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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수필집담회(隨筆集談會) 토론 모임
1. 일시 : 2018.12.11(화) 15:00 ~ 17:00
2. 장소 : 대구수필문예대학 강의실(성안오피스텔 16층)
3. 초청 패널 : 이동민 작가(수필문예대학장)
4. 발표주제
독서행위 (저자 - 작품(텍스트) - 독자)
(저자와 독자는 작품을 통하여 어떻게 만날까?)
5. 나의 수필쓰기(작품 예시) : 귀, 귀, 귀(이미영 작가)
6. 걸음 하실 분 : 수필집담회 회원
* 패널의 주제 발표에 대한 토론을 하고 그후 작품을 예시로 들어 의견을 교환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원이 아니시더라도 관심있으신 분 참석하셔도 됩니다. 환영하겠습니다.
《발표 주제》
독서행위 (저자 - 작품(텍스트) - 독자)
(저자와 독자는 작품을 통하여 어떻게 만날까?)
저자와 작품 그리고 독자는 문학의 3대 요소이다. 문학의 요소에 독자가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지금까지는 무시당해 온 부분이었다. 독자가 없다면 독서란 존재할 수 없다. 독서를 통해서 작가 - 작품 - 독자의 관계가 형성한다. 작품은 독자의 읽기로서 완성된다고 말한다. 독자는 작품을 완성시키는 사람이다. 독서행위를 하면서 우리는 작가와 작품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독자인 나 자신은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독서이론에 의하면 책을 읽는 나는 작가만큼이나, 작품만큼이나 중요하다.
독서는 독자가 책을 찾으므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책을 찾아서 읽을까?
바르트는 ‘독서란 유희 행위이다.’라고 했다. 유희가 일어나는 장소는 작가와 작품과 독자가 만들어 내는 공간(장소)이라고 했다. 유희는 즐거움을 찾는 행위이다. 즐거움은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나타난다. 욕망의 바탕은 몸이다.(독서에서는 독자의 몸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몸이 원하는 것(매혹, 휴식, 고통, 쾌락, 심심함 등의 혼합, 즉 독자의 욕망이다.)을 채워주기 위해서 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료하고 심심해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책을 찾는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아서 재미가 없을 때, 욕망을 채워서 재미를 느끼려고 책을 찾는다.(지식을 구하려는 욕망도 호기심이라는 본능적인 행위라고 한다.)
바르트가 쓴 글을 직접 읽어 보면서 독서가 일어나는 행위를 보기로 하자.
“고통과 불의에 처했을 때 나는 눈물을 터트리기 위해 지붕 밑의 공부방 옆에 있는 (아이리스 꽃 향내가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 이곳에는 창을 통해 꽃 향내도 들어왔고, 루생빌르팽 탑도 보였다.-- 화장실은 오랫동안 나의 피난처였다. 그곳만이 독서, 몽상, 눈물, 쾌락 같은 절대적인 고독을 필요로 하는 나의 탐익의 장소이다. 내가 열쇠로 잠글 수 있는 유일한 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분석해보면 저자(바르트)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이유는 고통과 불의가 찾아와서(욕망이다.) 외부의 현실을 피하는 방법으로 몽상하려고, 혹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은밀한 몸짓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책을 읽었다. 현실에서 도망하여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므로(몽상하고, 눈물을 흘리므로) 행복한 고립이 된다. 독서는 고립된 나만의 공간에 몰래 숨어서 하는 행위이다. 독서행위란 떠들썩한 놀이가 아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망과 은밀하고, 조용하게 나누는 대화인 동시에 만족을 얻으려는 놀이인 것이다. 어떤 분위기에서 독서행위가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라면 독서는 몸이 원할 때, 즉 심심할 때, 고통스러울 때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이다.)
두 번 째로 알 수 있는 것은 독서를 통하여 행복함을 맛보는 것은 몸이 감동하여 반응하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하여 감동을 느낄 때는 우리 몸이 반응한다. 독서 안에는 우리의 몸이 감동을 느끼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매혹도 있고, 휴식도 있고, 쾌락도 있다. 심지어는 고통도 있다. 우리는 독서를 통하여 내밀한 몸짓을 한다. 즉 감동하는 몸을 만들어 낸다. 독자와 책 사이에는 몸이 개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어려운 심리학 이론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몸의 감각기관에 부딪힘으로 나타나는 감각적 흥분은 운동으로 방출하는 장치로 구조화 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절박성은(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가슴이 답답하면 숨을 쉬는 따위의 육체적 행위) 육체적 욕구의 형태로 심리 장치를 건드립니다. 감각적 흥분이란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내적흥분이고 감정흥분의 변화는 육체적 운동으로 표현한다는 말입니다. 독서에서 즐거움을 느끼면, 즉 감각적 흥분을 느끼면 육체적으로 반응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어렵지요. 그래서 유희와 같다는 것입니다.)
바르트의 독서에 대한 설명을 쉽게 요약하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심심할 때(욕망이 충족되지 못하여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때) 책을 찾는다. 이때는 책만이 아니고 텔레비전을 켤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친구를 찾아 집 밖으로 나설 수도 있다. 그렇게 하여 감각적 흥분을 찾으려고 한다.
문학 작품은 작가가 독자에게 의미를 강제로 주입하는 장치가 아니다. 독자가 독서를 위하여 작품을 선택할 때만이 의미의 전달이 가능하다. 독자는 작가가 주는 의미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작품을 선택하는, 말하자면 능동적인 수용자이다. 독자가 작품을 선택할 때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이다. 기분전환을 위해서거나, 친구처럼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선택한다. 책에서 얻은 정보를 나와 비교하거나(책 속의 인물을 나와 비교해본다는 말이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책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책에서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내용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1.독자가 선택하는 내용이라고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인간은 작가이든, 독자이든, 삶이나, 심리까지 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봅니다. (예 ; 프롭의 민담론.) 선택하는 내용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2. 현대 문화이론에 의하면 예술작품도 상품이다.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팔리는 상품을 제작하는 것과 유사하다.)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는) 소설이나 수필은 독서가 소비가 된다. 작가는 소설의 소비(독서)를 위해서 소비가 가능한 감정도 투입하고, 이야기도 만든다. 문학작품도 소비라는 관점에서 보면 物神性을 전재하는 상품일 뿐이다.
독자는 작품의 스토리(또는 내용)에 밀착하여 자신의 감정을 이입함으로 작품을 읽는다. 작품에 독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작품이 빚어내는 언어유희에 몰입하는 독서와는 다르다. 말하자면 재미만을 맛보기 위한 독서와는 다르다.
작가는 작품이 독자에게 최대한의 울림을 주도록 글을 쓴다. 이와 같이 글을 쓰는 방식에는 작가가 작품에 자신의 욕망을 담는다. 독자는 감정이입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작가의 욕망과 합류시킨다. 저자와 독자는 서로의 몸으로 표현되는 욕망을 함께 함으로 공감의 끈으로 맺어진다.
또 하나는 작가의 문체이다.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이냐, 감성적으로 미화한 문체이냐에 따라서 독자의 반응이 달라진다. 문체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과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는 인격체로서의 관계가 아니다(인격체로서 관계라는 말은 책 속의 인물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격을 갖춘 인간이라는 뜻이다). 감정이라는 표피와 관계있다.
글은 사람이다, 라는 전통 이론에 따르다 보면 작가는 글에다 인격을 담으려 한다. 그러나 글 속의 사람은 개개인이 갖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적인 모습이란 개개인이 사회 속에서 부대끼면 살아오는 동안에 만들어진 주체로서 인간을 말한다.(주체란 개인사적이고, 문화적인 사람을 말한다. 삶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인격체라고 하면 사회적 가치에 부합하도록 자신을 가공한 형태에 가깝다.)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상품을 만들어내려면 작가가 자신의 욕망만을 표현하기보다는 독자의 욕망을 살펴보는 배려가 필요하다. 작가와 독자는 자신들의 의도를 투여한 작품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만난다.
작가가 욕망을 일방적으로 표현할 수 없고 독자의 눈치를 봐야 함으로 오늘의 독서 이론에서는 ‘저자의 죽음’을 말한다. 작품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독자에게로 돌아와서 숨을 쉬게 되는 것을 말한다. 독자에게 돌아왔다고 하여 위인전처럼 인격체로서 돌아 온 것이 아니고 욕망에서 만들어지는 허구적인 주체로, 작품에서 만들어진 주체로, 분산된 기호로서(이 말은 무척 어려운 말입니다. 기호로서 돌아왔다는 것은 작품에서 실재의 인격체로서가 아니고 상징하는 의미로, 이미지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돌아왔다. 따라서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를 작품의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는 투사나 동일시를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 동안에 작가를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는 뜻이다.
(롤랑 바르트가 파리마치 지의 표지 사진에서 읽기를 했습니다. ‘기호’란 우리도 읽기를 그렇게 한다는 뜻입니다.)
독자가 작품을 통해서 작가를 간접적으로 안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자의 역할을 독자반응이론으로 알아보자. 독자가 작품을 대할 때는 자신의 인생에서 얻은 경험과 지적 공동체와 연계하여 이해한다. 지적 공동체(지식을 공유한)와 경험은 독자의 의식을 만들고, 독자는 자신의 의식으로 작가가 아닌 작품을 읽는다. 독자의 의식이 페미니즘적이냐, 구조주의적이냐에 따라서 읽기도 페미니즘적이 되기도 하고, 구조주의적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의식이 정해지면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능동적으로 찾아 나선다.
이때의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서 독자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 버린다. (독서란 독자가 겪는 사건이지 작가가 겪는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을 독자들은 자신의 독법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읽는다. 말하자면 작품(텍스트)은 독자에게 자극을 주고,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와주는 안내판 역할을 한다. 이 말은 독자가 자기 멋대로 상상을 하게하고, 작품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면 작품의 줄거리나. 의미 내용들이 독자가 작품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는 뜻이다.
독자의 의식에는 자신의 욕망이 들어있다. 몸으로 느끼는 욕망이 들어 있지 않은 작품은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고, 물리적인 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진 ‘언어의 거품’일 뿐이다. 우리는 이처럼 지식으로 작품을 읽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를 감동시키는 작품은 독자가 자신의 욕망을 작품과 교류하는 공간(무대)에 등장시켜서 즐거움을 주는 텍스트(작품)이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독서란 근본적으로 저자와 작품, 텍스트의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언어유희이다.’라고 했다. (*텍스트는 의미가 들어 있는 글을 말한다.) 읽기는 작가의 의도, 작품의 의도, 그리고 독자의 의도가 서로 뒤엉켜서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 답을 찾으려는 유희이다.
이 이론을 수필에 적용하면 작가가 지식과 가치관만을 강요하는 교시문학이라는 분류는 잘못이다. 수정해야 한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욕망하는 것을 채워주는, 언어유희로서의 글을 써야 한다. 그럴 때라야 독자들은 수필을 읽는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가치도 전달된다.
(** 독서 이론을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인간은 각자 어머니의 뱃속에서 탯줄로 영양을 공급받고 생존한다. 따라서 사람마다 어머니가 다르므로 서로 다른 개인사적인 가치가 형성된다. 그러나 탄생과 더불어 탯줄은 끊어지고, 사회 속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사회학자의 말로는 사회 속에 던져져도 여전히 탯줄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아야 산다. 이때 공급받는 영양은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에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은 같은 영양을 공급 받는다. 따라서 각 개인은 개인사적인 경험과, 사회에서 받아들인 가치 등으로 서로 간에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진다. 따라서 독서 행위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도 깨닫는다.)
*** 우리 모임에서 수필이론을 공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대하여 일부에서는 수필쓰기 공부에 너무 이론에 치우친다면서, 우리가 공부하는 수필이론을 부담스러워하는 회원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독서이론은 형이상학적인 고급 이론이 아니고 글쓰기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쉬운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예학의 책에서는 독서이론을 가디머, 야우스, 이저, 후설, 잉가르덴이라는 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해석학, 현상학, 기호학이라는 학문으로 설명을 합니다. 철학적 명제를 담아서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문예이론으로서 수용미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문 이론가들이라면 이들을 연구하겠지만, 우리 모임에서 공부하는 이론은 머리가 아픈 이들의 이론이 아니고 글쓰기 실제와 관계있는 쉬운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입니다.
나의 수필쓰기(작품 예시) : 귀, 귀, 귀(이미영)
귀, 귀, 귀
# 1
건너편 아파트의 불빛이 또렷해 질 무렵 후줄근해진 교복을 입은 아들이 현관문을 들어선다. 휴대전화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신발을 훌쩍 벗는다. 입을 떼는 둥 마는 둥 들리거나 말거나 자신이 돌아왔다는 신호를 보낸다.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듯 제 방으로 들어가 휴대전화를 충전한다. 컴퓨터 전원을 켠다. 키보드 옆에 놓아 둔 헤드폰을 쓴다. 늦어서야 돌아온 아들이 안쓰러운 듯 먹을거리를 들고 엄마가 방문을 두드린다. 반응이 없는 방안 사정을 살펴보며 조심스레 들어선다. 원래부터 제 몸과 하나인 것처럼 커다란 헤드폰이 먼저 보인다.
한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것을 슬쩍 들고는 “알았어요.” 한다. 전후사정을 풀어 놓지 않고도 아들은 “알았어요.” 하고 엄마는 “알았어?” 한다. 헤드폰을 쓰고 있으면 청력을 해친다,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엄마가 잔소리를 보탠다. 앞서 “괜찮아요.” 하고 “괜찮아?” 한다. 듣기는 들었다는 표시인지 말문을 막으려는 뜻인지 아들은 서둘러 “괜찮아요.” 하고 엄마는 “괜찮아?” 한다. 커다란 솜뭉치 같은 것을 귀에 두른 아들은 머리를 까딱까딱 거린다. 멍하니 옆모습만 바라보는 엄마는 한숨을 뱉어 내고는 방문을 닫는다.
어느 새 자정이 넘어선다. 방문을 빠끔히 열고 아들의 기척을 살펴본다. 여전히 귀는 덮여 있고 눈은 책에 고정된 채로 손에 얹힌 펜이 뱅글뱅글 돌아간다. 무엇을 알았고 무엇이 괜찮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아들은 먼저 마침표를 찍었고 뒤이어 엄마는 물음표를 던진다.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2
늦은 저녁 시간 빈대떡집이다. 남자는 술잔을 기울이며 앞에 앉은 이의 연설에 귀를 모은다. 앉을 자리가 없이 꽉 들어 찬 주점 안은 전쟁터마냥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 요란스럽다. “거기 투자 한번 해 봐, 확실하다더라.” “그래? 그래!” 남자는 고성이 오가는 술자리에서 좀 더 자세히 들어 보겠다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다. “그렇지? 맞지!” 술자리는 금세 투자 상담처가 된다. 취기가 오르는 만큼 귀는 더 달아오른다.
벌써 여러 해 전, 동창 모임에서 다음 주에 갚겠다는 말만 믿고 돈을 건네주었다. 다음 주는 다음 달이 되었고 하마 몇 년이 흘렀다. 다정하게 속삭이던 동창은 전화연락마저도 끊은 지 오래다. 남자는 언제부터 술기운이 오른 웅성거림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리지 않는 모임의 한가운데에 있다. 쉬이 거절하지 못하는 탓에 술자리라면 단골손님처럼 불려 다니기도 한다.
혹시나 인기척으로 식구들이 깨기라도 할세라 손끝에 힘을 주고 문을 연다. 진공상태마냥 움직임이 없는 집 안에 대문 여닫는 소리가 울린다. 아이들이며 아내가 제 방에서 나와 맞이한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야단맞은 아이처럼 살금살금 까치발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어색하다.
#3
아침상을 물리고 집안 정리가 대충 끝이 난 시간이다. 여자의 휴대전화가 몸부림을 친다. 머리는 모임을 줄이고 인간관계도 추려내라고 명령하지만 몸은 여전히 습관을 따라 월요일 점심, 화요일 밤, 목요일 점심, 셋째 주 토요일 그리고 수시접수처를 바쁘게 오간다. 촘촘히 이어진 연결의 매듭을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대접에서 김이 설설 피어오르는 칼국수 집이다. 누구네 남편은 사업이 나날이 번창한다더라. 어느 집은 시댁에서 미리 유산을 나누어 주었다더라. 언제부터 국수에 힘줄이 들어 앉아 있었던지 질겨서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 날이 그날 같은 여자의 남편이 떠오른다. 시댁에 용돈을 보내드리는 날에 둘러둔 붉은 동그라미가 오버랩 되어 다가온다.
다시 며칠 후 청국장 가게 안이다. 모임의 한 여인이 남편의 승진 턱을 내겠다고 점심값은 걱정 말라며 목소리에 힘을 준다. 벌써 몇 차례 승진이다, 명문대 진학이다 하여 배불리 대접을 받은 터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나는, 나만” 하는 소리가 이명처럼 떠나지 않는다.
칼국수 집에서 들었던 말을 끊어내지 못하고 귀에 담아 두었다. 청국장을 떠 넣으며 주고받았던 사연을 삭히지 못하고 묵혀 두었다. 속에서 불어 터지고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여자의 귀는 끌어 모으기만 하지 소화시키는 법을 몰라서 체증으로 막혀 있다. 답답하고 먹먹하다.
#1-1
늦은 밤 아들이 웅얼거리는 신호를 보내고는 제 방으로 들어간다. 엄마는 인기척을 쫓아가 본다. “나도 한쪽 줘 볼래?” 걱정 섞인 말 대신 나누기를 청한다. 왼쪽 귀에서 뽑아 왼쪽 귀로 옮겨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쪽씩 이어폰을 공유한다. 엄마도 어렴풋이 텔레비전에서 들어 본 노래이다. 선율이 잔잔하니 좋다고 말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염려로 굳어있던 심장이 말랑해져 온다. 오늘은 어떤 말로 설득을 해 볼까 했었는데 그 결심이 어느새 녹아내린다. 한 가닥 전선을 타고 나오는 노래가 흰 셔츠에 검정치마의 교복을 입었던 시절로 데려다 준다.
검정치마는 엄마를 졸라서 새로 나온 미니 카세트를 손에 쥐었다. 야간자습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귀를 타고 오는 음악이 링거 줄을 통해 오는 수액처럼 세포를 되살아나게 했다. 테이프에서 재생되는 음표들은 교실에서 틀어 쥐였던 숨통을 트이게 했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부터 대문을 들어설 때면 환한 얼굴의 엄마는 “나도 한번 들어 보자꾸나.” 하셨고 검정치마는 “엄마는 모르는 노래예요.” 했었다.
쉽게도 검정치마 시절을 잊었다. 엄마는 정성껏 손질하던 검정치마가 장롱 속을 굴러다니다가 언제 검은 비닐에 싸여 폐기처분 되었는지 모른다. 그제야 검정치마의 귀에서 들리던 소리는 테이프에 저장된 기호들이 기계장치를 거쳐 음악으로 살아나듯 문제풀이에 지친 교실에서 벗어난 자신을 어루만지던 휴식이었음을 알아챘다. “엄마는 몰라요.” 했으면서 “알았어요.” 한마디에 가슴이 아렸다. 왼쪽 귀로 전해진 곡조는 심장을 적시고 다시 기억의 회로를 밝힌다. “몰라요.”는 그저 모른다는 의미였고 “알았어요.”는 알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엄마는 노래가 끝이 날 때까지 아들의 오른쪽에서 가사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체온이 담긴 한쪽을 아들에게 되돌려 준다.
“고맙다.”
#2-1
바스락거리는 네 개의 발자국 소리를 제외하면 숲은 침묵이다. 산새들도 바람을 불러내어 어울려 쉬러 간 모양이다. 간간이 뒤에서 거친 숨소리를 토하는 아내를 돌아본다. 발걸음을 앞세우다가도 몸을 틀어 어깨너머로 시선을 내린다. 보폭을 맞추어 나란히 걷고 싶지만 옆으로 다가올 만하면 손을 휘휘 저으며 먼저 가라는 시늉을 한다. 머릿속의 아내는 손을 내밀며 당겨 달라, 같이 가지고 조르고 있다. 눈앞에 선 여인은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앞서 가라는 손짓을 보낸다. 언제부터 아내는 도움이 성가신 여인이 되었는지 낯이 설다. 휴식 시간이 끝이 난 것인지 바람을 타고 날아든 산새들이 저만치 가라앉은 지난날을 불러온다.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려 힘줄이 불거진 손으로 벨을 눌렀다. 아이들의 “앙 앙” 대는 소리와 아내의 넋 놓은 얼굴이 마중을 나왔다. 남자에게 집은 새로운 전장이었다. 바깥일을 핑계 삼아 술자리로 떠돌았다. “앙 앙” 대는 난리를 피해 “건배”가 넘치는 곳을 찾아다녔다. 벌겋게 달아오른 귀를 믿었다가 재물로 식혀야 했던 일이 있었다. 나긋한 속삭임에 끌려가다 관계를 끊어야 하는 일도 있었다. 더는 요란한 대문 밖이 귀를 홀리지 않았다. 소음 속에서 악다구니를 쓰다가 목이 쉬어버린 줄 그제야 알았다.
남자가 요란한 집 안을 피한 사이 아내는 전쟁터를 마무르는 장군처럼 변했나 보다. 남자의 지원을 청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각자의 방으로 들였고 원성 없이 진두지휘를 해왔다. 이제는 다시 조용해진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무슨 핑계라도 대야 할까. 새로이 집안을 꿰찬 아내에게 허락이라도 구해야 할까. 남자는 아내와 산길을 오른다. 고요 가운데 귀는 잠잠해지고 심장은 요란하게 펄떡거린다. 가슴은 따뜻해지고 귓가로 지나는 바람이 청량하다.
#3-1
여자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날짜에 맞추어 지인들을 만난다. 최면에 걸린 듯이 여기에 얼굴을 내밀고 저기로 발걸음을 옮긴다. 앞 다투어 쏟아내는 으쓱해진 목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고 은근하니 드러내는 낮은 음성에 귀는 예민해져 버렸다. 부러움에 “나는” 하다가 시기심에 “나만” 하다가 이명을 안게 되었는지 모른다.
지난날 여자는 ‘다르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누구라도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 없이 쓸 때면 여지없이 올바른 사용 설명서에 대해 강의를 들어야 했다. 두 단어의 뜻이 하늘과 땅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웃은 분명 아닐진대 흔히들 혼용한다고 흥분하던 여자였다. “다르면 틀리다는 말인가?” 하며 열변을 토해내던 여자였다. 여자는 이명에 사로잡혀 ‘다르다’를 놓아 버린 모양이다.
되감기를 시켜본다. 여자는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못하는 까닭을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사고하면 틀렸다고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언어습관이 사람됨의 일부라 잘라 말하고 사용처를 분명히 구분했다. 어떤 사람은 여자를 까탈스럽다고 했고 어떤 이는 유별나다고 했다. 따지지 않으면 그만인 줄 알았다. 곤두서 있는 귀를 다스리는 처방은 내리지 못했다.
여자는 칼국수도 후루룩 먹고 청국장도 팍팍 비벼서 먹을 수 있는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나 보다. ‘다르거나 틀리거나’ 크고 너른 귀로 들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나 보다. 좀 달라도 비슷하다고 해도 된다. 조금 틀려도 거의 맞는 것이나 진배없다. 부처님 귀가 왜 턱 아래까지 닿도록 긴 것인지, 공자님 귀가 어째서 두툼하니 손바닥 같은지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