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11,16-19
사람이 복음에 무감각한 이유
예수님은 당신과 세례자 요한에게 무관심한 이 세대를 질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여기서 피리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할 수 있고 곡을 함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춤을 춘다는 행위는 자기를 버리는 행위이고 곡을 한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마음과 하나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구원에 무관심할까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안 믿어야 할 ‘핑계’만 늘어납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핑계 대지 않고 믿게 할 마음, 곧 “착한 뜻”을 갖게 만드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먼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착한 뜻이 생기지 않습니다. 착한 뜻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반면 지혜가 들어가 그 사람 안에 착한 뜻을 갖추게 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놀라운 표징이 됩니다.
곽상빈 변호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좋은 스팩을 지녔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공인회계사, 증권분석사, 감정평가사, 변호사, 손해사정사, 가맹거래사, 경영지도사, CIIA(국제공인투자분석사) 등 전문직 자격증 30여 개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150년이 걸려야 할 따낼 수 있는 자격증을 10년에 다 땄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머리가 좋았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했던 사람은 아닙니다.
고등학교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란 곳을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다섯 가족은 거의 길거리 나앉다시피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형제들마저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상황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마음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우리 안에 주님께서 능력을 넣어주셨고 그 능력으로 이웃을 위해
무한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불만과 죽고 싶은 마음을 접고 공부해보기로 합니다.
죽기 살기로 하니 3개월 만에 열 개의 자격증을 따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광야의 삶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을까요?
바로 세례자 요한을 만난 것입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만난 이유는 세상에 좋은 일을 하려는 ‘착한 뜻’을 장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와 싸워 이기도록 이끄는 인물입니다.
이것을 넘어서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감사’입니다.
곽상빈 씨가 군대에 들어갔을 때 악마 같은 선임이 있었습니다.
그를 너무 견디기 어려워 그는 친구를 모아 하느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니 일이 잘 풀렸습니다.
시험을 얼마 앞두고 맹장이 터졌을 때도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니 이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감사하여 보답하는 삶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요한을 만나는 것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모두 지혜가 심어준 착한 뜻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착한 뜻이 없으면 그 착한 뜻의 열매를 맺게 하는 예언자와 주님에게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에게는 이 광야가 신학교였고 세례자 요한이 ‘하.사.시’였습니다.
하.사.시를 읽은 것은 주일 학교 교사를 하는데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더 잘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려는 착한 뜻 때문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는 착한 뜻을 실천하는 방법과 힘을 주시는 분들입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그분들을 순서대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오 11장 16-19절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따뜻하고 편안하신 하느님>
오늘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던진 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는 말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천 년 간 기다려왔던 메시아,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다들 그분이 과연 어떤 분이실까, 과연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주실까, 무척이나 궁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너무나 따뜻하고 편안하신 분, 너무나 자연스럽고 인간미가 넘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완전히 동떨어진 신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너무나 소탈하고 평범한 예수님의 모습에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백성들은 환호하고 안심하였지만, 나름 한 가닥 하던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도저히 이 특별한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녕 파격과 놀람의 연속입니다.
당대 가장 몹쓸 인간의 대명사였던 세리의 친구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로 발탁하셨습니다.
스승이셨지만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허기진 제자들을 위해 직접 아침상을 차리시던 스승이셨습니다.
아흔아홉 마리 건강한 양들을 남겨둔 채 길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기괴해서 다들 멀리 피해가던 한 여인을 치유하시고, 당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목숨 걸고 있던 안식일 규정, 그러나 백성들은 그로 인해 죽어나고 있던 안식일 규정을 하나하나 깨트리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잔칫집에 들어가시면 최대한 즐기셨습니다.
기쁜 얼굴로 식탁에 앉으셨고,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행복해하셨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여흥을 즐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로 축제였습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짧은 생애를 살다가셨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 30년, 출가 후 공생활 3년, 그리 길지도 않는 삶이었습니다.
당연히 수학여행 떠난 아이처럼, 따사로운 봄날 오후 소풍 나온 연인처럼 최대한 즐기면서, 최대한 만끽하면서 지내셔야 마땅했습니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언행을 종합해볼 때 예수님의 얼굴은 절대로 경건하거나 엄숙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목이 뻣뻣하다거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편안한 분이셨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로 붐볐습니다.
그분의 성품이 얼마나 소탈했으면 가시는 곳 마다 아이들이 졸졸 뒤따랐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당대 지도자들처럼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던지 강의를 시작하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 내면에 형성된 하느님 상을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혹시라도 그 하느님 상이 왜곡된 것은 아닙니까?
두려운 하느님, 처벌자 하느님, 진노하는 하느님,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은 이미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명확하게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와 연민,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을 등지고 떠나간 둘째 아들, 순식간에 유산을 다 까먹고 맨발의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된 우리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걱정, 우리 죄에 대한 걱정, 종말에 대한 걱정은 이제 한쪽으로 밀쳐두길 바랍니다.
대신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따뜻하고 자상한 하느님, 그분이 차려놓으신 이 세상이란 잔칫상 앞에 기쁜 얼굴로 앉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감미로운 포도주를 우리 각자 인생의 잔에 담아 감사하며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단 한번뿐인 이 ‘이승의 삶’에 최대한 감사하며 온 몸과 마음으로 만끽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였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17절),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17절),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예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준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다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