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마태오 17,10-13
사람은 자신이 만든 그릇의 용도와 크기만큼 채우며 산다
1491년, 한 스페인 함장이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던 중 숫자를 몇 개 틀렸습니다.
지구 둘레는 대략 40,000킬로미터이지만, 그는 약 24,000킬로미터로 계산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 계산은 틀렸다고 해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계산을 확신했습니다.
분명 거꾸로 돌아도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의도가 앞섰기에 지구를 실제보다 작게 계산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고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사벨라 여왕도 그가 틀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손해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 3척을 내어줍니다.
콜럼버스는 계속 착각 속에 자신의 계산상 자신이 발견한 대륙은 인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난 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고 그 제도를 인도 제도라 칭했습니다.
그의 거대한 실수 때문에 발견된 신대륙 덕분으로 스페인 정부는 그 후로 200년 이상을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참조: ‘세계를 바꾼 49가지 실수; 결과가 좋았던 실수’, 빌 포셋, 생각정거장]
콜럼부스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지 못한 발견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부에 대한 그릇이 작았던 것입니다.
반면 이사벨라 여왕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에 대한 그릇크기가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신 나갔다고 손가락질 받는 콜럼부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이 잘 살 수 있는 축복의 그릇을 누구보다 크게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 만드는 자기 자신의 크기만큼 채워주십니다.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모르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그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재산 차이를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받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부자들이 돈을 덥석덥석 잘 받았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아, 이렇게 나에게 돈이 굴러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이 뭔 꿍꿍이속으로 나에게 돈을 줘?’라며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돈이 채워질 그릇이 이미 컸던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작은 그릇이 채워져 있기에
더 이상 채워질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어떤 그릇을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타볼산에서의 변모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이유는 당신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을 보고 제자들이 엘리야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엘리야의 필요성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의 부와 자주독립을 이뤄줄 분으로 여겼습니다.
잘못된 그릇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담기기 때문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불이 들어갈 벽난로를 불에 타는 재료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를 세속적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여기는 이들은 다 이처럼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도 세속적인 성공을 바랄 때는 사제가 되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제를 담을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려면 먼저 그 무엇을 담을 그릇부터 만들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러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야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성전이 되기 위함이지 돈주머니나 권력주머니가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 담기 위해 크고 작은 각자의 그릇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그릇만큼만 내 안에 그것이 담깁니다.
그릇의 용도는 다 다릅니다.
영원한 그릇이 되고 싶다면 영원한 것을 담을 재료로 그릇을 만들어야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마태오 17,10-13
성체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온전히 살아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 산을 내려오면서, 제자들에게 선구자 세례자 요한, 그리고 당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제멋대로’라는 표현에 한동안 멈춰 묵상을 해봅니다.
꽤 부정적인 뉘앙스로 여겨집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성적이거나 상식적인 사고나 판단이 배제된 즉흥적인 행동....
결국 ‘제멋대로’라는 표현은 진지한 성찰을 통한 신앙의 눈이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눈만으로 바라보고, 합리적인 규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정관념이나 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부 몰지각한 유다인들의 시선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기대했던 선구자와 메시아의 모습이 따로 있었습니다.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무소불위의 권능과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화려하고 멋진 선구자와
메시아의 모습을 잔뜩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눈앞에 등장한 선구자는 어땠습니까?
외양부터 남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얼굴은 평생토록 계속해온 고행과 극기의 생활로 수척하고 거칠었습니다.
입고 있는 옷은 길바닥에서 주운 낙타털옷에다 맨발이었습니다.
거듭 외치는 예언의 말씀은 가슴을 후벼 파는 쌍날칼 같아 도무지 듣기가 민망했습니다.
예수님은 한술 더 떴습니다.
변반 중의 변방 갈릴래아 사람, 그 중에서도 낙후된 깡촌 나자렛 사람이었습니다.
뒷배경도 시원찮았고 가방끈도 짧았습니다.
거기다 그가 하루 온종일 어울리는 사람은 세리와 창녀, 죄인과 중병환자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유다인들은 도저히 그들을 선구자요 메시아로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뚜렷한 징표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고정관념, 끼고 있던 색안경으로 인해, 끝까지 그들을 거부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선구자, 어떤 예언자, 어떤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까?
이번 성탄 우리는 과연 어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도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아기 예수님께서는 탄생하시고, 성장하시고, 고통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데, 우리는 너무 멀리서만 그분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체는 물건이 아닙니다.
살아 있지 않은 사물이 아닙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온전히 살아 계십니다.
이것을 의식하며 그분을 받아 모실 때 우리는 더욱 온전히 살아 있게 되고,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와 함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니 플린, 성체성사의 일곱가지 비밀, 성바오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방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선물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