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문종)는 반드시 나 같은 임금이 되어야 한다.’ 세자를 당신 같은 성군으로 키우려 했던 세종대왕의 노심초사가 서려있는 계조당이 오는 8월31일 마무리를 목표로 복원공사 중이다. ‘계조(繼照)’는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하여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주역>의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다. 따라서 ‘계조’는 왕위계승을 뜻한다.
계조당은 고종 때 재건하고(1866), 25년 뒤 보수(1891)했다. 계조당 보수 뒤 고종은 “1443년 계조당을 세웠고, 세자(문종)가 곧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고 하면서 “동궁(순종)은 훗날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고 계조당을 재건한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고종이 계조당을 재건한지 20여 년 만에 국권이 탈취되고 말았다.
계조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1443년(세종 25) 5월12일이었다. <세종실록>은 “왕세자(문종)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전각을 건춘문 안에 짓고, 이름을 계조당’이라 했다”고 했다. 즉 왕세자(문종)가 국왕(세종)을 대신해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고 정사를 펼치는 정당(正堂)으로 건립된 것이다.
보통 3세 때부터 시작되는 후계자의 양성은 나라의 근본, 즉 국본을 튼튼히 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맏형(양녕대군·1394~1462)이 세자였고, 더구나 셋째 왕자였다. 왕권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맏형이 폐위되고(1418년 6월 3일) 둘째형(효령대군·1396~1486)까지 건너뛰고 졸지에 세자위를 물려받았다. 그런 다음 8월11일 태종의 선위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불과 두 달 여 만에 대군에서 세자, 세자에서 군왕으로 발탁된 것이다. 물론 왕자 시절에도 부왕(태종)으로부터 큰일에 결단하는 데에는 충녕에 견줄 사람이 없다는 극찬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왕위가 그리 만만한 자리는 아니다. 예부터 군주의 정사를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했다. 그래서 만기친람(萬機親覽)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군주가 하루 처리해야 할 일이 1만 가지나 된다고 해서 나온 표현이다. 세종은 졸지에 국왕이 된 당신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바로 대리청정이었습니다.
1437년(세종 19) 세종이 대리청정의 의지를 공식 언급한 다른 이유도 있었다. “왕위에 오른지 20년이 다가오는데 조금도 다스린 효과가 없구나. 해마다 수재를 만나 기근이 끊이지 않고, 도적떼가 날로 창궐해서…물러나 하늘의 문책에 답하고자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다….”(3월27일) <세종실록>은 “임금(세종)이 전 해(1436년) 가을부터 대리청정의 뜻을 밝혔다가 반대에 부딪혀 결심을 접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20년간 다스린 효과가 없다”는 세종의 말은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세종의 시대(1418~1450)는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은 건국 초였다. 인심이 흉흉했고, 범죄가 들끓었다. 1439년(세종 21) 12월15일 세종은 “복역 중인 사형수가 190명에 달하니 감형 좀 하면 어떠겠느냐”고 운을 뗐다. 세종은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가 되니 내가 부끄럽게 여긴다”고 반성했다. 이건 약과였다.
왕실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의 황금술잔과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의 은찬(銀瓚·제기)까지도 털렸고 온 백성이 들끓는 도둑들을 원망하며 그 고기를 씹고자 해도 어쩔 줄 몰랐다는 기사도 등장한다. 그래서 세종이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대리청정을 모색했던 것이다.
건강악화도 세종의 발목을 잡았다. 세종은 타고난 ‘공부벌레’이자 ‘일벌레’였다. 책 한 권을 최소한 100번씩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또 날마다 새벽 2~3시에 일어나 하루 평균 20시간씩 격무에 시달렸다. 그러니 건강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몸이 뚱뚱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막 즉위한 세종에게 “주상은 몸이 뚱뚱한데 때때로 나와 놀면서 살 좀 빼야 한다”고 권했다. 그뿐 아니라 태종은 주상(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한다고 걱정하는 유언까지 남겼다.
그러나 이때는 “내가 본디 병이 없고 늙지도 어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뒷날에 병이 날까봐 염려하겠느냐”고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것은 젊었을 적의 자신감이었다. 공부와 정사에 매달릴수록 심신이 급격히 약해졌다. 결국 왕위에 오른지 20년이 가까워지는 1436년말~1437년초 사이에 대리청정을 공식 거론한 것이다.
세종은 “나이 40을 넘겼지만 이제 예지(銳志)가 흐려져 90세 늙은이나 다름없다”면서 게다가 병까지 생겨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정사를 보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세종은 “세자의 나이도 스무살을 넘겼고 경전과 사서도 고루 보았으며, 지기(志氣)가 왕성하여 능력이 있을 만한 때가 아니냐”면서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다 넘긴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인사권과 병권, 형벌권, 외교사절 접견 등 국가의 대사는 과인이 맡을 것”이라 했다.
세종의 치세가 20년이 넘어가자 건강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세종은 급기야 하루에 한 동이 이상 물을 마시는 병(당뇨병)이 있고, 등 위에 부종(浮腫)을 앓고 있었으며, 임질(요로결석)까지 걸렸다. 세종은 당뇨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눈앞의 사람마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호소했다.
세종은 1436년말~1437년초 사이에 대리청정을 공식 거론한다. “나이 40을 넘겼지만 예지(銳志)가 흐려져 90세 늙은이나 다름없다”면서 “게다가 병까지 생겨서 정사를 보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대리청정 할 뜻을 표명했다. 세종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정책을 두고는 결코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종은 1442년(세종 28) 6월16일 “이제 그대들과 토론하자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명을 전하는 것일 뿐”이라면서 세자궁에 대리청정을 담당할 관청(첨사원)까지 두라고 지시한다. 신료들은 국왕의 명령을 받드는 승정원이 있는데, 세자의 명을 받잡는 첨사원까지 생긴다면 어찌되겠느냐고 아우성쳤다. 명령이 승정원과 첨사원 등 두 군데서 나온다면 큰 혼란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였다. 대리청정을 마침내 관철시킨 세종은 계조당을 세울 때 남쪽을 향하도록 배치했다. 세자가 군주 대행이므로 군주의 자리인 남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료들 중에 “세자가 정무에 참여하더라도 반드시 승정원에서 그 명을 출납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세종이 첨사원 설치의 명을 내리자 기존 세자의 대리청정 이야기는 어느새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세종은 한때(1439년) 꺼냈다가 포기한 세자의 ‘강무 주재 건’도 기어코 성사시킨다. 강무(講武)는 국왕의 친림 아래 실시하는 수렵대회를 겸한 군사훈련이다.
이렇게 대리청정을 성공시킨 세종은 1443년 4월17일 세자가 신료들의 조회를 받으며 정사를 펼칠 정당(집무실)을 세웠다. 그것이 계조당이다. 세종은 원래 계조당을 남쪽을 향해 지었다. 세자가 남쪽을 향해서 정사를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대소신료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남쪽은 오로지 군주가 정사를 펼칠 때 앉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신료들은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다”며 일제히 반대했다. 결국 세자는 계조당 안에서 서쪽을 향하는 ‘서면’으로 대신들을 맞는 것으로 결정됐다.
아버지가 쳐준 든든한 울타리 속에서 세자(문종)는 29살 때인 1442년(세종 24)부터 사실상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닮아 학문을 좋아했던 세자(문종)는 한밤에 인적이 뜸해지면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 학사가 숙직하는 거처까지 걸어와 밤새도록 토론했다. 그래서 집현전 숙직자들은 감히 의대를 풀지 못했다. 효성 또한 대단했다. 아버지(세종)가 앵두를 즐기자 세자는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었다. 세종은 세자가 따주는 앵두를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앵두가 어찌 세자의 손수 심은 것과 같겠느냐”고 좋아했다.
그러나 문종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지(1450년 2월) 불과 2년 3개월 만(1452년 5월)에 39살의 춘추로 승하한다. 원체 병약했던 데다 어머니(소헌왕후·1395~1446)와 아버지(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3년상을 잇달아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것이다. 재위기간으로만 보면 너무 짧았다. 그러나 대리청정까지 합한다면 문종의 치세는 사실상 10년 정도는 된다. 그 사이 세종은 웬만한 정사를 아들에게 넘기고 훈민정음 창제(1443) 및 반포(1446)에 전념할 수 있었다.
문종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다. 1441년 4월29일자 <세종실록>에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등장한다. “세자(문종)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 올 때마다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다.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 세종의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 발명가가 다름 아닌 세자(문종)였던 것이다. <세종실록>은 “문종이 천문을 잘 관측하고 후기(候氣)에 정교하여, 우레가 어느 때에 치고 어느 방위에서 일어난다고 예언하면 반드시 적중했다”고 덧붙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절세의 성군(세종)이 승하했지만 권력의 공백은 없었다. 모두 대리청정의 덕분이었다. 문종은 특히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궁중에 참석하여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던 일)를 허락했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지위가 낮은 신하라도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말씨로 응대해서 언로를 활짝 열었다”고 전했다. 또 이민족과의 전쟁·전란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혹시나 있을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고자 했다. 2년 3개월의 짧은 치세치고는 만만치 않은 업적임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성군 아버지(세종)의 후계자 이양 방안, 즉 ‘8년여 대리청정’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종이 너무 일찍 승하하는 바람에 세자(단종·재위 1452~1455)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잇는 불행이 찾아왔다. 만약 문종이 오래 왕위에 있었다면 계유정난(1453)과 같은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왕의 등극으로 쓸모가 없어진 계조당은 단종 즉위년(1452년) 9년만에 헐리고 만다. 그래도 대리청정은 후대 왕세자의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의 모델로 활용됐다. 바로 경종(재위 1720~1724)과 영조(재위 1724~1776), 장조(사도세자·생몰 1735~1762), 정조(재위 1776~1800, 익종(효명세자·생몰 1809~1830) 등의 대리청정이다. 지금 복원 막바지에 임박한 경복궁 계조당에는 성군의 정치를 잇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염원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