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zz의 탄생 5-Chicago 스타일과 Kansas city】
뉴올리언즈의 스토리빌 폐쇄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재즈맨들이 북부 도시로 이주했다는 것은 지난 회에 설명했던 이야기이다.
특히 시카고로 이들은 많이 진출했는데 Louis Armstrong은 늦게 시카고로 이주한 편이다. 여기서 시카고 스타일의 블루스와 Jazz가 만들어진다. 시카고 스타일이란 젊은 백인 아마추어 뮤지션에 의한 흑인 재즈의 모방 연주이다. 한마디로 상당수의 백인 소년들이 흑인 예술을 존경하고 그들 나름대로 섭취해서 만들어간 과도기 현상이다. 이들의 음악에서 뉴올리언즈 스타일의 힘이 넘치고 변화무쌍한 연주는 볼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그들만의 스타일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이들 아마추어가 잇달아 뉴욕에 진출하여 각지에서 온 뮤지션과 솜씨를 갈고 닦는 동안에 테크닉은 완성되어갔다.
재즈의 발전사에 가장 중요한 도시로는 뉴올리언즈 다음이 Kansas city인데 의외로 여기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Kansas city는 미주리 강을 끼고 미주리 주 Kansas city와 캔사스 주 Kansas city로 나뉘어져 있다. 중요한 것은 미주리 주 쪽이다. 금주법 시대에도 지금의 라스베가스처럼 도박장이 있고 공공연하게 술을 마실 수 있었던 유일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당의 톰 펜더가스트가 놀랄만한 부패 정치를 행했기 때문이다. 1911년 그는 시정위원이 되었다.
25년의 선거에서 재선된 그는 City manager(시 행정을 관장하는 전문인 정도로만 알고 계세요)에 헨리 맥켈로이라는 사람을 지명하는데, 이후 이 콤비는 13년 간에 걸쳐 Kansas city 시정의 부패를 일삼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재즈가 무척 발전했다. 펜더가스트는 막후 조정자로서,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강력한 지지기반과 뛰어난 부하를 많이 데리고 있었다. 후에 그의 부하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데, 그가 미국 제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다.
펜더가스트는 카바레,도박장,매춘가를 경영했고 시멘트 회사,토건회사를 갖고 있었으며, 그의 토건회사는 마침 미국의 고속도로 건설붐에 편승해 미주리 주의 공사를 독점했다.
그 공사 총감독이 트루먼이었다. 트루먼은 이때의 공적으로 펜더가스트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 나갔고 ,그 이후 계속 정치인으로서 성공해서 마침내 미국 대통령까지 된다.
펜더가스트와 그의 충견 맥켈로이 콤비의 부정과 부패는 미국 정치사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추악한 사건이었다.
Kansas city시청은 뇌물 청탁,직권 남용의 소굴이었고, 시내에는 갱들이 마음놓고 날뛰었다. 1927년 Kansas city에서 발생한 인구 10만 명당 살인 사건 수는 16건이었는데,
당시 알 카포네가 날뛰었던 Chicago는 13.3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정이 부패하면 할수록 재즈맨은 바빠졌다.
라스베가스적인 대환락 도시가 되버린 Kansas city에서 재즈맨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재즈의 빅 밴드 스타일이 생겨난 것도 Kansas city이다.
돈벌이가 되니까 여기저기에서 재즈맨들이 이 도시로 몰려왔고 쟁쟁한 재즈맨들이 이 곳에서 활동했다.
가끔 뉴욕같은 큰 도시에서 온 유명 악단이 Kansas city에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실력에 자부심이 있다고 여기고 이 도시에 왔지만 무참히 깨지고 돌아갔을 정도로 Kansas city의 재즈 실력은 막강했다. 흑인들의 샤우트 창법은 Kansas city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창법은 후일 R&B라는 전세계인의 사랑를 받는 팝음악의 모태가 되었다.
1938년 Kansas city의 언론인 포스트지가 펜더가스트의 13년간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연방정부가 조사에 나섰으며 펜더가스트는 체포된다. 죄목은 소득세 탈세이다.
시시한 죄목 같지만 시카고의 알 카포네도 이 죄목으로 붙잡힌 것이다. 펜더가스트는 알 카포네처럼 옥중에서 죽었고 Kansas city재즈의 황금시대도 끝났다. Kansas city에서 활동하던 재즈맨들은 뉴욕으로 진출했고 이들이 모던재즈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 무렵 캔사스시티에는 전국의 재즈 고수들이 이곳으로 몰려와서 마치 올림픽이 열리듯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기도 하고 이른바 "Cutting session"이란 연주배틀을 통해 자신들의 기량을 향상 시켰습니다. Cutting session이란 재즈연주자간의 경쟁적 연주 형태 경쟁에서 승리한 연주자가 경쟁자를 해고시키고(cut),그 자리를 꿰찬다는 의미로 당시 흑인 공동체 문화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지금의 브레이크 댄스 배틀이나 랩 배틀의 유래가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연주자들은 그야말로 인간계를 떠난 신계에 속한 연주자들이었습니다.
뉴욕이나 시카고 등지에서 온 쟁쟁한 실력자들도 캔사스시티의 고수들에게는 당하지 못하고 도시 밖으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그 시대의 캔사스시티의 수많은 빅밴드 중에서도 가장 실력있고 블루스 전통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던 팀이 Count Basie의 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