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녀분(雙女墳)
쌍녀분(雙女墳)은 말하자면 한국의 첫 고대설화라고 보면 된다. 인물과 전설이 얽힌 설화로 분류되는데, 최치원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흥미요소가 증대된다. 스토리는 이렇다.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현의 현위(縣尉.율수현은 지금의 양저우 인근에 있어다고 하며. 현위는 대략 치안국장 정도의 직책이라고 김준엽 선생이 주석)가 되엇는데, 항상 고을 남쪽의 초현관(招賢館)에 가서 놀았다.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雙女墳)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노는 곳이었다. 어느 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었더니, 홀연히 취금(翠襟)이라는 시녀가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최치원의 시에 대해 화답한 시를 가져다 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노라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율수현의 부자 장씨(張氏)의 딸들로 언니가 18세, 동생이 16세 되던 해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을 보내고자 하여 언니는 소금장수에게, 동생은 차(茶) 장수에게 정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은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여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고자 청하니 두 연인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당시에는 이런 것이 흔한 일이라나...). 이렇게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날 지난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부른다. 그 뒤 최치원이 신라에 돌아와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고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린다. 이 설화는
원래 <수이전>에 수록되었는 것이 뒤에 성임(成任)의 <태평통재> 권 68에 <최치원>이라는 이름 아래 전재되어 있고, 그 뒤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권 15에는 <선녀홍대>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전한다한다. 같은 내용이기는 하나 <선녀 홍대>가 <최치원>보다 약 5분의 1정도로 축약되어 있다. 설화라기보다는 소설에 매우 접근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최초의 수록자나 작자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설화는 내용상 중국 남송(南宋) 때의 <육조사적편류>의 분릉문 제13 쌍녀분기(雙女墳記)와 공통되는 바가 많아 상호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또 당나라의 전기 소설인 장작의 <유선굴(遊仙窟)>과도 공통되는 점이 많아 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전문가들은 이들 중국의 이야기들이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인 최치원이 결부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최치원'은 당시 중국에서 한반도인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최치원은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았던 인물이기에 이들 중국 설화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고, 또 그의 시재(詩才)가 그 곳에서 높이 평가되었기에 설화 속에서도 그의 시가 죽은 두 여인의 혼(魂)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설화의 내용에서 혼교 설화(魂交說話)·재생설화(再生說話)·애정설화 등의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이 설화가 중국 육조시대, 그리고 당나라시대의 신괴류(神怪類)의 전기적 설화소설에서 다분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말하는 예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이 설화의 성립 연대는 주인공인 최치원이 연대로 보아 고려 초기나 적어도 중기 이전으로 추측된다. 신라 말엽 이후 많은 최치원 관계 설화가 생성, 구전되면서 이 설화도 생성되었고, 이것은 처음 <수이전>에 수록되었다가 <태평통재>-<대동운부군옥>의 순서로 전개되었으며, 이야기 중의 혼교 설화·재생설화적 요소는 <금오신화>나 기타 많은 조선시대 국문소설의 혼교적·재생적 요소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설화의 내용 중 주인공들의 의사 표시가 대부분 한시로 나타나 있어 전체적으로 대략 20여수의 시가 등장하는데, 이러한 설화소설 속의 삽입시는 후대 한문소설류에 영향이 매우 크다는 데에서 이 설화의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학자들은 설명했다. 참고로 다음 내용은 쌍녀분에 대한 설명을 옮긴 것. ① 당 天寶년간(747)에 쌍녀분 조성, 율수지역에 쌍녀분 내력 전승 ② 최치원이 874년경에 招賢館에 갔다가 쌍녀분을 목격하고 작품 앞의 石門詩와 뒤의 長詩를 지었으리라 추정. ③ 宋, 張敦이 찬(1160), <雙女墓>條 [墳陵門 第十三], {六朝事迹編類} 雙女墳記曰, 有鷄林人崔致遠者, 唐乾符中補율水尉, 嘗憩于招賢館. 前岡有塚, 號曰雙女墳. 詢其事迹, 莫有知者, 因爲詩以弔之. 是夜感二女至, 稱謝曰 “兒本宣城郡開化縣馬陽鄕, 張氏二女, 少親筆硯, 長負才情, 不意爲父母匹于鹽商小竪, 以此憤예而終. 天寶六年 同葬於此.” 宴語至曉而別. 在율水縣南一百一十里. ④ 박인량(?-1096)이 문종34년(1080)에 宋使로 浙江에 이르렀고(소흥에서 오자서묘를 시로 읊음), 지금의 남경을 위시하여 강소성 지역을 여행함(최치원이 편력한 지역과 비슷) 쌍녀분 유적 또는 최치원의 시를 접하고 이를 토대로 <최치원>을 지었으리라고 추측. ⑤ 박인량이 {수이전}을 편하면서 여타 설화에 <최치원>을 포함하여 편찬 ⑥ 成任(1421-1484)이 {太平通載}에 최치원 전재. ⑦ 權文海(1534-1591)가 <최치원>을 <仙女紅袋>로 축약 {大東韻府群玉}에 수록 ⑧ 이인영과 최남선이 {태평통재}의 <최치원>을 활자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인영이 소장하고 있던 {태평통재} 잔권은 한국전쟁 중에 소재 묘연 [출처] 쌍녀분(雙女墳)|작성자 화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