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5장 32 - 41절
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
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미국 네브라스타 주 북서쪽의 모래 언덕 위에 사는 조지 해치(George Hatch)는 일곱 아들과 다섯 딸을 거느린 대가족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집안의 철칙으로 정해 놓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서쪽으로부터 시커먼 구름이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할 때 이웃에 사는 한 농부가 황급히 달려오며 외쳤습니다. “어서 서둘러요. 조지! 폭풍우가 닥치기 전에 어서 건초 더미를 광으로 옮깁시다!” 그 농부는 애써 말려 놓은 조지 해치의 건초 더미가 비에 젖을 것을 걱정하여 좀 도와주려고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건초 임자는 오히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말했습니다. “친절하신 배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일이고 나는 우리 식구들을 교회까지 데려다 줘야 하거든요.” “그러다가 건초 더미를 모두 잃게 되며 어쩌시려우?” 이웃 농부는 안타깝다는 듯이 발을 둥둥 굴렸습니다. 하지만 조지 해치는 예정대로 가족들을 데리고 교회로 갔고, 그 사이 비바람이 몰려와 광에 들이지 못한 건초 더미들은 깡그리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것 봐요. 내가 건초 더미들을 잃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요.” 교회에서 돌아온 조지 해치를 바라보며 이웃 농부는 딱하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러나 조지 해치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대꾸했습니다. “그래요. 나는 건초 더미를 잃었어요. 하지만 그보다 몇 갑절 더 소중한 우리 가족을 구했지요.” 건초 더미를 아까와 했던 농부가 이 말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조지 해치의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가족에게 풍성한 복을 주셔서 3, 4세에 이르는 조지 해치 일가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날을 잊지 않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의미를 부여해서 지키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만드신 다음 한 번도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 없었는데 한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하다가 발각이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 번도 벌을 내린 적이 없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일단 가두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율법에 보면 돌로 쳐서 공개 사형에 처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분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한 사람이나 하나님의 성호를 모독한 사람, 부모에게 대적하는 패륜아, 간통한 남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만 공개 처형을 하라고 말씀을 하실 정도로 극히 드문 일이었는데 안식일을 범한 사람에게 그와 같은 엄중한 벌을 내리셨던 것은 일벌백계를 삼으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벌을 내려서 백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 일벌백계의 의미인데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안식일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어놓자 바나바에 대한 존경과 칭찬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니니아와 삽비라 또한 이런 존경과 칭찬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자신들도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땅을 팔고 나니까 그 돈에 대한 욕심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땅 판 돈을 일부 빼돌렸습니다. 그 모든 정황을 아신 하나님께서 결국 이 부부를 사망하게 만드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벌백계의 심정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헌금을 도둑질해도 망하지 않고 사망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헌금이나 안식일을 범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모든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절대 그런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깨우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옷에 술을 달도록 명령을 하셨습니다. 옷 귀퉁이에 꽃 같은 모양을 달아서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구나.”를 알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멀쩡했던 사람도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서 예비군복을 입게 되면 개차반이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원래 입고 있던 자신의 옷을 벗고 누군지 분별이 되지 않는 똑같은 예비군복을 입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옷차림으로 구별된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옷에 술을 달도록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서로가 힘이 되고, 서로 관찰자와 조력자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표를 하고 다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소속감에서도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니품을 입은 많은 직종의 사람들이 왜 굳이 유니폼을 입고 일을 할까를 생각해 보면 옷에 술을 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 가서는 이것을 악용해서 종교적 지도자들이 자신의 종교성을 과시하고 경건성을 자랑하기 위해서 오용했지만 본래 하나님께서 옷에 술을 달게 하신 이유는 구별성과 소속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인식표가 있었을 때 보다 더 뛰어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하나님의 자녀임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어떤 인식표든 달고 다닌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보다 더 많은 도전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옷을 입고 인식표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빛도 되지 못하고 소금의 맛도 내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목걸이 십자가가 그런 역학을 조금 했던 것 같고, 주일이면 들고 다니던 빨간색 성경책이 그런 역할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을 대신할 만큼 특별한 인식표가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영적인 인식표를 만들어서 가지고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스마트 폰에 성경 애플리케이션을 받는다거나 성경책을 자신의 사무실 자리에 꽂아 둔다거나…. 생각해 보면 쉽게 할 수 있는 많은 인식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처럼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았던 조지 해치처럼 형통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