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후면 모친 4주기이다. 어제밤 잠자리에 들면서 모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모친이나 나나 부친을 잘못만난 악연의 인생을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친과 결혼해 4년을 못넘긴 것으로 안다. 모친이 부친과 결별한 것은 부친의 무리한 사업경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부친은 이미 한번 결혼해 누님 두분이 있는 상태에서 모친과 결혼했다. 재취라는 그 당시의 사회적 편견에 더해 사업마저 망했으니 새색시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힘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모친은 나를 데리고 외가집으로 찾아가 씁쓸한 하루 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나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신기한 것은 당시 나이가 만 3세가 안될때 이었음에도 사고 당일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사실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늦가을이었다. 모친은 안방에 취미생활인 뜨게질용 실들을 펼쳐놓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모친을 등지고 앉아 뜨게질 실을 문고리에 걸고 날카로운 가위로 실을 끊는다고 하다가 순간적인 실수로 오른쪽 안구를 찔러버렸다. 나의 울음소리를 들은 모친과 외할머니는 나를 업고 가까운 의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시골동내 의원의 처치라는 것이 임시응급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큰병원에 갔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도 유사한 사고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을 볼때 더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졸지에 모친은 자식 하나 건사못해 불구자를 만들었다는 주변의 눈총을 받으며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야말로 단 하나뿐인 혈육에서 애증의 자식이 되어버린 셈이다. 모친이 나를 부친에게로 보내려 했던 것은 그러한 바탕때문이었을 것으로 이해가 된다.
4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덕적도의 큰댁을 거쳐 6학년때 부친과 조우했지만 이미 4명의 동생이 있는 계모와의 삶은 단 하루도 마음 편할날이 없는 갈등과 불안의 세월이었다. 결국 학업을 모두 마치기 전에 집을 나와 산전수전 겼으며 광야의 삶을 살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나에게는 모두가 적처럼 느껴졌다. 하나뿐인 자식을 포기한 모친도 미웠다. 그래서 나중에 모친을 만났음에도 모자의 관계는 외가를 떠날때의 애틋함을 회복하지 못했다.
모친 역시 나때문에 주변으로 부터 자식의 인생을 망친 못난 어미라는 멍에를 메고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10대후반 20대 초의 나에게는 그러한 이해의 여유가 없었다. 계속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 속에서 나의 마음은 늘 슬퍼야 했다. 어쩌면 그러한 연단을 통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을 통해 늘 은혜를 받게 된다.
결혼후 외가쪽 친척을 통해 인천에 사시는 모친과 다시 만났지만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서먹한 관계는 해소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2003년 중국으로 이주한 후부터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귀국할 때마다 찾아가 만나도 도무지 마음을 닫고 차갑게 대하다보니 찾아가기 보다는 전화로 안부를 묻는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전화기 코드를 빼놓아 그나마의 교류도 끊겨 버렸다. 18년도 귀국후 이종사촌댁 조카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모친이 별세한듯 싶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아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쉽게 찾을수가 없었는데 다행히도 친구의 동생이 모친이 거주하던 지역의 동장을 역임한 덕에 복지팀장을 통해 비슷한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주민등록 전산화 과정에서 입력실수로 생일이 바뀌는 바람에 호적과 불일치로 주민번호가 나오지 않아서 였다고 하였다. 실제는 1224인 생일이 서류에는 12월24일로 된 탓이었다.
모친은 요양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1년전 당뇨 저혈당 쇼크로 혼절한 상태에서 3일만에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져 위기를 넘겼다고 하였다. 퇴원후 우리가 4개월 모시다가 다시 모친 집으로 옮겨 1년정도 지내다가 요양병원에서 삶을 마감하셨다. 코로나 시국이라 너무 초라한 장례를 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