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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사랑
호 2:14-23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호 2:14-23 / [사막에서의 종교 개혁] 그러나 나는 다시 그녀에게 구애하여 사막으로 데리고 나가 다정한 말로 위로하리라. 15) 내가 거기서 그녀의 포도원들을 되돌려 주고 온갖 고난의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리라. 그러면 그녀는 기뻐 노래 부르며 내게 응답할 것이다. 마치 그녀의 젊은 시절, 애굽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내가 그녀를 해방시켰던 그 옛날과 같이 기쁘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16) [정조를 회복하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날이 오면 그녀는 나를 `나의 주인'이라 부르지 않고 `나의 남편'이라고 부를 것이다. 17)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네 우상들을 떨쳐 버리게 하리니 다시는 아무도 그 우상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리라. 18) [평화의 새 계약과 창녀의 결혼] 그때에는 내가 너희와 들짐승들과 새들과 뱀들 사이에 계약을 세워 서로 다정하게 살도록 하겠다. 또 모든 무기를 부수어 전쟁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여 너희가 평화롭고 안전하며, 걱정 근심 없이 편히 잠자리에 들게 하겠다. 19) 또 나는 정의와 공평, 사랑과 긍휼을 예물로 주고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이하며 20) 진실과 사랑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때엔 네가 나를 참으로 알게될 것이다.' 21) [응답하는 미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날이 오면 비를 기다리는 대지의 호소에 하늘이 응답하고, 땅에 비를 내려 달라고 청원하는 하늘의 간청에 내가 응답하겠다. 그러면 습기와 이슬을 얻고자 부르짖는 오곡백과의 목타는 호소를 대지가 들어줄 수 있으리라. 천지의 대합창단이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신다!'고 함께 노래 부르며 `모든 것을 주신 이는 그분이시다!'라고 찬양할 것이다. 22-23) 그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곡식의 씨를 뿌리고, 몸소 그들을 키우겠다! `불쌍히 여김받지 못하던'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내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 `이제는 너희가 내 백성이다.'라고 이르겠다. 그러면 그들이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응답하리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복으로 전환됩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나타날 회복의 모습들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날'에 이루신 회복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루신 은혜의 날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14-17)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지만 하나님은 회복의 때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위로가 있고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회복의 때는 심판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됩니다. 심판의 목적은 심판 자체가 아니라 다시 거룩한 성도로 세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있습니다. 회복의 때에는 거친 들이 출애굽의 때와 같이 이스라엘이 새롭게 빚어지는 장소로 바뀌고, 고통의 골짜기인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의미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고통의 때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처럼 보이지만, 회복의 때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찾으시고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키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새롭게 형성될 관계는 하나님을 남편이라 부르고 바알(주인)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회복의 날에는 우상 숭배의 대상인 바알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의 입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직 심판이 임하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이 메시지는 심판의 고통 중에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예언이고 소망입니다. 또한 회복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회복될 관계(18-23) 그 날에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과 함께 다른 관계들도 회복됩니다. 자연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이 회복의 때에는 근심, 걱정 없이 평안이 넘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망가졌던 질서가 바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이 날에는 하나님과 참된 교제가 이루어지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비전을 보여줍니다(21).
하나님의 심판으로 막혔던 땅의 축복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회복의 때에는 하나님이 심판을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이름이 새롭게 변화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으신 자가 되고, 긍휼을 입은 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23). 하나님의 설명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진실한 마음으로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이루시려고 하시는 비전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경험한 이의 진실한 고백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입니다. 이 신앙의 고백이 삶의 모든 순간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윌리엄 로우는 그의 저서 <엄숙한 부르심>에서 말합니다. ‘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든가, 금식을 많이 했다든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든가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누가 예수를 잘 믿느냐, 누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이냐 할 때에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어떤 일에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축복 - 관계의 회복
호세아 2:14-23 / 이상호 목사
■ 1917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태리 국경지대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막 돌아온 1,200명의 불란서 군인들이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열차를 타기 위해 집결해 있었습니다. 열차가 서니까 군인들은 서로 오르려고 아우성입니다. 그리고 열차 안에 가득차서 정원을 초과였습니다. 마치 짐짝처럼 빽빽히 채워졌습니다. 이제 열차의 출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관사가 밖에 나와 있는 거예요. 열차만 쳐다보고 있어요. 그래서 한 장교가 ‘기관사님, 왜 출발하지 않고 서서 보고만 있습니까?’ 한참 머뭇거리던 기관사는 ‘지금 이 열차는 이 상태로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아니, 왜 그렇습니까?’ ‘인원이 너무 많아 20-30마일쯤 가면 내리막길인데, 이 열차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장교가 화가 나서, ‘이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돌아가는 길인데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그래도 안됩니다. 열차가 이대로 가다가는 침몰합니다.’ ‘당신 내말대로 하지 않고 버티면 내가 총으로 쏘겠다’ 기관사는 어쩔 수 없이 기차를 움직입니다. 기관사는 기차의 한계를 알기에 마음을 졸이며 서서히 기차를 운전합니다. 내리막길에 다다르자 브레이크를 잡고 있는데, 나중엔 열이 받고 연기가 나고 불이 났어요. 그래도 어찌하든 멈추게 하려고 브레이크를 잡고 있지만 오히려 가속도가 붙어 어쩔 수 없이 열차가 탈선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대열차사고가 났습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병사들의 전쟁터의 공로도 중요합니다. 권력고 총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전문가, 즉 기관사의 안된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힘으로 밀어붙이니 결국 대 인명피해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복된 삶을 살길 원하시며 복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고 안전하게 가기를 원하시며 옳은 길로 인도하시길 원하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호세아서 2장 전반부에서는 자신의 죄로 파산한 이스라엘의 상태가 암담하고 음울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여기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상태가 밝고 즐거우며 소망스럽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쓸쓸하고 거의 절망상태에 있었을지라도 다시 위로와 소망으로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1. 축복의 새 시대를 위해 설득하시는 하나님(14절)
1) 거친 들로 데리고 나가 설득하심(14절)
14절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하신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내가"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고멜은 나를 잊고, 이스라엘은 나를 잊어버리고 연애하는 자를 따랐으나 나 여호와는 너희를 잊지 않고 그를 설득시켜 멀리 거친 들로 데리고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무지한 백성들을 말씀으로 설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새로운 기업을 얻게 되고 새로운 소망의 문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2) 말로 위로하시는 하나님(14절下)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과 위로를 주시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능력과 위로와 소망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마음 위에 말하고, 말씀을 뿌립니다. 또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그 위로와 축복은 무엇으로 나타나고 입습니까?
2. 잃었던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15, 16절)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서 마음 위에 위로하실 뿐만 아니라 잃었던 포도원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가나안에 다시 돌아온 후가 아니라 "거기서" 즉 포로되어 있는 그곳에서 회복케 하여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에게 거듭거듭 강조한 말씀이요, 또한 호세아 선지자의 설교의 결론이기도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계속해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당한 환난의 골짜기를 오히려 큰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거친 들 광야, 아골 골짜기인 바로 거기서,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가 있고, 다음에 새로운 "소망의 문"이 열린 그곳에 감사와 찬미의 노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회복을 의미하고 회개할 때 회복시켜 주십니다.
3. 백성의 모든 요구에 응하시는 하나님.(21, 22절)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므로 그를 취하여 아내로 맞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크게 축복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의 모든 요구(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 주는 내 하나님(23절)
오늘 본문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편이시고 이스라엘은 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 2:9-13을 보면 남편인 하나님께서 아내인 이스라엘을 법적으로 버리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근동사회에서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핑계 삼아 법적으로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에서 5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너는 내 백성, 주는 내 하나님’(23절)입니다. 이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① 남편과 아내의 부부(사 54:5, 62:4)
② 부자(말 1:6, 출 4:22∼23).
③ 목자와 어린양(사 63:11, 호 11:1∼4)
④ 포도원을 기업으로 주는 주인과 그 사랑 받는 자(호 2:14∼15).
⑤ 토기장이와 진흙 (렘 18:1∼6, 사 29:16).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는 성도의 호소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 되심이 우리의 신앙고백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 신앙으로 암담하고 어두웠던 날을 걷어 제치고 주님과 함께 축복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회복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완성이 됩니다. 이제 주를 나의 하나님을 모시고 순종하며 살겠다는 다짐으로 회복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실패의 깊은 구덩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면서 온전한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수 윤형주 장로님은 원래 모태신앙이었습니다. 대학생 때 가수활동을 해서 인기 절정에 올랐습니다. 참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마초 흡연 때문에 감옥엘 가게 됐습니다. 그 실패의 구덩이 속에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요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한 정근모 장로님도 평탄한 삶을 살던 중에 아들이 신부전증으로 죽어가게 되었답니다. 이 때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찾게 되었고 은혜받고 방언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평탄할 때는 하나님과의 처절한 씨름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깊은 구덩이에 빠지면 얍복강의 야곱처럼 하나님과 처절한 씨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그리고 진정한 회복의 절정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이 때 온전한 회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실패의 구덩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구덩이까지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십니다. 그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회복이 시작됩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져서 진정한 회복을 경험하시고 축복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왜 광야로 데려가시려 하는가?
호세아 2:14-20, 요 4:16-18- / 이성희 목사
1. 문명사는 종교개혁 이후 시대에로 진입함
오늘 주일은 종교개혁 495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시대에 말씀하시는 복음의 음성을 경청하려 합니다. 한국교계와 신학계는 5년후 2017년에 맞이할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준비를 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근대 서구사회만이 아니라 세계인류문명사에 큰 영향을 끼친 종교개혁 사건발생의 50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마땅이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교계신문엔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시기’ 라던가 ‘종교개혁 500주년 준비 위원회’같은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개신교의 한사람 신도로서, 신학자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요즘 근본적 질문에 스스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 시대, 다시말하면 지구촌이 실현되고 문명사회가 근본적인 털갈이를 하려는 역사적 카이로스에서는 ‘제2종교개혁’ 운동이나 ‘종교개혁 발생500주년 기념행사’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종교개혁 이후시대’(post-protetant Era)에 돌입했다는 시대의식 또는 교회사 의식이 더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진지한 고민입니다.
‘제2종교개혁’이라는 개념바탕을 검토해보면, 마틴 루터가 1517년 당시에 로마 가톨릭 교권체계의 도덕적 타락에 저항하고 개혁하려했던 것처럼, 요즘 한국 개신교가 특히 그 지도자들이 너무나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세인의 지탄을 받고 있음으로, 루터가 당시 교황청의 도덕적 타락을 정화하려고 개혁의 불길을 든것처럼 개신교의 도덕적 혁신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식인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준비’ 라는 의식 속에도 500주년이라는 연대기적 기념식에 더많은 초점이 놓여저 만고불변의 진리를 천명한 종교개혁기념일 곧 개신교 탄생 500 주년 ‘생일 잔치’를 더 성대히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나 죤 칼빈의 종교개혁의 근본의미는 당시 도덕적 타락상태에 있었던 교권체계를 바로잡으려는 도덕정화운동보다 더 깊은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묻는 근본적 성찰이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당시 로마가톨릭체계로 신성시 되어있던 거짓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상타파’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과 앞으로 몇 년동안 종교개혁에 관련된 기독계와 신학계의 모든 담론들은 교회가 타락하였으니 정화해야겠다 던지,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레등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다시 증보간행하는 행사 수준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문명사 자체가 ‘종교개혁 이후시대’(post-protestant Era)에로 진입해들어 갔다는 시대의식을 가지고, ‘종교개혁적 기독교’ 그 자체를 총체적으로 성찰을 해야 할 시대에 돌입했다는 영적통찰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 박사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큰 눈으로 조감하면 기독교 2000년 역사는 사도들이 이끌었던 초대기독교 제1세기 이후, ‘복음의 본질’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패러다임으로서 5가지 큰 패러다임 전환이 있어왔다고 본 것입니다.
헬라철학 영향을 듬뿍받은 헬라철학적 교부시대 기독교(상징인물은 어거스틴) , 중세 1000년을 지탱했던 스콜라 신학 기독교(토마스 아퀴나스), 근세 시민사회가 동트면서 형성된 종교개혁적 기독교(루터와 칼빈) , 성인이된 현대인들의 계몽주의적 기독교(칸트와 헤겔) , 그리고 2차대전 겪은후 형성된 에큐메니칼 기독교(칼 바르트와 칼 라너) , 이상 5가지 기독교 패러다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한스 큉 신부에게서 경청할 점은, 종교개혁을 비롯하여 기독교사 속에서 등장했던 거대한 신앙운동이 각각 삶의 자리와 역사적 배경을 가진 한정된 복음이해의 형태일 뿐, 그것이 만고불변한 ‘복음 그 자체’를 대신하거나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노력들 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이후로 들어간 오늘의 문명사회사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종교개혁’ 패러다임에 갇혀버린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또 하나의 ‘동굴’로 전락되고 만다는 위험을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은 항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시대제약적 한계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한계성은 무엇보다도 첫째, 종교개혁이 발생했던 16세기는 개인의 주제적 자기의식과 개인적 인간가치를 자각하던 시대에 걸맞는 종교개혁입니다. 중세기시대엔 ‘전체’라는 의식이 부분과 개체를 삼켜버렸던 시대였습니다. 종교개혁적 신앙은 루터가 그랬던 것 처럼, 내가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영성이었지, 오늘날 처럼 ‘온생명’ (장회익) 론적인 생태학적 생명이해와 양자물리학(아인슈타인)등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 영성입니다.
둘째, 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은 시대적으론 중세기가 끝났지만,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이중구조의 이원론이 개혁자들의 맘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라는 니케야신조에 기초한 성육신 신앙과 속죄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가령 20세기에 활발하게 논의된 소위 ‘역사적 예수’ 에 대한 관심은 아직 철저하게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넷째, 16세기는 아직 유럽중심주의에 갇혀있던 시대요, 기독교왕국 밖에도 중국이나 인도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심원한 종교가 발전하고 있는줄을 모르던 시대 곧 유럽기독교왕국 밖은 온통 이교도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일어난 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이후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있어야 할 종교개혁 신앙의 가장 핵심적 복음진리는 무엇입니까? 설교자는 그것을 두가지라고 요약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우상타파’ 정신인데,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되게 하라 !”(Let God be God!)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교 복음신앙 곧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다는 말의 참 뜻은 “예수를 바르게 알고, 예수를 깊게 사랑하고, 예수 뜻에 온전히 동참하여, 예수를 사는 것이다”는 것이다. “예수 앎, 예수 사랑, 예수 닮음, 예수 살기” 가 복음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절대화함으로서 우상숭배 직전에 이르렀고, 오직성경만의 틀에박힌 교리신조에 사로잡혀 벧들레헴 말구유에 누었던 ‘아기예수’ 대신 수십만원된다는 외제 유모차에 ‘교리로 조립된 밀랍예수’를 태우고 한껒 자랑하며 명동거리를 걷는 졸부에 비유하면 지나친 것일가요?
2. 호세아가 본 이스라엘의 죄와 요한복은 기자가 본 예수의 혁명
구약성경이라고 기독교인이 부르는 유대교 경전의 본래이름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집‘이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예언서 안에는 기라성 같은 예언자들이 많지만, 초기 예언운동의 두 물줄기는 아모스와 호세아 였다고 구약학자들이 밝힘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신비자 하나님 심장의 구성소를 밝힌셈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장의 일부분은 정의 혹은 공의라고 강조했고, 호세아는 긍휼심 혹은 은총이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의와 긍휼심, 정의와 은총은 둘이 아니고 심장의 심방심실 처럼 피를 온몸에 돌게 뿜어보내는 심장박동의 구성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오늘 호세아서 2:14-20엘 보면, 겉으론 가장 번성했다고 보이는 북왕국 여로보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신앙의 실체를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서”, 평생동안 성실하게 서로 사랑하며 살자고 혼례식에서 약속한 남편 님을 버리고, 정부에게 꼬임받아서 타락해버린 여인에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라는 관계, ‘내 뼈중의 뼈, 내 살중의 살’이라고 일심동체로 살아야 할 참 남편을 배신하고, 자기에게 금귀고리와 각종 패물로 호사하게 치장해주는 어떤 허우대좋은 남정네, 남편이라고 감히 할수 없는 주인같은 바알과 도시의 호화생활에 빠져 외도하는 한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을 비유함니다.
그런데, 변심한 그런 여인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그녀를 타이르되 출애굽 후 40년 광야에서 고생했지만 행복했던 신부신랑의 허니문 밀월시대 그 때를 생각하게 하려고, 그녀를 광야에로 데리고 가서 타이르겠다는 것입니다. 제 발 지금 그대가 몸과 맘을 다 빼앗겨 푹 빠져있는 그 사람은 ‘남편’ 이 아니고 언젠가 임자의 아름다운 얼굴과 자태가 시들어버리면 언제든지 버리고 떠날 여러첩을 거느리는 ‘세도가’(바알)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서 깨닫고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사실 알고보면,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의 질적차이를 엄격하게 강조하는 성경신앙이, 매우 역설적이게도 가장 이상적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치적 군신관계로서도 아니고, 봉건시대의 주인과 하인관계도 아니고, 선생과 학생사이의 사제관계를 넘어서 장가들고 시집가서 살을 석어살고 맘을 서로주고 받으며 일심동체로 살아가는 부부관계로서 은유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0-21)고 말씀하셨던 가 봄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보면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귀의하고 있는 기독교마져도 ‘진정한 남편’이라고 말 할수 없으며, 과거 우리민족에게 풍류도, 무교, 불교,유교, 천도교등 우리조상들에게 남편노릇했던 다섯종교가 있었듯이, 지금 우리가 함께 살고있는 기독교라는 종교도 궁극적 마지막 참 ‘남편’은 아니고 종교사속에 나타난 매우 훌륭한 잠정적 동거인 인뿐이라고 상대화시켜 볼 줄 알 때, 진정한 기독교신자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증언하는 신비자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셔서, 자기가 남편되고 인간들을 자기 신부로 삼아 알콩달콩 사랑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인간들이 남편인 자기를 버리고 자기 이외 다른 것 예들면 기독교라는 종교, 성경이라는 경전, 거대하 ㄴ성전건물이나 저명한 성직자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못견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관념적 변증법을 가르친 헤겔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정반합의 변증법적 종교사 발전단계의 마지막 완성체라고 강조했지만, 서구 철학적 해석임이 들어난 것입니다. 차라리, 초기 칼 바르트가 1920년대 <로마서 강해>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강조하면서 계시는 역사적 종교들을 심판하는데, 그 종교들 중에는 기독교라는 서구당시 종교도 포함된다고 일갈한 예언자적 포효속에서 더 진실에 가까운 종교개혁자의 영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3. 현재의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교권체계를 우상화 한 집단
종교개혁 정신에서 정직하게 한국 기독교사를 돌아본다면, 한국 개신교 역사 130년동안, 적어도 4가지 우상을 섬기면서 참 하나님을 배신하고, 참 복음을 우롱하였고, ‘참사람이시고 참하나님, 어린양이시고 사랑의 화신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능멸하는 범죄를 저질러왔습니다.
첫째우상은 국가주의 우상이었습니다. 20세기 전반기는 특히 제1,2차대전 전쟁은 국가주의 우상이 세계사를 비참으로 몰고가던 시기였습니다. 히틀러의 독일국가주의, 일본의 대동아 평화명분이 일본국가주의, 뭇소리니의 파시즘, 그 밖에 모든 국가들도 온 우주를 주고도 바끌수 없는 한사람 한사람 생명가치를 ‘국가’라는 우상 앞에 무조건 희생하도록 강요하고 전쟁터로 젊은 이들을 내몰았습니다. 극소수 독일 고백교회를 제외하고 대부분 독일교회가 제3제국 국가주의 우상앞에 무릅꿇었습니다.
둘째 나타난 우상은 ‘정치이념’이었습니다. ‘냉전시대’라고 하던 그 시절 한국 기독교는 ‘극우이데올로기’를 우상화했습니다. 그 우상숭배는 오늘까지도 건재합니다. 화해와 사랑의 복음정신을 내팽개치고 새시대를 앞당겨보려고 애쓰는 기독교 교회 형재들과 <생명, 평화, 정의>사회를 이러보자는 시민운동마져도 모두 ‘종북세력, 친북세력’이라고 정죄하거나 단죄하는데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우상은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아주 휘황찬란한 의상을 입고 등장한 ‘무한성장, 무 한경쟁, 약자도태’를 지지하는 ‘the more ,the better'의 맘몬숭배입니다. 1980년대 이후, “교회는 하나요, 보편적이교, 사도적이며, 거룩한 공동체’라고 말하는 교회론은 더 이상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오늘의 한국 대형교회들이 나라의 대통령을 세우기도하고 폐하기도 하고 무릅 꿇리기도하는 막강한 힘을 지닌 종단으로서 기독교 종교단체임을 과시했는지는 몰라도, 그 댓가로 예수는 죽고 복음은 ‘싸구려 상품’처럼 그 품위가 전락되었습니다.
넷째 우상은 언필칭 <오직 성경만!>이라고 주장하는 독단적 교리주의가 성경을 우상화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성경말씀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예루살렘중심주와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형제를 이단정죄하고 자기교단 과거 전통을 절대시하며 서로 경쟁적으로 장자권과 우월성 다투는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앞서말한 4가지 우상들은 쉽사리 단결하여 다가오는 새시대의 아기 탄생을 막고 산모와 태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4. 맺음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답은 두가지입니다.
첫째, 단순성과 순수성을 상징하는 정신의 거친들과 광야로 나아가, 자발적인 절제와 청빈을 통해서 내 영혼 속에 들어온 거짓 배우자를 몰아내고 참 님과의 화해와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하자, 마음을 비운자의 몫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지금은 종교개혁시대 이후시대라는 자각과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도 궁극적인 참 남편은 아닌 잠정적 동거인이라는 자각을 가지는 고도의 자기부정의 정신입니다. 그 때라야만, 진정한 개신교 신앙인이 되고 역사 상대적 교회나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영원자를 만나고 영원을 증언하는 증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루터 말을 인용한다면, 그리스도인이란 그 무엇,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으로서 주인이며, 바로 그러하기에 그 무엇 그 누구에게도 봉사하는 자유를 지닌 섬기는 자 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문
호세아 2:14-20 / 한경직 목사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에 빠져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이끌어서 축복을 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올시다. 여기 보니, 하나님께서 저를 개유(開諭)하여 말하자면 꾀어서 거친 들로 데리고 가겠다고 말씀했고, 거친 들에서 그들을 위로하겠다고 하셨고, 그 후에 그들에게 다시 포도 원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때에는 과연 아골 골짜기로써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특별히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시겠다는 이 말씀을 중심해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하여 장래에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시겠다는 예언인데, 우리가 이 뜻을 분명히 알려고 하면 먼저 과거의 아골 골짜기와 또 어떻게 과거의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이 되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아골 골짜기를 생각하려면 여호수아 七장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요단강을 건너서 첫 성 여리고를 믿음과 하나님의 크신 권능의 나타남으로 무너지게 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써 이 성을 점령한 것을 우리가 잘 기억합니다. 그 다음에 아이 성을 점령한다면 온 가나안 복지를 전부 점령하게 될 것인데, 여리고를 점령하고 곧 아이 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탐을 먼저 보낸 것입니다. 정탐이 아이 성에 들어가서 모든 일을 다 알아본 후에 돌아와서 보고하기를『그 아이 성은 여리고 성처럼 굳은 것이 아니고 성도 변변치 않고 사람도 적고 하니 뭐 많은 군대를 보낼 필요 없고 우리 생각엔 한 二, 三천 명 올려 보내면 쉽사리 아이 성은 점령할 줄 압니다.』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 보고를 듣고 三천 명이 정예 군사를 뽑아서『그러면 너희들이 올라가서 아이 성을 먼저 점령하라. 그러면 우리 후방 부대가 너희를 따를 것이다』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三천 명 되는 정예 부대가 올라갔건만 뜻밖에 아이 성 사람들이 담대히 성문을 열고 이스라엘 사람을 쫓아 나오며 치는 통에 이스라엘 정예 부대가 쫓겨 도망쳐 산비탈을 내러옵니다. 아이 성 사람의 수는 적지만 담대히 싸웠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하고 쫓겨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쫓겨올뿐더러, 이렇게 정예 부대가 쫓겨오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이 얼마나 겁이 났든지 마음이 녹아서 물과 같이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많은 장로들이 크게 공포심이 일어났습니다. 이리해서 아이 성 사람에게 이스라엘 사람이 패전했다는 소문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에 있는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수가 적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단숨에 삼켜버릴 것 같은 위험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떨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언약 궤 앞에 꿇어 엎드려서 머리에다 티끌을 얹고 종일토록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다고 합니다.『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아이 성 사람에게 이처럼 쫓기게 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요단강을 건너오지 않았을 터인데, 요단강을 건너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패전했으니 이 말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서 일제히 일어나 우리를 삼켜버릴 것 같으면 이를 어떻게 합니까? 또 이렇게 되면 여호와 아버지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하나님 앞에 대성통곡하면서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응답하신 말씀은『일어나라! 어찌하여 너희들이 엎드려서 나에게 부르짖기만 하느냐? 너희 이스라엘 군대가 이번에 아이 성 사람들에게 패전한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명령한 대로 여호와께 바치라고 한 것을 너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도둑질한 자가 있어서 그 까닭으로 내가 너희를 떠났다. 이제라도 너희가 가나안 복지를 점령하려고 하면 그와 같이 악한 사람을 너희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와 같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 말을 들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여리고 성을 점령하려 할 때 특별히 분부한 것이 있습니다. 성에 들어가서 금이든지 은이든지 이와 같은 모든 보물은 한 사람이라도 사사로이 소유할 것이 아니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라고 엄히 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필연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도적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제비를 뽑아서 범인을 잡게 되었는데, 제비를 뽑아 보니까 十二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가 뽑히었습니다. 유다 지파에 또한 여러 족속이 있는데, 그 족속 가운데 세라 족속에게 뽑혔습니다. 세라의 자손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삽디의 가족이 뽑혔습니다. 삽디의 자손 가운데서 다시 제비를 뽑아 보니까. 갈미의 아들 아간이 나중에 뽑혔습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갈미의 아들 아간을 불러다가『네가 한 일을 이 시간에 온전히 자복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말할 때 아간이 피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대답하였습니다.『예, 제가 과연 하나님께 성별(聖別)한 물건 가운데서 좋은 오바가 한 벌 탐이 나서 그것을 도적 했고 은 二백 세겔과 五十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도적해서 그가 있는 장막 땅 속에 묻어 두었는데, 지금 가도 그것이 있을 터이니 그것을 찾아오기 바랍니다.』
과연 사람을 보내서 그 장막 속을 파보니 외투가 나왔고 또한 금과 은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아간에게 속한 모든 가장 물, 그 은 금까지 전부 다 어떤 골짜기로 가지고 가서 모든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네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렇게 괴롭게 하였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고 여러 사람이 돌을 들어 쳐서 아간을 죽이고 또한 아간에게 속하는 모든 물건을 온전히 불살라 버리고 그 죽은 송장 위에 돌무더기가 되도록 돌을 던져서 쌓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 골짜기를 아골 골짜기라 불렀습니다. 아골이라는 말의 뜻은「탈락」혹은「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부터 그 골짜기를「탈락의 골짜기」또는「괴로움의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죄를 제하여 없이 한 후에 다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 후에 오래지 아니해서 이스라엘 사람이 아이 성을 무난히 정복했습니다. 아이 성을 정복한 후에 그 밖의 헤브론 성을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한 성, 두 성, 온 가나안 복지를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아골의 골짜기는 모든 가나안 복지를 점령하는 소망의 문이란 것입니다. 만일 아골 골짜기가 없었던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죄를 제거하지 않았던들 가나안 복지를 점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아골 골짜기가 있는 까닭으로 가나안 복지를 소유하는 소망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의 아골 골짜기와 소망의 문이올시다.
그런데 여기 호세아는 미래에 또한 아골 골짜기가 있겠고 아골 골짜기가 있음으로써 소망의 문이 열리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예언과 같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많은 죄를 짓고 죄를 지음으로써 나중에 예루살렘이 다 멸망을 당하고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으로 다음에는 저 멀리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가서 다른 나라 사람의 압박 하에 살면서 많은 괴로움을 받은 그 七十년의 생활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다른 새로운 아골 골짜기였습니다. 그 아골 골짜기에서 많은 눈물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죄를 회개하고 그 곳에서 더러워지고 다 부패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새롭게 되었고 다시 깨끗하게 되었고 아름답게 되어서 마지막 七十년 기한이 간 후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이스라엘 나라와 교회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아골 골짜기가 소만의 문이 되었습니다.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제해 버리는 골짜기가 없이 우리 앞에 소망은 없습니다. 이것은 민족의 장래만 그런 것 아니고 우리 개인의 생활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잘 압니다. 이 둘째 아들이 부모에게서 많은 재물을 얻어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허랑 방탕하게 진탕하게 놀고 있을 때에 그 탕자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이 다 없어지고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들어서 먹을 양식이 없어지고 친구도 없어지고 집도 없어지고 돌볼 사람이 없어질 때 부득이 구복(口腹)이 원수가 되어서 다른 사람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고 머슴 중에서도 돼지를 치는 처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 보기에 돼지 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유대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습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돼지 친다는 것처럼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참 죽지 못해 돼지를 칩니다. 하물며 돼지를 치는 것도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 돼지 먹는 팥 껍질을 먹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막히는 사실입니까!
돼지를 치고 팥 껍질을 먹다가야 그 때서야 이 사람이 죄를 깨달았습니다. 자,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넉넉하고 품꾼이 많은데, 나는 지금 여기서 돼지 먹을 것도 넉넉히 목 먹고 주려서 죽겠다. 내가 왜 이와 같은 운명을 당했나? 내가 왜 이 처지를 당했나? 내가 이제라도 아버지 앞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야말로 탕자가 아골의 골짜기를 당했습니다. 그 아골 골짜기는 탕자에게 소망의 문이 되었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지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아골 골짜기를 지나서야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도 베드로의 생활을 잘 아십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이 다 예수 님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자기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할 때 베드로 앞에 소망이 없었습니다. 과연 예수 님께서 붙잡혀 멀리 예수 님을 따라 제사장의 집 문 밖에서 불을 쪼이고 있을 때 세 번씩 예수를 모른다고 비겁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주의 시선에 마주칠 때 자기의 한 말과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곧 그 자리에서 일어나 캄캄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심히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그 통곡의 밤이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아골 골짜기였던 것입니다. 그 밤을 통해서 베드로에게는 소망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지금 일본에 나와서 많이 설교하고 있는 선교사 가운데서 J.D.세이서라는 청년 선교사가 있는데, 이 선교사는 본래 미일(美日) 전쟁시에 첫 번으로 동경과 일광(日光) 등 몇 곳을 폭격한 A.L.듄니들 부대의 폭격 기수로서 처음으로 폭탄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던지고는 항공모함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 비행기가 모두 중경(重慶)으로 가던 도중에 불행히도 이 사람이 탔던 비행기는 가솔린이 부족하여 그만 중간에서 일본인이 주둔한 지역에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로가 되어 상해로, 북경으로, 혹은 일본으로 三년 간 많은 고초를 당하면서 포로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장해서 오래 교회를 떠났던 사람입니다. 자기 말대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심지어 도적질까지 했습니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고생하는 가운데 전에 듣던 복음이 다시 생각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생각나고 자기의 죄를 깨달아서 그 감옥에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회개를 한 후에는 자기가 다시 일본에 와서, 비록 자기가 처음에는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왔었지만, 이번에는 복음을 가지고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미국으로 돌아가 기독교 대학 패시픽 대학(大學)에서 공부를 마치자 곧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사람이 많은 가운데도 특히 미·일 전쟁을 일으켜 진주만을 처음 폭격한 일본 비행대의 사령관이었던 후지다 라는 대위가 이 분의 말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三년 동안 많은 괴로움을 받고 그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회개한 그 동안의 감옥 생활이 괴롭기는 괴로웠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아골 골짜기였고 아골 골짜기가 있는 까닭으로 그에게는 소망의 문이 있었습니다. 우리 애국 청년 가운데도 포로 생활하는 가운데 아골 골짜기를 통하여 새로운 은혜를 받고 지금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새해 둘째 주일 저녁인데, 금년 일을 가만히 내다볼 때에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를 우리가 걸어가려고 합니다. 이 一년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길는지 모릅니다. 나 개인으로나 가정으로나 교회로나 국가로나 어떤 일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금 걸어가려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보지 못한 길이요, 생각건대 음침한 골짜기가 될는지 모릅니다. 알지 못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 것은, 우리가 비록 장래의 일은 모르나 우리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내 손목을 붙잡고 이 길을 간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하든지 축복을 받고 우리의 가정도 교회도 민족과 국가도 축복을 받을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금년 一년 동안 우리 개인과 우리 교회와 또 가정, 국가와 같이 하신다고 하면, 물론 우리는 두려워할 것 없고 의심할 것 없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일어나라, 어찌해서 엎드려 부르짖기만 하느냐? 너의 군대에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할 자가 있는 고로 내가 너희를 떠난 것이다. 그것을 없이 하라. 죄를 없이 하라』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하실 조건이 있습니다.『네 속의 죄악을 없이 하라』아간을 돌로 쳐죽이고 그 가장 물을 불사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기에 너무 과하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신령한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모두 비유로써 가르쳐 주신 말씀인 줄 압니다.『네 눈이 죄를 범하면 그 눈을 뽑아 버리라. 한 눈 가지고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두 눈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나으리라. 네 손이 죄를 범하면 찍어 버리라. 한 손 가지고 천당에 가는 것이 두 손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나으리라. 네 발리 죄를 범하면 찍어 버리라』이와 같이 가장 엄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 마음 앞에 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마음속에 들어오시려고 하면, 내 마음속에 아간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욕의 아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탐심의 아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거짓의 아간,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아간, 불평과 불만의 아간,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아간이 있습니다.
이 아간을 없이 하여야 됩니다. 온전히 없어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 아간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 마음의 아간을 없이 하여야 됩니다. 우리 가정에 아간이 있습니까? 가정의 아간을 없이 해야 됩니다. 우리 국가에 아간이 있습니까? 이것을 없이 하여야 됩니다. 그래야 북진(北進)하고 통일합니다. 말로만 북진하고 통일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저 그렇게 소망만 하면 됩니까? 아골 골짜기를 지나야 소망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이 새해 벽두에, 새 길을 걸어가는 이 자리에서 내 마음속의 모든 아간에 속하는 것을 철저히, 내 잠재 의식에 있는 것까지 온전히 소탕해 부리고 우리 주님과 동행해서 금년 일년 동안에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로나 우리 국가로나 참된 축복을 받는 새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아간을 택하겠습니까? 아골 골짜기를 지납시다. 그래야 소망의 문이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