슨의 표현으로 ‘암묵적 재분배’가 강하다. 그때그때 정치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대상에 보조금이 주어지는데, 이런 재분배는 명시적이지도 않고 사전에 규칙을 알기도 어렵다. 이 역시 ‘국내 엘리트들이 승자를 결정할 힘’을 높여 주기 때문에 부패와 비효율이 발생한다.
3.
박근혜는 탄핵당할만 했다. 삼성은 3세 승계를 위해 공적 자원에 손실을 입혔다. 이것은 정치권력과 기업이 결탁해 원하는 것을 주고받은 부패였다. 그러나 이 부패가 경제 시스템의 기본 원리일만큼 전면적이고 거대했는가? 올슨의 덫에 걸린 전형적 나라들은 확실히 부패가 경제 시스템의 기본 원리다. 나는 우리가 그런 규모의 부패를 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국내 엘리트가 승자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지는 않지만, 글로벌 기준으로는 크지 않은 나라다.
한국은 개발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수출 주도 경제다. 이 게임의 승자는 해외 시장이 결정한다. 수입쿼터제와 관치금융으로 대표되는 인허가의 힘은 여전히 존재했고 그것이 ‘국내 엘리트 카르텔’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본질적으로 승자를 해외 시장이 결정한다는 원칙을 뛰어넘을 만큼은 아니었다. 해외 시장에서 살아남은 현대와 삼성은, (세기의 혼테크를 비롯해) 인허가로 성장한 SK와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봤다.
수출 주도 경제가 자리잡을수록 한국에서 ‘국내 엘리트가 승자를 결정하는 힘’은 줄어들어 왔다. 이 ‘방향성’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나라 경제 전체를 인허가로 좌우하는 ‘올슨의 덫’ 국가들과 비교하면 엘리트가 저지를 수 있는 부패의 최대치가 낮다. ‘올슨의 덫’ 국가에서 삼성 규모의 기업과 중앙정부가 결탁한다면, 오가는 대가가 ‘말 몇마리’일 수는 없다.
대략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내부 엘리트가 승자를 결정할 수 없는 시스템’이, 한국 사회가 가진 아주 중요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4.
이제야 본론. 한강 작가의 노벨상에 대해 내가 뭐라고 말할 실력이나 취향은 없다.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보수 일각의 반응인데, 조선일보에 칼럼을 연재한다는 어느 작가는 한강 작가의 역사관에 문제가 많은데 스웨덴 한림원이 속았다는 주장을 했다. 하루 후에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떨떠름한 축하 다음에, 번역이 좋았느니 나이가 어려 걱정이라느니 이상한 어깃장을 놓는 칼럼을 썼다.
이 대조는 너무나 선명해서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다.
‘내부 엘리트가 승자를 정하는 시스템’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은 정부가 만든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교육청이 관리하는 도서관에서 퇴출을 당했다.
‘외부에서 승자가 결정되는 시스템’에서, 위의 퇴출을 주도했던 내부 엘리트 세력은 떨떠름한 축하 메시지와 이상한 어깃장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부 엘리트가 승자를 정하는 시스템’은 섬이다. 애초에 한강 작가는 국내 독서시장의 ’승자 결정’만으로도 내부 엘리트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노벨상은 이 섬이 얼마나 가련한가를 보여준 일종의 확인도장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수정권이 문화예술계에 갖는 울화의 근원이었다. 내부 엘리트가 승자를 결정하고 싶은데, 그걸 못한다는 것.
장르를 영화로, 이름을 봉준호로 바꾸면 지금 이 구도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내부 엘리트가 승자를 정하는 시스템’이 봉준호를 패자라고 아무리 외쳐 봤자, ‘외부에서 승자를 결정하는 시스템’은 그 외침에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국내 영화 시장이, 나중에는 해외 시장과 글로벌 영화제들이(그리고 미국의 로컬 영화제도) 그에 가세했다.
나는 한국 보수가 수출 주도 경제를 자랑스러워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수출 주도 경제가 한국에 가져다준 가장 장기적인 축복은 ‘내부 엘리트가 승자를 정하는 시스템’을 사회의 주변부로 밀어냈다는 점이다. 한국 보수가 정말로 이 결과를 자랑스러워하는가?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보수를 보고 있을 것이다. 한국 보수는 여전히 승자를 자기들(=내부 엘리트)이 결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게 도저히 안 될 때 뒤틀린 심사를 어떻게 가누지 못한 분들의 터져 나오는 본심을 요 며칠 꽤 자주 보고 있다.
5.
반면에, 주로 진보적인 성향의 분들이 하는 얘기 중에, 한국인들은 외부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주체적인 사고와 결정을 할 줄 모른다는 논점도 있다. 이분들은 노벨상에 대한 열광도 같은 관점으로 비평한다. 나도 그런 면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우리가 한국어 소설의 가치를 스웨덴 노인네들한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로 보면, ‘외부의 시선에 민감’하다는 속성은 중요한 숨은 이익을 준다. 이 속성은 승자를 결정하는 과정을 엘리트 카르텔이나 이익집단이 통제할 가능성을 낮춘다.
어쩌면 한국인은 ‘외부의 시선에 민감한 태도가 주는 이익’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군부든 관료든 재벌이든 언론이든, 다른 나라 못지 않게 ‘엘리트 카르텔’을 형성할 자원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들이 올슨의 덫으로 대한민국을 밀어넣을 경로도 아주 많았고, 그럴만한 심적 태도도 당연히 풍부했다(2024년에, 노벨상을 앞에 두고도, 그 뒤틀린 심사를 가리지 못할 정도다)
그러니까 한국의 엘리트 아닌 사람들에게 ‘외부의 시선’이란 일종의 무기였다. 엘리트들이 승자를 결정하려는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무기였다. 현대사를 보면 민주주의 건설에서도 경제 건설에서도 이 무기는 꽤 잘 작동한 편이었다. 이 성공의 경험은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집단심성을 남겼을지 모른다. ‘외부의 시선에 민감했을 때’ 우리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한국인의 이런 성향을 (비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는 더 긍정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래글은 김필성님의 글입니디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pfbid075s4e8fpTQANvCzXTtoMwbJ4SsbvUp9JFj5sAKLowQ9g94XfFunp6HqE1PCdMKfLl&id=100002014156359
기본적으로 이 글에 동의합니다만, 전 좀 다른 측면에서 생각했습니다.
이번 노벨상 수상건에서도 확인되었지만, 우리 사회, 특히 우리나라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지식인”들은, “세계적, 보편적” 기준에서는 매우 수준 떨어지는,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 친구 중에 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과학 전공자인데, 대학원 때 빈민 연구로 어린 나이에도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미국 최고의 대학교로 유학가서 박사를 받은 후에,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 중 하나에서 먼저 와달라고 초빙해서 교수가 된 친구입니다. 빈민의 사회학적 연구로 주목받은 학자여서 기본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학자입니다.
그 친구가 미국에 유학갈 무렵입니다. 박사과정 입학이 확정된 학교의 연구실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이런 저런 작업을 했는데, 그 연구실에서 갑자기 진지하게, “당신과 이야기해보니 생각보다 진보적이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학교로 와서 연구하면 성향이 안 맞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라는 메일이 왔다는 겁니다. 물론 그 메일은 아직 본격적으로 같이 연구해보지 않은 제 친구를 오해해서 온 것이었고, 그 친구는 아무 문제 없이 연구 잘 하고 학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만, 그 친구는 그 메일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든 생각은, 아무리 미국이 자본주의의 메카고 패권적 제국주의국가라고 비판을 받아도, 적어도 미국의 학계, 지식인들은 우리나라 기준에서는 극좌인 게 기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 일로 다시한번 확인을 한 셈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 두드러지는 것 같은데, 진보냐 보수냐는 많은 경우 단순한 성향 차이가 아니라 지적 능력의 차이 때문에 결정됩니다. 인문 사회적 주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공부한 사람이 우리나라 같은 “보수”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다양한 학문의 영역들이 진보, 보수라는 한 가지 틀로만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크게 보수, 크게 진보라고 묶이더라도 매우 다양한 견해와 논쟁들이 존재하니까요.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진보적 이슈에 더 관심을 갖는 게 세계적인 스탠더드라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아무리 “보수”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그 분들, 뉴라이트 추종하고 대학교, 사법시험 붙은 걸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치부하는 그런 수준낮은 사람들은, 적어도 세계적인 기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그들은, 우리나라라는 좁은 틀 안에서는 권력을 쥔 메이저들이지만, “국내”라는 틀을 걷어낸 순간, 지식인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가 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저질스러움이 까발려진 적이 없기 때문에, 더 격렬하게, 다분히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겁니다. 그들이 해보지 못한 경험이니까요.
지금 말한 내용이 천관율 기자님이 말씀하신 ‘국내 엘리트가 승자를 결정할 권한’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전 “힘을 가진 주류의 경험”이 그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설명하는 더 적절한 수단인 것 같습니다. 아울러 이런 측면에서 보는 것이, 우리나라의 지식인, 엘리트, 언론 등 카르텔의 본질을 설명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생각하고 있던 건데 천 기자님께서 글을 쓰셔서 간단히 제 생각을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