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蘭谷)에서 먹은 오리 똥집
“방송국에서 나왔다고? 인터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궁금할 게 뭐가 있어? 할 얘기 없으니까 가던 길 가셔.”
1990년대 중반, 서울 시내에서 마지막 남은 대규모 재개발 지역인 관악구 난곡(蘭谷) 산기슭 공터에서 아저씨들이 공사판에서 주워온 듯한 철망 위에 무언가를 굽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방송을 위해서 무작정 찾아간 난곡은 이미 여기저기 철거가 시작되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직 집을 비우지 않고 계속 살고 있는 주민들도 조금 있었습니다. 아마 그분들은 갈 곳이 마땅치 않았거나 보상 문제가 해결이 덜 된 경우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 거기 잘생긴 아나운서 양반, 이런 거 먹어본 적 없지? 이거 한 점 같이 먹으면 인터뷰 해줄게. 싫음 말고.”
녹슨 드럼통 안에 불을 피워 놓고 얼기설기 엮은 철망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위의 고기를 굽고 있던 주름 많은 아저씨가 깐족거리며 한마디 합니다.
“닭똥집(근위 또는 모래주머니)인가요? 맛있게 구우시네요~ 저 좋아합니다.”
사실 필자는 닭똥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입사 연수 때 단체 급식으로 나온 곱창전골을 먹고 두드러기가 나서 된통 고생을 한 후에는 동물의 창자나 부속물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재개발 현장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길고양이들만 몰려다니고 있으니 고양이들을 인터뷰할 수는 없고,
이런 상황이면 촬영을 접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당장 내일 아침에 방송을 해야 하는데 속된말로 맨땅에 헤딩이라도 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공터에 모여서 술판을 벌이고 고기를 구워 먹는 주민들을 보니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어디서 지나가는 나그네가 흥을 깨려고 드느냐?”였던 겁니다. 그분들이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못하겠다고 하니 어떻게든 환심을 사야 하는데 그게 어디서 구해온 건지도 모르는 동물의 부속물을 먹어야 되는 일이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조류의 각종 장기들을 굽고 있었는데 죄다 처음 보는 부위였습니다. 속으로 ‘이런 것도 구워서 먹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런 거 처음 보지? 닭이 아니라 오리 똥집이야. 아~ 해봐!”
“아~”
생전 처음 오리 똥집을 입에 물고 아그작 씹었는데 겉은 타고 속은 익지 않아서 육즙이 터지며 세상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비린 맛이 입안에 가득했습니다. 찰나의 순간에 ‘뱉어?’ ‘말어?’를 만 번 정도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뱉으면 인터뷰는 물 건너 갈 것이고, 그냥 먹자니 당장 너무 비리고 나중에 두드러기도 걱정되고…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안주만 주시고 술은 안 주시나요? 저도 한 잔 주시지요?”
“아, 그렇지! 한 잔 받으시게.”
그렇게 해서 덜 익은 오리 똥집을 소주의 힘을 빌려 삼키고 입 안에 남은 비린 맛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따라주는 소주로 씻어냈습니다. 멀끔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 당신들이 먹는 허름한 안주와 따라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먹으니 금세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원래 서울 시내에 살았는데 거기가 재개발되면서 밀리고 밀려서 여기 난곡까지 온 거야. 근데 여기마저 허물어 버리면 이젠 갈 곳이 없어.”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은 새 아파트 지어줘도 들어가 살지를 못해. 그림의 떡이지.”
“여보슈, 기자 양반, 달동네가 왜 좋은지 알아? 이웃이 있어서 좋은 거야. (옆에 서 있는 다른 주민을 보면서) 안 그래요, 형님? 우리가 서로 얼마나 의지하고 살아요? 그런데 이제 뿔뿔이 헤어지면 어디 가서 이런 정다운 이웃들을 만들고 살겠어요? 이제는 더 이상 서울에서는 이런 동네를 만들 곳이 없어요.”
다음 날 방송에서는 재개발에 대해 경제적 관점이 아닌 사라져 가는 달동네와 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월이 거의 30년이 흘렀습니다. 그때 인터뷰처럼 이제 달동네는 박물관에서나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필자가 찾아갔던 곳엔 대규모 아파트 촌이 들어서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난곡 주변 동네들은 조금 낙후되어 있지만 과거 달동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가끔 그때 인터뷰를 해주었던 난곡의 동네 아저씨들이 생각납니다. 지금쯤 80세는 훌쩍 넘기셨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합니다. “부천으로 이사가려고요.”라고 말씀하셨던 분은 부천으로 이사를 가셨는지,
아파트 입주권을 가져서 부러움을 샀던 아저씨는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잘 입주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연락처를 받았어도 이사를 가면 간 쪽에서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다시 연락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주택에 살 때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무슨 악국이 보여, 그 옆 골목으로 한 50미터쯤 올라오면 구멍가게가 하나 있는데 그 가게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와서 세 번째 집, 그러니까 파란 대문 집이 우리 집이야.”라고 알려줬는데 요즘은 “하이페리온 2차 XX동 XXX호야”라고 아파트 이름과 숫자만 알려주면 끝납니다. 물론 아직도 단독주택에 사시는 분들은 동네 약도를 그리며 오는 길을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경우에도 보통은 “옆에 XX아파트가 있어.”라고 아파트를 이정표로 얘기를 합니다.
이제는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그 집의 경제력과 생활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새로 짓는 아파트들이 목숨 걸고 럭셔리하고 엘레강스한 이름을 지으려고 혈안이 된 이유도 좀 더 있어 보이는 아파트 단지가 되려는 몸부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에 그 많던 달동네와 그 속에서 얼기설기 섞여 살던 문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대화와 가치의 척도가 점점 ‘돈’에 매몰되면서 스스로 불행해지는 사회를 만들어 온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국민 대부분이 30년 전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 살고 있고 자동차 보유 대수도 배 이상 늘었습니다. 동네의 작은 뒷산마다 등산로가 잘 꾸며져 있고 버스 정류장에는 온열 벤치가 놓여서 추운 겨울에도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뜨끈뜨근합니다.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분명 살기가 좋아졌는데 왜 자살률은 올라가고,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 갈등은 더 심화됐을까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데 빵만 생각하고 밀어붙인 재개발로 공동체가 붕괴됐고, 그 결과 작은 충격에도 사회 구성원들이 삶의 의지를 쉽게 잃고 또 즉각적으로 쉽게 분노하는 현상에 상당 부분 영향을 준 것은 아닌지 세월이 흐른 뒤 돌이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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