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지인이 내가 올린 포스팅을 보고 한강 소설에 역사 왜곡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조갑제TV를 한번 보라고 했다. 참고로 나는 정기구독하는 유튜브 채널이 한군데도 없다. 산책 나갈 때면 그날의 관심사에 따라 이 채널 저 채널 가리지 않고 타이틀 봐서 골라 ‘듣는’ 편이다. 그런데 조갑제TV는 한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알아서 걸러준 모양이다. . 사실 나는 젊은 시절의 조갑제 씨를 알고 있다. 내게 남아있는 그 시절의 조갑제 씨는 영민한 편집장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방송사에 들어가기 전 한때 <마당>이라는 잡지에서 원고 청탁을 받을 때의 일이다. 수많은 필자 중 하나였으니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검색을 해보니 조갑제 씨는 이 잡지의 창간에 관여하고 편집장으로도 활동하다가 1983년에 조선일보로 옮겨갔다고 하니, 기억은 어슴프레하지만 아마도 내가 기고하던 무렵은 81년~82년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하나가 갓 나온 신진이었던 나는 출판사를 다니다 때려치고 한동안은 잡지에 원고를 팔아 살기도 했다. 혼자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웬만한 청탁은 다 소화했다. . 그런데 대부분 에세이성 원고 청탁이었던 데 반해 <마당>의 원고 청탁은 특별했다. ‘취재’를 해서 그 실상을 글로 쓰라는 것이었다. 즉 르포를 주문한 것이었다. 난 ‘르포’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성격은 극 I에 취재란 걸 해본 적도 없는데 도전정신만은 강해서 그걸 덜컥 받았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는 더욱, 방송사나 신문사 같은 백그라운드가 없는 일개 개인이 관이나 기관이나 기업에서 뭔가 정보를 얻어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장벽을 돌파하여 대상의 실체에 파고들기 위해 내 나름대로 궁리를 해서 방법론을 세워야 했다. 첫 원고의 중간 점검 같은 걸 했는데, 편집장은 내게 “남자들보다(당시는 남성중심주의의 시대였다) 훨씬 낫다”며 잡지사에서 제시한 원고매수에 상관없이 “쓰고 싶은 만큼 써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후 나는 <마당>지 르포 필진의 하나가 되었고, 그 르포 기사들은 후에 윤재걸 기자 등과 함께 묶여져 한국 최초의 르포집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즉 젊은 시절의 나는 젊은 시절의 조갑제 씨에게서 칭찬을 들은 사람이며, 그는 내가 르포라이터라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도록 격려 고무해준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 조선일보로 이직한 이후 그의 행적은 간간이 미디어를 통해 전해들었을 뿐이다. 내 기억 속의<마당>지는 진보적 경향의 잡지였던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이제 그는 보수우파의 굳건한 논객으로 자리잡고 있다. . 유튜브로 찾아본 조갑제TV에서 그는 수십년의 세월이 스쳐간 얼굴로 나와 마주했다. 그는 노벨문학상 관련하여 몇 차례 방송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한강의 소설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요즘 한강의 노벨상 수상작을 역사 왜곡이라 주장한 모 작가에 대해 언론이 ‘막말’이라고 한 데 대한 비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작가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선을 긋는 점이 조갑제답다고 할까. 그는 과거 한강의 뉴욕타임즈 기고문을 갖고와 이러한 역사관을 가지고 쓴 소설이라면 그것이 ‘왜곡되었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고 단언한다. 이 문장으로 보았을 때 그는 한강의 소설을 읽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 뿐만 아니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두고 격하게 비난(비판 아님)하는 모든 인사들 역시 진짜로 소설을 읽었는지 의문이다. 그 주장들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기 때문이다. . 첫째, 어떤 문학적 성취에 대한 비판을 하려면 그 작품 내에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정석이다. 특히 상을 잘못 주었다고 주장하려면 말이다. 조갑제TV를 비롯 그들 비판의 근거가 되고 있는 한강의 뉴욕타임즈 기고문을 보니 세상에나, 그건 2017년 10월에 실린 거다. 무려 7년전 기고문에 실린 ‘대리전’이란 단어 하나를 갖고와서 2024년 10월에 발표된 노벨상 수상이 부당하다고 하면 말이 되는가. 정말 한강의 역사관이 소설에 담겨있어 그게 문제라면 소설 속에서 근거를 가져와 제시하고 그것이 문학성을 훼손했다는 것을 논증하면 되는 것이다. . 둘째, 한강의 소설이 좌파 선전 선동을 위해 쓰여졌다는 주장을 하려면, 역시나 그 작품 내에서 어떻게 무엇을 선동하고 있는지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정석이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한번이라도 읽어봤다면 이 소설들이 얼마나 선전 선동에 부적절한 문장으로 구사되고 있는지 대번에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폭력 앞에 내던져진 약자들의 가없는 슬픔이다. 예술은, 특히 문학은 강자와 권력자를 위한 찬양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약자의 고통과 슬픔을 응시할 수밖에 없다. 5.18과 4.3에서 소설 속 화자가 누가 되든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든 그것은 예술가의 자유다. 자신들이 원하는 눈으로 보지 않는다고 문학적 가치가 낮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 셋째,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로부터 창작의 영감을 얻는다.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잘 쓸 수 있는 작가는 없다. 상상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판타지 장르도 사실상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조갑제 씨는 자신은 솔제니친 같은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며, 한강 작가도 향후 정말 절실한 북한인권문제 같은 것을 다루어주기를 바란다(문장이 꼭 이렇지는 않으나 이런 뜻임)는 당부를 하는데, 죄송하지만 공허한 당부가 될 수밖에 없다. 한강은 북한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넷째, 문학은 진영이나 이념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문학상 수상을 폄하하는 데 ‘역사 왜곡’을 이유로 들고 나오는 것은 문학을 예술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도구적 존재로 보는 자신의 시각을 노출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작가라면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므로 스스로도 도구로서의 문학을 할 뿐일 것이다. 그러니까 안타깝지만 김규나 작가는 진정한 작가로서 성공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 여기서 역사적 진상이 무엇인가 하는 논란은 하고 싶지 않다. 단지 문학을 문학으로 본다면, 문학을 문학의 언어로 비평한다면 나올 수 없는 헛소리들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과거에 알았던, 깐깐하고 논리적이고 영민한 편집장 조갑제라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들으리라 믿는다. . 사족으로 댓글에 2017년 슬로우뉴스 링크를 붙여놓겠다. 뉴욕타임즈 기고문이 영역되기 전 한강이 쓴 ‘대리전’ 부분 원문이 소개되어있다. . 사진은 역시 안구정화용으로 아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