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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한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happy
에베소서1장 1-23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使徒)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聖徒)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信實)한 자(者)들에게 편지(便紙)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主)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讚頌)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복(福)으로 우리에게 복(福) 주시되
4 곧 창세(創世) 전(前)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擇)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豫定)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自己)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者)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恩惠)의 영광(榮光)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恩惠)의 풍성(豊盛)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罪)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智慧)와 총명(聰明)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秘密)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爲)하여 예정(豫定)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願)대로 역사하시는 자(者)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豫定)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基業)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前)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榮光)의 찬송(讚頌)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眞理)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救援)의 복음(福音)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約束)의 성령(聖靈)으로 인(印)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基業)에 보증(保證)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榮光)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15 이를 인(因)하여 주(主)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聖徒)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因)하여 감사(感謝)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祈禱)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榮光)의 아버지께서 지혜(智慧)와 계시(啓示)의 정신(精神)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所望)이 무엇이며 성도(聖徒) 안에서 그 기업(基業)의 영광(榮光)의 풍성(豊盛)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能力)의 지극(至極)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求)하노라
20 그 능력(能力)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者)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自己)의 오른 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權勢)와 능력(能力)과 주관(主管)하는 자(者)와 이 세상(世上)뿐 아니라 오는 세상(世上)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萬物)을 그 발 아래 복종(服從)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萬物) 위에 교회(敎會)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敎會)는 그의 몸이니 만물(萬物) 안에서 만물(萬物)을 충만(充滿)케 하시는 자(者)의 충만(充滿)이니라
에베소서 1장 및 서론
에베소서 1장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도들에게 이 글을 씁니다.
하나님의 뜻. 고전 1:1; 고후 1:1; 골 1:1; 딤후 1:1과 비교하고, 고전 1:1 주석을 참조하라. 바울은 자기 개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부르심과 책임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나타내고자 노력했다(참조 고후 8:5). 그의 부르심은 하나님에게서 직접 왔다(참조 갈 1:15, 16 주석). 이 사실에 대한 강한 확신은 그가 강력하게 사역하고 헌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산 비결이었고 고통 중에서도 용기와 믿음을 얻는 근원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이 호칭의 의미에 대해서는 마 1:1 주석을 참조하라.
사도. 헬라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 참조 행 1:2 주석).
바울. 참조 롬 1:1 주석.
성도들. 헬라어 하기오이(hagioi), 문자적으로 “거룩한 자들”(참조 롬 1:7; 고전 1:2 주석). 헬라어 단어로는 통속적인 상태와 용도에서 분리됨을 뜻한다.
에베소에 있는.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이 표현을 고수하는 독법과 생략하는 독법들로 엇갈리게 나타난다(참조 에베소서의 서론; 제10권, 157). 이 표현이 생략된다면 이 절의 마지막 부분은 “성도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에게”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이 표현 혹은 이것과 관련된 형태인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에서”, “주 안에서”, “사랑하는 자 안에서”는 이 서신의 주요 구절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 서신에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자가 그 안에서 생활하고 거동하는 영역 혹은 매체로 지칭한다. 이 표현들은 주님과 그리스도인의 밀접한 연합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주님과 연관시켜 행한다.
신실한. 헬라어 피스토이(pistoi), “충실한”, “믿음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귀한 교훈의 말씀―에베소 1장 전체에는 모든 영혼을 위하여 귀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원고 110, 1903).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내리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와 아들을 영적 축복의 근원으로 함께 지칭함으로써 바울은 그분들 사이에 존재하는 동등성을 강조한다(참조 롬 1:7 주석).
은혜와 평강. 이 인사의 의미에 관해서는 롬 1:7 주석을 참조하라.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이 찬양의 표현은 때때로 “찬양의 문”(gateway of praise)이라고 불리는 장엄한 성경 구절 중 하나를 소개한다. 3~14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계시의 과정을 개관하고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약속과 교회의 영광스런 특권들을 설명한다. 이 절들은 구원의 계획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조 1절 주석.
하늘에 속한. 헬라어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en tois epouraniois), “하늘 [처소]에서”(in the heavenly [places]). 이 구절은 에베소서에 두드러지게 등장하여 다섯 번이나 사용된다(1:3, 20; 2:6; 3:10; 6:12). 6:12에서는 그 구절이 “하늘에 있는”으로 번역돼 있다(「제임스왕역」에는 “in high places”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그러나 “하늘에”(heavenly)로 번역된 것은 다른 곳에도 있다(요 3:12; 고전 15:48; 빌 2:10 등). 엡 1:20에서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는 하늘의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은데, 이는 그곳이 그리스도가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2:6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아있는 것이다.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는 3:10에서 하늘의 권세 즉 선한 천사들이 거하는 곳으로, 6:12에서는 악한 사자들이 거하는 곳으로 묘사한다. 1:3에 나온 이 구절은 하늘을 “신령한 복”의 근원으로 지정함으로써 그 복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 같다.
모든 신령한 복. 문자적으로 “온갖 신령한 복.” 신령한 복은 성령에게 속한 것이고 성령을 통해 촉진되는 것이다.
복 주시되. 헬라어 율로게오(eulogeo-), “찬양하다”, “축복하다.” 형용사 율로게토스(euloge--tos)의 동사형이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곧.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선택되었기에 개인이 결코 그 결과를 좌우할 수 없다는 교리를 지지하는 데 4~6절이 때때로 사용됐다. 사실 그 구절은 창세 전에 선택받아 자녀로 입양되도록 예정되거나 택함받은 어떤 이들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하도록 선택된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더욱이 택함받은 자들은 “우리”라고 지칭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 곧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들을 의미한다. 창세 전, 곧 구원의 계획이 세워졌을 때 그 계획의 섭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자녀의 신분이 회복되도록 정해졌다. 모든 사람이 그 계획을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딤전 2:4; 벧후 3:9). 예정설 문제에 대한 논의를 보려면 롬 8:29 주석을 참조하라.
창세 전에. 구원의 계획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세워졌다.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에 협력하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결심하신 것이 바로 그때였다(참조 계 13:8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는 선택이 이뤄질 수 있는 영역인데, 이는 모든 신령한 생애가 그분 안에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자가 구원얻도록 택함받는 것은 합창단에 가입하는 사람이 노래 부르도록 택함받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임의로 하는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속주인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두기로 선택하는 모든 자를 구원하려는 의도를 갖고 계신다.
우리를 택하사. 미드라쉬 랍바(Midrash Rabbah)의 창 1:3 주석(Soncino ed., 6)에는 하나님이 창조 전에 이스라엘을 택하셨다고 기록돼 있다. 바울은 여기서 교회, 즉 영적 이스라엘에 관하여 유사한 사상을 표현한다. 그것은 보편적인 선택일 뿐 개별적인 선택은 아니다.
사랑 안에서. 이 구절은 4절에 연결되어 「제임스왕역」처럼 번역되든지 아니면 5절에 연결되어 “사랑 안에서…예정하사”로 번역될 수 있다. 고대 라틴어 역본과 수리아어 페쉬타(Peshita) 역본에는 이 구절이 5절에 연결돼 있다. 한편 「불가타역」과 일부 후기 언셜 사본들(uncials)에는 4절과 연결돼 있다. 고대 헬라어 필사본들은 이곳의 내용 구분을 결정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 이는 구두점이 없고 단어 구분이 안 되어 있거나, 있어도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어느 절과 연결되어도 뜻이 이해된다. 모든 신령한 역사는 하나님의 품성의 기본 속성인 사랑에서 비롯된다. 사랑(아가페)의 정의에 관해서는 마 5:43, 44; 고전 13:1 주석을 참조하라.
거룩하고. 헬라어 하기오이(hagioi, 참조 롬 1:7 주석; 사도행적, 51).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벧전 1:16). 구원 계획의 목적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참조 교육, 125 ).
흠이 없게. 헬라어 아모모이(amo-moi), “흠 없는”, “결점 없는.” 5:27에는 “흠이 없게”로, 계 14:5에는 “흠이 없는”으로 번역돼 있다. 「70인역」의 아모모스(amo-mos)는 “흠 없는”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타밈(tamim)을 번역한 것이다. 타밈은 흠이나 점이 없어야 했던 희생제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레 1:3 등). 아모모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히 9:14; 벧전 1:19).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5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기쁘신 뜻. 헬라어 유도키아(eudokia), “선의”, “선한 기쁨.” “그 기쁘신 뜻대로”(good pleasure of his will)처럼 비슷한 뜻을 지닌 추상적인 용어 두 개가 결합된 구절은 에베소서 특유의 문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확고히 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녀로 입양해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는 구원의 계획을 고안하고 운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기쁨이었다(요 3:16; 계 22:17).
예정하사. 헬라어 프로오리조(proorizo-, 참조 롬 8:29; 엡 1:4 주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은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 주체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시다(딤전 2:5). 하늘 아버지는 달래야 하는 분노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분으로, 자신의 목적인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다. 갈 4:3~5과 비교하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헬라어 휘오쎄시아(huiothesia). 문자적으로 “아들이 되게 함”(참조 롬 8:15 주석).
하나님의 예정(롬 8:29, 30; 벧전 1:2)―아버지께서는 사람들 중에 살고 있는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베푸셨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값으로 주고 속량하신 백성들이다. 그들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이끄심에 응답하였기 때문에 택하심을 받고 그의 순종하는 자녀들로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나타났다. 그 은혜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자기 자신을 작은 아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마음을 겸손하게 갖는 사람,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
(엡 1:2-11 인용)인간은 비록 범죄하기는 했지만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자와 보증인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도록 예정된 자들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이는 사람의 속전을 지불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주심으로써 충분한 준비를 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사인즈 1893. 1. 2).
아브라함에게 주신 영원하신 언약―(1:3-5 인용)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다음과 같은 언약을 하셨다.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며, 풍성하게 예비된 하나님의 은혜를 각자가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품성이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언약을 하셨다. 영원 전에 하신 이 언약을 예수께서 오시기 19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인류가 이미 준비되어 있는 구원의 길을 이용할지 어떨지를 알기 위하여 인성을 쓰신 예수께서 얼마나 깊은 관심과 열렬한 마음으로 사람을 연구하셨을까?(원고 9, 1896).
무조건적 선택이란 있을 수 없음(겔 18:20-24; 33:12-16; 롬 11:4-6; 벧전 1:2; 벧후 1:10; 2:15-21)―(벧후 1:2-10 인용)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택하시는 하나밖에 없는 조건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야 한다. 약속의 말씀은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조건적 선택`-`한번 은혜 가운데 있으면 항상 은혜 중에 있다`-`과 같은 그런 것은 없다. 베드로후서 2장에는 그 문제가 분명하고 똑똑하게 취급되어 있다. 악한 일을 행한 어떤 사람의 역사를 기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저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벧후 2:15-20 인용). 여기에 사도가 경고를 발하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 즉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리라.”…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나 성경은 한 때 생명의 길을 알고 진리 안에 즐거워하던 사람들이 배도하고 떨어져 나가서 잃어버림을 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께 결정적으로 회심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한번 은혜 안에 들어오면 항상 은혜 안에 있는 것이라는 선택의 교리(the doctrine of election)를 지지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다 “여호와가 말하노라”하시는 분명한 다음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겔 18:21; 33:13 인용).
참으로 회심한 사람들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부활을 본받아 곧 무덤에서 일어나 새 생명 가운데 행하여야 한다. 그들은 진리를 신실하게 순종함으로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한다 (원고 57, 1900).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6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이 서신의 주요 구절의 다른 형태이다(참조 1절 주석). 아들을 그의 사랑하시는 자로 지칭한 것은 이곳에 적합하다. 우리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로 인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며, 그 결과 우리도 사랑받는 자녀로 불린다(5:1).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분이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그분에게 사랑을 받는다.
거저 주시는. 헬라어 카리토오(charitoo-), “은혜를 베풀다”, “우아하게 하다.”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가 적용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은혜가 거저 주어졌다는 뜻이다. 자신의 아들을 굴욕스러운 죽음에 내어준 분은 다른 은사도 풍성하게 주신다(롬 8:3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은혜로운 섭리로 인해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던 그분과의 관계 형성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매수되거나 뇌물에 넘어가거나 감언이설에 속지 않으시며, 오직 자신의 선한 뜻과 신령한 목적대로 행하신다.
바(Wherein). “which”라는 독법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를 인용할 수 있다. 이 독법에 의하면 이 구절은 “그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의 은혜의 영광.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충만함은 이 서신의 두드러진 주제이며, 확신과 소망의 주된 요인으로 제시된다. 은혜의 정의에 관해서는 롬 3:24 주석을 참조하라.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함”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계시를 통해 우주는 하나님의 품성과 목적을 올바로 깨닫고 찬양으로 반응할 것이다. 구원의 계획의 목적 중 하나는 우주 앞에 하나님의 품성을 변호하는 것이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68; 시대의 소망, 625, 626,; 엡 3:10, 11).
참 과학이 되는 복음(요 1:12; 골 1:26, 27; 2:2, 3, 10)―(엡 1:3-6 인용)참된 신자는 이 거룩한 높이에 다다를 수가 있다. 원하는 자는 모두 다 경건의 오묘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실 때에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 있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그의 사명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이다. 그분의 길다란 인성의 한 팔이 인간 가족들을 안으시고 그의 신성의 팔이 무한하신 분의 보좌를 붙잡으신 것은 그가 사람을 위해서 치루신 무한하신 희생의 은혜를 우리로 입게 하려 하심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신다.
자신의 의견을 너무 높이기 때문에 이러한 오묘한 일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이들 위대한 사람들로 깨닫게 하시는 과학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분을 볼 수가 없다. 인간의 과학은 하나님이 비쳐주신 빛이 아니다. 하나님의 과학은 하나님의 영의 나타나심이며, 그분을 믿는 절대적 믿음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믿음은 그들의 위대하고, 총명한 마음의 주의를 끌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은 너무 높아서 인간의 지성이 전혀 미치지 못할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복음 기별은 참 과학이나 인간의 학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참 지혜는 세상 지혜가 깨달은 바를 휠씬 초월하는 것이다. 영광의 소망이신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 곧 숨은 지혜는 하늘 만큼이나 높은 지혜이다. 경건의 심오한 원칙들은 숭고하고 영원하다. 그리스도인 경험만이 우리를 도와서 이 문제를 이해하게 할 수가 있고 지식의 보화를 얻게 할 수가 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처소에 감취었던 것으로 그리스도와 산 관계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 알려진 것이다. 원하는 자는 누구나 다 그 교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리뷰 1899. 7. 18).
그리스도의 품성을 높임(2:7)(마 3:16, 17; 눅 17:10; 엡 1:20, 21; 히 4:15, 16; 9:24 주해 참조)―지상에서 재능을 가장 많이 타고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지금부터 심판 때까지 그리스도의 품성을 드높이는 데에 풍부한 일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신비들은 그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다 취급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성육신, 그의 속죄 등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의 가장 뛰어난 두뇌와 펜을 다 동원하여 지금부터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 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까지 그들의 온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을 설명하려 해도 그들의 설명은 실제에 휠씬 미치지 못할 것이다.…
구속의 주제는 무궁한 세월이 흐를 때까지 구속받은 자들의 혀와 마음을 다 들여도 못다 표현할 주제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주의 얼굴에서 무궁토록 반사되어 나갈 것이다(편지 280, 1904).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7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따라서, 그분의 피로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구속은 그리스도와 협력하는 수준이나 그분과 신비롭게 연합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로 인해 이뤄진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산 본령”이시며, 그 위업이 성취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위격(位格) 안에서이다. 그는 설계가 겸 건축의 대가인 동시에 모퉁잇돌이다. 그는 목자일 뿐 아니라 양우리의 문이기도 하다(요 10:1~14).
그의 은혜의 풍성함. 인자(롬 2:4)와 영광(엡 3:16; 빌 4:19; 골 1:27) 등의 풍성함과 비교하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생명은 피에 있다(레 17:11).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버린 생명을 의미한다.
구속. 헬라어 아폴뤼트로시스(apolutro-sis), “되삼”, “몸값을 치르고 되찾음”, “구출”(참조 롬 3:24 주석).
죄사함. 구속이란 사람이 범죄하여 처하게 된 속박에서 구출, 곧 형용하지 못할 값을 주고 얻은 구출이다. 그분의 피흘림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참조 마 26:28 주석).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이 구절은 앞이나 뒤에 모두 연결될 수 있다. 이 구절이 8절에 속한다고 본다면, 이는 은혜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려지는 범위를 일컫는 것이며 “지혜”와 “총명”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된다. 이 구절을 9절의 앞부분으로 본다면, 이는 바로 하나님의 특성들을 언급하는 것이 된다. 구두점이 없는 고대 필사본들에서는 양쪽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혹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부어 주사”(「개정표준역」).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모든 필요를 채워줄 뿐 아니라 부가적인 은사를 통해 흘러 넘친다. 모든 천연계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베푼 풍요로운 손길을 증언한다. 은혜를 갈구하는 자는 그분이 영적 은사에도 전혀 인색하시지 않음을 발견한다.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비밀. 헬라어 뮈스테리온(muste-rion, 참조 롬 11:25 주석).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알릴 때가 무르익었다. 세상은 이 시간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으며 사도 바울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골 1:26; 참조 엡 3:3) 비밀의 전달자 중 하나로 크게 존경받았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 선포되고 나서야 풀리기 시작했으며, 그 범위와 이방인을 향한 적용도 그때부터 알려졌다. 서신 기록에 나타난 바울의 주된 부담은 바로 이방인에게 비밀을 알게 하는 것이다.
바울이 “비밀”, “지식”, “지혜”라는 세 단어를 이방 신비종교에서 채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단어와 개념들은 그런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의 세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어구들이 사해 두루마리에 나온다는 것은 그것들이 유대인의 관념임을 반영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개념과 어휘를 잘 활용하여, 영감을 통해 그것들을 기독교가 제공하는 하나님에 관한 풍부한 배경과 결부시켰을 것이다.
그 기쁘심. 참조 5절 주석. 이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의도로 주어졌다. 그분은 죄가 발발했을 때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처신하시지 않았으며, 또한 영광스럽지만 고통이 따르는 구속 사업을 마지못해 착수하시지도 않았다. 그분은 강요받을 필요도 없으셨고, 그분과 상관없는 환경들에 의해 영향받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한 일들을 기꺼이 하셨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거나 상처받은 피조물을 도우시기 전에 사람이나 그리스도의 설득에 마지못해 뜻을 굽히는 분으로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적절하거나 경건한 묘사가 아니다.
때가 찬(Fullness of times). “때”(times)가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기간이나 시기가 연속됨을 시사한다(참조 고전 10:11 주석). 복음 시대 전체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파종하고 추수하는 데도 적절한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구속과 관련된 하나님의 활동에도 적절한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이룰 수 있고 다른 때에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이는 그분이 자신의 계획에 억지로 복종하도록 강요할 수 없는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들을 다루시기 때문이다. 각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곧 우주적 연합이 있을 최후의 정점으로 나아가는 발전 단계들이 이어져왔다. 사도는 서신을 써 가면서 이 주제의 범위를 넓힌다.
경륜.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 “청지기 직분.” 즉 청지기의 직무인 “채비”, “계획.” 바울은 여기에 묘사된 연합을 궁극적으로 이룰 구원의 계획으로 언급하는 것 같다.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0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다 그리스도 안에서. 깨진 연합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 연합이 필히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는 그분이 만물의 중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만물을 만드셨고,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교회의 중심이자 최고의 희망이시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고독한 모험이 아니요, 그리스도인은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이다. 하나님의 우주에 존재하던 연합은 죄로 인해 깨졌다. 하나님의 뜻의 비밀은 여건이 마련될 때 연합을 회복시키는 계획, 즉 그리스도를 통해 이룰 회복이었다. 그 비밀은 대쟁투의 종국, 곧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고 하나님의 품성이 옹호받을 때 절정에 이를 것이다.
통일되게. 헬라어 아나케팔라이오오(anake-phalaioo-), “요약하다”, “주재하다”, “초점을 맞추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여기와 바울이 율법을 요약해서 묘사하는 롬 13:9에만 나타난다.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1 모든 것을 자기가 뜻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따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그 마음의 원대로. 하나님이 사람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역사하심을 확신하는 근거인데, 이는 사람의 뜻은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사에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고, 그분의 모든 행사의 이면에는 완전과 무한한 사랑이 있음을 잊어버리고 염치없이 그분에게도 인간처럼 가변성이 있다고 여긴다. 그분 안에는 무한한 지혜가 무한한 사랑 및 최고의 주권 의지와 결합돼 있어서 그분은 어떤 구속이나 불가피성 아래 있지 않으시다.
예정을 입어. 즉 “미리 선별되어”(참조 4, 5절 주석). 여기에 예정이 다시 언급된 이유는 기업을 얻는 것이 우연이나 운으로 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목적과 일치되었다.
그 안에서. 이 말은 단순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 10절보다는 11절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기업이 되었으니. 즉 “[제비로] 뽑혔으니.” 모든 신자는 언약을 통해 이미 각자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업은 5절에 언급된 입양을 통해 권리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 기업은 보혈로 그 기업을 사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2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문자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리고 지금까지 바라는].” 이 말은 선조들을 통해 제일 먼저 기업의 참여자가 되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적용되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때부터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고대해 왔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날 복음의 진리를 간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세계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인 것처럼, 유대인도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 위해 살고 활동하는 큰 특권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단순히 장래에 대한 소원에 그치지 않는데, 이는 그 소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소망의 풍성함”(히 6:11), “산 소망”(벧전 1:3), “하나님의 소망”(롬 15:13)을 “부끄럽게 아니”(롬 5:5)하는 소망이 기록돼 있다. 사람의 심령 속에는 삶의 비극에서 행복한 결말을 고대하는 본능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이 그것을 심령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었다. 바울이 친척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롬 16:7), 그는 분명히 이전에 허송세월 보낸 것을 늘 후회했을 것이다. 허송세월한 뒤 남은 삶을 바치기보다는 젊었을 때 그리스도에게 나와 온 생애를 바치는 자들은 복이 있다. 소망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던져진 밧줄과 같다. 밧줄을 던져 준 사람의 의도에 관해 논쟁하거나 그 밧줄의 강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겠는가! 멸망해 가는 자가 “복스러운 소망”을 굳게 붙잡으면 그 소망이 자신을 지탱하고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영광의 찬송. 참조 6절 주석.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너희도 바라는] 그 안에서. (「제임스왕역」에는 “그 안에서 너희도 바라는”[In whom ye also trusted]라는 구절이 있음-역자 주). “바라는”(trusted)이라는 말은 첨가된 것이다. 다른 독법을 지지하는 해석들은 다음과 같다. (1) 내용의 흐름을 11절 상단으로 되돌려 “기업을 얻었으니”를 보충하여, 이 구절을 “너희도 기업을 얻은 자들 가운데”라고 읽어야 함. (2) “속해 있다”를 보충하여, 이 구절을 “너희도 속한 자들 가운데”라고 읽어야 함. (3) 내용의 흐름을 13절 하단에 있는 “인 치심을 받았으니”와 연결해 아무 말도 보충하지 말고 이 구절을 “그 안에서 너희도…인 치심을 받았으니”(참조 「개정표준역」)라고 읽어야 함. 보충된 단어인 “바라는”에 반대하여, 12절에 있는 말이 사실은 “전에 바라던”(헬라어로는 한 낱말임)이기 때문에 “바라는”을 보충하면 13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진리의 말씀. 진리의 말씀은 여기서 “너희의 구원의 복음”이라고 정의된다(참조 롬 1:16). 우리는 말씀에 유의하고(막 4:24), 온유함(약 1:21)과 믿음(히 4:2)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권면을 받는데, 이는 말씀이 영생에 이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진리란 그 자체로는 구원이 없는 사실들을 조합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진리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분에게 인도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든 이교도이든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상한 욕구는 한 근원에서 나온다. 진실로 성령의 감화는 진리를 효과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필요하다(고전 2:12~15). 척박한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살아 있는 말씀인 분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기록이나 구두로 된 말씀에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다.
약속의 성령. 성령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전부터 약속됐고(사 32:15; 겔 36:26; 욜 2:28) 그리스도도 친히 약속하셨기(요 14:16, 17) 때문이다. 자기 백성(딤후 2:19)을 인 쳐서 신원을 확인하고 구속의 날까지 지키는 분(엡 4:30)이 바로 약속의 성령이시다. 여기서 그분의 신원은 인 치는 대리인이다. 인 쳐진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그들 안에 있다(요일 5:10).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이 진실하다고 보증하시는데, 신자와 불신자가 주로 구분되는 점은 바로 이 확신이다. 인은 성도가 되기로 선택한 모든 자들에게 쳐진다.
인 치심. 헬라어 스프라기조(sphragizo-, 참조 고후 1:22; 요 6:27 주석). 신자의 생애에는 순서대로 변화가 일어난다. 우선 들은 뒤에 믿게 되고, 그런 뒤에 인 쳐지는데, 말하자면 날인 혹은 검인을 받는 것이다.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14 이 성령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합니다.
보증. 헬라어 아라본(arrabo-n, 참조 고후 1:22 주석).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되었고, 따라서 그 말씀을 믿으면 성령을 받아 인 침을 받게 되며, 그 인 침은 사람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궁극적 성취에 대한 추가적인 약속이라는 것이 전체 구절의 사상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늘의 기쁨을 맛볼 특권이 여전히 있으며, 그런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마땅히 자신의 경험을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육체의 부활과 주의 재림, 불멸의 선물과 모든 영원한 실체들을 깊이 확신할 수 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거룩한 영을 통해 친히 보증하시기 때문에 확실하다.
그 얻으신 것. 헬라어 페리포이에시스(peri-poie-sis), “취득”, “획득함”, “소유물을 취함.” 페리포이에시스라는 단어는 벧전 2:9에서 “소유된”으로 번역하는데, “소유된 백성”이라는 구절은 문자적으로 “취득한 백성” 혹은 “[하나님] 소유의 백성”이다. 주석가들 중에는 바울이 쓴 이 구절을 하나님이 값을 주고 사신 소유인 성도에게 적용하는 이들도 있고, 성도가 얻는 기업에 적용하는 이들도 있다(참조 엡 1:18 주석). 후자의 견해가 문맥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 성도는 성령이 보증하는 미래의 기업을 고대한다.
구속. 참조 7절 주석. 신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미 구원받았지만, 여기서는 구속을 미래에 속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기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영광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참조 6절 주석. 이 고양된 찬양의 음조로써, 이 편지의 특별한 서론은 마무리된다. 바울은 사상의 범위를 “창세 전”부터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기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본다.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개념을 신학적 추상개념이 아니라 가장 실제적인 관심사로 제시한다. 그는 예정과 자유 의지에 관해 철학을 엮어 내거나 논문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야말로 사람들이 직면해야 하는 모든 지적, 도덕적 문제를 해소해 주신다고 이해하고 있다.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5 그러므로 나도,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여러분이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듣고서
이를 인하여…나도. 사도는 1~14절에 묘사된 축복으로 인해 여기서부터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듣고. 바울은 수감 중에 자기가 세운 교회들의 형편이 어떠한지 소식을 자주 들으면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다.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은 그에게 큰 용기를 주는 원천이었다.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의 생략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를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장의 내용을 적절히 완성하려면 이 단어가 필요하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믿음과 사랑을 함께 묶어 제시하는데(고전 13:13; 살전 1:3 등), 이는 믿음과 사랑이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구별짓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성도를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성도, 사실 그다지 성도답지 않은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요일 4:20). 바울이 권장한 사랑은 모든 성도, 즉 다양한 습관과 기질 때문에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까지도 포함하라는 포괄적인 것이다.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6 여러분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올리며,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하기를. 유사한 감사의 진술이 롬 1:8; 고전 1:4; 빌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딤후 1:3; 몬 4, 5절에도 나온다. 바울의 감사 정신은 감사의 표현을 “쉬지 말고” 하는 것이었기에 많이 볼 수 있다. 자주 자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바울에게 밝고 즐거워하는 성품이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그런 특성이 없었다면 그는 여러 고난을 결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기쁨과 감사의 선율이 다수의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해법 중에는 신앙생활의 행복한 경험들을 나누는 것이 포함된다.
말하노라. 바울의 기도를 연구해 보면 그의 탄원이 주로 교회와 교인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참조 롬 1:9; 빌 1:4).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 묘사돼 있다고 해서 아들 하나님이 종속되신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참조 요 14:28 주석). 우리는 그분들의 관계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을 우리의 크신 맏형과 같은 입장에 둔다.
영광의 아버지. 행 7:2 주석과 비교하라. 이 표현은 영광을 속성 중 하나로 지니신 하늘 아버지를 의미할 것이다. “영광”의 정의에 관해서는 롬 3:23 주석을 참조하라. 영광의 아버지를 자기 삶에 영접한 신자는 영광스런 기업도 갖게 됨을 시사하는 엡 1:18에서 “영광”이라는 단어의 용례와 비교하라. 하늘 아버지가 창세 전에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셨던 것처럼(요 17:24),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에게 나오는 모든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고후 3:18).
지혜. 헬라어 소피아(sophia, 참조 눅 2:52 주석). 히브리어 호크마(h.okmah)에 해당되며, 그 정의에 관해서는 잠 1:2 주석을 참조하라.
계시.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에게 직접 받은 통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에 이르는 데는 이성 이상의 것을 활용해야 한다. 믿는 영혼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신령한 조명, 곧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만 한다.
정신. 지혜와 계시가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표현은 계몽된 인간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눅 12:12; 요 14:26; 고전 2:9, 10).
알게 하시고. 헬라어 에피그노시스(epigno-sis), “온전한 지식”, “정확한 지식.”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인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분을 명확하게 아는 지식이다. 이런 지식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사색에 그치는 지식만이거나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고, 오히려 영적 기능이 활발하고 신령한 진리에 민감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체험적인 지식이다. 그러한 지식은 과정을 거친다. 날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품성의 새로운 면을 보여 주어 영혼을 감동시켜 더 거룩하게 살도록 격려하신다.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너희 마음 눈. (「제임스왕역」에는 “너희 이해의 눈”[Eyes of your understanding]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너희 마음 눈”(eyes of your heart)이라는 독법을 입증한다. 이 인상적인 구절은 신약의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은 “마음”을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있는 곳으로 묘사했다(참조 롬 1:21 주석). 이런 맥락에서 바울도 여기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 같다. “눈”은 통찰력과 계몽된 견해, 신령한 깨달음과 도덕적 이해력을 대표한다. 영적으로 열린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참조 고전 2:9, 10 주석). 가장 내밀한 인격에 영향을 끼치는 새롭고 깊이 있는 조명이 이뤄진다. 그것은 새로운 기능이나 은사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 혹은 통찰력이다.
부르심. 참조 롬 8:30 주석.
소망. 참조 롬 5:2~5; 8:24 주석. 이 구절에서 바울은 소망의 대상이 아니라 거룩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고취된 생애에 나타나는 소망의 원칙을 언급한다고 믿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런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곧 측량 못할 귀중한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의 독자들은 아직 그들을 부른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기에, 바울은 그들이 구속의 사실 위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소망,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골 1:27, 28)을 보게 되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꿈 꾼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소망을 품기를 원했다. 소망은 믿음과 보증이 혼합된 것이지만, 그것의 성취를 위해 미래를 내다본다. 신자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자신의 온 생애가 복스러운 소망으로 채워지게 될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주석가들은 바울이 “소망”을 하나님의 부르심의 최종 목표로 언급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목표란 하나님이 성도에게 도달하라고 하시는 신령한 성취의 극치이며, 타락한 데서 높은 지위로 회복된 성도가 보게 될 궁극적인 영광화라고 말한다.
기업. 이 용어는 하나님의 선민인 성도나 하나님의 상속인으로서 성도가 누리는 특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구속받은 자들이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소유, 재산 혹은 기업이라고 불린다(출 19:5). 그들은 창조와 구속 때문에 그분의 소유인 것이다. 그들은 “값으로 산 것이”(고전 6:20)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유업을 기뻐하신다.
성도의 특권으로 여겨지는 유업은 영광스럽고 풍성할 것인데, 이는 “이기는 자는 이 [모든] 것들을 유업으로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계 21:7). 하나님의 은혜, 사랑, 능력, 자비, 나라의 풍성함은 그분의 충성된 자녀에게 공급된다(참조 빌 4:19).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강력. 헬라어 크라토스(kratos). “힘”, “세력.” “능력”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하나님이나 그분의 말씀과 관련해서만 사용된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은 죄인을 성도로 변화시킬 때 발휘된다. 이 뚜렷한 변화는 심리학이나 교육이나 선행으로 이루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역사한 결과이다.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인지 가늠하는 표준 혹은 기준은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고 이뤄지는 데 있다(20절).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도록 해 주는 통로이다(참조 롬 4:3~5 주석).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 사도는 “소망”과 “풍성”에 대한 지식(18절)뿐 아니라,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적으로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우리의 연약한 본성은 회심과 성화를 통해 거룩한 힘에 의해 소생하고 변화한다. 수반되는 능력이 없다면 “그의 부르심의 소망”(18절)으로 기다리는 것은 가장 애타고 불만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알게 하시기를. 사도는 눈이 밝아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지식 세 가지를 열거한다(18, 19절).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0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참조 19절 주석.
다시 살리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사했던 동일한 능력이 지금 신자의 심령 속에서도 역사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 능력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은 육체에 임했듯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에게도 임한다(엡 2:1; 참조 롬 8:11; 고후 4:14).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일어나서 하나님 우편에 앉는 권위를 얻으셨다. 그분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보증하며(롬 4:25; 고전 15:20~22), 그분이 높임받으신 것 역시 성도가 마지막에 높임받을 것을 보장한다(참조 엡 1:18).
하늘. 참조 3절 주석.
오른편. 오른편은 권위를 나타내는 자리이다.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권위를 공유하신다는 사상은 성경 다른 곳에도 명백하게 언급돼 있다(요 1:1; 17:5; 행 7:55; 계 3:21).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1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모든 정사와…주관하는 자. 여기에 나열된 것들은 일반적으로 선한 천사나 악한 천사의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참조 엡 6:12; 롬 8:38 주석). 그리스도는 천상과 지상의 모든 권세들보다 뛰어나시다. 그분은 전 우주에서 최상의 권위를 가진 만군의 주이시다(참조 롬 8:38 주석; 고전 15:24; 엡 3:10; 6:12; 골 1:16). 항상 바울은 영지주의 이단의 점증하는 영향에 비춰볼 때 쉽게 용납할 수 있는 개념 곧 그리스도를 열등한 신격(subdeity)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유대의 가르침으로 이미 익숙해진 용어를 사용하여(참조 외경 에녹1서 61:10), 그리스도가 실제 혹은 가상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모든 존재보다 우월하시다는 진리를 밝힌다.
세상. 헬라어 아이온(aio-n), “시대”, “시기”(참조 마 13:39 주석). “이 세상”은 천상과 지상을 막론한 현재 정세를, “오는” 세상은 우주에 도래할 미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굴욕을 당한 뒤 높임받은 결과로 그리스도는 이 시대뿐 아니라 오는 시대에도 전 우주에서 최고로 인정받으실 것이다.
모든 이름. 이 구절은 포괄적인 표현으로, 마치 나열한 것들을 절정으로 몰아가기 위한 것처럼 사용된다. 그분과 비길 존재가 없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과 비교할 수 있는 이름도 없다.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신 바 됨(엡 1:6; 히 1:3)―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오른편에 앉게 하심으로 그의 아들에게 모든 영광을 주사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훨씬 뛰어나게 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받으실 때에 큰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를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셨다.
아버지께서 그 큰 속죄를 받으실 때에 그의 아들에게 보여주신 모든 사랑이 그의 백성들에게도 나타났다. 사랑으로 그들의 관심을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한 사람들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는 바 된다. 그들은 가장 깊은 치욕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였고, 그분의 영광이 그들의 최고의 관심사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신 바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사랑하심같이 그들을 사랑하신다.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믿는 자 사이에 서셔서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 그분의 점없는 의의 두루마기로 그들의 허물과 죄를 가리워 주신다(원고 128, 1897).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그의 발 아래. 참조 고전 15:24~28 주석.
만물 위에…머리. 이런 관계에는 통치권만 암시된 것이 아니다. 이 서신에 사용된 머리의 역할에는 생사가 걸린 연합과 관계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다(엡 4:15, 16; 골 2:19). 머리는 육체의 모든 활동을 주관하는 능동적인 중심부이다. 바울은 머리와 육체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에서 잘 예증된 연합 사상을 강조한다.
교회.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e-sia, 참조 마 18:17 주석).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그의 몸. 머리인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든 권위 위에 좌정하신다. 교회와 인체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 몸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며, 둘 다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고, 구성원 각자에게는 은사와 기질이 있다. 은사가 매우 다양하더라도 조화로운 연합과 동작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교인들은 함께 일할 때에 비로소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충만케 하시는. 참조 4:10 주석.
충만. 헬라어 플레로마(ple-ro-ma), “전부(수)”, “전부(범위)”, “전체 내용”, “보충.” 이 단어는 채워짐(수동의 의미) 혹은 어떤 것이 채워진 상태를 가리킨다(참조 골 1:19 주석).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본다(엡 3:19). 그리스도는 자신의 충만과 속성을 부어 주어 교회를 거룩한 생명, 참으로 풍성한 생명으로 채우셨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머리의 신성을, 에베소서에서 몸의 특권을 강조한다.
서 론

1. 표제
초기교회는 이 서신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내졌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일치된 견해를 보였으며, 알려진 모든 성경 필사본은 하나도 예외 없이 “에베소인들에게”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그런데 엡 1:1에 나온 “에베소에 있는”(en Epheso-[엔 에페소])이라는 말이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필사본에 속하는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과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오래된 파피루스 필사본인 체스터 베티 사본(Chester Beatty MS P46) 등에는 빠져 있다. 4세기의 바실(Basil)은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말이 생략돼 있는 고대 필사본들을 보았다고 말한다(Against Eunomius ii. 19). 오리게네스(Origen, Commentary)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Against Marcion v. 17)의 진술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그러므로 2세기 필사본들 중에는 문제가 되는 이 말이 생략된 필사본들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참조 제10권, 156~159.
또한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친구들을 분명 많이 사귀었을 텐데도 이 서신에 개인적인 인사나 안부가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서신은 모든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교리를 다룬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제시된 해결책으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이 편지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것이다(참조 골 4:16).
(2) 이 편지는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 보낸 회람용 편지이다.
(3) 이 편지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둘째와 셋째 견해를 조합하면 이 문제의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편지를 총독령인 소아시아의 수도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낼 때 그 지역의 다른 교회들도 회람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매우 짙다. 이런 견해는 이 서신을 에베소 교회에 보낸 것이라는 전승의 설명과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말이 생략된 초기 필사본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인근 교회들이 회람한 자필 원고의 필사본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이 편지를 에베소 신자들이 분명히 읽었으며, 소아시아 도(道)에 있는 다른 신자들도 읽었을 것이다.
2. 저자
바울이 에베소서의 저자라는 데 의문이 전혀 제기되지 않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바울이 저자가 아니거나 썼더라도 일부분만 기록했다는 결론에 다다른 현대 비평가가 많아졌다. 그들은 에베소서가 골로새서를 장황하게 반복한 것이며 일부 표현에는 필자가 에베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음이 드러나 있다(엡 3:2, 3; 4:21)고 주장했다. 바울이 약 3년간 애썼던(행 20:31)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아무런 인사도 남기지 않은 사실도 지적했다. 이 서신은 문체나 정서나 목적상 바울 서신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나아가 수감된 사람이 그처럼 유쾌한 편지를 쓰지 못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보려면 제10권, 156~159을 참조하라.
가짜 문서와 외경들이 정경에서 분리되던 초기부터 에베소서는 신약 정경에 포함됐다. 에베소서에 그런 자격이 있다는 외적인 증거는 매우 많다. 이런 사실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AD 90년경)도 분명히 알고 있었고, 2세기 초 이그나티우스(Ignatius)와 폴뤼카르푸스(Polycarp)도 입증했다. 바울이 저자라는 언급은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에 나오고, 이후 이레내우스(Irenaeus, AD 18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190~195년경),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AD 207년경), 그 외 많은 초기 저술가들의 기록에도 나온다. 본 주석은 바울이 저자라는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3. 역사적 배경
로마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했던 바울은 로마에 보내졌는데, AD 61년 봄에 도착했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2년간 죄수로 지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이 기록된 시기는 AD 62년경일 것이다.
바울은 죄수였으나 어느 정도 자유를 누렸던 것으로 보이며(참조 엡 6:19; 골 4:3~11), 그로 인해 숙고와 기록을 할 만한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 좀 더 교리적이고 실제적인 교훈을 써 보냈다. 이 편지는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와 같은 시기에 기록된 것 같은데, 이는 두기고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전달자였고 그와 동행한 오네시모는 빌레몬서의 전달자였기 때문이다(엡 6:21; 골 4:7~9; 몬 12절; 참조 사도행적, 456). 그리고 에베소서는 1차 투옥 기간에 기록한 편지 네 통 가운데 하나이며, 빌립보서도 같은 기간에 네 통 중 마지막으로 기록됐을 것이다(참조 제11권, 66).
에베소서는 사도가 가이사랴에 투옥돼 있는 동안 기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로마에서 기록했다는 증거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 기록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3:1; 4:1), 구금(拘禁)된 형편으로 볼 때 그가 편지를 기록하기에는 로마가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행 28:16, 20). 그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속히 석방될 것을 희망했으나(몬 22절), 가이사랴에 구금된 동안에 그런 희망을 품었다는 지적이 없다. 바울은 오래 전부터 로마에 방문하고 싶어했으며(롬 15:23, 24), 그곳에서 골로새로 갈 생각이었다(몬 22절). 그렇지만 가이사랴에서 골로새로 갈 의향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그가 주고자 한 기별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잔인무도한 폭군 네로(Nero)가 황제였던 당시에는 방종과 사치와 살상이 만연했다. 예를 들면 로마 원로원의 의원이었던 L. 페다니우스 세쿤두스(L. Pedanius Secundus)가 어떤 노예에게 살해당하자, 법적인 권리에 의거하여 그 집안의 노예 약 400명이 보복으로 사형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서신을 기록할 무렵(AD 62년), 영국에서는 보아디케아(Boadicea) 또는 부딕카(Boudicca)가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 “7만 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더불어 반군도 수천 명이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같은 혼란스러운 와중에서 사도는 깊은 생각과 영감의 결과로 인간에게 평화와 연합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신앙에 관하여 가장 훌륭한 설교를 내놓았다. 이 편지서는 “신약의 알프스”(the Alps of the New Testament)라 불리며 바울이 일곱 교회에 보낸 아홉 통의 서신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4. 주제
에베소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아시아인과 유럽인, 노예와 자유인으로 이뤄진 교회(또는 교회들)에 편지를 썼는데,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으로 회복돼야 할 분열된 세계를 상징한다. 그곳에는 개인, 가족, 교회, 인종의 연합이 필요했다. 각 신자의 생애에서 이뤄지는 개인적인 연합의 회복은 하나님의 우주의 연합을 보증한다. 연합이라는 주제가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에베소서 전반에 걸쳐 은연중에 드러난다.
사도는 자신의 주제를 영적으로 매우 고조된 논조로 선포하며, 교리와 조직뿐 아니라 머리인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인 교회 안에서 연합을 이루기 위해 모든 고결한 품성과 행위를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주요 구절이긴 하지만 중심 성경절 하나를 골라내기는 매우 힘든데, 이는 어떤 형태로든지 기본 주제를 제시하지 않는 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택함, 용서, 예정, 가족관계 같은 것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렇다.
사도는 믿음보다는 은혜에 관해 더 많이 말한다. 먼저 쓴 편지들에서는 개인과 구원의 관계를 강조했으나, 여기서는 단체, 교회, 몸을 더 강조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보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에 관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보다 오히려 신자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주제를 형식적인 논증이나 명제로 발전시키지 않는다. 그는 계시받은 것을 단순히 말하면서, 자신에게 어떤 탁월한 지성이나 직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 자신에게 하나님이 하늘나라의 본질적인 요소인 영적인 연합에 대한 계시를 주셨기 때문에 소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16세기 개신교의 종교개혁과 관련된다면 에베소서는 오늘날 교회와 관련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과 가족, 가족과 민족, 민족과 인종, 나아가서는 만인과 교회 그리고 하나님과의 제반 관계에 관해 기독교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교회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실현하며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1:10)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물의 중심이요 목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대답한다.
오늘날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연합, 고정된 획일성으로 묶이지 않는 연합에 대한 필요보다 더 긴요한 것은 없다. 모든 선한 사람의 마음에 늘 붙어 다니며 괴롭히는 문제에 유일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계시가 사도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5. 개요
I. 인사, 1:1, 2
II. 교리적인 부분, 1:3~3:21
A. 믿는 자가 받는 복, 1:3~14
1. 찬송, 1:3~10
2. 믿는 자들은 구원의 인 침을 받았음, 1:11~14
B. 교회를 위한 기도, 1:15~23
C.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임, 2:1~22
1.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재창조, 2:1~10
2. 만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 2:11~22
D. 비밀이 담긴 계시, 3:1~21
1. 비밀이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알려짐, 3:1~6
2.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를 통해 나타남, 3:7~13
3. 믿는 자를 위한 기도와 송영, 3:14~21
III. 실제적인 부분, 4:1~6:20
A. 성령의 은사를 통한 연합, 4:1~16
1. 생명의 연합을 위한 호소, 4:1~6
2. 은사의 본질과 목적, 4:7~16
B. 생활 개혁, 4:17~5:21
1. 영적인 암흑과 영적인 생애가 대조됨, 4:17~24
2. 개혁한 생활의 특성, 4:25~32
3. 순결한 생애를 권고함, 5:1~14
4. 어리석음과 지혜, 5:15~21
C. 가족 관계의 의무, 5:22~6:9
1. 남편과 아내, 5:22~33
2. 자녀와 부모, 6:1~4
3. 종과 상전, 6:5~9
D. 그리스도인의 갑옷, 6:10~20
IV. 결론과 축도, 6: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