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수필은 ‘제 10회 수필 집담회 모임 안내’에 있습니다.)
이미영의 ‘귀, 귀, 귀’를 읽다.
(이 읽기는 독자 이동민의 독서 행위이지 정답은 아닙니다.)
이 수필은 수필의 일반론과는 다른 형식으로 구성하고, 표현하였다.
작가의 경력에 걸맞게 수필로서 격조나 문장은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수필의 일반론에서 본다면 파격이다. 수필 구성의 기본은 기, 승, 전, 결이고, 시점은 일인칭으로 서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승전결을 찾기도 어렵고, 시점도 3인칭으로, 전지적 시점이라고 하겠다. 이론으로만 본다면 소설 형식에 가깝다.
귀와 연관이 있는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했다. 세 개의 일화를 하나로 묶는 끈이 있다면, 글은 하나로 통일을 이룬다. 세 개의 일화를 이어주는 끈을 찾아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자기 나름으로 읽기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아닐까?
또 하나는, 세 개의 에피소드를 여섯 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세 개씩, 세 개씩 묶었다. 앞의 하나와 뒤의 하나를 연결함으로 독립된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했다. 그렇다면 이 수필은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것도 특이한 구성이다. 독서는 세 개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의미를 찾는 행위라고 할까?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의 의도가 서로 다르다면 작가가 말하고 싶어 하는 의미를 반드시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며 독자는 어떻게 읽을까? 등등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독자가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서 자기 나름의 의미를 구축하려고 하더라도, 독서 이론에 의하면 작품은 내용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는 것을 규제한다고 하니, 독자 멋대로 상상력을 펼치는 것도 정답은 아니라 싶다. 말하자면 독서 행위에서 독자가 작품을 마무리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내용과 영 엉뚱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구체적으로 읽어보자.
첫째 일화
아들 이야기이다. 이어폰을 끼고 현관으로 들어선 아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방문을 열어보니 컴퓨터를 켜고 헤드폰을 쓴다.
‘알았어요’와 ‘알았어’라는 대화에서 엄마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다. 그런데 아들은 밤늦게까지 그런 자세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와(음악을 들으면서 공부가 될까, 라며 의심하는 엄마) 음악이 오히려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아들과 사이에는 틈이 벌어져 있다.
작가는 여고시절에 음악 테이프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엄마는 모르는 소리예요’라고 하였던 자기의 말을 떠올리므로 아들과의 틈을 메운다.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은 독자도 경험하였던 일이었으므로 아주 공감이 간다.)
둘째 이야기
남자 이야기이다. 독자가 읽기로는 남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해준다. 동창생에게 사기를 당하고, 죄 지은 듯이 숨을 죽이고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이 주인공이다. 작가로서는 3인칭인 ‘그’다. 비 맞은 장닭처럼 볼품이 없은 남편, 아내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아내는 냉담하다. 이것이 남편이 느끼는 아내(작가?)의 시선이다. 그러나 작가가 아내라면 아내 자신의 시선이기도 하다. 이후로 아내가 가정을 책임지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쌓아간다. 그러나 화자는 이렇개 말한다.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려 힘줄이 줅어진 손으로 벨을 눌렀다. 아이들이 ”앙 앙“대는 소리와 아내의 넑놓은 얼굴이 마중을 나왔다.”
이 말의 화자는 작가이고 아내이다. 그러나 3인칭인 그가 자신의 심경을 나타내는 형식이다. 전지적 시점이다. 이 말은 독자에게 어떤 뉴앙스를 준다.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이다. ‘연민’의 시선이다. 연민은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셋째 이야기
아내는 여자들의 모임에 나가서 ‘잘 나가는 남편’ 자랑을 듣는다. 그들의 삶이 옳고, 자신의 삶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한다.
그러나 화자는 ‘틀리다’라는 자기의 생각을 ‘다르다’라고 해석함으로 탈출의 문을 찾는다. 화자는 자기는 그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지 틀리지는 않았다.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답을 찾는다.
그렇다면 세 가지의 일화를 하나로 이어주면서 관통하는 ‘끈’은 무엇일까?
아들과는 세대가 다르므로 삶의 방식이, 사고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두 번 째 일화에서는 남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표현함으로 남편을 감싸주고자 한다.
세 번 째 이야기는 자기의 이야기이다. ‘틀리다’를 ‘다르다’로 해석함으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이 수필에서 세 개의 일화를 모아보면, 가족 사이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 엄청난 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가족이더라도 다름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 화해를 한다. 화해가 기승전결의 결어가 된다. 이것이 이 수필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 의미가 아닐까? 주제가 아닐까? 작가의 사유세계를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읽기는 여러 독자들 중의 한 독자의 읽기일 뿐이다. 독자의 의도가 작가의 의도, 작품의 의도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하였지만 수필의 기본 형식에서 벗어난 기법으로 쓴 글이다. 실험수필이라고 하겠다. 우리 수필집담회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글쓰기이다.
이 수필을 읽기 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좀 더 하겠다.
나는 수필쓰기에서 공모전과, 문학상의 대상이 되는 작품은 다르다고 본다. 신춘문예 등의 공모전에서는 수필쓰기의 기본이 갖추어졌는가와, 기본에 입각하여 쓰기의 기능을 얼마나 훌륭하게 연마했는가를 따진다고 본다.
그러나 문학성을 따지는, 문학상의 대상 작품은 작가의 사유세계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사유세계를 즉 의미 내용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펼쳐내는가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신춘문예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가 더 이상 뻗어나지 못하는 것을 흔히 본다. 한편으로 공모전 당선 작가는 공모전 경력을 평생 동안 써 먹는 경우도 흔히 본다. 시원찮은 글인데도 공모전 당선 작가라면 아예 글을 평하려 하지 않는다.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고, 한 번 이름을 얻으면 평생을 대가 대접을 받으려 한다. 이것은 우리 수필문단에서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영은 대구매일 신춘문예의 공모전에 당선한 작가이지만, 이 수필을 읽으면서 공모전 당선에 안주하지 않는 작가라고 느꼈다. 앞으로 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