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라는 말은 죽은 말이다.
추억이란 포토샵의 그레이드처럼 겹겹이 쌓여 현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한 장의 사진이 되어 지금의 나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나는 사진으로 추억을 간직하고 싶지 않고, 오롯이 마음로만 남겨두는 편이다. 추억이 사라지면 사라지는데로 내버려둔다.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만 언어로서 숨이 끊겨버려 내다버릴 곳도 없다.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이나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키치’라고 하는데 ‘추억’이야말로 키치문화의 대표적 언어다.
시골 이발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실제 생활에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때가 있다.
여행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 곧잘 이 말을 듣게 된다.
“좋은 추억 만들어 가고 싶어요.”
나는 이따위의 예쁜 척하는 말로 인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대체 추억을 어떻게 만든다는 건가. 여행지가 추억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도 되나?
추억이란 아련하고 어렴풋해서 불투명 유리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뚜껑을 자세히 열어보면 온갖 구질구질한 시간의 잔해, 치욕과 모욕의 언사, 가난과 결핍의 부유물들이 떠돌고 있다. 지나간 과거를 감추거나 잊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추억은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위장막이 되어주는 것이다.
과거를 낭만적인 빛깔로 채색해보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너나없이 힘겹게 세월을 버텨왔으니까. 하지만 추억이라는 말로 ‘사실’은 가릴 수 있지만 ‘진실’마저 가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추억이란, 심장에 금이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마음 안쪽에만 아프게 새겨지는 것이다. 아파야 추억인 것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추억 돋는다’는 말을 마구 쓴다. 지네들이 얼마나 아파봤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