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57
4월12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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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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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EoF_JOjStQ
[의정부교구 최재영 세례자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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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렬한 신비 체험이나 은총 체험들은 평생 지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그동안 떠도는 소문에 대해 긴가민가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빵도 드시고 물고기도 드시는 모습을 뵌 사도들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간 지니고 있었던 의혹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반대로 잠깐 다른 볼일 보러 나갔다가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던 토마스 사도는 얼마나 아쉽고 답답하고 억울했겠습니까? 토마스 사도는 그 답답함과 억울함을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있던 토마스 사도였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왜 그리 믿음이 약하냐? 언제까지 그 따위로 살거냐?’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자상하고 따뜻합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복음서 내에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 사도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토마스 사도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단 한 명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분께서 주신 믿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 단단히 붙들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희미한 안갯속 같은 신앙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한 주님 부활의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신앙 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종종 체험하는 강렬한 신비 체험이나 은총 체험들은 평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 혹은 두세 번뿐입니다. 그 은혜로운 체험을 가슴에 안고 믿음의 삶,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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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x8iLE77g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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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실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부활하신 주님의 자비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의심 많은 토마스 사도에게 나타나셔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보면 더 잘 믿을 텐데, 그러면 더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정반대를 말씀하십니다. 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행복할까요?
우선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겠습니다. 행복은 곧 '만족'입니다. 그런데 이 만족은 내가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작아지느냐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 때문에 낙원의 모든 것에 불만족을 느꼈고 결국 불행해졌습니다.
「로또 당첨자들의 비극과 쾌락 적응의 법칙」 실제로 수백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의 80% 이상이 이전보다 더 불행해진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뇌는 강렬한 도파민의 자극을 금방 기본값으로 설정해버립니다. 공돈이 생기니 "나는 이제 남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는 교만이 커지고, 교만해지면 관계는 깨지며, 만족의 기준치는 끝없이 높아져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진정한 행복은 많이 가지는 방향이 아닌 내가 작아져 지금 가진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언제 작아질까요? 사랑받을 때 작아집니다.
19세기 프랑스의 한 교만한 귀족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품위와 지위를 지키는 것을 인생의 최대 가치로 여겼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숲에서 길을 잃고 사흘 동안 굶주림에 지쳐 쓰러졌습니다. 그때 한 더러운 산골 노인을 만납니다. 그 노인은 자신의 곰팡이 핀 빵 조각을 그녀에게 내주었습니다.
부인은 평소라면 침을 뱉었을 그 빵을 받아 먹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녀는 훗날 고백했습니다. "내가 평생 화려한 연회에서 먹었던 진수성찬보다 그 노인의 빵 한 조각이 나를 더 행복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는 내가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비 없이는 단 10분도 살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처절하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완전히 깨졌을 때, 인간은 비로소 단 하나의 숨결에서도 하느님의 우주적인 사랑을 발견하고 만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한순간에 죽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해준 분을 믿고 끊임없이 나아가지 않으면 사랑을 받아도 다시 교만해집니다.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성인식 전통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 아들을 커다란 나무에 묶어놓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일 아침까지 여기서 혼자 견뎌야 진짜 어른이 된다"라는 말만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소년은 처음에는 맹수들의 울음소리와 공포에 떨며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버렸어! 나를 사랑하지 않아!" 자기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발견합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믿는 길뿐입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사랑이 있는데, 그래 믿자. 아버지가 나를 버리실 분이 아니야!’ 이런 자신을 아버지께 대한 신뢰로 맡기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아버지와 온 마을 사람들이 활을 들고 밤새 그를 지켜주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른은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존심 센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더 큰 존재에게 온전히 의탁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침묵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방관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날개를 펴게 하려는 거룩한 전략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무섭다고 울어대는 아들에게 5분마다 나타나 "나 여기 있다, 걱정 마라"라고 했다면 소년은 결코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믿음을 통해 버리는 과정은 오랜 혼자만의 작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동료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요한 20,25)라고 증언할 때 일주일 동안이나 고독한 의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그 시간은 토마스가 제련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토마스가 자신의 '눈'이라는 오만한 도구를 내려놓고 동료들의 '말씀'을 믿는 겸손한 존재가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바람에 일주일밖에 자신을 죽이는 노력을 할 수 없었지만, 그 짧은 시간의 결핍이 토마스의 남은 인생 전체를 주님께 봉헌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비가 너무 안쓰러웠던 그는 가위로 고치를 살짝 찢어주었습니다. 나비는 아주 쉽게 밖으로 나왔지요. 하지만 그 나비는 날개를 펴지 못한 채 바닥을 기어 다니다 얼마 못 가 죽고 말았습니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사실은 날개에 있는 액체를 온몸으로 보내 날개를 단단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고통 중에 즉시 개입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이라는 날개를 스스로 펼쳐 천국으로 날아오를 힘을 기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겸손해져서 "주님 없이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때까지 주님은 방해하지 않고 숨죽여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사랑을 믿고 더 의탁하는 존재가 되도록 믿음을 키워갑시다. 그러면 자아가 작아져 큰 평화와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 느끼게 될 것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요, 그 믿음의 보상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모습을 감추시는 이유는 우리 마음의 눈을 정화하여, 훗날 당신을 대면했을 때 그 기쁨이 영원히 마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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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에 사과를 먹을 때가 있습니다. 사과는 껍질까지 먹으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과 껍질을 깎아서 먹는 편입니다. 사과 껍질을 깎다 보면 늘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일 사과에 껍질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과에 껍질이 없다면 며칠 지나지 않아 금방 변질될 것입니다. 오래 보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벌레가 생기고 상처가 나면서 금세 썩어버릴 것입니다. 사과의 껍질은 단순한 겉모습이 아닙니다. 사과의 맛을 보존하고 사과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사과는 껍질째 먹어야 건강에 좋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 껍질째 먹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먹으려고 하면 또 껍질을 깎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건강보다는 편한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도 가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지만, 때로는 편한 길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에도 껍질이 있습니다. 특히 수백 년, 천 년을 사는 나무들을 보면 껍질이 매우 단단합니다. 나무의 껍질은 병충해를 막아주고 비와 바람을 막아주며 나무의 생명을 보호해 줍니다. 껍질이 없다면 나무는 오래 살 수 없습니다. 동물 중에도 껍질과 같은 보호막을 가진 동물들이 있습니다. 악어나 거북이를 보면 몸을 덮고 있는 껍질이 매우 두껍습니다. 그런 껍질이 있기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처럼 몸을 보호하는 털이나 단단한 껍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옷은 인간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몸을 지켜 줍니다. 최근 국제 뉴스를 보면 또 하나의 보호막을 생각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방공망입니다. 방공망이 무너지면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나라는 방공망이 약해서 쉽게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반대로 어떤 나라는 강력한 방공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공격을 상당 부분 막아 냅니다. 이스라엘의 ‘아이언 돔’ 같은 방공 시스템이 그 예입니다. 하늘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하여 피해를 줄이는 역할을 합니다.
전쟁에서 방공망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보호막이 필요합니다. 신앙인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몸을 보호하는 껍질은 없지만 영혼을 보호하는 껍질, 다시 말하면 신앙의 방공망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보호막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악의 공격에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로 신을 신고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며 성령의 칼, 곧 하느님의 비유 말씀을 받아 드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의 삶을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에 비유합니다. 군사가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전쟁터에 나간다면 금방 상처를 입고 쓰러질 것입니다. 그래서 군사는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투구를 씁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보호 장비를 영적인 보호 장비로 설명합니다. 진리는 허리를 동이는 띠가 되고, 의로움은 갑옷이 되고, 믿음은 방패가 되고, 구원은 투구가 되고, 하느님의 말씀은 성령의 칼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는 영적인 껍질, 신앙의 방공망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신앙인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영적인 보호막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영혼을 지켜 주는 가장 강력한 방공망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면 초대 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신자들은 서로 가진 것을 나누었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기쁨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습니다. 이 공동체도 하나의 영적인 보호막입니다. 혼자 있으면 쉽게 흔들리지만, 함께 기도하고 서로 도와주면 공동체는 우리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됩니다.
사과가 껍질로 보호받듯이, 나무가 껍질로 오래 살아가듯이, 전쟁에서 방공망이 나라를 지켜 주듯이, 신앙인에게도 영적인 보호막이 필요합니다. 그 보호막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 악의 세력은 쉽게 침입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굳건하면 악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사과는 껍질이 있어서 오래 보존됩니다. 나무는 껍질이 있어서 천 년을 살아갑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영혼을 지켜 주는 신앙의 껍질이 되고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지켜 주는 신앙의 방공망이 될 것입니다. 굳건한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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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춘천교구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은 사실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심과 확신 사이를 오가며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토마스 사도의 말은 단순한 불신의 표현이라기보다 정말로 부활을 믿고 싶다는 간절한 절규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직접 체험하고 싶다는 갈망의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던 제자들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거로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 안에서, 인간의 미움과 폭력까지 떠안으신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신 말씀처럼 죽음까지 이겨 낸 사랑의 증거로서 상처를 본 것입니다. 이 상처를 통하여 부활을 만난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그들을 고립과 두려움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삶으로 이끈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도 교회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살아 있습니다. 상처 없고 문제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와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공동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볼 때, 우리는 부활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사랑의 하느님, 그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깊이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한 주간, 말과 행동으로 기쁘게 부활을 고백하며, 사도들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 삶으로 울려 퍼지기를 희망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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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9-31: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오늘은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다. 전통적으로 이날은 부활 성야에 세례를 받은 새 신자들이 흰 옷을 벗는 ‘사백 주일’(Dominica in albis) 로 불려왔다. 그 흰옷은 새 생명의 표징이며,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그 세례의 은총을 실천으로 살아내야 함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이 은총의 삶을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보여 주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들은 마음과 영혼이 하나였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그리스도이셨다.”(Sermo 355,1) 곧,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질서를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1. 부활하신 주님의 첫 선물: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 번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19절, 21절, 26절) 이 인사는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 속에 닫혀 있던 제자들에게 주시는 새 창조의 인사다. 예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22절) 하신 장면은 창세기 2장 7절, 하느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행위와 대응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이 숨을 내쉬셨을 때, 제자들은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받은 새로운 창조였다.”(Hom. in Ioannem 86,4) 성령의 선물은 죄의 용서와 평화의 실현으로 이어진다.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23절) 교회는 이 성령의 은총을 통해 인간과 하느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명을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며,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화해의 성사가 된다.”(교회 8항)
2. 의심하는 토마스: 신앙의 여정
복음의 두 번째 부분(24-29절)은 토마스 사도의 체험을 전한다. 그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겠다.”(25절)라고 말한다. 토마스는 의심하는 인간의 대표, 곧 신앙을 과학적 증거로 확인하려는 세속적 이성의 상징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상처를 보여주시며 초대하신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만져보아라.”(27절)
성 그레고리오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토마스는 의심함으로써 우리를 도왔다. 그의 의심은 우리 믿음을 굳건하게 하였다.”(Homiliae in Evangelia 26,7) 그리고 토마스는 감격 속에 고백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이 고백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전환이다. 그는 이제 자기 삶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분께 의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라는 말씀은 단지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계시 신앙의 본질을 드러낸다. 믿음은 눈으로 보는 확증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받아들이는 은총의 응답이다. 교리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그분께 전 존재를 맡기며 동의하는 것이다.”(143항)
3. 보지 않고 믿는 행복: 자비의 신앙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믿음이다. 그분은 영광중에 부활하셨지만, 여전히 상처 입은 주님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선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활의 영광은 고통의 상처를 통해 완성된 자비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상처는 우리 믿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남아 있다.”(In Ioannem Tractatus 121,5) 이 믿음은 새로운 창조의 삶으로 이어진다. 부활의 신앙은 현실을 초월한 도피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천상의 질서를 살아내는 삶이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3)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매일 새로 창조되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4. 결론: 부활의 평화와 감사의 삶
결국 오늘 복음의 초점은 ‘보지 않고 믿는 자의 행복’이다. 이 행복은 세속적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 평화의 상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이라는 고백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살아계신 주님 앞에 서 있다는 신앙의 체험이며, 그분께 우리 전 존재를 맡기겠다는 서약이다.
이제 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성령의 숨결에서 용서와 평화를 이루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민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1베드 1,8) 그것이 바로, 자비로운 부활의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삶, 곧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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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평화입니다>
요한 20,19-31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예수님과 토마스, 복음서를 쓴 목적)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평화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19,19.21.26)
벗을 품으니
내가
평화입니다
벗을 바라보니
눈이
평화입니다
벗에게 들으니
귀가
평화입니다
벗에게 말하니
입이
평화입니다
벗에게 내미니
손이
평화입니다
벗에게 다가가니
발이
평화입니다
벗을 그리니
마음이
평화입니다
벗과 함께하니
삶이
평화입니다
벗을 있게 하니
살림이
평화입니다
벗을 품어
나는
평화이어야 합니다
벗을 품어
나는
평화이고 싶습니다
벗을 품어
나는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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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몸과 마음을 치유 받고 평화를 간직하시길 빕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고,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교회는 이때부터 해마다 부활 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주일’로 지내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 있다.
성녀의 일기를 보면, 자비의 예수님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저녁때에 방에 있었는데, 그때 흰옷을 입으신 주님을 보았다. 한 손은 가슴에 얹으셨고, 한 손은 축복하시려는 듯이 들고 계셨다. 가슴에는 두 줄기의 빛이 뿜어 나왔는데 하나는 붉은빛이었고 하나는 엷은 빛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주님을 쳐다보았다. 내 마음은 두려움에 떨렸지만 큰 기쁨에 넘쳤다.
잠시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네가 본대로 성화를 그려라. 그리고‘예수님, 당신께 의탁하나이다.’라는 말을 넣어라. 나는 이 성화가 먼저 네가 있는 성당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공경 받기를 바란다. 나는 이 성화를 공경하는 사람을 멸망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부터 특히 임종 때에 적에게서 승리하도록 약속하겠다. 나는 이 성화를 내 영광으로서 지킬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로부터 깊은 자비가 흘러나와 세상을 구원한다는 진리를 하느님 자비의 사도’인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폴란드) 수녀께 밝히시고 그분 성심에서 분출된 빛줄기가 하느님의 분노로부터 영혼들을 보호할 것임을 알려주셨다. 아울러 “자비심 축일을 제정하여 모든 영혼들, 특히 불쌍한 죄인들을 위한 피난처와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
이날 나의 깊은 자비심의 심연이 열린다. 나의 자비심의 샘으로 가까이 오는 영혼들에게 은총의 바다를 쏟아주겠다.”하고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말씀하셨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많은 환시와 예언, 그 외에 영적 은총을 받았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박해를 받기도 했다. 예수님은 수녀에게 자신의 성심에 대한 공경을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셨다. 이 신심의 이름은 ‘하느님 자비’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 환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체험을 기념하고 아울러 그 그림을 보고 공경하는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여러 번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영적인 지도와 기도의 은총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수녀에게 하신 말씀은 성녀 파우스티나가 직접 기록한 일기에 담겨 있으며, 그 일기는 오늘날 “내 영혼 속 하느님의 자비”(Divine Mercy in My Soul)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성녀의 사명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해 성경이 전하는 신앙의 진리를 세상에 일깨워 주어야 한다. 둘째, 특히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자비’ 신심 실천을 통해, 온 세상과 특히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해야 한다. 셋째, 하느님 자비의 사도직을 시작해야 한다.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간청하며,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폐결핵을 비롯한 수많은 고통을 죄인을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던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는 크라쿠프(Krakow)에서 1938년 10월 5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녀의 시신은 크라쿠프 라기에프니키(Krakow-Lagiewniki)의 하느님의 자비 묘지(Shrine of Divine Mercy)에 안치되었다. 그녀는 1993년 4월 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4월 30일 새천년기에 처음으로 시성되었다.(가톨릭홈)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19)하시며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기억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를 회복하는 날 되시길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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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19-29)>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의 첫 번째 은총은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하든지, 용서를 받든지 간에, 용서를 통해서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미움과 원한을 버리고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부활을 증언하는 일이기도 하고, 부활의 기쁨을 얻는 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나의 모든 죄를 용서받을 때에도 당연히 부활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용서 없이는 부활의 기쁨도 없습니다. 그런데 용서에서 필수요소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나에게 주신 ‘용서의 은총’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고,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용서의 은총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면 부활의 기쁨도 없습니다. <회개는 용서하는 입장에서도 필수요소입니다. 용서란,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지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구원과 생명’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용서’를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루카복음에 있는 말씀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2) “성령을 받아라.”라는 말씀은, 성령을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할 때에는, 또 용서하는 일을 할 때에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잘 받으려면 늘 기도해야 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일해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3)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도,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 자체는 믿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그는 사도들이 만났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인지, 혹시 사도들이 어떤 환시 같은 것을 체험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영적인 존재’로 나타나신 것인지, 아니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유령’을 본 것은 아닌지(루카 24,37)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를 위해서 다시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당신이 그 몸 그대로 부활하셨음을 확인시켜 주신 일입니다. 어떻든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향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최초로 신앙고백을 한 신앙인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인물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리는 거의 대부분 ‘보지 않았지만 믿어야 하는’ 교리입니다. ‘천지창조’의 경우,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것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종말과 재림의 경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니, 그것도 역시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는 그 일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은, “볼 수 없는 것인데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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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원호 바오로(등촌3동성당 주임) 신부님]
<주님의 자비, 상처와 상처가 맞닿는 자리>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자비하신 주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하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동료들이 주님을 뵙고 감격에 젖어 있을 때, 홀로 그 기쁨에서 소외된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왜 하필 나만 없을 때 오셨을까?' 하는 서운함과 오해는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는 한맺힌 절규로 변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불신이라기보다. 주님의 사랑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0,27) 이 말씀은 토마스의 불신에 대한 질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아픔을 통해 그의 오해와 아픔을 치유하시려는 자비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상처 앞에서 토마스는 비로소 모든 오해를 씻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이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예전에 안동교구 강구성당에서 사목했던 적이 있습니다. 성 토마스 사도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작은 시골 성당의 성전 문고리는 예수님의 깊은 상처를 만지고 있는 토마스의 손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그 문고리를 밀어 성전 문을 열고 제대를 차리며 신자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예수님의 상처 위에 저의 손을 포개어 문을 열던 그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 사랑하는 신자분들과의 만남은 주님의 자비를 매일같이 체험하는 순간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연민'이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우리의 상처 안으로 직접 들어오시는 '투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마음을 열 때, 멋지고 화려한 모습이 아닌 가장 아픈 곳을 먼저 내보이듯,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영광보다는 부서진 상처를 먼저 내어주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통을 알아주길 원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아픔에 들어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누 구의 상처에 손을 포개고 있느냐?" 주님께서는 당신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투신'하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러셨듯 나의 아픔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님 앞에, 그리고 아파하는 이웃 앞에 내어놓고 서로의 상처가 맞닿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치유하고 치유받는 자비로운 경험을 하길 원하십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을 "나의 자비이시며,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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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현국 요한 사도 신부님]
<모든 순간에 통하는 기도,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교회는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게 하셨고, 그것도 모자라 그 아들을 세상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과 자비를 특별히 묵상하고 그것에 감사드리는 날이 오늘,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화살기도를 자주 바치시나요? “자녀가 건강하게 해주세요.”, “가족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어려움을 잘 이겨내게 해주세요.” 등 저마다 소중한 지향을 담아 기도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화살기도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도입니다. 오늘 저는 평소에 자주 바치는 보편적인 내용의 화살기도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미사 전후나 미사 중에 저는 부족한 저 자신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일을 하다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에도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일이 잘 풀려 결실을 맺었을 때에는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합니다. 몸이 아프거나 지칠 때에도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이 화살기도는 모든 상황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기도하며 얻은 작은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가 된 이후,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습관처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무언가 이룬 것 같지만, 그 노력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노력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더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고 그분께 의탁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매 순간 마음을 모아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내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 있을 수 없고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이를 기억하며, 각자 일상 안에서 매 순간 하느님의 자비를 믿음으로 청하는 복된 한 주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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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황하철 안드레아 신부님]
<하느님 자비와 용서>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한자 <자비(慈悲)>는 ‘슬픈 사랑’ 혹은 ‘사랑은 슬프다’는 뜻을 지닙니다. 하느님께 서는 왜 슬픈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는 왜 그 슬픈 사랑을 청하는지? 혹시 그 사랑을 돌려받지 못해서 슬픈 것은 아닐지? 너무나 당연한 듯 받기만 하는 사랑이기에 슬픈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어쩔 수 없는 사랑인 자비, 너무 당연한 사랑이기에 철이 들어야 알 수 있는 그 깊은 사랑에 대해 묵상하며, 나는 철든 신앙인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오늘 복음은 부활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들을 전합니다. “평화”, “평화”, “용서”. 부활을 만난 제 자들에게 평화를 전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처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용서해 주어라.> 부활을 전하는 이들은 평화가 함께 하는 이들이고 용서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성령께 도움을 청하며 자비로이 용서를 시작해 봅시다.
용서가 없으면 평화도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아픔은 내 몫일 뿐입니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령과 함께 용서를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수 있을 뿐, 용서의 참 완성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심판 날에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그 죄들에 대해서 갚아주실 것이고 응징하실 것입니다. 용서는 그렇게 심판 날에 완성됩니다. 용서를 완성하려 하지 말고 시작해 봅시다. 시작이 있어야 완성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맡겨 드립시다. 예수님께서는 토마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믿어라.”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생명을 얻읍시다. 의심을 버리고 믿으며, 부활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용서를 시작합시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닮게 창조된 형제자매임을 기억하고, 하느님을 닮고자 자비로이 용서하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살아갑시다. 성령과 함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요한 복음이 기록되던 때(90-100년), 사람들은 더 이상 역사 속에서 걸어 다니시던 예수님을 느끼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숨결은 이미 지나간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고, 남아 있는 것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전해지는 기억과 말, 그리고 때론 담대히, 때론 조용히 이어지는 증언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은 ‘증언’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눈으로 본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이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들려주고자 애씁니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믿음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알아가는 자리가 됩니다. 토마스처럼 의심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심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어느 순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으로 건너갑니다.
믿음은 그렇게, 머뭇거림과 질문, 그리고 회심 사이를 오가며 자라납니다. 그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문득 깨닫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그것이 요한 복음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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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풀리지 않은 인생의 의문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하느님을 직접 뵙고자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고,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과 고난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욥은 다음과 같이 고난 가운데서 울부짖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19, 27)
어쩌면 인간만이 유일하게 인생의 의문을 묻고 답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은 당신을 뵙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듣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업적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과 영의 눈(=靈眼)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은 모든 사물 안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습니다. 보는 것이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 주더라도, 믿음 그 자체가 보는 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 뵙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요1,39)라고 초대하신 것은, 보아야만 믿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며 사랑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행적과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일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현존하셨던 그분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토마스 사도와 똑같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라고 말한 것은 그의 불신을 드러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토마스라는 뜻은 본래,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것을 좋아하는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보고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 는 그 표현 자체로 토마스 사도의 신앙과 인격을 낮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는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보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중 하나는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을 볼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까지 마치 선글라스를 끼고 살아왔다면, 오늘부터는 선글라스를 벗고 제대로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 선글라스를 벗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더 이상 속하지 않기에 현세에 동화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마음과 시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을 때”(로12,2) 우리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은 토마스의 의심을 탓하기보다 토마스의 신앙의 눈높이에 맞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토마스는 물론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배려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0,27) 예수님은 토마스가 원하는 경험에 의한 증거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시면서도,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더 이상 만지거나 손을 넣어 보는 일을 포기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의 응답은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 는 표현처럼 다음과 같은 믿음의 고백으로 표현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0,28) 그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최고의 호칭인 ‘하느님 그리고 주님’을 사용하여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토마스는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이름처럼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적어도 정직한 사람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는 회의하면서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역설적으로 신앙은 회의이고, 이 의심이 믿음을 강하게 깊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물론 신앙은 하느님의 은사이기에 주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지니게 되고 그 믿음이 깊어가는 것이지요. 어쩌면 정직하게 의심하는 과정을 거쳐 참으로 믿게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토마스가 지녔던 정직함을 지닐 수 있도록 청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토마스 사도에게 감탄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믿게 된 다음에 철저하게 투신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주님을 뵙자, 그분께 다가가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실로 온몸과 온 마음으로 주님, 당신은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이라고 믿고 투신하는 토마스를 보면서 우리 또한 그의 투신을 본받도록 청합시다. 그를 철저히 변화시킨 것은 부활 이전과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손과 옆구리의 상처들은 곧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신 하느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의 영원한 표지입니다. 저나 우리 모두 토마스 사도처럼 그렇게 투신할 수 있기 위해서 그분 사랑의 표지를 마음으로 보고, 그 사랑에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할 수 있는 단순함을 지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도 숱한 의심과 회의를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뵙는 일은 감정이나 이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죄와 배신과 의심에 대하여 분노나 복수가 아닌 오직 자애로운 염려와 배려만 하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에서 용서와 평화, 성령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26)라고 인사하십니다.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고통을 통해 얻은 평화이며, 죽음을 통해 이루어 낸 평화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부터 온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하실 때, 거기에는 당신이 고통을 통해 성취한 화해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평화를 잃지 않도록 늘 예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 안에 머물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울러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우리는 세상을 이긴 사람이기에(1요5,4~5참조)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부활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4,32~33참조)
오늘은 특별히 하느님 자비의 주일이기도 합니다. 경험적으로 하느님의 사람들은 철저한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난 후에야 비로써 자신을 하느님에게 개방하고, 의탁하게 됩니다. 알콜 중독자를 치유하는 12단계 프로그램에도 잘 드러나 있듯이, 중독자는 스스로 자신의 병을 치유할 수 없다, 는 사실과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할 때 하느님의 은총에 의탁하게 됩니다. 오늘 하느님 자비의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실패와 불신, 나약함과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처절하고 온전하게 내어놓고 맡깁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고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거룩하신 하느님,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이여,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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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들, 곧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거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들이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를 노래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베풀어진 자비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시어,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시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곧 당신의 생명이신 성령을 건네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곧 신뢰로 사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이는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을 넘어 성령으로 용서하셨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동시에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우리에게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단지 용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걸머주며, 짊어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고, ‘위해’주는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시는,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짊어주고 걸머주시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그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 ‘사랑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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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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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클레이튼 M.크리스텔슨은 2007년 11월 심장질환으로 쓰러진 후 암과 뇌졸중을 연이어 앓게 되고, 교수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 능력 장애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계속되는 불행에 한탄하고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상황과 불행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문제와 욕구,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골몰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을 돕고 봉사하는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 봉사하면서 남에게 사랑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건강 문제는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는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본인의 자기중심적 사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 사랑 속에 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이 저절로 내게 와서 살포시 앉아 있기를 바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유다인들에 대한 공포로 스스로 문을 굳게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닫힌 문을 통과하여 그들 한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는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평화’로 회복시킨 완전한 구원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라는 말에, 증거를 요구하면서 믿지 않습니다. 철저히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드레 뒤에 다시 예수님께서는 방문하십니다. 토마스가 요구했던 증거를 정확히 짚어내시며,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나약함, 의심의 눈높이까지 기꺼이 내려오시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 상처에 손을 넣지 않습니다. 대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라고 외칩니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오직 야훼 하느님을 부를 때만 사용되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의심 많은 제자의 입에서,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하고 높은 차원의 신앙 고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하면서 보고서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주님 안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주님 안에 머물며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을 갖추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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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의 공동체>
오늘 주제는 부활의 공동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합니다.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형제적 친교의 공동체, 기도와 성찬의 공동체, 포기와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기쁨이랄까 충만함이 가져다준 선물입니다. 기쁨이 충만할 때 우리는 그 기쁨을 나누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기쁨을 나누게 되는데 맨입에 나눌 수 없으니 먹을 것을 나누고 가진 것을 나누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손주 봤다고 한턱내고, 딸 결혼했다고 한턱내는 것이 좋은 예지요. 반대로 슬픈 사람은 슬픔을 같이 나눠주길 바랄 뿐 결코 한턱낼 수 없고요.
그런데 인간적인 기쁨과 충만도 이러한데 부활의 기쁨과 충만은 어떠하겠습니까? 훨씬 더 기쁘고 훨씬 더 충만하기에 더 완전하고 더 대단하고 더 오래 가겠지요?!
부활의 기쁨과 충만은 그야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쁨이고 성령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된 기쁨이니 그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임사체험(臨死體驗)이라는 것이 있지요.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 말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체험을 하는데 대부분 빛과 황홀을 체험한다고 하고, 그것이 너무도 황홀하기에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다고 하지요.
꼭 이런 임사체험이 아니더라도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의사마저 포기한 사람이 기도로 살게 된 경우 하느님 체험을 하면서 인생이 달라지지요.
자기는 원래 죽은 목숨이었는데 하느님께서 덤으로 주신 인생이니 이제 더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기로 하고 재산도 좋은 일을 위해 쓰라고 다 희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더 높은 가치를 체험한 결과 전에 가치 있던 것들이 무가치하게 되고, 욕심부리고 집착하던 이 세상 것들을 사랑을 위해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내놓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경지를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썩지도 더러워지지도 시들지도 않는 하늘의 상속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 상속 재산을 육신의 아버지께 다 돌려주고 어디에도 또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주님을 섬긴 프란치스코처럼 한편으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을 자유롭게 따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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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하느님의 자비가 되자!>
오늘 복음(요한 20,19-31)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과 '토마스의 불신과 이 불신을 치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 한가운데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시면서, 당신의 온전한 육체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시면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2-23)
부활 제2주일인 오늘은 '스물여섯 번째 맞이하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은 2000년 대희년 부활 제2주일 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실 때 제정된 주일입니다. 많은 성당에 '하느님의 자비상'이 걸려 있는데, 이는 1931년 2월 22일에 파우스티나 수녀가 환시 속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은 '하느님의 자비가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그 반대가 '지옥'이지요. 믿는 이들은 이제와 영원한 천국을 그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토마스의 불신을 치유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쏟아진 하느님 자비의 결정적 표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 자비의 힘으로 우리는 날마다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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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진정한 만남에서
태어나는 고백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만남을 통해
변화됩니다.
부활과 하느님의 자비는
서로 분리된 두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자비가
결정적으로
승리한 사건이며,
자비는 부활을 통해
완전히 드러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자비를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에
부활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비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부활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그 상처는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사랑이 끝까지 머문
은총의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상처를
없애주기보다
그 상처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상처는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만남이 시작되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 또한
상처 한가운데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때,
부활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상처는 자비를 낳고,
자비는 상처를
새롭게 합니다.
자비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며,
상처는 자비를
배우는 자리입니다.
자비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힘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진정한 부활이며
진정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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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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