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기제품구성
A5(210mm X 148mm, 국판) |
양장 |
국내도서 > 문학 > 시 > 한국시
“살아서 이 열차를 내려야 한다”
김윤배는 장시 「시베리아의 침묵」을 통해 우리 근대사의 가장 불행한 비극에 숨을 불어넣는다. 더러운 진창에서도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듯, 아프고 끔찍한 역사적 비극을 그 자체의 언어로 명명하여, 때로는 거칠고 아픈 신음으로, 때로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숨결로 생명의 리듬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그는 시베리아의 샤먼이 되어 죽은 자들의 차가운 영혼을 위무하고, 한인 유민들의 묵살된 역사를 불러내어 거기에 예카테리나와 빅토르의 사랑의 서사를 엮었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묵직한 민중 서사시를 갖게 되었다.
-박철화(중앙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개인의 목소리와 대사회적인 목소리를 같은 높이로 지닌 시인”(황동규)
1966년 『세계의 문학』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여, 20여 년 동안 ‘전통 연시(戀詩)’와 ‘아픈 시대를 증언하는 시’ 사이를 넘나들며 삶과 역사에 끝없는 애정을 드러내온 시인 김윤배의 장시집『시베리아의 침묵』이 출간되었다.
그간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동화와 평론집으로 거침없는 필력을 자랑해온 김윤배 시인의 시력에서 유독 돋보이는 것은 ‘장시’일 것이다. 시적 경향을 과감히 거슬러 “노래로서의 시의 본래적 기능과 공감의 정서를 회복하려”(이혜원) 했던 『사당 바우덕이』(2004) 이후 두번째로 선보이는 장시집인 『시베리아의 침묵』에서는, 긴 호흡 속 보기 드문 리듬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잊혀가는 역사적 비극과 그 안에 매몰된 개인의 삶을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되살리고 있다. 시인은 2011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한 달 남짓 강제이주경로를 답사하며 당시 고려인들이 겪었을 감정들을 되짚고, 그곳에 터를 이뤄 살아남은 사람들과 ‘예카테리나’와 ‘빅토르’의 아이들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삶을 장시 「시베리아의 침묵」에 불어 넣었다. 절절한 공감이나 따스한 위무를 넘어, 남루하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생에 대한 애착을 끝내 놓지 않았던 고려인의 강인한 생명력이 시 곳곳에 생생하게 녹아 있는 것이다.
철로 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위태로운 질주…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던 조국이 그를 혼돈케 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조국인가
조국은 대한제국 아닌가
조국은 어째서 둘인가
그는 혼란스럽다 (p. 137)
조선왕조 말, 큰 흉년이 들어 수천 명의 사내들이 식솔을 이끌고 고향을 등졌다. 죽을 각오로 국경을 넘고 며칠 밤낮을 걸어 시베리아 먼 동쪽 땅에 도착했다. 살 길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은 유랑하다 마주한 낯선 땅에 이름을 지어 붙이며 새 삶을 시작했다. 1923년 토지와 국적 문제가 해결되어 20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이 소련의 공민이 되었고, 자치구역도 마련할 수 있었다. 건물을 올리고 농사를 짓고 고깃배를 타며 나름의 삶을 살아가던 신한촌 개척리 사람들에게 1937년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라는 강제 통보가 전해졌다. 총 9부분으로 나뉜 「시베리아의 침묵」의 초반부에서는 고려인들이 어떻게 조선을 떠나 러시아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지, 강제이주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위와 같은 상황을 차근차근 풀어내고 있다. ‘사내’는 희망을 품고 새 땅을 일궜으나 멀리 있는 조국을 잊지 못해 가슴속엔 늘 분노가 가득했다. 시 속 ‘사내’는 각각 조명희이거나 안중근이며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결국 비극적 역사에 묻혀 사라져간 익명의 ‘사내들’, 고려인을 대표하는 상징일 터다. 두 개의 조국에서 비롯된 정체성의 혼란은 제2의 조국이라 생각하던 소련의 배신으로 더욱 심화된다. 일본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수천 명의 지도자가 투옥되었고, 수십만 명의 고려인이 “마음에 없는 지명”인 중앙아시아로 일거에 강제이주되어, 시베리아 횡단철로 위에서 만여 명이 희생당했다. 결국 고려인들은 어디에도 뿌리박지 못한 난민이었다.
햇빛 아래 남루하지 않은 무엇이 있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인가
빅토르는 생각한다
남루한 게 우리들의 생이다
강제이주, 이보다 더 남루할 수는 없다
이리저리 찢기는 바람이다
바람은 방향이 없다
방향이 없으니 종착지도 없다 (p. 76)
강제이주열차에서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중반부부터는 ‘사내들’ 대신 ‘예카테리나’에게로 초점이 맞춰진다. 강제이주당하며 수난을 겪고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 상처입고도 기어이 삶의 의미를 찾아내 살아갔던 고려인들의 수난을, 시인은 예카테리나라는 한 여성의 생을 빌려 소생시키고 위무한다. “보랏빛 라벤더 향기” “순백색 꽃구름 드레스” 같던 열여덟 예카테리나는 “먹구름 속으로 떠밀”리듯 강제이주열차에 올랐다. 먹고 살기 위해 제 몸과 흑빵 몇 조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내야 했던 열아홉 살은 “좌절”이고 “슬픔”이며 “절망” 같았다. 이후 십수 년간 예카테리나는 아이만을 바라보며 살았지만 결국 예카테리나에겐 어머니와 사랑하는 빅토르가, 고향 포시예트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 조국이마저도 상처로 남는다. 여든여덟 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사는 일이 상처투성이였”던 예카테리나의 삶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그저 잊혀가는 또 다른 고려인들의 비극을 대리하는 가장 짙은 흔적일 것이다.
“지독한 냄새는 지독한 삶의 증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
인간답지 못한 온갖 것들을 견뎌야 했던 강제이주열차에서의 참혹한 생활이 드러난 시구를 맞닥뜨리면 그 처절함을 차라리 외면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내들이나 소중한 사람을 모두 잃고 외로이 홀로 삶을 마감한 예카테리나의 일생에는 공분하거나 연민을 던지기 쉽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침묵」은 연민이나 위무, 애도를 넘어, 고려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방점을 찍는다. 살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고려인들은 씻지 못한 제 몸에서 나는 몸내와 마땅한 자리가 없어 먹고 자는 열차간 한켠에 처리해야 했던 배설물의 구린내까지도 살아 있음의 증거로, “몸을 몸이게 하는 일”로 여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지독한 냄새는 지독한 삶의 증거였다
지독한 두려움과 지독한 추위와 지독한 굶주림과
지독한 욕망을 넘어왔다
그렇게 살아서 지금, 여기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 역 광장에 서 있는 것이다
사내의 모습을 한 사내는 없었다
아낙의 모습을 한 아낙은 없었다
혹독한 철길을
혹독한 감시를
혹독한 냉대를
견디어준 몸이 고마울 뿐
흙을 밟고 서 있는 발바닥이 대견할 뿐
이렇게 고통스런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던
사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게 해준 헐벗은 영혼이 자랑스러울 뿐 (p. 207)
줄곧 자신이 발 디딘 대지와 동일시되는 “대지였고 강이었던” ‘사내들’ ‘아낙들’은,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에 부려지더라도 그곳을 살 만하게 바꿔낸다. 피폐한 삶을 놓지 않고 그래도 살아내려는 원초적 삶의 의지가 그들의 고난을 경건한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 고려인은 비루한 목숨을 독하게 붙들며 “가혹한 운명에 굴하지 않”았으니 패배한 적이 없다.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침묵하지만, 「시베리아의 침묵」이라는 묵직한 민중 서사시로 “기억함으로써 폭력을 용서하지 않”았기에, 1937년 강제이주의 비극은 지워지지 않을 만큼 ‘무거운 시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황무하고 거친 땅에 버려졌다
도망칠 수 없는 시골의 간이역이 하차 역이었다
강을 건너고 황무지를 지나고 반사막 지역에 짐을 풀게 했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벼농사를 꿈꾸고
그곳에서 살아남아 채소 농사를 꿈꾸고
그곳에서 살아남아 목축을 꿈꾸고
그곳에서 살아남아 학교를 꿈꿨다
독하고 독한 사내들이었다
독하고 독한 아낙들이었다 (p. 211)
펼쳐보기
김윤배
194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겨울 숲에서』『강 깊은 당신 편지』『굴욕은 아름답다』『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부론에서 길을 잃다』『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장시『사당 바우덕이』와 산문집『시인들의 풍경』『최울가는 울보가 아니다』『바람의 등을 보았다』, 평론집『온몸의 시학 김수영』, 동화집『비를 부르는 소년』『두노야, 힘내』를 상자했다.
내용등록하기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