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 스님이 내소사 주지라면 /구활
좋은 사찰은 좋은 스님을 만나야 한다.
스님 또한 좋은 도량에서 공부해야 깨우침에 쉽게 이르게 된다.
가람은 좋은데 이에 걸 맞는 스님을 만나지 못하면 항상 삼류 절 집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절은 시원치 않아도 기품 있는 스님이 차고앉으면 그 공덕으로 사찰의 품격은 높아지고
품새는 더욱 넉넉해져 신도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도회지에 앉아 그간 다녀온 절을 머리 속에 그리자니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찰은 이름은 알아도 머리 속에서 얼른 떠오르지 않는 곳도 있다.
나는 석 달 보름 동안을 답사만 하리라고 작정하고 우리나라 전역에 널려 있는
무려 백 여 개가 넘는 사찰을 둘러보고 열심히 사진 찍고
부지런히 메모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아름이나 되는 사진들을 늘어놓고 정리를 하다 보니
길 잃고 제목을 잃어버린 대웅전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전북 부안에 있는 내소사는 내 의식 속에 너무나 또렷하게 각인 되어 있다.
몇 번 본 영화처럼 화면의 바탕은 대웅보전의 꽃 창살이 깔리면서
‘내소사’(來蘇寺)란 글씨가 컴퓨터 그래픽에 의해 사방에서 튀어나와
복판의 정점으로 밀려들다 다시 밖으로 페이드 아웃된다.
그러다가 일주문에 붙여져 있는 ‘능가산 내소사’란 횡액이
전나무 숲길을 가로질러 달려와선
대웅보전의 길게 늘어뜨린 쇠서를 핥는 듯하다가 팔작지붕을 휘돌아 이웃 봉래루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소사는 프랑스 영화처럼 재미있다.
아니다.
내소사 자체가 프랑스 영화다.
그러면 내소사의 주지 스님도 영화처럼 재미있는 그런 스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나는 한참 잊고 있었던 중광 스님을 기억해 냈다.
정말 중광 스님이 내소사를 맡는다면 절 집은 약간 개판이 되겠지만
하나의 이벤트 사찰로서 끝내줄 것 같았다.
“내소사의 주지는 중광 스님이다”란 가정을 세우고 나니
이 기발한 생각을 끄집어 낸 내가 무척 대견해 보였다.
1980년대 중반이었던가.
서울 동대문 옆 감로암에 살고 계시는 걸레 중광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 야, 난데. 오늘 대구에 내려갈건데, 너희 집에서 잘거여.”
목소리만 들어도 중광 스님인줄 알겠는데 “난데가 누구여”하고 능청을 떨었다.
“너네 형님도 몰라, 똥 강아지 같으니”
“난 형님이 없는 데유”
“오후 3시 40분에 도착할거여, 알았지” 찰칵하고 전화는 끊겨 버렸다.
중광 스님은 김태선 선생과 함께 동대구 역에 내렸다. 김태선 선생은 건축학도였다.
그는 뉴욕에서 건축을 전공하다 무심결에 사진에 빠져 열심히 카메라 공부를 하던 중
어느 날 길거리에서 걸레스님을 만났다.
흔히 사랑이 그렇게 오듯 김태선 선생은 중광 스님을 보는 순간 “바로 이 사람이야”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중광스님 또한 공짜 카메라맨이 제자로 따라 붙는 게 싫지 않아
미국에서의 볼일을 대충 끝내고 아프리카 여행까지 함께 했다.
중광 스님이 우리 집 앞에 도착하자 동리 사람들이 금방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은 “영화를 찍더라”고 소문을 내 사람들의 행렬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 온 중광 스님은 런닝셔츠와 팬티 바람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 다녔다.
스님의 런닝셔츠는 젖가슴께를 칼로 도려내어 마치 브래지어를 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집 아이들은 스님이 그러고 다니시는 게 신기한 듯 졸졸 뒤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접대를 해야 하는 아내는 눈 둘 곳이 없어 애를 먹는 눈치였다.
이튿날 아침 항공편으로 도착한 여성 치과의사와 보살님 한 분을 맞아 아침식사를 마치고
스님 일행이 운문사로 떠난 후에야 우리 집은 겨우 평온을 되찾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소사를 말하려다 얘기가 잠시 옆으로 빗나갔다.
내소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미당 서정주시인의 ‘내소사 대웅전 단청’이란 시 한편을 읽어보자.
“....내소사 내벽 서쪽의 맨 위쯤 앉아 참선하고 있는 선사,
선사 옆 아무 것도 칠하지 못하고 너무나 휑하니 비어둔 미완성의 공백을 가 보아라.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웅보전을 지어놓고 마지막으로 단청사를 찾고 있을 때,
어떤 해 어스럼제 성명도 모르는 한 나그네가 서(西)로부터 와서 이 단청을 맡아
겉을 다 칠하고 보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며 말했었다.
‘내가 다 칠해 끝내고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마라’ ....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그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
이쁜 새 한 마리가 천정을 파닥거리고 날아다니면서 부리에 문 붓으로
제 몸에서 나는 물감을 묻혀 곱게 곱게 단청해 나가고 있었는데,
사람 기척에 ‘아앙’ 소리치며 떨어져 내려 마루 바닥에 납작 사지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한 마리 불 호랑이었다.
‘대호스님! 대호스님! 어서 일어 나시겨라우’
중들은 이곳 사투리로 그 호랑이를 동문 대우를 해서 불러댔지만 영 그만이어서,
할 수 없이 그럼 내생에나 소생하라고 이 절 이름을 내소사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단청하다가 미처 다 못한 그 빈 공백을 향해
벌써 여러 백년의 아침과 저녁마다 절하고 또 절하고 내려오고만 있는 것이다.”
이 산문시에 적혀있는 씹으면 씹을수록 곰삭은 맛이 나는 이 내소사 이야기는
‘삼라가 모두 미완’이란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내소사는 법당 안의 빈 단청 얘기만으로 ‘완결치 못한 허무’의 얘기를 끝내지 않는다.
내소사 법당 안 오른쪽 천장 밑에 다포를 이루고 있는 공포,
쉽게 말하면 장식으로 끼워놓은 목침만한 나무토막 하나가 빠져 있는 것이
이 절의 허무와 미완을 완결한다.
조선조 인조11년(1633) 청민 선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유명한 목수 한사람을 데려온다.
그는 3년 동안 절은 짓지 않고 목침같이 생긴 나무토막만 깎고 또 깎았다.
언제나 일을 낭패시키는 건 절에서나 속에서나 방정맞은 자의 소행이기도 하지만
장난기 많은 동자스님 하나가 목수가 정성 들여 깎아 놓은 목침 한 개를 감추어 버렸다.
다포로 엮을 목침 깎기를 마친 목수가 숫자를 세어보니 한 개가 부족했다.
목수는 자신의 실력이나 신심이 절을 짓기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려 했다.
이 때 동자승이 감춰 뒀던 나무토막을 내놓지만 부정 탄 물건은 쓸 수 없다 하여
결국 한 토막은 미완으로 비어두고 법당 짓기를 끝냈다고 한다.
지금도 내소사를 찾는 사람들이 참배는 하지 않고
“뭣이라 그게 어디에유”하고 물을라치면 법당을 지키고 있는 보살님은
“들어와서 참배나 하고 저기를 봐유”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러면서 한 술 더 떠 “사진 찍지 말아요”하고 한마디 더 보탠다.
“젠장, 법당 안에서 사진 좀 찍으면 단청이 닳나. 서까래가 썩나” 이런 불평들이
입 밖으로 쏟아질 듯하지만 꾹 참고 보살님이 보는 앞에서 불전 1천원을 낸 후 돌아서서
카메라 플래쉬를 터트리니 보살님은 봐도 못 본 척 벌써 부처님 마음이 다 되어 있었다.
중광 스님이랑 자주 만날 그 때는 신문사의 부장인가를 하고 있었다.
스님은 그날 서울로 올라가면서 “감로암에 와서 애 한번 먹여 봐”하곤 훌쩍 떠나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세미나가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열렸다.
나는 중광 스님이 던지고 간 “애 한번 먹여 봐”란 말씀이 생각나 감로암에 전화를 걸었다.
“스님, 나 오늘 서울가요. 법당 앞에 술상 좀 봐 놓아요.”
“알았어, 마중은 안나가도 되겠지”
친구 둘을 데리고 오후 어중간한 시각에 감로암으로 들이 닥쳤다.
법당 옆 요사채 비슷하게 생긴 부엌에는 끓는 물 속에 대병 청주 두병이 데워지고 있었다.
스님은 술상을 법당 앞에 차려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기거하는 골방에 차려야 할지를 약간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스님의 심적 고통을 한시라도 빨리 들어주기 위해
“스님, 오늘 저녁 예불은 자동 생략입니다 그려.”하고 말씀드렸더니
“넌 뭔가 너무 알어”하고 맞받는다.
대웅전이랄 것도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법당 앞에 술상을 차리고
조기찜을 비롯하여 기타등등 부처님도 맛 좀 보았으면 싶을 음식들을 안주로 청주를 마셨다.
내 옆에 앉아 계셨던 중광 스님의 어머님,
지금은 돌아가시고 이 땅에 계시지 않는 혜련 스님이
“저 놈이 너희 집에 가서 애를 많이 먹였다면서” 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우리는 그날 종로 2가에 있는 ‘로망스‘ 란 술집까지 밀고 나와 흠뻑 취할 정도로 마셨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내소사를 들릴 때마다
나는 왜 “중광 스님이 내소사의 주지 스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중광 스님의 승적을 박탈하고 종단에서 쫓아낸 조계종의 간부들이 알았다면
“가당치도 않다”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테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허기야 내가 동의하고 안하고 간에 대세에는 아무 변화가 없겠지만 나의 생각은 요지부동이다.
그것은 내소사가 미완이어서 공허하고
중광 스님 또한 견성성불 이전에 완성되지 못해 공허한 것은 같은 이치다.
내소사의 단청 한 부분이 비어 있고 다포집의 나무 한 토막이 끼워져 있지 않다고 해서
어느 누가 내소사의 아름다움에 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나 물건이나 모든 삼라는 어느 한 쪽이 비어있는 미완일 때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지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불편하고 불결할 것 같다.
‘비어있음’이란 허(虛)의 상태를 기하학적인 공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곳간이 비어있는 양적 부족 개념으로 받아들여선 더더욱 안 된다.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에도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도 ‘허’를 유지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허’야말로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언어가 멈추는 곳인
무칭지언(無稱之言)이나 궁극지사(窮極之辭) 부근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내소사의 빈 단청이 빠져있는 공포를 보고 웃고,
그 공포는 미완의 중광 스님을 향해 박장대소하고,
그러면 중광 스님은 단청과 공포 앞에 서서 꽉 찬 충만의 허구와
위선을 발기발기 찢어 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흔히 화두는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의 집합이라고 말한다.
“중광 스님이 내소사 주지라면” 요즘 내가 들고 있는 화두 한 자락이다.
첫댓글 내가 내소사 주지라면 공돈을 받아가는 국립공원을 해지해 달라고 청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