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향적사(過香積寺)
향적사를 지나며
왕유(王維, 701~761)
향적사는 어디 있나 구름 덮인 산을 헤매는데
고목 우거져 인적 끊긴 깊은 산속에 먼 종소리
바위틈에 샘물은 졸졸 햇빛 차가운 푸른 솔숲
저물녘 빈 골짜기에서 망령 걷어내는 고요한 좌선
不知香積寺 數里入雲山(부지향적사 수리입운산)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鐘(고목무인경 심산하처종)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천성열위석 일색냉청송)
薄暮空潭曲 安禪制毒龍(박모공담곡 안선제독룡)
행적사 위치를 모른 채 그름 속으로 중난산에 올랐다. 숲속은 사람의 자취가 없
고 길도 끊겼다. 그때 어디선가 종소리가 가냘프베 들려온다. 거친 바윗돌에 부
딪히며 흐르는 물소리도 흐느끼듯 들린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드는 솔숲이 시
원하다. 서산에 비낀 해가 저녁을 재촉하는데 빈 골짜기가 너무 조용하고 신비
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선정(禪定:참선하여 삼매경에 이름)에 든다. 마음이 고요히
가라 앉으며 온갖 번뇌가 사라진다. 향적사를 찾아왔으되 그 절을 못 찹으면 어떠
하랴. 내 마음속에서 법열(法悅)을 느끼며 망령된 마음이 씻기는데, 부처님의 깨달
음보다 절을 믿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교회만 믿은 것은 모두 허망한
짓이다.
[작가소개]
본명 : 왕유(王維)
출생지 : 산시성(山西省)
출생-사망 : 699년 추정 - 759년
<개요>
왕유는 중국 당나라 시기 화가이자 시인이다. 맹호연(孟浩然) · 위응물(韋應物) ·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류(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 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명대에 동기창(董其昌)에 의해 남종화(南宗畫)의 시조로 칭송되었다.
• 활동분야 : 동양화
• 국가 : 중국
• 주요작품
- 강간설제도(江干雪霽圖, 8세기 전반경)
- 강산설제도(江山雪霽圖, 8세기 전반경)
- 복생수경도(伏生授經圖, 9세기경)
<생애>
왕유(王維)는 중국 당나라 시기의 화가이자 시인이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거사(居士)인 유마힐(維摩詰)에 연유해서 자를 마힐이라 했다. 9살 때 이미 시를 썼을 만큼 일찍부터 시문으로 유명했으나 음률에도 자세하고 비파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왕유의 조부는 음률을 관장하는 관직을 역임했고, 장남이었던 왕유는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동생들과 함께 청빈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왕유의 동생은 당 대종(代宗, 재위 762~779) 조의 재상 왕진(王縉)이다.
개원(開元) 19년(731년) 진사(進士)에 합격해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이후 여러 개의 관직을 역임했으나,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出仕)했다. 반란이 평정된 뒤 문책을 받았지만, 동생 왕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볍게 처벌되었다. 당 숙종(肅宗, 재위 756~762)을 섬겨 상서우승(尙書右承)에까지 이르러 왕우승(王右丞)이라 불렸다.
젊었을 때부터 도심지를 피해 불교에 경도하는 생활을 보냈다. 이와 같은 생활 태도가 후세, 북송대의 소식(蘇軾)이 말하는 “시중화, 화중시”(詩中畫, 畫中詩)의 이상을 뜻하는 문인화의 시조로 헤아리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송 말기에 전해온 왕유의 산수화는 세밀한 선묘에 의한 청록산수였던 것 같고 원대 이후의 남종화와는 다르다. 명대에 동기창에 의해 남종화(南宗畫)의 시조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저서에 ‘왕우승집’(王右丞集) 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아내를 잃은 뒤 재혼하지 않고 ‘망천장’(輞川莊)을 지어 30여 년을 홀로 살면서 세상사와 떨어져 살았다.
<작품 활동>
중국의 산수화는 육조시대부터 줄곧 윤곽선을 긋고 착색하거나 또는 금벽이 휘황한 형식이었다가 당나라 화가 이사훈(李思訓)에 이르러 착색을 가한 산수화인 청록산수화라는 곱고 화사한 산수화가 등장하였다. 이후에 수묵산수화를 성공적으로 활용한 화가는 왕유였다. 왕유의 그림을 직접 보았던 당나라의 서화론가인 장언원(張彦遠)은 “일찍이 파묵(破墨) 산수를 본 적이 있는데 필적이 굳세고 시원스러웠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고 있는 파묵산수화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처럼 왕유는 먹으로 선염한 회화의 편평성(扁平性)을 진한 색조의 강세로 깨뜨리는 파묵법(破墨法)과 산이나 돌에 주름을 그려 입체감을 나타내는 준법(皴法)을 사용하는 혁신을 했으며, 이는 후대의 수묵산수화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중국 한나라에서 당나라 말기까지는 인물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미술의 관심이 인간에서부터 자연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인물화는 주로 유교적인 테두리 안에서 발전했지만, 산수화의 흥기는 도교적 태도와 사상에 의해 고취되어 온 듯하다. 풍경의 아름다움과 자연과의 교감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고자 하는 관습은 육조시대의 도교적 시인과 화가들의 유파에서 처음 유행하였다. 그들은 자연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반응에 관심을 두었고,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창조하였다.
왕유는 이러한 도가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가 불교를 숭배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 불가와 도가가 근본 사상에서 상통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도가와 불가에서 모두 재계와 해탈을 중시하고 산림에 들어가 허정(虛靜)을 구했다. 왕유는 선송(禪誦)을 일로 삼았고, 중년에는 불도를 매우 좋아했다. 도가에서는 자연을 숭상하고 청정(淸淨) ∙ 무위(無爲) ∙ 무욕(無慾) ∙ 소박(素朴)을 중시했지만, 오색찬란한 성격의 화려함을 반대했다. 도가에서는 묵색이 곧 ‘하늘의 색’이자 ‘자연의 색이’었다.
장언원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서 “먹을 운용하여 오색을 갖춘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먹을 활용하여 청정한 자연을 나타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왕유의 ‘강간설제도’(江干雪霽圖)를 보면 인물 없이 산수만을 중점으로 그리고, 채색 없이 먹의 농담으로만 자연을 표현하였다. 강 부분은 먹으로 선염하여 멀고 가까운 느낌을 살렸고, 준법으로 산봉우리의 주름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나무와 산을 표현한 윤곽선에서 이전 세대의 선묘 위주의 특성을 보인다.
<평가>
왕유는 원대 동기창에 의해서 남종문인화의 효시로 추숭되는 등 과대 평가된 측면이 없지 않다. 당대 산수화를 대표하는 화가였을 뿐, 수묵산수화의 형성에는 특별히 기여한 것이 없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역대명화기’를 보면 왕유 이후부터 산수화가들이 전대에 비해 매우 증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즉 왕유 이후부터 수묵산수화가 세상에서 공인하는 양식이 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 제임스 케힐, 『중국회화사』, 열화당, 1995.
• 천관시, 『중국산수화사 1』, 심포니, 2014.
• 한국사전연구사편집부, 『미술대사전: 인명편』, 1998.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