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탈코한지 얼마 안 됐고, 2N년 동안 은은하게 처돌아버린 흉자세계에서 몸을 담그고 살아왔기 때문에 코르셋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여기서 코르셋이 위험하다는 건 말 그대로 댄져러스~ 오마이갓~ 이라는 뜻이 아니라, 코르셋을 벗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촘촘하게 짜여진 세계에서 코르셋을 벗는 게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만드는, 흔히 말하는 가스라이팅의 개념으로서 코르셋이 위험하다고 봐야 함!
우리 대부분은 평생토록 코르셋을 차왔고, 어쩌면 앞으로 차야할지도 모르잖아. 거기에서 코르셋+페미들은 정신분열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생각하거든?
탈코한 사람도 저렇게 많은데 내가 코르셋+꾸밈노동에 기여하고 있다니... vs 아니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안 꾸미면 도태된다고 조팔
이런 사상들로 뒤범벅되면서 머리는 난장판이 되고 종내에는 '코르셋을 혐오하면서 코르셋을 주워입는 백래시맞은 꾸밈노동자'가 되어버림... ('하 코르셋 하면 안 되는데... 꾸미기 싫다... 그래도 꾸며야지 어쩔 수 없으니까... 꾸민 나를 보니 제법 예쁘네? 섹시한 컨셉도 해볼까? 기죽지 않게 하이힐 신어볼까?'의 과정)
나도 이 단계를 정말 오래동안 거쳐왔어.
종내에는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냐면, 코르셋은 차지만 페미 활동은 하고 탈코르셋 페미들을 흐린눈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 ㅋㅋ...
이게 나쁜 건 아냐. 오히려 당연함. 페미는 내 인생의 전부였지만 난 탈코를 평생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럼에도 이 감정이 날 정말 괴롭게 만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나를 부정하는 하나의 증표처럼 보이기도 했음.
그러다 내가 탈코를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등장했는데, 바로 도쿄올림픽이야! 2021년 상반기를 기점으로 젠더 갈등이 심화되고, 자지들이 별 거 아닌 🤏 이모티콘 하나에 부랄발광할 동안 올림픽은 열렸고, 숏컷여자들은 팽배했으며, 그들은 강인했지만 동시에 욕받이었지.
도쿄 올림픽이 진행될 당시 인스타그램에서 한 숏컷 여성 국가대표에게 페미 해명하라는 댓글을 봤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사이버 불링을 당하는 선수에게 나를 대입시키게 됐음. 내가 숏컷하면 세상이 저렇게 반응하겠지. 그렇게 두려워 하는 날 본 순간 대가리를 망치로 맞은 거 같았음.
아니 x발 나 지금 뭐하는 거지? 나 존나 잘 싸우는 전사 아님? 뭐가 부족해서 저런 새끼들한테 쫄지? 평생 자지들 밑에서 좆밥처럼 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코르셋 쓰는 여자들 비하 절대 아님 오로지 내가 느낀 감정이야)
그래서 곧장 남자 머리만 하는 미용실로 가서 머리를 안 잘라준다는 미용사에게 10분정도 떼를 썼고, 허리까지 오는 긴머리에서 투블럭에 가까운 숏컷을 쳤어.
솔직히 머리 자르고 나서 존나 무서웠음. 길가다 뚜드려 맞을까봐. 아는 지인들이 나 페미라고 손가락질 할까봐. 내가 더이상 '여자'가 아니게 될까봐.
근데 그것도 며칠이지. 머리 자르고 학원가니까 내가 제일 잘생겼더라.
난 원래 행동이 거칠어서 얌전히 다니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머리 자르고 나니까 그게 그렇게 내 본모습같이 어울리더라.
'평소엔 얌전하지만 꾸밀 땐 꾸미는 나'에 심취해서 사놓고 입지도 않던 브랜드 반팔 티셔츠들을 이젠 옷장에서 찾아입게 되더라.
코르셋에 절여져 있을 때 갖고 싶던 원피스, 치마, 심지어 귀걸이까지 이젠 갖고 싶지 않더라.
그리고 인생이 좀 편해졌더라. 코르셋을 주워 입었을 땐 밥도 굶어가며 아침 7시에 일어나 8시까지 화장만 하던 내가, 머리를 감고 가볍게 선크림을 바르고 앞머리를 정리하는 과정까지 길어야 10분 안에 끝났거든. 밥도 맛나게 먹었어.
그 준비를 하고 나면 난 나가도 되는 상태로 변신하는 거야.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딱 쓰면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데, 그 상태로 집 밖을 나서.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와 파운데이션이 묻어나지 않은 깨끗한 마스크를 봤을 때.
이상하게 시원했다? 마음 한 켠이 두근대더라.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 것 같았어.
그때부터는 길거리를 지나다녀도 부담스럽지 않았어. 고등학교 동기를 봐도, 중학교 동기를 봐도. 걔가 내 뒤에서 추접하고 저열한 표현을 섞어 내 욕을 한다 해도. 결국 내 눈을 피하는 그 애들을 봤을 때 난 자랑스러워졌어.
주변 사람 그 누구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너 페미냐?' 라고 묻지 않았고, 설령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내겐 별로 필요없는 사람임을 깨달았어.
그들 대부분은 남자였거든.
가족이 아닌 남자는 나를 평가하고 있었고, 나 또한 평가받는 걸 은연중에 즐기고 있었거든.
결국 난 그들을 연애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거야.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거기서 존나 현타가 왔는데, 또 웃기게도 남자 만날 생각이 안 들더라. 그들이 날 더이상 연애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게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애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게 되니까 그 일련의 과정이 내게 정말 이로운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음.
그리고 진짜 신기한 게 나 남자에 미쳐서 덕질이니 짝사랑이니 안 해본 게 없는데 탈코하고 나니까 거짓말처럼 남자에 대한 욕정이 짜게 식음
그렇게 탈코에 성큼성큼 다가서기 시작했고, 이젠 완전히 코르셋을 던져버린 탈코 페미가 됐어!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내 탈코의 결정적 계기는 도쿄 올림픽이었지만, 어쩌면 난 끊임없이 탈코와 코르셋 사이에서 자아분열하면서 천천히 코르셋을 내려놓고 있었다고 생각해.
코르셋을 내려놓을 때면 비싼 허벌 반팔 니트대신 브랜드 반팔 티셔츠를 사기도 했고, 화장을 하면 마스카라나 볼터치는 생략했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코르셋을 주워입을 때면 롱래스팅 마스카라를 찾아보기도 했고, 틴트를 깔별로 사기도 했음.
이렇듯 난 탈코와 코르셋의 과정을 아주 오랜 시간 거친 끝에, 평생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탈코르셋에 도달할 수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코르셋을 잃지 못하는 페미들을 손가락질 하고 싶지 않아.
사실 그 누구보다도 분열하고 있고, 두려워 하고 있고, 살아있고 싶은 간절함이 있는 존재라는 걸 내가 겪어봐서 알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여자들아. 코르셋을 포기 못하는 걸 괴로워 하지 말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지 말고, 분열하지 마.
천천히 나아가면 돼. 화장을 하나씩 줄이고, 선크림을 하루정도 안 발라보고, 짧은 단발로 잘라보고, 레깅스 대신 트레이닝 바지를 입어보고, 원피스 대신 편한 청바지를 찾아보고, 하이힐 대신 발이 편한 운동화를 사보고. 지방흡입이나 주사를 고민하지 말고. 양악을 고민하지 말고. 네 몸에 영향을 끼치는 시술들을 마음속에서 하나씩 버려봐.
천천히 해도 좋아.. 나 2016년에 급하게 후다닥 겉탈코만 했었어. 여전히 예전의 코르셋 사진을 보면서 그리워하고 선망하고 그랬었어. 그러면서 백스텝해서 다시 코르셋 꽉 조이고 살았어.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놓아가다가 2022년 2월에 삭발했어. 지금은 투블럭으로 길렀고 화장 머리 옷 코르셋 하나도 없이 잘 살고 있어. 천천히 해도 돼. 그렇다고 합리화하면서 안주하고 있으라는 말은 아님ㅎㅎ
첫댓글 하나씩 ..벗는게 중요한듯 솔직히 남시선때문에 못하는건데 주변에 탈코가 많아질수록 많은 용기를 얻는중
천천히 해도 좋아.. 나 2016년에 급하게 후다닥 겉탈코만 했었어. 여전히 예전의 코르셋 사진을 보면서 그리워하고 선망하고 그랬었어. 그러면서 백스텝해서 다시 코르셋 꽉 조이고 살았어.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놓아가다가 2022년 2월에 삭발했어. 지금은 투블럭으로 길렀고 화장 머리 옷 코르셋 하나도 없이 잘 살고 있어. 천천히 해도 돼. 그렇다고 합리화하면서 안주하고 있으라는 말은 아님ㅎㅎ
맞아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