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한국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4개국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며 약 15년을 보냈고 업무 관련 출장지가 40개 도시에 이르다 보니 여러면에서 우리 한국인과 외국인을 비교해 보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그리고 오래 살았거나 자주 다닌곳은 내 집처럼 편안하게 느낄 정도가 되었다. 필자의 호기심과 똥배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여권 내기가 하늘의 별따기 처럼 어렵던 시절. 여권을 받아 쥐어도 소양교육이라는 중정 (중앙정보부) 에서 실시하는 4시간 정도의 교육을 받아야 출국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그들이 가장 강조하던 대목이 외국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는 것이었다.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던 시절. 혹시나 그들의 꾀임에 빠져 북한으로 들어가 남한에서 굶주리다 못해 북조선으로 건너온 용사라는 칭호를 얻고 그들의 TV에 나와 남한 욕을 한바탕 해 대는게 우리 정부는 그렇게 싫었던 것이다.
필자가 대한항공 암스테르담 지점에 근무할 때 공항 (스키폴 공항: 당시 유럽에서 제일 큰 공항이었다) 에서 김일성 뱃지를 가슴에 단 북한사람 4명과 마주친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비엔나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4명 모두 해외여행이 처음인지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는 사람과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맞서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필자가 다가가 그 비행기를 타려면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자 그들은 모두 순간적으로 얼어 붙었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그 방향으로 사라졌다. 마치 필자가 그들을 납치라도 하려 했던것처럼.
그 때의 느낌은 그들이 예절을 차릴 만큼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외국인들이 우리 한국사람들을 보며 동일한 느낌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북한 모두 그렇고 그런 시절의 이야기다. 이렇게 우리 한민족은 6/25 전쟁을 치루고도 모자라 남북한이 항상 서로 경원하며 다투며 허구한 날 일촉즉발의 전쟁 위험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국가나 개인이나 깡다구(?) 하나만은 무섭게 세다. 그것을 도전정신이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우물안 개구리가 가진 일종의 자만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계 2위의 군사, 경제 강국인 중국을 아직도 좀 덜 깨인 미개국 정도로 여긴다. 30여년전 도시 변두리 대부분의 집들이 목욕 시설도 없고 일부는 노천 화장실에서 일을 보던 그 때 그 시절 중국의 기억에서 한치도 더 못 나가고 있다. 그리고 국토가 남한의 4배이며 인구가 1억 2천만에다 세계 제 3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을 이젠 아예 우리 보다 한수 아래로 본다. 북한은 한 발 더 나아가 세계 최강인 미국과 맞짱도 불사할 정도로 강하게 맞 붙는다. 그러다 이라크 처럼 총 한방 제대로 못 쏴 보고 꼼짝 못하고 당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깡다구 정신이 불굴의 의지로 승화되어 국가나 개인에게 닥친 역경을 헤쳐나가는 모습도 숱하게 보게된다.
어느 해 6월. 그날은 유난히 더웠다. 드라이덴은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겨울은 무지하게 춥지만 여름은 한국 못지 않게 덥다. 다만 습도가 좀 낮아 그늘만 찾아 들어가면 그래도 시원하다. 사무실과 붙어있는 안채 거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나를 아내가 부른다. 저녁 6시경 이지만 아직 해가 쨍쨍한게 한 낮이나 다름 없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 키가 180센티 이상으로 보이는, 바짝 마른 한 한국인 젊은이가 아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너무 타서 숯덩이 처럼 새카맸다. 첫 인상은 꼭 아프리카 케냐의 마사이족 같았다. 그는 자전거로 세계일주 중인데 목하 캐나다 대륙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더워 예정된 마을보다 훨씬 못 미친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장거리 여행에서는 무엇보다 체력관리가 제일이라고 하며 방을 하나 내 주었다. 그것도 무료로. 그는 아직 여유가 있다며 숙박비를 내겠다고 우겨 우리는 해도 남았으니 우리 잔디밭 잔디 깎는 것으로 숙박비를 대신 하기로 했다. 그후 자기 방에서 목욕을 하고 우리는 안채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그의 여행담을 재미있게 들었다.
어려서부터 자전거 세계일주가 꿈인 그는 직장생활을 하며 착실히 여행비용을 모았다. 근 13년 정도 저축하니 여행비용이 마련 되더란다. 그렇게 하느라고 30대 후반인데 아직 장가도 못 갔다고 하며 웃는다.
그의 여행은 시베리아 횡단으로 시작해서 유럽 그리고 영국.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 대륙횡단으로 이어진다. 시베리아 횡단시 승용차에 받쳐 3개월간 러시아의 한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할 때는 이 여행을 포기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한 러시아 간호사의 헌신적인 간호로 그 어려움을 이겨 내고 지금에 이르렀다.
캐나다 육로 횡단후 밴쿠버에서 비행기로 도쿄로 날라가 도쿄 - 시모노세키까지 자전거로 또 달린후 페리편으로 부산에 상륙후 서울까지 또 페달을 밟는 여행이 이어진다고 하는데 그 젊은이가 대견하고 무척 존경스러웠다. 이 여행이 끝나면 무엇을 할꺼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일단 한국에 돌아가면 좀 쉬고나서 이 여행을 기록한 책을 출판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는? 이라는 질문에 그걸로 돈이 좀 모이면 또 자전거 여행을 할텐데 그 때는 남미 종단이 될거라고 했다. 당신이야말로 “의지의 한국인” 으로 우리나라의 나약한 젊은이들이 따르고 배워야 한다는 나의 말에 자기가 쓸 책에 오늘 이 팀버랜드모텔 이야기도 들어갈 것이라고 해서 부디 이곳을 잘 묘사하고 책이 나오면 꼭 한권 부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캐나다의 이런 깡촌에 한국인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며 이곳에서 전적으로 캐나다인을 대상으로 삼아 여유로운 생활을 꾸려나가는 우리야 말로 “의지의 한국인” 이라고 오히려 우리를 치켜세웠다. 이튿날 아침을 함께하고 그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작별을 고했다. 우리는 그가 무사히 여행을 끝내고 책이 출판되면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고 우리 팀버랜드 모텔이 한국에도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덕담겸 우리의 바램을 말 해줬다.
<추신>
첫댓글 종로에서 소양교육 받을 때가 아련합니다.
한국 여권의 위력에 격세지감도...
이제는 여행자유화 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가니까 웬만한 글발이나 테마를 미리 정해 기획을 세우지 않고 다녀와 출판하기는 쉽지가 않을 겁니다.
대충 썼다가는 SNS 를 통해 비교평가나 비난까지 받기도 쉽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부터도 아마 군대 영향인지 일단 저지르고, 안되도 되게 하려고 기를 쓰는 습성이 강하더라구요.
서양 사람들은 합리적인 추론과 검토를 해보고 가부를 결정하면 아예 잊던가, 끝까지 가는데....
쫒겨 다니고, 잡혀가고 하던 제게 해외 여행은 자유와 국격 그 자체여서
우리 나라가 더 잘 되어 후손들이 보다 자유롭고 당당하게 어느 나라든 다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늘 실감나고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5 - 6월 이곳 캐나다의 햇볓에 새카맣게 탄데다 키도 호리호리해서 꼭 케냐의 마사이족 같았던 그 청년이 얼마나 부럽고 존경스러웠는지 뭐든지 다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 요즘 한국의 캥거루세대 젊은이들을 보며 새삼 그 청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정도의 열정이 있는 분이면 잘 되어 너무 바빠서 연락도 못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정선생님 글 잘읽었습니다
항상 흥미진진한 글입니다
선생님 의 그 남다른 배짱이
이렇게 흥미로운 삶이 되셨는데,
한편 부인께서도 부군의뜻을 그나마 잘 마추어주신 덕에
오늘의 흥미로운 삶들을 저희에게 보이시게 되지않았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