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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투사와 의대
1. 나는 우연히 카투사가 됐다. 신림동과 종로 정도만 알던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과사에서 만난 문학공간(학회) 동기 SangHyuk Park이 남산 간다기에 룰루랄라 따라 갔다. 그는 카투사에 지원하러 병무청에 가려던 참이었다. 난 그때 카투사가 어떤 보직인지도 몰랐다. '편한 군대'라는 이야길 듣고 지원서를 따라 냈다.
2. 당시 카투사는 중앙 선발과 훈련소 추첨으로 뽑았다. 시험 봐서 합격한 사람이 절반, 훈련소에서 추첨으로 뽑은 사람 절반. 국군 입장에서는 소위 '좋은 인재'가 카투사에 몰리는 게 마뜩잖아서 추첨 방식을 가미했던 모양이다.
3.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걸 자대 배치 후 알았다. 훈련소 추첨으로 우리 부대에 온 선후임 중에는 당시 여권 유력자의 '귀한 우리 새끼들'이 있었다. 훗날 태극기 부대 집회에 나선 4성 장군의 조카, 박근혜 정부 시절 7인회 가운데 한 사람의 손자 등등.
4. 다른 많은 영역에서 그랬듯, 민주 정부가 들어서며 이런 폐해가 제법 개선됐다. 요즘 카투사는 토익 780점 이상이면 지원 가능하고, 지원자 중 추첨으로 뽑는다. 1년에 한 번 선발하는데, 한 번 떨어지면 재지원이 불가능하다. 영어 네이티브인 우리 조카도 떨어졌다.
5.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이렇게 제도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소위 '좋은 인재'가 카투사에만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한국군에도 소위 '좋은 인재'가 필요하니까. 한국군이 강해지려면 카투사뿐만 아니라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등에도 '좋은 인재'가 골고루 배치되는 게 타당하다.
6. 군대도 그러한데, 사회라고 다를까. 소위 '좋은 인재'들이 의대에 몰리는 건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뚱딴지 같은 아이디어지만, 의대 입학자도 카투사 선발처럼 빡빡하지 않더라도, 일정 수준 추첨을 도입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7. 그런데 이게 허무맹랑한 생각이 아니었다. 네덜란드에는 이미 그런 의대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명성 높은 의대는 3개다. ▲에라스무스 의과대학 ▲암스테르담 대학병원 ▲레이던 대학 의대. 그중 인문주의 철학자의 이름을 딴 에라스무스 의대의 위상이 가장 높다. 유수의 대학 평가에서 전 세계 상위 50위 내외에 꾸준히 오를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로테르담의 여러 의료 기관이 뭉쳐서 이룬 성과다.
8. 이 의대는 올해 400명 신입생 중 1~200등은 성적 순으로, 나머지는 35%의 임의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뽑았다. 성적이 65% 반영되나 임의점수(35%)가 추첨의 효과를 냈다. 이 대학 입시 담당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성적이 좋은 ‘과잉 성과자’만 의대에 모이면 특정 학과나 업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더 강해질 수 있다.”
9. 의사가 없으면 사람의 몸에 문제가 생긴다. 의사에만 인재가 몰리면 사회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다. 우리 사회는 이미 병들었다. 병세는 악화일로다. 성장 펀더멘털을 갉아먹는 심각한 증상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사회를 치료할 의사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10. 카투사 선발 과정의 장점을 의사 선발 과정에도 적용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