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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자유게시판 스크랩 [백가쟁명:유주열] 프란치스코 교황과 이순신장군 (한시 감상)
재휘애비 추천 0 조회 100 14.08.24 12:57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백가쟁명:유주열] 프란치스코 교황과 이순신장군

 

뜨거운 8월에 새로운 리더십이 뜨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의한 집단 우울증에 걸린 국민의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일이 더 꼬이고 있는 현실 속에서는 찾기 어려운 리더십이다. 이순신(1545-1598)장군과 프란치스코(1936- )교황의 이야기이다.

역대 개봉영화 최대관객을 기록한 화제작 “명랑”에서 보여 준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절망감에 빠진 한국사회를 감동시키고 있다.


조선을 재침한 일본 수군을 맞아 1597년 10월 이순신 장군은 다시 전선에 나타난다. 2달 전 거제 앞바다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의해 전멸된 원균의 후임이었다. 궤멸된 수군의 상황을 전해들은 선조는 수군의 해체를 권고하나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면서 용기를 잃지 않고 부하들에게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리더십으로 명랑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장군의 스토리에 한국사회가 새롭게 열광하는 것은 장군의 리더십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발발 일여 년 전인 1591년 2월 전라 좌수사로 제수되었을 때 장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어촌을 돌면서 현지 사정을 잘 아는 나이 든 어부들과 소통이었다. 장군은 젊은 시절 잠시 수군의 일을 한 적은 있으나 주로 함경도 변방에서 여진족과 싸워 육전에는 능하지만 바다는 잘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장군에게 바다를 가르쳐 준 사람들은 수대에 걸쳐 물때와 싸우고 암초를 피해 간 현지의 어부들이었다. 그는 낮은 자세로 그들에게 다가가 마음을 얻었다. 명량해전은 백성들의 응원에 의해 군민(軍民)이 하나가 되어 이룩한 기적적인 승리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축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르헨티나의 예수회 신부였다. 그는 권위주의에 맞서고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약자들과 소통하였다. 그의 청빈과 겸손 그리고 낮은 자세는 2013년 3월 교황으로 즉위된 후에도 변화가 없다.

서울에서의 짧은 체류기간 동안 그의 소탈한 행보에서 매일 새로운 뉴스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열광하였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리더십에 갈망을 느끼고 있는 한국사회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리더십은 국민에 대한 충(忠)이다. 충(忠)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마음이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마음의 중심이 대중에 있다고 했다. 대중과 살을 맞대고 양(羊) 냄새가 나는 목자처럼 대중의 냄새가 몸에 배여야 한다고 했다. 애민(愛民)과 경민(敬民)의 리더십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국민이외에 권력이나 부(富)라는 불순함이 마음의 중심에 들어 와 있는 리더십이 늘어나고 있다. 기득권이나 부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면 마음의 중심이 두 개가 된다. 국민에 대한 충(忠)이 재앙의 환(患)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8월의 서울 하늘에서 교황과 장군은 드디어 한 장소에서 만났다. 한국 천주교 여명기에 천민과 민초(民草)로 이루어진 순교자 124명을 복자(the blessed)로 선포하는 시복(諡福)미사 때였다. 장군은 100만 구름 인파 속에서 교황의 시복식(beautification)을 마치 경호라도 하듯 긴 칼을 차고 광화문광장에 버티고 서 있다. 장군의 근엄한 모습은 명량해전에서 왜군과 싸우던 모습 그대로다.

낮은 자세로 소외된 자와 소통하고 자신을 내려놓는 교황과 장군의 리더십은 패배감과 무력감에 젖은 한국사회에 큰 감동과 울림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이순신장군의 한시들을 휴일 오전에 감상해보자.

숭고한 뜻을 생각해보자. 

 

한산도가(閑山島歌)

 

山島月明夜     (한산도월명야)

上戍樓撫大刀     (상수루무대도)

深愁時何處        (심수시하처)

一聲羌笛更添愁  (일성강적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올라

큰 칼 불끈 잡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 이내 시름 더해 주네

 
 

무제(無題)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蕭蕭風雨夜(소소풍우야)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耿耿不寐時(경경불매시)

간담이 찢어질 듯 아픈 이 가슴     懷痛如?膽(회통여최담)

살이 에이듯 쓰라린 이 마음         傷心似割肌(상심사할기)

 

강산은 참혹한 모습 그대로이고    山河猶帶慘 (산하유대참)

물고기와 새들도 슬피 우네          魚鳥亦吟悲(어조역음비)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國有蒼黃勢(국유창황세)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人無任轉危(인무임전위)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恢復思諸葛(회복사제갈)

말 달리던 곽자의 그립구나          長驅慕子儀(장구모자의)

원수 막으려 여러 해 했던 일들이  經年防備策(경년방비책)

이제 와 돌아보니 임금만 속였네   今作聖君欺(금작성군기)

-1594년 9월 3일-

 
 

선거이 수사와 작별하며..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했고          北去同勤苦(북거동근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같이 했지       南來共死生(남래공사생)

오늘 밤 달 아래 한 잔 술 나누지만    一杯今夜月(일배금야월)

내일엔 우리 서로 헤어져야 하네       明日別離精(명일별리정)

-1595년 9월 14일-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

한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驚寒雁陣高(경한안진고)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이루는 밤      憂心轉輾夜(우심전전야)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1595년 10월 20일-

 
 

무제(無題)

병서도 못 읽고 반생 지내느라        不讀龍韜過半生(불독용도과반생)

위태한 때 충성 바칠 길 없네           時危無路展葵誠(시위무로전규성)

지난날엔 큰 갓 쓰고 글 읽다가        ?冠曾此治鉛?(아관증차치연참)

오늘은 큰 칼 들고 싸움을 하네        大劍如今事戰爭(대검여금사전쟁)

마을의 저녁 연기에 눈물 흘리고      墟落晩烟人下淚(허락만연인하루)

진중의 새벽 호각 마음 아프다         轅門曉角客傷情(원문효각객상정)

개선의 그 날 산으로 가기 바빠        凱歌他日還山急(개가타일환산급)

공적 기록 신경 쓸 겨를 없으리        肯向燕然勒姓名 (긍향연연륵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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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8.24 17:10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 14.08.25 13:06

    감사합니다

  • 14.08.28 16:24

    지도력 부재에 대한 갈증은 전통의 가치를 현사회로 소환하는 것이지요.

  • 14.08.29 16:54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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