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필
이름 : 지안프랑코 졸라 (Gianfranco Zola)
생년월일 : 1966년 7월 5일
국적 : 이탈리아
신장 : 168cm
체중 : 68kg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세컨 스트라이커
클럽 커리어
1984–1986 Nuorese 31 (10)
1986–1989 Torres 88 (21)
1989–1993 Napoli 105 (32)
1993–1996 Parma 102 (49)
1996–2003 Chelsea 229 (59)
2003–2005 Cagliari 74 (22)
Total 629 (193)
국대 커리어
1991–1997 Italy 35 (10)
지도자 커리어
2006-2008 Italy U-21
2008-2010 West Ham United
2012- Watford
아래 글은 제가 가지고 있던 글입니다. 오래 전이라서 정확히 어디서 퍼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꽤 오래 전에 작성된 글이고 내용이 많지만, 졸라가 어떤 선수인가에 대한 글이라서 같이 올려봅니다.
그 많은 스포츠 중,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를 꼽으라면 단연 축구라 할 수 있다. 축구라는 운동이 가지는 특성, 즉 원시적이고 결렬한 몸싸움에 동반되는 가장 남성적인 운동인 동시에 감독간의 두뇌 싸움도 승패를 좌우하는데 큰 요소로 작용하는 것, 단순하지만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축구라는 운동이다. 또한 여러 메이저 스포츠 중에서 선수로서의 수명이 가장 짧은 스포츠라면 이 역시도 축구라고 하는데 큰 이견이 없을 듯 하다.
선수들과 마찰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과격한 태클이 난무하기에 어느 스포츠 종목보다도 부상 위험도가 높기 때문이다. 또 전. 후반 90분 동안, 끊임없이 경기장을 누빌 수 있어야 하는 체력이 가장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기 때문에 만 30세를 넘어서면 이제 노장으로 분류된다. 즉 23-24세쯤에 빛을 보기 시작하는 대다수의 선수들은 27-29세를 전후로 가장 완숙한 경기력을 보유 줄 수 있는 전성기를 거쳐 30세를 넘어서면 서서히 신예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서브 맴버로 내려 않게 되고 35세를 전후로 하여 은퇴를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30이 넘어서도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하는 선수들도 적지 않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만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지난해, 전성기 때 못지 않은 활약을 펼친 베르캄프와 디 카니오가 대표적이고,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98년 아스날의 더블을 달성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며 리그 최강의 수비진을 구성한 아담스, 볼드, 키온, 딕슨, 니젤 윈터번, 5인방은 이미 축구에 있어서는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이든 선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뚜렷하게 증명한 가장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03년, 우리는 또 한명의 노장 스타 플레이어의 부활한 모습을 직접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첼시의 지안프랑코 졸라가 그 주인공이다. 이번 시즌, 졸라의 모습은 예전 졸라가 파르마에서 첼시로 이적한 첫해에 보여 준 그 센세이션한 모습과 비교를 해도 그리 부족함이 없을 듯, 완연히 전성기 시절을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물론 전 잉글랜드 간판 스트라이커, 쉬어러도 다시 잉글랜드 대표팀에 복귀하느냐, 마느냐가 한 때 이슈가 될 정도로 이번 시즌 많은 골을 터트리고는 있지만 졸라의 경우, 쉬어러보다도 많은 나이이고 또 격렬한 수비로 유명한 이탈리아와 몸싸움과 체력이 중요시 되는 잉글랜드 리그에서 모든 선수생활을 보냈다는 점, 거기에다 축구 선수로서는 대단히 왜소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시즌 변함없는 기량을 보여 주는 노장 스타들 중에서 가장 돋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졸라, 베르캄프, 쉬어러… 소위 한물 간 선수들의 뛰어난 활약상은 비단 축구의 흥미를 더욱 높이는 요소뿐만 아니라 그들의 예전 전성기 때를 잊지 못하고 열망했던 수많은 축구팬들에게는 다시 한번 예전의 향수를 진하게 느끼게 하는 소중한 선물이다. 어느 스포츠든지, 팬들은 항상 새로운 스타를 갈망한다. 동시에 점차 시간의 흐름에 순응해 가는 기존의 노장 스타들에게도 팬들은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예전 전성기 시절을 회상한다. 그러나 이번 시즌의 졸라는 팬들에게 ‘예전에 이랬지’라는 회상을 할 필요도 없게 해 주었다. 그가 직접 눈앞에서 예전의 그 화려했던 기량을 다시 한번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의 졸라의 부활을 충격적이었고 동시에 너무나도 반가웠다.
지안프랑코 졸라는 1966년 사르디니아 지방, 전체 인구 8,000명의 작은 도시, 올리에나(Oliena)에서 태어났고 축구 선수로서 매우 작은 신체적 조건(168cm 68kg)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이러한 핸디캡을 화려한 테크닉과 기발한 축구 머리로 커버하면서 결국 세계적인 축구 선수로 성장했다. 졸라의 플레이를 유심히 본 축구팬들이라면, 역대 최고의 선수, 마라도나의 모습을 졸라를 통해 얼핏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졸라가 바로 마라도나가 떠난 이 후, 나폴리에서 '제2의 마라도나'란 영광스런 수식어를 얻으며 팀 공격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왜 그렇게 마라도나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는지 쉽게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다른 선수들 보다 작은 신체적 조건뿐만 아니라 플레이 스타일도 마라도나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물론 불세출의 스타, 마라도나와 졸라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정의하기에는 마라도나라는 이름이 가지는 네임 발류가 너무 대단하지만 말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 89년 '나폴리'로 이적하면서 이다. 나폴리는 80년대 후반, 마라도나가 이적해 오면서 '스쿠데토(scudetto)'를 두 번이나 차지하면서 신흥 강팀으로 부상했다. 비록 마라도나와 졸라 등, 그들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들이 차례로 이적한 이후에는 Serie A와 B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소위 '요요팀'으로 전락했고 이제는 Serie A에서는 도무지 그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지만 80년대 말, 마라도나의 이적으로 시작된 나폴리 시대, 당시에는 남부지방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 인기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마라도나의 인기는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데 특히 그 동안 부유한 북부팀들(유벤투스, AC와 인터 밀란 등)에게 밀려 기가 죽었던 남부 지방의 나폴리 팀인지라 대리 만족을 만끽하게 해준 나폴리는 남부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나폴리의 3대 자랑거리가 항구, 피자 그리고 '마라도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때의 열기는 가히 짐작하기 힘들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폴리 팬들은 마라도나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마라도나의 존재성이 확고부동한 당시에 나폴리에서 졸라는 1990년, 마라도나의 백업 선수로 활약하면서 팀이 스쿠데토를 차지하는데 일조를 하면서 서서히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기발한 플레이와 현란한 드리블, 특히 뛰어난 프리킥 실력은 상대팀 골키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마라도나가 떠난 이후, 졸라가 예전 마라도나가 팀내 차지했던 비중만큼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어느 선수가 마라도나의 공백을 매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최소한 졸라는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고 앞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결국 졸라는 비록 마라도나는 팀을 떠났지만, 그 유명한 카레카(Careca), 폰세카(Fonseca), 페라라(Ferrara) 등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들과 함께 뛰며 팀의 간판 스타로 자리 매김을 했고 4년간 나폴리에서 105경기에 출전, 32골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1991년에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되는데 당시 이탈리아 감독이 그 유명한 아리고 사키(Arrigo Sacchi)였다. 오랫동안 카데나치오로 대변되는 수비 축구에 안주해 왔던 이탈리아 축구 스타일에 일대 변화를 추구했던 사키는 한 시대를 풍미한 명감독이다. 그로 인해 졸라는 첫 대표팀 선발이라는 감격을 맛보았고 이후부터는 꾸준히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졸라와 함께 이탈리아 공격을 이끈 핵심 선수가 바로 전 첼시 감독을 지냈던 비알리였다는 점이다. 두 선수가 함께 첼시 유니폼을 입었던 굴리트 감독 시절, 비알리는 벤치 멤버를 면하지 못했지만 졸라는 항상 퍼스트 초이스였다. 또한 많은 자금을 선수 영입에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부진으로 인해 비알리가 감독직에서 물러날 때, 그들의 불화설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아무튼 90년대 이탈리아 공격의 한축을 담당했던 비알리와 졸라의 인연은 이렇게 91년 부터 시작했다.
93-94 시즌, 그는 이탈리아의 신흥 강팀으로 부상하는 파르마로 이적했다. 그 당시 파르마의 감독이었던 네비오 스칼라(Nevio Scala)는 졸라에게는 특별한 지시를 내리지 않고 선수 본인에게 전적으로 맡기며 자유롭게 플레이(free role) 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며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나타냈다. 결국 그는 파르마로 이적 후, 2년만에 세도우 스트라이커로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감독의 기대에 크게 부응했다. 그 당시 졸라의 공격 파트너가 바로 그 유명한(?) 아스프리아(Asprilla – 전 콜롬비아 국가 대표팀 출신으로, 그 역시도 95-96 시즌 중반 뉴캐슬로 이적해 프리미어 리그 경험이 있는 선수이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뉴캐슬이 맨체스터에게 밀려 아깝게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던 시즌, 아스프리아는 특유의 예측할 수 없는 플레이로 팬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지만 과도한 개인 플레이로 인해 비난도 함께 받았다)였다.
파르마 유니폼을 입은 첫 시즌이었던 94년, 졸라는 비록 결승에서 아스날에게 1-0으로 패했지만 팀이 컵 위너스 컵 결승에 진출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고, 95년, 결승에서 유벤투스를 누르고 UEFA 컵 우승을 차지하는데도 일조를 했다. 즉, 몇 년 전만 해도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무명팀이었던 파르마를 일약 빅7으로 승격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졸라였던 것이다. 물론 재정적인 지원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졸라를 비롯한 스타 플레이들의 만족스러운 활약상은 결국 트로피로 이어지면서 탄탄한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파르마가 엔리코 키에자(Enrico Chiesa)와 이제는 세계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성장한 에르난 크레스포(Herman Crespo) 등 뛰어난 공격수들을 영입하면서 졸라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고, 어느덧 파르마는 더 이상 졸라에게 의존하는 팀이 아니었다, 실제로 졸라는 96-97 시즌 초반, 자신의 조기 교체에 불만을 품고 웃옷을 벗어 던지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전혀 졸라답지 않은 모습으로 기억된다. 또한 유로 96에서 이탈리아는 조예선 '탈락'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는데, 이로 인해 졸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만만치 않은 러시아를 상대로 첫경기를 가졌던 이탈리아는 무난한 2-1 승리를 거두며 산뜻한 출발을 했지만, 체코와의 2차전에서 사키 감독은 러시아전 승리를 거둘 때 포진했던 선수 명단에 대대적인 변화를 준 것이 화근이 되었는지 2-1로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우승까지 내다 본 사키 감독으로서는 베스트 맴버 외의 선수들의 경기력도 체크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 체코전의 패배는 이탈리아의 8강 진출 실패로 이어진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후 이 대회에서 준우승까지 차지한 팀이 체코였지만 만약 체코전에서 이탈리아가 베스트 맴버를 기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지울 수 없다.)
비록 체코, 러시아, 독일과 함께 죽음의 조에 편성되는 불운이 있었지만 아무리 조편성을 핑계로 내세운다 하더라도 8강 진출 실패에 대해서 이탈리아 자국팬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해 팀내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그 중심에 있었던 졸라도 비난을 면치 못했고, 이와 같은 대표팀 상황과 소속팀 파르마에서의 좋지 않은 상황이 맞물려 결국 이적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 그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실제로 자신의 실추된 명성을 회복하려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졸라는 유로 96이 끝나고 얼마지나지 않은 11월, 당시 첼시 감독이었던 루드 굴리트에 의해 프리미어 리그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게 된다. 졸라의 잉글랜드 진출은 당시만 해도 상당히 비중 있는 뉴스 중 하나였다. 비록 잉글랜드로 진출하기 직전 Serie A에서 졸라는 점차 그의 명성에 걸맞은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고 부진 아닌 부진을 겪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솔직히 그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의 리그'라는 Serie A 출신 선수가 다소 평가절하(?)됐던 프리미어 리그로 진출하는 것은 드물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11월에 첼시로 이적해서 단 6개월 동안의 활약만으로 졸라가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잉글랜드에서의 첫 시즌은 마치 이탈리아에서 당한 푸대접(?)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 제 2의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이었다. 그 때를 뒤돌아보면 너무나도 기억에 남는 경기가 많았는데, 특히 FA 컵 윔블던과의 경기에서, (당시까지만 해도 부동의 이탈리아 대표팀 주전 미드필더였던) 디마테오의 패스를 받아 논스톱으로 뒤로 빼면서 180도 턴, 이어서 바로 오른쪽 골포스트 안쪽으로 찔러 넣은 골은 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멋진 골로 기억하고 있다. 그 때 그 시절의 졸라의 기량은 정말 '환상적이다!'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 잠시 1997년 '프리미어 리그 Footballer of the Year'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언급하면, 물론 그 해 시즌 최우수 선수는 여전히 미들스보로의 주닝요의 몫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굳이 이 두 선수를 비교하면, 둘다 팬들의 시선을 끄는 화려한 플레이의 대명사였고 팀 공헌도도 비슷했지만, 한가지 차이점이 바로 '소속팀의 성적'이었다. 주닝요의 경우, 하부 리그로 강등 된 미들스보로의 소속이었다는 점이 수상을 하지 못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주닝요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는 이유는 시즌 중간에 영입한 졸라 보다도 더 많은 경기에 출전하면서 졸라 이상으로 '꾸준함'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 미들스보로에는 에머슨, 라바넬리, 페스타 같은 스타급 선수가 포진하고 있었지만 가히 쥬닝요의 '원맨팀'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당시 주닝요의 활약상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1996-97 시즌은 한마디로, 유로 96에서 초반 탈락한 이탈리아, 그 이탈리아 대표팀 주전 공격수로 활약한 졸라가 그 충격과 팬들의 야유를 딛고 일어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세계 정상급 기량과 팬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화려한 개인기, 동료에게 찬스를 만들어 주는 능력도 탁월하고, 정말 언제 무엇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기발한 플레이 때문에 첼시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이적 당시에는 영어를 거의 못했지만 항상 영어 사전을 들고 다닐 정도로 잉글랜드 생활에 적응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 점 역시 그가 제 컨디션을 회복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97-98 시즌에도 그의 기량은 변함이 없었다. 팀이 필요할 때 골을 성공 시켜주며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첼시의 공격을 주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선수층이 두터운 이탈리아 대표팀이라 하더라도 만약 졸라가 제 컨디션만 유지했으면 98 월드컵 출전도 생각 해 볼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유로 96에서의 아픔을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에게 주지 않았다. 시즌 중간에 당한 부상으로 인해 그는 몇 달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대표팀 탈락의 '치명타'로 작용했다. 물론 델피에로, 바지오, 비에리 등 다수의 뛰어난 공격수를 보유한 팀이 바로 이탈리아 대표팀이라 재발탁을 노리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존재해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94 월드컵에서도 뛰었고 앞서 언급했듯이, 유로 96 본선에서도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활약하면서 A 매치 35경기 출전하여 7골을 기록했다. 특히 1997년 2월 12일에 있은 98 월드컵 예선, 잉글랜드-이탈리아 경기에서, 불리한 원정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1-0으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수가 바로 졸라였다. 본선 직행을 앞두고 길목에서 만난 숙명의 라이벌, 잉글랜드와의 일전, 더욱이 장소는 잉글랜드 축구의 매카라 할 수 있는 웸블리 경기장에서 졸라는 결승골을 성공시켜 이탈리아가 초반 판도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이후, 잉글랜드와는 달리 약팀들에게 승점을 챙기지 못해, 예선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잉글랜드에 밀려 조 2위롤 내려 앉았다. 운명을 판가름 할 예선 마지막 경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정 승리를 거둔 바 있는 잉글랜드와의 홈경기였는데 잉스가 피에 불든 붕대를 감고 부상 투혼을 발휘한 본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는 바람에 결국 플레이 오프를 거쳐 98 월드컵에 진출하게 된다) 그런 그였지만 결국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이다.
부상에서 돌아와서 첫 출전한 경기가 슈트가르트와의 컵 위너스 컵 결승전이었는데 후반 27분 교체 멤버로 들어오자 마자 결승골(1-0 첼시 승)을 성공시키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특히 교체 멤버로 들어 와, '첫 번째 잡은 볼'을 바로 골로 연결시킨 것으로 신문 일면을 장식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었던 세자르 말디니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또한 델피에로, 바지오, 비에리, 인자기의 존재는 노장 졸라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넘기 힘든 벽이었고 뿐만 아니라 자국 리그가 아닌 잉글랜드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핸디캡도 걸림돌이었다.
98-99 시즌에는 월드컵 대표팀 탈락 충격 때문인지 한때 그답지 않은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99-2000 시즌 역시 예전만큼 그런 '카리스마 있는 플레이'는 자주 볼 수 없었다. 적지 않은 나이, 그리고 수준급 선수들이 계속해서 첼시 유니폼을 입는 바람에 졸라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그리고 그는 고향팀 칼리아리(Cagliari)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싶다고 누차 피력한 적이 있어 정말 이탈리아로 돌아 가는 듯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실제로 나폴리 등 몇몇 이탈리아 팀들이 그의 영입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그는 '첼시 잔류'를 선택하면서 첼시에서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 이때부터 그는 이제 한물 갔구나 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한다. 오랜 외국 생활 때문인지 고향 이탈리아를 향한 향수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이탈리아 컴백설로 표현 되어 졌고 2001-2002 시즌에는 여전히 가공할 득점포를 자랑하는 하슬벵크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는 구드욘슨에 밀려 벤치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예전 벤치 맴버로서의 고충을 꺼리김 없이 표출했던 비알리의 아픔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차세대 핀란드를 대표할 선수로 촉망 받았던 포셀에게 마저 밀려 팀내 4번째 초이스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것은 풍부한 인적 자원을 자랑하는 첼시 라인-업에서도 항상 선발 출전을 보장 받았던 졸라로서는 잉글랜드 진출 이후, 처음 겪는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졸라는 팀 내에서 여전히 가장 창의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the most creative player)로, 그의 풍부한 경험과 승부사 기질은 팀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2002-2003 시즌, 첼시는 그 동안 과감한 투자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는데 머무르면서 재정 악화에 허덕이기 시작했고 거기에다 3년 연속 UEFA 컵 조기 탈락으로 인해 팬들에게는 실망감과 충격을, 클럽에게는 안 그래도 어려운 재정에 더 큰 금전적인 타격을 입히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재정 악화는 글랜 호들 감독 취임으로 시작된 캔 베이츠의 구단주의 원대하고 야심 찬 계획(리그 우승을 비롯한 확실한 명문팀으로 자리 매김)에 찬물을 끼얹는 심각한 문제로, 앞으로 첼시 클럽의 운명을 좌우하는 크나큰 변수로 떠올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리그 4위 안에 들어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초반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는 그토록 갈망하는 챔피언스 리그에 다시 진출할 수 있을지 여부가 실로 의심스러운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만만치 않은 강호로 입지를 다져온 첼시의 저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전문가들의 당초 예상보다 빨리 제 페이스를 찾기 시작하는데 리버풀 전 패배 이후, 맨체스터 시티, 웨스트 브롬, 버밍엄 시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초반 슬럼프를 극복하며 리그 테이블 상위권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들, 하위권 팀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은 그 동안 첼시가 우승권에서 멀어졌던 가장 큰 이유, 즉 ‘상위권 팀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반면에 항상 하위권 팀들에게 발목을 잡혀 왔던 그들의 전례’를 타파한 결과라서 첼시로서는 대단히 긍정적인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하위권 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사실 이점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90년대 리그를 호령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굳이 상위권 팀들을 상대로 원하는 승점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유나이티드는 하위권팀들을 상대로는 어떻게 하면 승점 3점을 확실하게 챙길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팀이었다. 반면에 첼시의 경우는 톱 5 팀들만 고려했을 때는 상대 전적이 가장 좋았던 경우가 많았지만 항상 우승권에서 멀어졌던 것이 하위권팀들에게 충분한 승점을 얻지 못하는 그들의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재정 압박에서 오는 부담감, 더불어 지난 시즌 팀의 주득점원을 맹활약한 하슬벵크의 부진까지 맞물려 클럽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첼시에게는 어느 때보다 부진을 타파할 수 있는 돌파구가 절실했다. 사실 이런 외우내환의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항상 거론되는 것이 베테랑 선수들이 분발인데 이러한 시기에 ‘지안프랑코 졸라’가 바로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 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더 위대하게 보인다. 워낙 해외 용병이 많기 때문에 제기되어 온 문제점, 매 경기 이기려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구성원들의 팀에 대한 충성도 및 애정이 낮다는 등이 비판을 불식시키며 첼시가 상승세로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은 단연 졸라가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90년대 중, 후반에 잉글랜드 축구를 관심 있게 지켜본 팬이라면 특히 졸라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졸라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과 차별화된 특유의 현란함을 과시했던 칸토나와 지놀라, 지금도 변함없이 프리미어 리그를 누비며 그들만의 특유의 매직을 보여주는 주닝요, 디 카니오, 베르캄프 등… 항상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했고 또 그것을 잊지 못하는 팬들에게는 현란한 개인기를 지닌 테크닉션들에게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만든다. 타고난 재능, 실질적인 재능에 있어서만은 당대 최고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테크닉션들의 활약상은 그렇기 때문에 축구를 보다 흥미 있게 만드는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테크닉션들의 말로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경우가 적지 않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테크닉션이라 할 수 있는 조지 베스트와 마라도나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데, 뉴캐슬과 토튼햄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지놀라는 이제는 예전의 명성을 잃었고 칸토나, 디 카니오의 경우는 뛰어난 기량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 안팎으로 수많은 말썽을 야기 시킨 선수들이었다. 물론 디 카니오는 지난 시즌,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 그의 실질적인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 주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화려함을 지닌 선수들은 그들 뇌리 뿌리 깊게 박힌 스타 의식으로 인해 자주 구설수에 말려드는 경우가 빈번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속팀 또는 대표팀 감독과의 마찰인데 이러한 경향 때문에 적지 않은 테크닉션들은 가진 재능에 비해 세계정상급으로 통하는 빅클럽에 뛸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미 세계적인 강팀으로 인정 받는 팀들의 경우, 이들의 필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못했고 또한 감독들은 이들의 화려함은 일종의 사치라 생각할 수 있으며 굳이 팀 밸런스를 다시 조절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현역 선수들 중, 아스날에서 오랫동안 활약하고 있는 베르캄프는 예외이고 가장 일반적인 경우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와 같은 예를 들었다) 다시 말해, 스타 의식에 사로 잡혀 화를 자초하는 플레이어들은 팬들에게는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반면에 팀분위기를 저해시키는 요주의 인물로 주로 언급되는 ‘양날의 검’으로 표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졸라에 있어서 만은 이러한 일반적인 시각이 통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졸라와 함께 짝을 이룬 선수들 중에는 대단히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그리 멀리 돌아 보지 않고 단지 첼시에 한정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마크 휴우즈, 비알리, 플로, 하슬벵크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있었는데 한가지 공통점은 이들 모두 졸라에게 수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르셀로나 같은 세계적인 클럽에서 득점 머신으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휴우즈였지만 첼시 유니폼을 입었던 당시만 해도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더 이상 예전 같은 폭발력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졸라와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를 보여 주면서 다시 한번 예전의 명성을 확인시켜 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막강 공격진을 보유한 첼시의 퍼스트 초이스 스트라이커로 첼시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 낼 수 있었다.
노르웨이 출신, 플로 역시 첼시 시절에는 그의 길지 않은 축구 인생에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시기였고 실제로 15-20m 파운드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몸값에 거론될 정도로 급성장을 한 선수였다. 이렇게 메이저 스트라이커로 유럽 축구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졸라의 어시스트였다. 물론 그 당시에 선수들의 몸값은 거품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고 해도 당시의 플로의 기량은 테크닉이 없다라는 북유럽 출신 선수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을 만큼 탁월했는데 그의 기량을 100% 이끌어 낸 졸라의 경기 운영 능력이 없었다면 과연 단시간에 그렇게 급성장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휴우즈, 플로에 가려 벤치 맴버에 머물며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전 이탈리아 대표팀 간판 스타 비알리 역시 그에게 기회가 줄 때면 항상 뒤를 받치고 있는 졸라가 있었다. 비알리가 첼시에서 명성만큼 큰 활약을 했다고 말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이탈리아 출신이며 적재적소로 패스를 공급해 주는 졸라의 존재가 다소나마 그의 컨디션을 회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것은 곧 중요한 시기에 비알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만든 기폭제였다. 하슬벵크 역시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구드욘슨과 함께 지난 시즌 첼시 공격을 주도했던 하슬벵크였지만 이번 시즌 초반에는 부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졸라의 능숙한 경기 운영 능력에 도움을 받으며 점차 예전의 기량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졸라는 그의 탁월한 개인 능력뿐만 아니라 팀을 위해서 특정 선수들의 능력을 어떻게 이끌어 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선수이다. 그리고 졸라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그의 프리킥 능력이다. 99-2000 시즌 마히일로비치(라치오)가 경신하기 전까지, ‘Serie A 최다 프리킥 골'을 기록한 선수가 바로 졸라였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데드볼 스페샬리스트’로 명성은 높은 졸라는 놀라운 성공률을 자랑하는 직접 슈팅뿐만 아니라 정확한 킥력을 바탕으로 위력적인 세트-피스의 중심에 있는 선수이다. 또한 윙어, 포워드, 플레이메이커 등 공격 라인에 있어서 어느 자리에 포진하더라도 100% 감독이 원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머리와 능력이 있어 감독으로서는 그만큼 전술 변화의 폭을 넓힐 수 있어 융통성 있는 전술 운용을 가능케 한다. 이렇듯 졸라의 장점은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들만큼 많다.
사실 축구라는 운동 자체가 특정 선수 한, 두명에게 의존해서는 결코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아무리 한명의 선수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농구, 야구와는 달리 그 한명의 선수만으로는 경기 전체를 지배할 수 없다. 넓은 경기장, 그리고 22명의 선수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시점에서 단 한 선수만 유독 특출 나게 보일 수 있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시즌, 첼시 경기를 보면 졸라의, 졸라에 의한, 졸라를 위한 경기가 적지 않다. 전성기였으면 워낙 뛰어난 선수이니까 하며 어느 정도 이해 할 수도 있지만 백전노장이 여전히 그러한 경기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은 감탄을 넘어서 이제 존경심마저 들 정도다.
처음 잉글랜드 진출 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졸라는 서툰 영어로 유니폼이 너무 커서 항상 소매를 걷어 입는다 라는 표현을 “I need M, not L, so I have to…”-이후에는 소매를 걷는 제스처를 보여 주었다- 으로 대신한 바 있다. 비록 영어 몇 마디 하지 않은 짧은 인터뷰였지만 개인적으로 그 때 그 장면에서 조금이나마 졸라의 유머 감각과 어째서 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인간적이고 활발한 성격을 느낄 수 있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번뜩이고 재치 있는 축구 실력뿐만 아니라 따뜻한 인간성과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낙천적인 성격은 이탈리아 출신의 이방인이지만 잉글랜드 팬들에게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엄청난 사랑을 받는데 큰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그에 대한 첼시팬들의 사랑은 여타 잉글랜드 출신 선수들도 부럽지 않을 수준이다.
그렇다. 졸라는 외국 용병들이 많기로 유명한 첼시 구단이지만 팀에 대한 진정한 충성도와 애정을 가지고 있고 이뿐만 아니라 시간을 잊게 하는 그의 몸 관리, 다른 동료들과 화합하는 그의 대인 관계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선수이다. 이러한 착실한 모습이 결국 이번 시즌 다시 보지 못할 뻔한 ‘예전의 졸라’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선수 생활을 이어갈지는 알 수 없다. 그 동안 이적 시장에 큰손 역할을 했던 첼시인 만큼 매 시즌 활발한 선수 영입을 할 때마다 졸라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물음표가 누차 재기되었던 점을 비추어 볼 때, 그도 어느덧 예전만큼의 존재성을 상실해 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팀이 위기에 처했을 때 첼시팬들에게 그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선수는 첼시로 이적한 약 7년 전과 변함없이 항상 졸라였다 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졸라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전반적인 선수 생활을 되돌아보면, 이탈리아에서도, 잉글랜드에서도 '영웅'으로 추앙 받기도 했고, Serie A 우승(나폴리), UEFA 컵 우승(파르마), 리그 컵, 컵 위너스 컵, 슈퍼 컵, FA 컵 우승(첼시)등 챔피언스 리그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한 몇 안 되는 선수이다. 그래서 가히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출중한 기량에 비하면 이것마저도 모자란다는 생각에 구구절절 졸라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그래서 다소 글이 졸라에 대한 감정적인 찬양으로 흘러간 듯 하지만 그 동안 졸라의 행보를 주시해 왔던 축구팬들이라면 이러한 찬사 일변도에 대해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
70년대 첼시의 황금기를 이끌던 주역 피터 오스굿(Peter Osgood)은 스템포드 브릿지의 레전드라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말을 빌리자면 졸라는 그 동안 첼시를 거쳐 간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선수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미 첼시에서는 전설이 되어버린 졸라… 베르캄프만큼이나 수많은 멋진 골로 팬들의 열렬한 성원에 보답해 왔던 졸라… 후배 선수들에게 프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장 모범적인 답안을 몸소 보여 주고 있는 졸라… 이번 시즌 너무나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줘, 당초 기대치를 훌쩍 넘어서는 바람에 되려 그의 기량을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에 미안함마저 들게 만드는 졸라… 그의 현란하고 아름다웠던 일련의 플레이들은 팬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 그가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첼시에 대한 애정과 축구에 대한 열정을 보여줘 선수 생활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했으면 하는 바램 외에는 개인적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1998년부터 해외축구를 찾아서봤던 저에게는... 당연히 졸라가 드록바보다 더!!!!!!!! 라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네요.. 물론 드록바도 제가 엄청 좋아하는 선수지만; 스폐셜에 나오는 졸라만 보고 드록바가 우승도하고 더 임팩트 있고 득점왕도 하고 그래서 일 수가 있겠지만... 졸라경기를 봐왔던 저로서는 졸라라고!
첫댓글 졸라..
졸라 짱나의 어원...
22222222
드록바인줄 알았던 1인
222
졸라잘하네
제목보고 졸라일걸 예상했음
졸라의 재림은 아자르가...
1998년부터 해외축구를 찾아서봤던 저에게는...
당연히 졸라가 드록바보다 더!!!!!!!! 라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네요..
물론 드록바도 제가 엄청 좋아하는 선수지만;
스폐셜에 나오는 졸라만 보고 드록바가 우승도하고 더 임팩트 있고 득점왕도 하고 그래서 일 수가 있겠지만...
졸라경기를 봐왔던 저로서는 졸라라고!
축구졸라잘함
벤스틸러닮앗음
키 작은 반니
졸라 잘하네
드록바 아닌가 이제
졸라형 ㅠㅠ
졸라 마킹 유니폼있는데......아무도 못알아봐.........괜히삿나 싶엇음.....
와우
첼시에게 챔스우승컵을 안긴 드록바지만 졸라에 한표 ㅋ
순간폭발력만 최상급이었으면, 이건 진짜 마라도나에 버금갈 정도였을듯... 못하는게 없네;; 마스터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