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문학예술>(1957)-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관념적, 주지적, 상징적, 존재론적
■ 심상
어 둠 - --불----밝 음
(인식 이전의 상태) (인식 하고자 하는 의식) (인식의 상태)
■ 중요 시어 및 시구의 의미
* 위험한 짐승 → 대상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존재(윤리적 위험함이 아니라,
지적 위험함임)
* 까마득한 어둠 대상이 지닌 참의미를 분별하지 못한 상태
*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 → 존재의 불안전성, 실존적 위기 상황을 묘사.
사물의 본질적 의미를 포착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회의에 바탕한 것임.
* 이름도 없이 → 무의미하게
* 무명(無名)의 어둠 →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
혼돈의 상태,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과 동일한 의미임.
* 추억의 불 → 지나온 삶의 과정에서 얻은 모든 경험과 감성의 정수(精粹).
* 한밤 내 운다 → 꽃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
* 돌개바람 →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노력을 통해 발현되는 생성하는 힘
인식 주체의 끊이지 않는 생명력과 역동성을 표상.
* 탑 → 너무도 견고하여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대상
꽃 한 송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무너져야 할 허망한 인식의 탑
* 돌 → 속에까지 뚫고 들기 어려운 대상
* 금 → 찬란함, 불변, 영원한 가치를 상징하는 말
* 얼굴을 가리운 신부 → 호기심에 찬 사람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대상
분명히 인식되지 못한 꽃의 실체
철학의 '不可知論"에 바탕
화자의 안타까움을 고조시키는 모습
* 말없음표(……) → 시간의 경과, 깨달음에 이르는 시간의 추이,
깨달음 바로 그 자체이자 인식 주체의
침묵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될 수 있음.
■ 주제 ⇒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인식하기 위한 노력과 인식하지 못한 안타까움
■ 제목에 대해
→ 추구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에 "서시"가 됨
→ 꽃에 대한 인식의 문으로 들어서기 위한 일종의 시적 암호
[시상의 흐름(짜임)]
■ 1∼2연 : 인식의 부재 (존재의 불안정함)
■ 3∼4연 : 인식에 대한 노력 (존재의 본질 탐구에 대한 몸부림)
■ 5연 : 인식 실패의 안타까움 (존재의 미지성)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에서 '너'와 '신부'는 시적 자아가 끊임없이 추구해 마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상징한다. 나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 채, 존재 탐구를 향해 고난의 몸짓을
거듭하지만, 대상은 얼굴을 가리고 좀처럼 나에게 다가올 줄 모르는 안타까움을
읊었다. 그렇게 본다면 사물의 본질은 영원히 우리의 인식 저편에 불가지(不可知)의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식 주체의 노력은 끈질기며 의지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돌에 스미는 금으로 상징되어 있다.
철학적이라 할 명상의 세계를 읊어, 우리가 보통 보아온 시와 사뭇 다른 인상을
받게 되는 작품이다. 이런 시를 존재 탐구의 시라 부르고 있거니와,
시를 정서 표출의 과정으로 보기보다 그것 자체의 존재를 규정하는
진실한 세계로 보는 데서 창조된 작품이다.
[더 읽을 거리] : 김봉군(성심여대 교수, 문학 평론가)
이 시의 화자는 꽃의 존재 탐구에 몰두해 있는데, 꽃은 베일에 싸여 있을 뿐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화자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추상적인 의미를 메시지로 전달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시답게 전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시의 꽃은 추상적인 관념의 꽃입니다. 고향의 둑길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나 들국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관념의 꽃을 이만큼 매력 있고,
그러면서도 격조 높게, 효과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요?
시 전편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경이로운 표현의 질서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이 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짐승'과 '어둠', '가지 끝'과
'이름 없음', '무명의 어둠'과 '한 접시의 불', '울음'과 '금'은 모두 '추상'과
'구상'의 대립 관계를 보여 주면서,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탐구라는 추상적인 인식 작업을
하면서 그것의 정체를 생생한 이미지로 구상화해 보이려는 서정적 자아(화자)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지 않습니까? 이 시가 '존재의 본질 조명'이라는
관념 세계 탐구 작업을 하면서도 읽는 이를 감동시키고 그 작업에 동참시키는
것은 바로 이 구상화된 이미지의 충격 때문입니다.
아무튼 '나'의 인식의 눈 안에서 '너'인 '꽃'은 '신부'에 비유되었습니다.
"꽃 너는 신부다."의 은유 체계로 된 것이 '꽃을 위한 序詩'입니다.
그럼에도 그 신부는 쉬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명시입니다. 추상과 구상, 지성과 감성, 암시하기와 드러내기의
대립과 지양이 빚어내는 정서, 이미지, 의미의 텐션이 절묘합니다.
지상에서 아름다운 것의 精華인 '꽃의 秘義'를 탐구하는 것은 苦行에 찬
求道의 길에 갈음됩니다. 김춘수는 다른 시 '꽃'에서도 소망의 존재론을
이끌어내어 많은 독자를 불러모으듯이, 이 시도 존재의 신비에 이끌리는
지성적인 독자들에게 경이감을 안겨 줍니다.
대화성을 품고 있어, 시란 본디 극적이지만, 이 시야말로 얼마나 극적입니까?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너'의 주변을 맴돌며 보채고 나부끼다 한밤내 울음까지
터뜨리며 그 정체를 확인하려는 '나'의 몸부림, 그것은 얼마나 극적입니까?
좀 다른 얘기지만,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던
靑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아니,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구 부르짖던 未堂의 '꽃밭의 독백'이 생각나는 장면입니다.
[작가소개]
김춘수 : 시인
출생 : 1922. 11. 25. 경상남도 통영
사망 : 2004. 11. 29.
학력 : 니혼대학교 창작과 중퇴
데뷔 : 1946년 시화집 '애가' 등단
수상 : 2004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2000년 제1회 청마문학상
경력 : 1991~1993 KBS 이사
1986 한국시인협회 회장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 태생.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했으나 1942년 12월 퇴학 처분을 당했다.
통영중‧마산고 교사, 마산대‧경북대‧영남대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문예진흥원 고문,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거쳐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었다.
1981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1958),
제7회 아시아자유문학상(1959), 경남문학상, 경북문화상,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柳致環)‧윤이상‧심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운동을 전개했고, 1946년부터 조향(趙鄕)‧김수돈(金洙敦) 등과 동인지
『노만파』를 발간했다. 1948년 대구에서 발행되던 『죽순』 8집에 시 「온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유치환(柳致環)‧송욱(宋稶)‧고석규(高錫珪)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발행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늪』(1950), 『기』(1951), 『인인』(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1969), 『처용』(1974),
『김춘수시선』(1976), 『꽃의 소묘』(1977),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처용 단장』(1991), 『서서 잠드는 숲』(1993),
『들림, 도스토옙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등이 있다.
시론집 『한국현대시형태론』(1958), 『시의 이해』(1972), 『의미와 무의미』(1976),
『시의 표정』(1979) 등과 수상집 『빛 속의 그늘』(1976), 『오지 않는 저녁』(1979),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1980) 등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86년 『김춘수 전집』(1권 시, 2권 시론)을 간행하였다. 김춘수의 시 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째 시기는 「꽃」, 「꽃을 위한 서시」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존재에의 탐구를 수행하던 시기로, 이때에는 존재와 언어의 관계가 강조된다.
둘째 시기는 「부두에서」, 「봄바다」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는데,
이 시기에는 이른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된다. 이는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곧 묘사를 지향하는 세계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전반까지의
시편들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언어유희가 두드러진 「타령조」 같은
시들도 나타난다.
셋째 시기는 「처용단장」 제2부를 중심으로 하여 탈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된다.
넷째 시기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로 종교 혹은 예술에 대한
성찰이 강조되며, 그후 1990년대 초에는 「처용단장」 제3‧4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학력사항
[네이버 지식백과] 김춘수 [金春洙]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