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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헌 조 미경.
동짓날 긴긴밤 허무를 달래며
단편 소설한편 올려봅니다
메리크리스마스
♡☆ 나는 혼자가 아니야 ☆♡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가족들은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지 거실에는 정적만 흐른다. 창밖은 어스름한 새벽 공기가 머물러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의 나무들이 빛바랜 옷을 갈아입고 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얇은 옷을 입고 있는 나의 몸은 찬기가 들어오자 파리하게 변한다. 상념에 젖어 있던 나를 깨운 것은 모닝콜이다. 밤새도록 뒤척이다 잠에서 깨서 그런지 목이 건조하고 아프다. 잠옷은 땀에 젖어 있고 머리카락은 부스스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른 듯, 몰골이 말이 아니다. 매일 기분은 다운되고 몸에서는 에너지가 바닥이다. 가족들은 갑자기 왜 그러느냐 놀라지만 여자는 나이가 들면 자신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겪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 심경의 변덕스러움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춘기를 심하게 겪듯 심연의 우물에 감추어 두었던 것들이, 불쑥 내 눈앞으로 걸어와 괴롭게 한다. 며칠 동안 악몽을 꾸었다. 다음 달 엄마의 기일이 다가오는데 코로나 확진을 받고 며칠째 집에서 쉬고 있다. 쓴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 차가운 심장에 닿았다. 심장은 움찔움찔 팔딱거리며 망각의 세계를 엿보려 한다. 식은 커피잔을 바라보다 창문을 닫고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낙엽이 나무에서 떨어져, 시나브로 낙엽이 날리는 11월이면 가을과 이별을 준비하고, 겨울을 준비할 때 갈잎의 스산함이 눈앞으로 걸어오는 날이 되면, 그날의 붉은 장미는 향기로운 꽃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시든 낙엽이 되어 어느 청소부의 비질에 쓸려 어디론가 목적지도 없이 스러졌다. 그날의 선명했던 기억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눈앞에서, 낡고 빛바랜 사진첩에서 툭 튀어나와, 나의 유년 시절을 어두운 암실로 만들어놓고 사라진다.
6살 꼬마 아이였던 나는 엄마를 따라 우물가에 갔다. 우리 동네에 유일한 공동 우물은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그날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기거하는 대문 옆, 사랑방까지 오셔서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셨다. 엄마는 사랑방 출입이 잦은 편이 아니다. 할아버지 식사와 할머니 식사 때도 나를 통해 어른들을 부르셨다. "은주야 …은주야?" 내가 입에 곶감을 물고 있어 얼른 대답하지 못했는데, 전에 없이 엄마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이 짜증이 배어 있었다. 내가 방문을 열며 엄마 얼굴을 빤히 보았다. "왜 그래 엄마?”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멈추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은주야?" 하고 약간 샐쭉 토라진 엄마의 음성이 들렸다. 눈앞에 서 있는 엄마의 창백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는데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엄마가 부르는데 대답도 하지 않고 방에서 뭐 하는 거냐?"
그날 난, 엄마의 심각한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데, 그때 엄마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무엇인가 무의식에 이끌리어 내 손을 우물가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우물가는 다른 날보다 한산했다. 엄마는 가족들 점심 식사 준비하느라, 밭에서 막 따온 고추며 오이 가지 등 푸성귀를 씻었다. 나는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에게 배운 한글을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그때 엄마가 하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
"우리 은주… 학교 가서 공부 잘해서 상도 타고 선생님께 칭찬받는 모습 보고 싶다." 엄마의 얼굴에는 하얀 찔레꽃처럼 맑은 미소가 어렸다. 그때 엄마 나이는 이제 겨우 25살, 볼에는 새색시 특유의 수줍음을 머금고 있었고 무거운 물항아리를 이고,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은 살찐 암송아지처럼 탄력이 있었다. 엄마 또래 젊은 아줌마들은 엄마가 예뻐서 아버지가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엄마는 19살에 아버지와 결혼해서 살림 밑천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던 첫딸인 나를 낳고 부부 금실이 좋아, 동네 아낙들의 부러움을 사던 차에 아버지 닮은 사내아이를 낳고, 시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쌀가마를 번쩍 들어 나르던 남정네의 속 깊은 사랑을 누리다 병이 들었다. 낮에는 농사일로 고단해도, 밤이면 넓은 품에 안겨 세상 시름을 잊던 새댁이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어른들의 무지와 관계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농촌에 없는 도시의 대형 병원에서, 진찰받았다면 지금의 나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엄마의 폐결핵은 아버지의 무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철이 든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 옆에서 흙장난하던 나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산과 들에 찔레꽃이 하얀 꽃을 피우는 5월이 되면 꽃들 머리 위에서 윙윙대는 벌들의 날개만 보아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길을 걷다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런 날이면 엄마의 허상이 내게로 온 것처럼 심하게 앓는다.
대가족을 건사하던 엄마는 우물가에서 푸성귀를 씻어 바구니에 담고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는 나의 손을 잡으셨다. 엄마의 손은 따스하고 축축했다. 엄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예쁜 엄마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게 좋아서 철부지처럼 웃으며 걸었다. 엄마는 무거운 양동이를 머리에 이어서 그랬는지 다른 날과 달리, 걸음이 더디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내 손을 꼭 쥐고 걷던 엄마가 비틀거리며 쓰러진 것은 집을 불과 30미터 앞두고 벌어졌다. 자주 잔기침하던 엄마의 입에서는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엄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은주야?… 얼른 외삼촌 외숙모 불러와." 응, 엄마 왜 또 아파?" 엄마는 자주 아팠고 가슴을 움켜쥐고 통증을 참지 못해 인상을 쓰는 날이 많았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엄마가 넘어진 모습에 놀라 동네 어귀에 사는 외삼촌을 부르러 뛰었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했다는 게 이상했지만, 외삼촌 집에 도착했을 때, 들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마당을 들어서는 외삼촌 부부를 만났다. 외삼촌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이고 “엄마가……, 엄마가, 피가…피가." 여기까지 말하고는, 그만 마당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마루에 누워 있었는데, 힘없이 축 늘어진 엄마 옆에서 이제 갓 세 살 된 남동생이 엄마의 어깨를 흔들며 보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엄마는 나의 바람과 가족들의 애처로운 눈빛을 외면 한 채, 며칠 뒤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엄마의 장례식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일주일을 앓고 나서 집안을 돌아다니며 엄마를 찾으며 울고 난리를 쳤다는 할머니 말씀이 생각 날 뿐이다.
시간은 깊은 상처도 아픔도 치유하는 힘이 있는지, 나의 경우는 사춘기 시절을 다시 한번 피의 악몽으로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기억은 흉터만 남아 만지면 아프고,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날들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농촌의 가을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어린애의 자그마한 손조차도 빌려야 할 만큼 일이 많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학교 옆 논에 벼들이 누렇게 익어서 허수아비도 즐거워 춤출 때면, 학년별 학급별로 학생들은 벼베기에 동원되었다. 바쁜 농촌 일손 돕기라는 명목으로 시작되는 가을 추수는 교실에서 따분한 선생님들의 지루한 수업보다 더 좋았다. 벼 베는 일 자체가 즐겁다기보다는, 일을 핑계로 친구들과 잡담하거나 장난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새참으로 제공되는 과자인 뽀빠이는 군것질에 목을 매은 우리를 흥분시켰다.
날카로운 낫의 번쩍이는 느낌은, 어쩐지 무섭지만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논에서 벼를 베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뜨겁게 내리쬐는데, 논에서 벼를 베어낼 때마다 메뚜기들이 폴짝거리고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나는 짝이 가르쳐 주는 대로 왼손으로 벼를 잡고 오른손에는 낫을 쥐고 조금씩 낫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낫이 스치면서 벼는 나의 왼쪽으로 쓰러졌다. 한참 허리를 굽히고 낫질하다 주위를 살피니 다른 친구들은 한참 앞에서 벼를 베고 있다. 친구들과 보조를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부농인 아버지는 집안일과 농사일은 삼촌들에게 시키고, 우리에게, 잔심부름은 시켜도 농촌의 다른 친구들처럼 한 번도 낫을 잡아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마음이 흐트러진 사이에 손가락이 심한 통증이 밀려오고, 이어서 붉은 피가 손가락을 거치더니 손등까지 흘러 내린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내 손등에서 흘러내린 피는 손가락 끝에서 뚝뚝 떨어지며, 5월 장미꽃처럼 붉은 피는 체육복을 적시더니 바지까지 흘러 내렸다. “피 피 피가 나… 나…어떻게… 아 아…” 피가 손가락에서 팔뚝으로 흘러내리는데, 순간 눈앞에서 쓰러지던 엄마의 모습이 스친다. 엄마의 입에서 시작된 피가 가슴을 적시던 그 모습이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내 목소리에 놀란 짝꿍인 인희가 놀라서 달려왔다.
“어머!… 베였어?”
“얼른 약 발라야겠다.”
인희가 선생님을 부르러 간 사이에도, 피는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고, 나는 피를 보자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리고 다리까지 덜덜 떨렸다. 너무 무서워 눈을 뜨고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붉은 피는 지금까지 참아온 눈물이 비처럼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순간 아픔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담임은 내 손을 보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어 손을 떨고 있었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지만 피는 계속 흐르면서 하얀 붕대를 붉게 물들이며 입고 있던 체육복 옷자락을 꽃잎으로 수 놓았다. 그날 이후 누군가 코에서 코피만 터져도 심장이 뛰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가족에게, 특히 아버지는 어린 남매를, 사랑으로 살뜰히 보살펴 키우는
어미 새가 부러진 날개를 치유하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난 후 다른 새가
둥지를 찾아와 자신의 알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식들을 품 안에 가두었다. 그 후 아버지는 모든, 학교생활을 통제했다. 새엄마는 아버지와 맞선을 본 후 전처 자식과 시동생 시누이들이 있는 우리 집으로 시집왔다. 시간이 지나 배다른 동생이 태어나면서 나는 새엄마의 사고뭉치가 되었다. 새엄마는 아버지를 빼앗아 가더니, 엄마가 쓰시던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 전처 자식인 나와 남동생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한 채 엄마 노릇을 시작했다. 엄마 잃은 조카를 살뜰히 보살펴 준 이모가 불쑥 꿈에 나타나는 날이면, 며칠 동안 감기처럼 아팠다. 지독한 사춘기를 보낼 때도 홀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독한 외로움에 사무처 애정 결핍에 시달릴 때도, 내 곁에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이모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독일에서 광부로 일하시던 이모부를 만나 이민을 떠나면서 나는 또 혼자가 되었다.
엄마가 피를 토하고 돌아가신 후 이모의 손을 잡고 서울이라는 곳으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엄마를 하늘로 보내드린 그해 늦가을이었다. 이모는 엄마의 언니로 자식이 없었다. 이모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이모는 한동안 힘들어하셨다. 그동안 혼자 사시다 엄마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설득, 서울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 집을 떠날 때 고모와 삼촌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아버지는 뚱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대신 했다. 마을을 떠날 때 동네 어귀에는 들국화가 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노란 들국화를 따서 내 머리에 꽂아 주시던 엄마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이모에게 말했다. "이모?” 이 국화꽃 꺾어도 돼요?" 내가 물었다.
이모는 서울 색시의 새초롬한 표정으로 "왜, 꽃이 좋으니?" 이모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모의 말씨는 서울말로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웠다.
"우리 은주…꽃을 좋아하는 모양이네? 이모는 모처럼 활짝 웃으셨다.
"응, 꽃을 보니까 엄마 생각이 나요."
내가 시무룩하게 대꾸하자 이모는 밝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모의 집은 서울에서 아파트 단지가 몰려 있는 동네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4층짜리 연립주택 2층에서 살고 있었다. 아이가 없는 이모 집은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지만, 사람의 훈기가 없이 적막했다. 서울에 도착 후 이모를 따라 큰 시장에 갔다. 시장은 내가 엄마를 따라 구경하던 시골의 5일장과는 달리, 온갖 진기한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모는 인파들을 뚫고 이리저리 점포들을 돌더니 여자아이들 옷을 파는 점포에 멈췄다. 그리고 "은주야? 너 이 옷 어떠니?”
나는 이쁜 옷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해서 이모 얼굴만 바라보았다.
"괜찮아 이모 돈 많아, 그러니까 돈 걱정 하지 말고 골라 보렴."
약 2시간 후 나와 이모는 양손에 옷과 신발을 담은 불룩한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낑낑거리며 걸었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주가 되었고, 얼굴이 까만 촌스러운 계집아이는 유치원에서도 서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어 가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이모 손을 잡고 넓은 운동장을 걸을 때도,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다. 3월 입학식 날 바람이 불자 모래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짓말처럼 눈물이 났다. 내가 울자 이모는 엄마 생각에 우는 줄 아시는지 나를 달랬다. "이모? 모래가 눈에 들어가서 아파요. 모래가 미워요."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나는 아버지가 새엄마와 재혼했다는 소식을 이모를 통해 들었다. 며칠에 한 번씩 전화 통화할 때, 매번 자식들인 나와 남동생만 보고 살겠다고 했는데, 그런 아버지가 우리를 배신했다. 미웠지만, 나에게는 아버지를 말릴 힘이 없었다. 우리를 잘 키우기 위해 새엄마가 필요하다는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집안 살림을 맡아줄 엄마 노릇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이모가 없는 이모의 집은 언제나 적막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식탁에는 내가 좋아하는 빵이 올려져 있었고, 어느 날에는 노란 바나나가 얌전하게 바구니에 담겨 있었지만, 배고프지도 않고 전혀 식욕이 돌지 않았다. 도시락을 먹는 점심시간이면 친구들은 언제나 내 책상에 몰려들어 이모가 만든 반찬에 군침을 흘렸다. 이모는 늘 바빴다. 이모부 사망 보험금으로 생활할 수도 있지만,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작은 가게를 하는 이모는 가끔 저녁 늦게 들어올 때면 몸에서 술 냄새가 풍겼고, 그럴 때 나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이모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은주야?…… 이모는 이름을 부르고 나서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살피더니, 너 이모 말고 엄마라고 부르면 안 돼 난 말이야, 은주에게 이모 보다는 엄마로 불리고 싶어." 알코올 기운으로 불과해진 이모의 얼굴은 신혼 첫날밤 신부의 얼굴처럼 흥분으로 가슴이 울렁이는 것이 보였다. 이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에 계속 이모의 말이 이어졌다. "너,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하게 해줄 수도 있는데… 이모의 말은 계속되었다.
"피아노도 배우고, 그리고 너에게 스케이트도 가르쳐 줄 수 있어. 우리, 남들이 그렇듯 모녀 사이로 보이잖아. 사실 가끔 나도 이모 보다는 엄마로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나…’
방학이면 가족들이 사는 고향에 갈 때마다, 나와 소꿉놀이하던 친구들이 얼굴이 하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렇지만 친구들은 가끔 나의 등 뒤에서 쑥덕거렸다. 엄마 없는 아이라고, 무시했다. 여름 방학이면, 마당 한가운데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할머니의 다리를 베게 삼아 누웠다. 별이 쏟아지는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면, 할머니는 ‘뭘 그리 유심히 쳐다보나?’ 하고 물으셨다.
“할머니? 사람이 죽으면 저기 저 하늘로 올라가서 별이 되는 거야?” 별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소곤거리는 모습을 볼 때, 나의 손을 꼭 잡고 노래 부르시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어느새 내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고, 할머니와 나의 대화를 새엄마가 들을까 얼른 고개를 돌렸다. 멍석에 닿은 등이 까슬까슬할 때쯤이면 어느새 나는 잠이 들었다.
아버지의 끙,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 방에서 잠든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방학이면 이모는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친절을 가장해 친딸에게 하듯이 친근감을 표한다고 억지로 웃어 보이더니,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예 남보다 못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너무나 그리웠다. ‘우리 은주 엄마가 못 본 사이에 많이 컸네." 이모가 잘해주는 모양이지. 라는 표정으로 새엄마가 억지웃음을 지으면, 옆에서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오랜만에 만나면 "우리 은주가 이제 키가 많이 컸구나! 허허 “아버지의 웃음소리는 마당을 건너 대문 밖으로 퍼져 나갔다. 그럴 때면 새엄마는 질투 어린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서울에서 이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나는 고향 집에서도 귀한 대접받았다. 이모는 언제나 다른 같은 반 아이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늘 장만해 주었는데, 미술 시간에는 48색의 크레파스로 예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선물을 안겨 주셨다. 그런 이모도 결국은 새 이모부와 독일로 이민을 떠났다. 자식처럼 키운 조카를 딸로 입양을 원했던 이모는 독일로 떠나면서 함께 떠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딸을 낯선 이국땅에 보내는 것을 반대해서, 나는 새엄마와 배다른 동생들이 사는 고향 집으로 전학을 왔다. 대문에 들어서자 반가움보다는 설움이 복받친다. 이모와 이별하고 가슴에는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남아 있는데…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데 집안을 둘러보아도, 엄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엄마의 제삿날이 다가오면, 머리가 아프고 열에 들떠 학교에 갈 수조차 없다. 종종거리며 가족들의 밥을 하던 부엌에는 손때 묵은 살림살이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동네 아이들 도시락 반찬보다 더 맛있는 반찬을 매일 챙겨 주어도 밥을 먹을 때마다 허기진 가슴은 채워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대문 앞에 서 있는 엄마를 보고 좋아서 뛰다 넘어지기도 했다. 그런 날은 가족들 몰래 산소에 갔다. 엄마를 만나고 오면 며칠은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붉은 피를 쏟으며 눈앞에서 쓰러진 모습을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철부지, 나 자신이 밉기만 했다. 원망은 차곡차곡 가슴에 쌓여 울분으로 변했다. 다정하게 마주 앉아 잔을 부딪치는 아버지와 새엄마를 보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를 갈았다. 엄마를 잊지 않기 위해 재혼하지 않겠다는 아버지는, 엄마 돌아가신 후 지금의 새엄마와 재혼해서 동생들이 생겼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심사가 뒤틀리고 마음이 아팠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로 아래 남동생은 오히려 새엄마 눈치를 보다 내 눈치를 살폈다. 남동생은 새엄마 대신 엄마라 부르며 따르는데, 가끔 남동생이 얄미웠다. 나를 위해서 학교 통학용 예쁜 자전거를 선물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아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사춘기가 되면서 친구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나를 괴롭히는데,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분은 다정하게 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친구들은 대학입시에 매달리는데,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나면 새엄마와 얼굴을 맞댈 일이 없을 것 같아 밤을 새워 공부할 때도, 새엄마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대한다.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를 차지한 새엄마가 무척 미웠기 때문에, 고교 졸업 후 뒤돌아보지 않고 고향 집을 떠나 이모와의 추억이 있는 서울로 돌아왔다. 새엄마 몰래 모은 꼬깃꼬깃한 돈은 호주머니 깊숙이 넣은 나는 무작정 걸었다. 그리고 이모와 단란하게 살던 삼양동 연립으로 갔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서울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이모는 독일로 떠난 후 편지와 함께 간간이 옷이나 학용품을 보냈다. 이모의 편지는 늘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늘 편지 끝에 비행기표를 구해서 줄 테니 꼭 한번 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사코 이모가 있는 독일에 가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나중에는 흐지부지 이모의 편지가 끊기더니 집안에서 이모 이야기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새엄마와 작당한 아버지는 이모의 편지를 모두 숨기고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새엄마와는 화해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다. 결혼 후 첫아이를 낳았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는 한 달 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생활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친정엄마가 계셔서,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 주는데, 나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물어볼 어른이 없었다.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핏덩이를 안고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새엄마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면서 밤중에 응급실에 갈 때면, 아이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아이는 허약했다 병치레가 잦아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밤새 잠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를 계속했다. 그럴 때마다 내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 엄마 생각에 밤새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다. 남편은 ‘아이는 아프면서 성장하는 거라고’ 위로를 건넸지만, 나는 두려움에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정성을 들인 음식 보다는 간편식을 자주 했다. 그런데 가끔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기 위해 주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신경 쓰이고 눈에 띄는 것은 조리용 칼이다. 그것마저도 무서워 칼 대신 가위를 사용했다. 칼의 날카로움을 보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어쩔 수 없이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를 썰었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 준비하던 을 듣고 너무 놀랐다. 그리고 도마에 무를 놓고 칼질하다, 그만 손을 베었다. 하얀 무위에 붉은 핏방울 뚝뚝 떨어졌다. 손에서는 통증이 느껴지는데, 나는 그만 주방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김치를 담글 수가 없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이 난다. 눈을 감고 한참 심호흡했지만, 가슴에서 세찬 방망이 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 가슴을 움켜쥐고 현실에 눈을 감으려 하지만, 두려움에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몰려온다. 한참 쓰러져 있다 일어났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니, 피를 토하고 쓰러진 엄마의 잔상이 눈앞으로 걸어온다. 병원은 마치 신기루처럼 만져지지 않았다. 병원에서 손가락 처치를 하고 5바늘을 꿰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 감은 붕대가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 피의 공포는 어제오늘 시작된 일은 아니지만, 언제쯤 무섭고 끔찍했던 기억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쁜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점점 옅어지고 희미해져 결국은 희미한 흉터만 남아 애써 외면하면, 잊히기도 한다. 평생의 업보처럼 올가미가 되어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점점 조여 온다. 아버지의 생신날 음식점 대신 한두 가지씩 집에서 만들어 뷔페처럼 생일상을 차리자는 큰올케의 제안을 나는 단번에 제안을 거절했다. 날카로운 칼 사용은 나에게는 족쇄처럼 헤어나기 힘든 도구인데, 그것을 모르는 올케는 밖에 음식 질리니 한 끼 정도만 집에서 먹자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다.
잠결에 가위에 눌리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잠에서 깼다. 너무 피곤해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화장실로 달려갔다. 옆구리가 꾹꾹 쑤시고 너무 아팠다. 몇 걸음을 떼는데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비틀거렸다. 통증 때문에, 엉금엉금 기었다. 어린 시절부터 참고 인내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겨온 나인데도 아픔은 여전히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안방에서 화장실 거리는 불과 4미터 채 되지 않은 거리인데도 걷는 게 힘들다. 통증 때문에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통증 때문에 겨우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았지만, 위장에서는 끊임없이 토사물이 올라오고 머리도 아팠다. 온몸을 비틀어 대며 입에서 터져 나오는 통증을 애써 참으며, 변기에 쭈그리고 앉았다. 배는 계속해서 아픈데도 졸음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낮에 지방을 다녀온 후 피곤이 쌓여, 지친 나머지 거실 바닥에 잠시 엎드려 있다 잠깐 졸았다. 졸음에 눈을 뜰 수조차 없는데,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구토를 참을 수가 없어 계속 헛구역질하다 그만 기진맥진 화장실 바닥에 고개를 떨구고 숨을 쉬었다. 통증은 숨을 쉴 때마다 더 심해지는데, 억지로 참아 보려 하지만,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온다. 평상시에는 심하게 아프지 않을 경우가 아니면 먹지 않는 비상약인 진통제 2알 꺼내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약에 내성이 생길까 두려워 많이 아프지 않으면 참고 견딘다. 보통 약 효과는 10분이면 나타나는데 약 효과를 기다리기에는 몸이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졸음이 쏟아진다. 다시 잠을 청하고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참으려 해도 배가 찢어질 듯이 아프다. 휴대전화로 내 몸 상태에 대해 검색하려 글자를 눌렀지만, 통증 때문에 글자들이 자꾸 눈앞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통증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입에서는 터지는 비명은 고요한 거실을 가득 메운다. 식구들은 깊이 잠이 든 것인지 아무도 나의 비명을 듣지 못하고 잠에 빠진 것인지 집안은 고요 속에 빠져 있다. 저절로 아악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혼자 숨죽이며 병원에 갈 생각 하다 벽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4시가 넘었다. 새벽에 곤히 잠든 가족들에게 미안해 통증을 참으며 화장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번에는 옆구리를 손으로 압박하면서 통증을 참아 보려 안간힘을 썼다. 안간힘을 쓸수록 복부 양쪽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복통과 함께 메스꺼움이 계속 올라온다. 진정하려 냉장고에서 찬물을 마셨지만, 구토는 점점 심해지고, 텅 빈 위에서는 더 이상 토사물은 나오지 않고 쓴 물이 넘어온다. 구토 후에는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언젠가 지방에 있을 때, 위경련으로 응급실에 다녀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새벽 시간에 119에 실려 가면서 죽을 것만 같아 아들 앞에서 울지도 못하고 통증을 참았다. 그 당시에도 구급대에 실려 가면서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도 이대로 죽는 것인가. 죽음의 공포가 몰려온다. 어린 시절 엄마의 죽음은 끊임없이 나의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잊으려고 하면 다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혼자 그럴 리 없다고 다짐하지만, 죽음의 공포는 나의 뇌리에 박혀서 치명적인 아픔을 주고 있다. 평상시라면 걱정거리가 아닌 것들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다. 소파에 기대 잠시 앉았지만, 이번에도 통증이 배를 가르듯이 쑤셔온다. 그리고 울렁거림은 멈추지 않고 나를 괴롭힌다. 변기를 껴안고 토하고 나니 잠시 통증이 멎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옆구리 양쪽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예전 코로나로 인해 공황장애가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대로 집에 앉아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다. 약 1시간 동안 방과 화장실을 오고 가면서 비명을 질렀다. 엉금엉금 기어서 잠에 빠진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일어나 봐 나, 죽을 것 같아.’ 목소리는 고통에 일그러져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새벽 깊은 잠에 빠진 남편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잠결에 가위눌린 것으로 착각했는지, 코를 골며 눈을 뜨지 못한다.
“나… 너무 아파… 아마 맹장 같아…응급실… 응급실 가보자.” 이번에는 눈을 뜨더니 오히려 남편이 놀라서 묻는다.
“무슨 일이야?”
“나, 죽을 만큼 아파 정말 죽을 것 같아 정말이야 어서. 정말이야.” 목소리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것처럼 건조하고 탁했다.
“병원에 데려다줘, 이러다 나 죽을 것 같아.” 정말이야 이것은 갱년기 증상이 아니라 정말 아파” 잠옷을 벗고 평상복에 대충 슬리퍼를 신고 남편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고통은 한시도 쉬지 않고 몰려온다.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배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통증이 멈추지 않는다. 이대로 죽으면 어떡하지. 남편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많이 아파? “조금만 참아 병원 가까우니까. 죽지 않아.”
집에서 도보로 약 5분 거리가 안 되는 종합병원이 그날은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병원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차를 주차하고 응급실 접수하는 남편 옆에서 서 있지도 못하고 배를 쥐고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때 피를 흘리며 들것에 실려 온 환자를 보는 순간 두 팔에 소름이 돋고 의자에 웅크리고 있던 나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남편이 놀라 나를 일으켜 세웠지만, 다리에 쥐가 나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고개를 꺾고 다시 바닥에 널브러지듯 늘어졌다. 남편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눈앞에 끔찍한 광경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고 있지만 의식은 저 깊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손과 발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간질을 앓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다. “여보 왜 그래 정신 차려? 당신 이러면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정신 차려? 남편의 목소리가 가물가물해질 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은주야? 이제 눈을 떠도 돼. 엄마…엄마? 왜 그렇게 빨리 죽었어? 왜 나만 혼자 둔 거야?” 6살 나는 혼자 울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이번에는, 선명하게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나 아직 죽지 않았어?” 옷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흥건한 환자들이 보호자의 팔을 붙잡고 들어오는데 그때마다 나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혹시 병원에서 기다리다 죽는 것은 아닌지, 남편은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을 참는 나를 바라보다 간호사에게 사정했다. “의사 선생님은 언제 뵐 수 있어요.” 하지만 간호사의 대답은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는 판에 박힌 말을 한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기까지는 지옥에 다녀온 것처럼 너무나 무서웠다. 순간순간 통증은 산모가 아기를 낳는 통증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응급실 의사 선생님을 만나, 죽음은 피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의사는 한참 검사를 하더니, “요로 결석인데 크기가 크면 개복 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요로 결석. 결석의 크기가 크면 수술해야 한다고 한다. 또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인가… 약 한 달 전에도 일어난 교통사고는, 또 한 차례 가슴을 뛰게 했다.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끔찍했던 날카로운 메스의 느낌이 온몸을 핥고 지나갔다. 수술실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전구가 내 몸을 비추고 있을 때, 나는 마취 기운에도 감각적으로 차가운 기분 나쁜 메스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선생님? 수술하면 죽지는 않나요.”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의사는 “요로 결석은 흔한 질병입니다. 요로 결석으로 죽지 않아요.” 그리고 침대에 누워 간호사가 준비한 커다란 링거를 꽂고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통증은 기진맥진한 가운데, 나의 무의식을 깨우더니, 그날 엄마 곁에서 깡충거리던 천둥벌거숭이를 우물가로 데려간다. 꿈속인 듯 누군가 내 곁에서 한숨을 쉬는 기척을 느꼈다. 그러나 내 팔에는 링거가 매달려 부족한 잠을 재촉하는지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잤을까, 이번에도 아랫배 통증에 인상을 쓰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눈을 뜨자 누군가 ‘엄마? 하고 나를 불렀다. 아들이었다. 새벽에 아픔으로 고통스러워할 때는 혹 아들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나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아들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들에게 못난 엄마 얼굴을 보이기 싫어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거울에 비춰 본 나의 얼굴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머리는 쑥대머리가 되어, 수세미처럼 엉켜 있고 두 눈이 퀭한 것이,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보인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건강한 얼굴을 보니 어제의 일들이 새벽의 일들이 마치 긴 꿈을 꾼 듯이 스친다.
아들이 아빠 대신 나를 간호하기 위해 아침에 병원을 찾은 게 대견하고 고마웠다. 마침 회진 한 간호사가 이제 퇴원해도 된다는 말에, 침대에서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휘청거린다. 밤새 토하고 설사했더니,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창으로 햇살이 비추자, 슬며시 미소가 어린다. 밤새 통증 때문에, 죽음을 떠올린 생각 하다,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직은 죽을 때가 되지 않았구나. 나는 아직 할 일이 많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앞으로는 긍정의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 했다. 수납하고 병원문을 나서는데, 멀리 보이는 푸른 산이 맑은 하늘에 구름이, 이토록 아름답게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아들 손을 잡고 걸으며, 꼬물거리던 그때를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번졌다. 집에 돌아와 커피 한잔에 빵을 먹고 나니 스르르 졸음이 쏟아진다. 한숨 자고 일어나 거실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를 뚫고 들어와 묵은 먼지를 떨어내듯이 털고 나니 마음이 가볍다. 냉장고를 열어서 냉수를 마시면서, 지금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쓴 커피가 정신을 맑게 한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자 창으로 드는 햇살이 너무나 아름답기만 했다. 그동안 가슴에 돌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던 가슴이, 까스활명수를 마신 것처럼 개운했다. 이상한 일이다. 며칠 동안 편두통에 시달려 오만상을 찌푸리며 가족들에게 짜증을 냈던 내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휴대전화를 열어 새엄마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며칠째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었나 생각했다. 몇 달 전부터 새엄마는 핸드폰을 주머니가 아닌 목에 줄을 매달아 자식들의 전화를 바로 받았다. 아버지께 전화해서 새엄마를 바꿔 달라하려다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참았다. 퇴근 후 새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엉뚱한 사람에게 잘 못 건 줄 알았다. 새엄마는 한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휴대전화에 뜬 내 이름을 봤을 텐데, 자꾸 다른 사람과 혼동한다. 강변북로는 언제나 교통 체증이 심하다. 막히는 차 안에 멍하게 있으니 답답하다.
퇴근하면 남편과 아이들 때문에, 새엄마와 통화하기가 불편했다. 며칠 전 막내 남동생의 전화가 생각났다.’ 누나? 이제 엄마도 내일 모래면 80인데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죽은 큰어머니를 끌어안고 살 거예요? 그때는 버럭 화를 냈다. 사실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지금껏 모든 화살을 새엄마
사실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지금껏 모든 화살을 새엄마에게 돌렸다. 잔소리하는 막냇동생이 밉다. 그렇지만 막냇동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심사가 배배 꼬인 나의 성정이 문제다. 이렇게까지 꼬인 것은 새엄마 때문이다. 고교 졸업 후 집을 떠나 서울로 왔을 때, 새엄마는 나의 생활비를 모두 끊어 버렸다. 그런 연유로 고생한 생각을 하면 새엄마에 대한 미움이 컸다. 오후 6시면 아버지 식사 준비 때문에, 집에 계실 것을 생각해, 새엄마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3~4번 울리자 새엄마의 목소리가 쨍하니 들린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카랑한 목소리는, 젊은 시절의 새엄마와는 다르지만, 이제는 받아들이려 생각했다.
“여보세요, 새엄마… 저… 은주예요”. 새엄마에게 생전 하지도 않은 아양을 떨었다. 그런데 다음 들려오는 새엄마의 대답에 당황했다.
“은주? 누구…전화 잘못 걸었슈?”
“새엄마?… 은주가 누구라니, 장난이지요?”
나는 새엄마의 대답에 기분이 상했다.
이미 끊어진 상태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심호흡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형님이요? 그간 잘 지냈오?”
새엄마에게는 형님이 없다. 고모들은 모두 아버지 여동생이기 때문이다.
큰어머니는 이미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형님이라니, 나 모르는 동네 친구가 있나,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전혀 알 수 없는 말이 들린다.
’형님 내가 은주 잘 키웠어요, 지금은 남편도 잘 만나서 자식 낳고 잘 살아.“
”그러니 형님도 나 너무 미워하지 마시우.“
순간 나는 새엄마가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말도 안 된다. 어떻게 나의 생모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지. 그리고 새엄마에 대해 뭔가 이상하다 아버지에게 물어볼까 망설였다. 2주 후면 엄마 기일이라 그때 보기로 하고 통화를 끝냈다. 새엄마와 아버지 건강을 챙기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생긴 것은 며칠 후였다.
집안에 노인이 있는 경우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그런데 모시지는 않지만, 근거리에 계셔서 늘 신경이 쓰이는 시어머니의 갑작스레 일어난 병원행은 가뜩이나 심란한 나의 일상을 흔들고 말았다.
엄마 기제사는 평일이었다. 남편은 직장 일에 바쁘고, 아이도 학업에 바빠, 혼자 자동차를 몰고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그날도 아침에 일어나니 머릿속이 뒤죽박죽 심란했다. 약 10일간 병원 신세를 지던 시어머니는 퇴원 후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다. 친정집이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린 시절에는 흙먼지가 자욱하던 마을 앞 도로는, 비록 좁지만, 포장이 되어 있었다. 자동차를 집 앞에 주차하고 대문으로 들어갔다.
집안에서는 동생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은주 왔어요.… 인사하는데, 거실에서 나오시던 새엄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새엄마의 무심한 눈빛은 50여 년 전 나를 탐색하듯 대하던 그 눈빛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최대한 다정한 척 굴면서 새엄마… 하고 얼른 달려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알 수 없는 시선을 느껴야 했다. ‘누군데, 우리 집에 왔어.’ 새엄마의 표정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 마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곧이어 아버지가 나오시며 “은주 왔냐?”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얼른 들어와라. 아버지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평생 원망만 하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듣고 말았다. 지금 새엄마는 치매가 진행 중이고, 다른 자식들은 모두 알아보는데, 내 이름은 기억 못 한다고 했다. 지금도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다는 거였다. 50년 동안 새엄마와 화해하지 못하고, 가슴에만 쌓아 두고 풀지 못한 응어리가 많은데 허탈함에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