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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문채현 |
나에게는 눈물이 기도였다
“나, 어떻게 해.”
마취에서 깨어난 아내의 첫마디였다. 일주일 전, 가슴 수술 후 의사가 “악성 종양이었다”라고 말해주었을 때와는 달랐다. 조직 검사 결과 수술한 주변이 깨끗하고 다른 곳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진단을 받은 아내는 ‘작은 혹’ 하나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드랑이의 림프 조직 검사에서 종양이 발견되어 또 한 번 수술을 했다. 아내는 한참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대했던 것들이 모두 무너졌다. 아내의 암은 조금 더 심각한 상태가 되었고, 수술 전부터 끔찍이도 싫어했던 머리가 모두 빠지는 항암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절망과 구원이 뒤섞인 아내의 말에 나는 어떤 답도 줄 수 없었다. 캄캄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아내가 암에 걸리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아내 자신조차도. 가족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작은 체구인 아내의 생활이 무절제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충격은 컸고, 아무런 면역도 없었다. 그래서 의사의 “큰 걱정 말라”는 장담에도 불구하고, 나도 아내도 ‘죽음’부터 떠올렸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치료만 잘 받으면 완치율이 80% 이상이니 걱정 말라는 의사의 위로가 공허했다. 나 역시 그 한마디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지?” 2014년 3월, 쉰다섯의 나와 쉰한 살의 아내는 이렇게 새로운 삶 앞에 섰다.
그날 이후 아내는 말을 잃었다. 기도에만 매달렸다. 아내의 기도는 늘 눈물과 함께였다. 한참을 아무런 기척이 없어 방문을 열어 보면 아내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는 울고 있었다. 평소에도 아내는 시간만 나면 기도를 했고, 기도하다 잠들면 가장 행복하다는 아내였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어떤 기도를 하는지 하느님께 무엇을 바라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도, 함께 기도한 적도 없었다. 그즈음 나는 냉담자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언론사에 근무할 때 교우회를 만들고, 가끔 참석했던 가톨릭언론인협의회의 월례미사조차 공직으로 자리를 옮긴 10개월 전부터는 발을 끊었다. 이상하리만치 기도도 못 했다.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 아니면 의례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나 자신의 기도가 되지를 않았다. 명색이 글쟁이 출신이고, 언변도 좋다는 소리를 듣는데, 기도만 하면 아예 말이나 문장이 안 되고 금방 막혀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생의 권유에 따라 기도문을 종이에 미리 써서 읽어 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울림이 없이 겉으로 맴돌기만 했다.
기도에 대해 고해성사를 한 적도 있었다. 신부님은 말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정말로 힘들고 슬픈 일을 겪지 않았다는 얘기도 됩니다. 기도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간절해야 나옵니다”라고. 그것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픈 아내와 함께 성당을 찾았다. 기도보다는 주님께 따지고 싶었다. “주님,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아내는 평생 주님을 의지하고 따른 것밖에 없는데, 기껏 주시는 것이 이겁니까.” 그러나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보는 순간 무너졌다. 눈물부터 쏟아졌다. 아무런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한참을 그냥 소리 내어 울었고 주님께 “저의 이 눈물로 아내의 아픈 곳을 씻어 줄 수 있다면 강물만큼이라도 흘리겠다”고 말했다. 그때야 나는 깨달았다. 기도가 눈물임을. 그 눈물로 주님이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아침마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이 모든 게 거짓이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헛된 희망이었다. 아들의 군 제대 날짜에 맞춰 아내는 3주 간격으로 6차례 항암 주사를 맞아야 했고, 그 긴 터널을 지나면서 나와 아내는 서로 다른 고통으로 신음했다. 몸이 약한 아내는 독한 주사를 견뎌내지 못해 버둥거렸고 휘청거렸다. 거동조차 불편한 시골에 계신 팔순 노모와 장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난 그 모든 뒷감당을 해야 했다. 입원 때는 밤새 병실에서 지내고 아침에 다시 출근하고, 퇴원 후 부랴부랴 퇴근해 장을 봐서 아내를 위해 전혀 다른 음식들을 준비하고 집안 정리를 하면 자정이 가까워지는 날들이 계속됐다. 나는 아내의 변덕에 지쳐갔고, 그렇게 효자 노릇 할 것 같았던 아들은 짓눌린 집안 공기에 일주일을 못 버티고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아내와 산책조차 같이 하지 않으려는 아들이 야속하고 괘씸해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장모에게, 나는 어머니에게 고통을 하소연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들의 눈을 보고 깨달았다. 나도 아내도 이렇게 힘들 때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는 엄마가 있는데, 아들은 엄마가 아프니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3차 항암 주사로 머리가 모두 빠진 날, 아내는 모자를 눌러쓴 채 울었다. 가발까지 미리 준비했지만 쓰지 않고 나를 보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항암 주사를 맞으면서, 맞고 나서 아내는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기도하는 시간을 빼고는 휴대폰으로 성가와 신부님의 강론을 줄곧 들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잠을 조금이라도 잘 수 있다고 했다. 아내는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으니 아프지 않게 주님이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 건강을 되찾기보다는 생을 포기하는 쪽으로만 자꾸 생각했다. 늦은 나이에도 밤낮으로 악착같이 매달려 암을 키운 초고까지 완성한 박사 논문을 던져버렸고, 대학의 연구원 자리도 내놓았고, 장롱 속의 옷들을 버렸고, 친구들의 병문안도 거절했다. 그런 아내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내의 고통을 대신할 수 없었고, 아내의 고통을 보며 나는 그로 인해 닥칠 나의 현실적 고통에 신음하였다. 그 아픔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누구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절망과 불안,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보, 울지마. 내가 있잖아”였다. 그래, 내가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허망한 줄 알지만 이 말 밖에는 달리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김훈의 소설 「화장」의 주인공인 오 상무처럼 나 역시 한편으로는 아내의 고통을 나누지 못하는 무력감과 죄책감, 다른 한편에는 아내로 인해 받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사이를 오갔다. 그런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때 신부님의 말이 생각났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기도하라. 그 기도가 어디를 향하든 상관없다”고. 어쩌면 그것만이 나와 아내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몰랐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복음성가 538)라고 노래했다. 물론 나의 기도가 언제 어디서 아내의 기도와 만날지는 주님만이 아시겠지만.
16년 만의 약속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를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주님이란 것을 깨달았다. 10년 전에도 그랬다. 2006년은 나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시간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에서 말한 것처럼 가치관이 뒤집히고 또 뒤집혔고, 진짜와 가짜가 똑같이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고, 깨끗함이 더러움이 되고 더러움이 깨끗함이 되었다. 아침에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후배가 저녁에 몰래 다가와 등에 칼을 꽂는 배신의 아픔과 억울함으로 가슴이 터질 같았다. 아우성도 쳐보고, 몸부림도 쳐보았지만 그놈의 분노와 고통과 억울함은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세상 어디에도 나의 말을 온전히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아내조차도. 절대고독 속에서 절대자이신 주님이 생각났다. 아내가 다니는 성당의 대성전 앞 벽에는 커다란 성작이 그려져 있다. 처음으로 그곳을 찾은 날, 그 성작이 빈 쓰레기통으로 보였다. “나의 분노와 고통과 미움을 모두 그 안에 버리자”고 다짐했다. 버리고 오면 또 어느새 슬그머니 차고, 그러면 또 버리고를 반복하면서 나는 세례를 받았다. 무엇보다 영성체를 하고 싶었다. 나의 대부(代父)인 소설가 고 최인호 선생님도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갔을 때 성체가 너무나 먹고 싶어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 마음속에 가득 찬 미움과 분노와 고통과 좌절과 불신을 버리지 않고는 성체를 모시지 못할 것 같았다. 성체가 내 몸 안의 그것들을 모든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첫 영성체는 뜨거웠다. 입이 화끈거렸고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세상 어떤 술과 음식으로도 느낄 수 없는 짜릿함과 황홀한 도취였다. 최인호 선생님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처음 어머니의 젖을 빨 때의 느낌’ ‘날카로운 첫 키스같은 것’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성모 마리아 승천일인 2006년 8월 15일, 나는 주님의 자식이 되었다. 16년 만이었다. 1990년 가을, 세례를 받기로 하고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아내(마카엘라)와 혼인을 할 때 신부님은 “나와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과의 약속”이라고 강조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은 나는 그 약속을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의 삶에는 주님이 필요 없다고 자신했다. 사후세계도, 부활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담은 기복신앙인 불교가 좋았다. 굳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고집한 것은 멋있어 보여서였다. 그래서 아내가 성당 가자고, 그냥 가서 앉아만 있어 달라고 하는 것조차 싫어 도망치곤 했다. 주님은 그런 내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알고, 약속을 지킬 것을 알고 말없이 빈 잔을 준비해 놓고 긴 세월을 기다려 주셨다. 이름이란 참으로 묘하다. ‘그렇게 되리라’는 운명 같기도 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 같기도 하다. 최인호 선생님은 자신의 이름인 ‘베드로’를 물려주려 했지만, 나는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가 되고 싶었다. 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의 주인공인 경아의 ‘요나 콤플렉스’를 떠올려서도, 어머니 뱃속의 평화로움이 그리워서도 아니었다. 투덜이 요나와 너무나 닮은 나의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신(주님)께서 구렁에서 생명을 건져 올리셨습니다. 제 얼이 아득해질 때, 저는 주님을 기억하였습니다”(요나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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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문채현 |
그것이 주님의 축복인지도 몰랐다
기다림이 길면, 만남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큰가 보다. 16년을 기다려 나를 품에 안은 주님이 그랬다.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었다. 세례받은 지 두 달도 안 돼 나를 문정동성당 김홍진 주임신부님은 ‘성당 20년사’ 편찬위원으로 임명했다. 내가 글쟁이이고, 또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천편일률적인 역사책이 싫어서였다. 글쓰기의 업(業)을 가진 자의 또 다른 글쓰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성당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교우들 힘으로 20년을 정리하자고 말은 꺼내놓고, 누구도 엄두를 못내 시간만 갔지만 나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신부님과 다른 편찬위원들이 회의 때마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지만 애써 외면했다. 자신의 재능을 주님의 역사에 쓰는 일이 얼마나 영광인지, 주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귀찮고 막막했다. 아내가 “주님이 인도하는 사업을 귀하지 않다(귀찮다)니” 하고 겁을 줘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갔다. 답답한 분위기를 끝내 참지 못해 “편집장을 하겠다”고 말하고는 곧바로 후회했다. 주말, 휴일, 심지어 휴가까지 쏟아 부어도 ‘역사’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의 신앙심은 너무나 얕았고, 자료는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으며, 도움보다는 주위의 간섭이 많았다. 봉사 의욕만 앞세우고, 글쓰기 경험을 위해 처음 의욕을 보였던 몇몇 젊은이들도 여름 한 철 헉헉대다 떠나고, 설상가상 기획을 돕던 교우가 갑자기 닥친 병(암)으로 손을 놓자 어두운 터널 속에 멈춰 선 것처럼 캄캄했다. “그래, 이건 나의 일이 아니야”라고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아무리 혼자 발버둥 치고, 쓰고 또 써도 어둠의 터널 끝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도 열두 번 도망칠 궁리만 했다. 그러나 주님의 세상 아래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요나처럼 투덜댔다. 대성전에 걸린 커다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노려보며 항의했다. “무슨 사건이라도 생겨 때려치우게 만들든지, 아니면 좀 도와주시든지.”
어느 날 축복과도 같이 한 교우가 찾아왔고, 그의 발 빠른 편집으로 20년사는 큰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성당을 거쳐 간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교우들의 가슴에 살아 있는 기억들을 만나면서 역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순간, 아득했던 터널의 끝의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성당 20년사’를 쓰면서 굳어 버린 기억과 자료, 그것들을 어설프게 정리한 글이 역사가 아님을 알았다. 주님의 역사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은 각자의 가슴과 삶에 있었다. 어느 수녀님은 지하철에서 만난 지체 장애 청년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어느 신부님은 한 달에 한 번 찾아가 병자 영성체를 주던 뇌성마비 청년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성당을 주검이 되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던 날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런 것들이 바로 주님의 역사이고, 성전의 역사임을 ‘20년사’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알 수가 있었으랴. 주님은 그렇게 내가 당신께 걸어오리란 것을 알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20년사’ 쓰기는 햇병아리 신자에게 더 없는 축복이었고, 16년이나 기다리면서 준비한 주님의 더없는 사랑의 선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자만했고, 게으름을 부리기 시작했다. “20년사를 내가 만들었는데” 하며 뽐냈고, 책 만들면서 수백 번 성당을 찾았으니 당분간 안 가도 된다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때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5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풍랑을 만나 바닷물에 던져지고 나서야 뉘우치는 어리석은 당신의 아들이 다시 될 줄은. 얼이 아득해져, 눈물을 흘리며 다시 돌아올 줄은.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항암 주사에 이은 방사선 치료로 아내의 병도 끝나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올 줄 난 알았다.
아내도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안간힘으로 28번의 방사선 치료를 견뎌냈다. “끝났다”는 홀가분함에 아내와 나는 베트남으로 여행까지 갔다 왔다. 그런데 아니었다. 방사선 치료는 남아 있는 아내의 한줄기 힘마저 앗아갔다. 방사선이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암세포를 죽이는 동안, 아내의 생명도 죽어갔다. 호흡조차 제대로 못 하게 된 아내는 가슴을 치며 억억 울었고, 몸이 사그라져 갔다. 게다가 항호르몬제를 매일 먹으면서 온몸이 저리는 통증과 불면을 호소하며 울었다. 적어도 아내 혼자 자기 몸 돌보는 것은 가능할 줄 알았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야”란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검게 변한 얼굴로 “차라리 재발되더라도 그만 두겠다”는 아내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난 알 수가 없었다. 예상보다 아내를 일찍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절망이 다시 엄습했다. 아내의 기도도 삶보다 죽음 쪽으로 점점 기울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몸무게 7㎏이나 줄면서 나도 무너져가고 있었다. 아내는 포기하듯 서울 근교에 있는 요양병원에 들어갔지만 혈변이 나와 한 달 만에 나왔다. 무슨 수를 쓰든 멈춰야 했다. 더이상 자기 연민에 빠져서는 안 되었다. 모든 것을 바꾸었다. 항암 치료를 할 때까지만 해도 일시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아예 다르게 살자. 생활 패턴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삶의 가치를 바꾸었다. 아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아내의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내는 6개월 전부터는 아예 항암 약까지 끊어 버렸다. 아내에게 말했다. “주님께 난 살아야 한다고. 그럴 이유가 있다고. 내가 아프면 남편과 아들이 아프고, 내가 죽으면 남편이 죽고, 남편까지 죽으면 내 아들도 죽는다. 이게 주님이 원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 가족이 살아야 한다고 기도해라. 나도 그렇게 할 테니.” 마침내 아내와 나의 기도는 하나가 되었다.
아내도 주님이 이런 병을 주신 데에는 반드시 뜻이 있을 것이라면서 면역력 회복을 위해 열흘씩 암환자 면역력 회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청주의 ‘성모꽃마을’을 찾았다. 처음 그곳에 데려다 주고 오는 날, 나는 마치 아내를 버리고 오는 것 같은 죄책감에 가슴이 아파 한참을 차 안에 그냥 앉아 있었다. 나의 이런 불안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아내는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따금 그곳을 찾아 나는 아내와 함께 기도하고, 그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외조의 힘’을 들려줘 박수를 받곤 한다. 이렇게 처음 서로 아득한 거리에 있던 아내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었고, 아내의 삶이 내 삶이 되었다. 함께 나누고 기도하는 이제는 그 아픔이 두렵거나 힘들지 않다. 이렇게 신앙의 일치, 성가정의 일치야말로 아내의 병을 통해 주님이 주려고 한 선물이 아닐까.
아내는 아직도 아프다. 매일 게르마늄 의자에 앉아 엉덩이를 쬐고, 족욕기에 발을 담가 체온을 높이고 있다. 폐에 자그마한 병변도 있다. 그러나 나와 아내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더 이상 영혼을 잠식당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제 아내 미카엘라를 지키시고 회복시켜주시는 당신의 권능과 은총에 의탁하나이다”라고 매일 기도한다. 그러면 신기하리만치 편안하다. 아내 역시 나의 이 기도 덕분에 몸이 한결 좋아진다고 말한다. 이제는 나도 기도할 줄 안다. 기도의 힘을 믿는다.
작은 소망 하나
성탄절 전야 미사에 참례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아내는 요즘처럼 행복한 때가 없다고 말했다. 당신과 결혼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아내와 반평생 살면서, 명색이 경상도 남자가 아내를 위해 집안 청소, 빨래, 심지어 밥과 설거지까지 도맡아 하고 있지만 빈말이라도 이전에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내 나이가 대부분 그렇듯, 위태위태한 직장 생활로 언제 경제적 어려움이 닥칠지 모르는데도 아내는 불안해 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병이 그렇듯, 거기에는 분명 주님의 뜻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준다. 과거에는 그런 아내를 비웃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소중하다.
작은 소망이 있다. 고향인 경북 예천 읍내에 작은 동산에 나무로 지은 작은 성당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 보고 싶었지만, 끝내 가보지 못했던 곳. 지금은 화재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여전히 소박하고 자그마한 새 성당이 지어졌다. 2, 3년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 손잡고 주일마다 그곳을 찾고 싶다. 그리고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많은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알려주고, ‘신앙의 신비’를 느끼게 해주는 봉사도 하고 싶다. 그때가 언제일지 역시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나는 그날을 위해 하루빨리 아내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제 아내 미카엘라의 몸의 아픈 부위가 당신이 창조하신 그 기능대로 작동하도록 새롭게 만들어 주소서. 그리하여 미카엘라의 삶이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과 기쁨이 되게 하소서.” ( 성모꽃마을의 ‘치유의 기도’).
첫댓글 미카엘라 자매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