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을 경험한 후 개량에 나서다
1940년 봄에 독일은 불과 6주 만에 프랑스를 정복(征服)해서 세계(世界)를 경악(驚愕)하게 만들었습니다.
20년 전에 4년 동안 수백만의 인명 피해(人名被害)를 입고도 패(敗)했던 것과 비교(比較)하면 극적(劇敵)인 반전(反轉)이었습니다.
공군(空軍)의 엄호(嚴護)를 받는 집단화(集團化)된 기갑부대(機甲部隊)가 전선(戰線)을 신속(神速)히 가르고 들어가면 후속(後屬)한 보병부대(步兵部隊)가 전과(戰果)를 확대(廓大)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덕분이었습니다.
이후 전격전(電擊戰)이라 칭(稱)하게 된 이 새로운 전략(戰略)의 핵심(核心)은속도(速度)와 집중(執中)이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새벽 5시 연합군 사령부가 있던 프랑스 콩피에뉴의 숲에 있던 페르디낭 포슈 사령관의 전용 기차에서 진행된 정전 서명 사진에 색을 입힌 모습.정전 시기는 11시로 잡았다.
[위키피디아]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113501
↑역사적인 콩피에뉴(Compiègne) 열차에서 프랑스의 항복을 받는 독일
그런데 결과적(結果的)으로 대성공(大成功)이었지만 1930년대 초반(初盤)에 구데리안(Heinz Wilhelm Guderian, 1888년 6월 17일~1954년 5월 14일)을 비롯한 소장파(少壯派)가 새로운 전략(戰略)을 주장(主將)했을 때에 군부 최고위층(軍府最高位層)에서 이를 지지(支持)해 준 이들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나마 의견(意見)을 들어주기라도 했다는 점은 고무적(鼓舞的)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나라도 독일군 소장파와 비슷한 주장을 펼친 이들이 있었으나 무시(無始)당했던 점과 비교하면 그래도 독일군은 열린 마인드를 가지도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 초기에 신화를 선도한 독일군 기갑부대
덕분에 소장파가 원하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1939년 폴란드 전역(全域)에서 군단급(軍團級) 기갑부대를 편성(編成)해서 작전을 펼칠 수 있습니다.
예상(豫想)대로 긍정적(肯定的)인 전과를 얻어 이듬해 야전군급(野戰軍級) 기갑부대가 편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선택(選擇)이 옳은 것인지 반신(半信)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한마디로 차원(次元)이 다른 상대(相對)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공군을 제외(除外)하고 독일군의 전력은 프랑스, 영국의 연합군(聯合軍)에 뒤졌습니다.
↑영국 대륙원정군의 6인치 26cwt 곡사포
때문에 전력을 최대한 효율적(最大限效率的)으로 재편(再編)했습니다.
새로운 무기를 만들 여유가 없기에 기존 무기(旣存武器)를 개량(改良)하는 방법도 동원했습니다.
기갑부대에서 전차, 차량화보병(車輛化步兵)과 함께 이동(移動)하며 작전을 펼칠 1호 자주보병포(自主步兵砲)도 그렇게 탄생(誕生)했습니다.
전력 외로 분류 된 1호 전차 차체(戰車車體)에 15cm sIG 33(이하 sIG 33) 보병포를 얹고 장갑(裝甲)을 둘러 급조(急造)한 자주포인데 침공 직전(侵攻直前)까지 38문을 만들어 6개 기갑사단(機甲師團)에 각 1개 포대(砲隊)씩 배치(排置)할 수 있었습니다.
↑1940년 프랑스 침공전 당시의 1호 자주보병포
그러나 실전(實戰)에서 활약(活躍)상이 기대(企待)에 미치지 못하다는 평가(平價)를 받았습니다.
일단 차체로 쓰인 1호 전차의 주행 성능(走行性能)이 좋은 편이 아니었던 데다 탑재(搭載)한 포(砲)에 비해 차체(車體)가 작아 사격(射擊) 시 반동(反動)을 제대로 흡수(吸收)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만 선봉(先捧)에 선 3호, 4호 전차와 비교한다면 강력한 화력(火力)만큼은 매력적(魅力的)이었습니다.
때문에 종종 위험(危險)을 무릅쓰고 정체(停滯)된 최전선(最前線)까지 출동(出動)해 공격(攻擊)에 가담(加擔)하고는 했습니다.
↑1호 자주보병포는 성능이 미흡했지만 화력만큼은 인정받았습니다
↑1941년 그리스 침공전 당시 독일 제5기갑사단 소속의 1호 자주보병포 비존(Bison) < 출처 : Public Domain >
프랑스 전역 종료(全域終了) 후 전훈(戰勳)을 분석(分析)한 결과 1호 자주보병포가 기대(企待)를 충족(充足)하지 못했어도 그럭저럭 쓸 만한 장비(裝備)라고 결론(結論) 내렸습니다.
이에 단점(短點)을 개선(改選)하는 방식(方式)으로 후속작 개발(後續作開發)이 곧바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만큼 가능성(可能性)을 높게 본 것이었습니다.
일단 1호 자주보병포는 단순히 sIG 33을 1호 전차 차체(戰車車體)에 상차(上車)시킨 것에 불과(不過)해서 전고(全高)가 높고 오픈 탑입니다.
커다란 포방패(砲防牌)를 둘렀어도 방어(防禦)에 취약(脆弱)했습니다.
↑1호 자주보병포는 높은 전고와 오픈 탑 구조가 커다란 약점이었습니다
그래서 1호 자주대전차포처럼 바퀴, 차축(車軸), 트레일러를 제거(除去)하고 포신(砲身)과 주퇴복좌기(駐退復座機, Run-out cylinder)만 장착(裝着)한 형태(形態)로 개조(改造)해 전고를 낮추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도 기본적(基本的)으로 sIG 33이 중(重)보병포여서 사격(射擊) 시 발생(發生)하는 충격(衝擊)을 받아내려면 좀 더 큰 차체가 필요(必要)했습니다.
이에 해결책(解決策)으로 등장(登場)한 것이 2호 전차였습니다.
사실 2호 전차도 경(輕)전차여서 만족(滿足)할 수준은 아니었으나 유휴 장비(遊休裝備) 중에서는 그나마 1호 전차보다 나았습니다.
↑개조된 2호 전차 차체에 15cm sIG 33 보병포를 장착한 2호 자주보병포 비존(Bison)
< 출처 : Public Domain >
↑2호 전차 차제에 sIG 33 보병포를 장착한 2호 자주보병포 프로토타입
그렇게 '15cm sIG 33 auf Fahrgestell Panzerkampfwagen II (Sf)'즉, 2호 자주보병포(Sturmpanzer II)로 명명(命名)된 후속작 개발이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이루어졌고 1941년 2월 시제작(試製作)이 탄생(誕生)했습니다.
차체 내부에 포를 삽입(揷入)한 형태여서 전고를 대폭 낮추는데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전작(前作)보다 지형지물(地形地物)을 이용한 은폐(隱蔽)에 효과적(效果的)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오픈 탑인데다 포방패마저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작아 방어력(防禦力)은 상당히 취약(脆弱)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