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 4. 2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라우나우암인~1945. 4. 30 독일 베를린.
나치(Nazi) 독일의 정치가.
1920(또는 1921)년부터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인 나치당의 당수를 지냈고,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가 되었으며, 1934년 8월 2일에는 총통 겸 총리로 취임하여 정권을 독점했다.
초기생애와 제1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1837 출생)는 사생아로 태어나 시클그루버라는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다가 1876년 히틀러로 성을 바꾸었다. 알로이스는 초등학교를 나왔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오스트리아 재무부의 세관원이 되었다. 아버지가 퇴직한 후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수도인 린츠 근교로 이사하여 아돌프 히틀러는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히틀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레알슐레(실업계중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불량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1906년 16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동안 린츠에서 방황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의 어머니도 이에 찬성했다. 1903, 1908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죽었지만 히틀러는 부모의 유산과 국가의 고아연금이 있었으므로 생활에 큰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그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빈에 있는 미술학교에 2차례(1907, 1908)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그후 몇 년 간 빈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책과 신문, 소책자를 읽었고, 역사·정치·민족 문제에 대해 공부했다. 엽서나 광고의 그림을 그려서 버는 수입은 불안정했으므로 여러 하숙집을 옮겨다녔다. 그러나 1911년 부모의 유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숙모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게 되자 고아연금은 여동생에게 양보했다. 그는 술·담배·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생활은 검소했다.
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절대주의 국가로서 당시 민족문제로 고심했다. 독일인 대귀족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했고, 관료·군인·대지주·자본가·교원·지식인의 대부분은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세력을 확장한 마자르인·체코슬로바키아인·폴란드인·남슬라브인은 민족자치와 생활향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특히 20세기초에는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인 간에 격렬한 민족투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자·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아리아인의 민족적 우월감을 기초로 한 그의 반유대주의는 중소상공업자와 중소농민으로 구성된 독일인 중산계급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한이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독일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입장에서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이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선전활동과 직장조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독신자 합숙소에서는 하층시민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독일민족지상주의자이며 반가톨릭 교회주의자인 쇠네러(1843~ 1921)파에 동조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이 제국 내에 있는 독일인 거주지역의 독일합병을 지지했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 이미 히틀러는 자신의 성격적 특성, 즉 원만한 대인관계의 실패, 기존 부르주아 사회와 비게르만인(특히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감, 성급하며 위협적인 격정, 가난과 실패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등을 보였다.
1913년 5월 26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 입대하지 않기 위해 독일의 뮌헨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14년 2월에 오스트리아로 소환되어 징집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다. 그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바이에른 보병 제16예비연대에 배치되었고, 플랑드르 지방에서 주로 영국군과 싸웠다. 전령병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4, 1918년에 각각 2급과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는데, 히틀러는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만년에까지 가슴에 달고 다녔다. 1918년 11월 독일이 패배했을 때 히틀러는 대단히 낙담했다. 군대생활은 그에게 전우애를 가르쳤고, '참호의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공동생활을 체험하게 했으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해주었다. 그는 단순하고 행동본위인 군대를 좋아했고, 황량하고 처연한 전선생활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패전에 따른 독일 군대의 해체, 유럽에서 독일 패권의 실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슬라브 민족들의 독립과 강화, 중유럽으로부터 독일의 후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 금지 등은 히틀러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독일의 11월혁명과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대자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정치활동의 개시
1918년 11월 7~8일 독일에서는 혁명이 발발하여 빌헬름 2세가 망명하고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가 새 총리로 취임했으며, 11월 11일에 독일 대표는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1919년 4월 13일부터 5월초까지 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자·병사 위원회가 뮌헨과 그 주변지역을 지배했으나, 이 위원회는 반혁명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바이에른은 반혁명적 왕당파와 반동적 군부가 세력을 장악한 유일한 반동지역이 되었다. 히틀러는 군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위원회에서 일하다가 보수적인 국방사상을 일반사병에게 교육시킬 인물을 양성하는 강습회에 참여했다. 1919년 6~8월 이 강습회에서 히틀러는 보수파의 우수한 학자와 정치가의 강의를 듣고, 토론과 연설 훈련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상관에게 탁월한 연설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정치·경제·역사 등 다방면의 강의를 들음으로써 자신의 지식을 넓힐 수 있었다.
1919년 9월 12일 히틀러는 뮌헨에 있는 독일노동당 집회에 참석했다. 독일노동당은 반유대주의에 기반을 둔 반혁명정당으로서 사회주의적 정책과 애국주의를 결합시킨 중간계급 위주의 정강을 채택하여 대자본과 귀족특권계급에 반대했다. 이 집회의 토론에 참여한 히틀러는 당간부인 드렉슬러의 주목을 끌었고, 며칠 뒤 "귀하의 입당을 허가함. 9월 16일에 열리는 독일노동당 위원회에 출석하기 바람"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히틀러는 심사숙고한 끝에 이 위원회에 출석하여 555라는 당원번호(당원번호는 501번부터 시작되므로 히틀러는 55번째로 입당했음)를 받았고, 제7당위원이 되었다.
당시 거의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독일노동당은 히틀러의 노력으로 공공연한 대중활동을 강화했다. 히틀러는 군대 동료들을 입당시키고, 잇달아 공개연설회를 개최하여 당세확장에 노력했다. 그의 뛰어난 연설 솜씨도 당의 명성에 일조했다. 또한 그는 연설회장에서 입장료를 받고 기부금을 모아 당 재정 확보에 기여했다. 1920년초 히틀러는 우익단체와 당과의 연락을 담당하던 당의장 하러를 축출하고, 드렉슬러를 당의 총서기로 추대했으며, 자신은 당 선전부장이 되었다. 당조직을 개편한 독일노동당의 당세는 1920년 2월 뮌헨의 한 맥주 홀에서 2,000명 이상의 청중을 모으는 대중집회를 개최할 정도로 신장되었다. 이날 집회에서 25개조의 당강령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와 독일의 영토확장이 포함되었다. 이 강령은 대부분 드렉슬러·에카르트·페더 등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이후 나치의 '불변의 강령'으로 존중되었다. 다만 강령 제17조의 '공공의 이익을 위한 토지의 무상몰수'는 1928년 4월 13일 히틀러의 성명에 의해 "무상몰수란 불법으로 획득한 토지와 국민복지에 위배되게 관리되고 있는 토지에 대하여 필요한 경우에 법률에 따라 이를 몰수하는 것이며, 이 무상몰수의 첫 대상은 유대인 토지투기회사이다"라고 수정되었다. 이후 당명도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National 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 일명 나치당)으로 변경되었다. 독일노동당의 집회가 대규모화함에 따라 당에 대한 반대도 격렬해졌으므로 히틀러는 '집회장소방위반'(나중에 이것은 나치 돌격대로 강화되었음)을 설치하여 회장에서 방해행위를 하는 반대파를 폭력으로 축출했다. 히틀러는 초기의 집회에서 항상 유대인 배척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패전 후 독일공화국의 나약함과 내부분열 및 부패를 공격했다. 또한 독일의 강력한 국민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베르사유 조약의 불합리성과 잔혹성을 강조했다.
당권의 장악
당집회에서 히틀러는 기본주제별로 문제점을 정리하여 청중에게 호소함으로써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고 청중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히틀러가 연단 위에서 증오와 복수만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중이 지닌 고귀한 감정에 호소하여 전독일인의 결집, 국내외 압력으로부터 독일 국민의 해방,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일 및 조화, 중산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생활안정 및 향상, 용병제도의 폐지와 국민군의 창설, 독일 국민의 강인함과 능력에 대한 신뢰, 자유라는 대이상에 대한 빛나는 희망 등을 역설했다. 1920년 3월 군에서 제대한 히틀러는 나치 운동에 전념했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갈고리십자가 모양의 당기를 만들었다. 갈고리십자가의 적색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백색은 민족주의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리아인의 승리를 의미했다.
히틀러가 당의 독재자로 부상한 것은 1921년 7월 29일 나치당의 임시당대회에서였다. 그는 드렉슬러 등 옛 당간부들의 운동방침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여 드렉슬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당의 총서기가 됨으로써 당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당위원회를 무력화하고 당내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당시 히틀러는 정계와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류하면서 자금을 조달했고 학생과 군부관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드렉슬러파가 합법주의와 사회주의를 제창한 데 반해 히틀러파는 폭력주의와 군부·관료에의 접근을 주장했다. 또한 이때부터 히틀러의 신격화가 시작되어 그는 동지가 아니라 '우리들의 지도자'(Führer : 나중의 총통)로 불리게 되었다 (→ 색인 : 퓌러). 또한 당기관지 〈민족의 관찰자 Volkischer Beobachter〉를 통해 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 그의 주변에는 나중의 유명한 나치 지도자가 된 A. 로젠베르크, R. 헤스, H. 괴링, J. 슈트라이허 등이 집결했다. 1921년 이후 나치당의 당세는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특히 바이에른의 군부와 경찰, 그리고 왕당파가 나치를 보호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나치는 바이에른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바이에른 동맹을 폭력으로 습격하여 집회를 해산시켰다. 이에 바이에른 정부는 나치당을 탄압했고 히틀러는 1922년 6월 24일부터 7월 27일까지 수감되었다.
1923년 1월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에서는 이에 대한 수동적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심각한 물가상승현상이 초래되었다.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독일인이 소극적 저항에 동조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투쟁과 베를린의 민주공화정부에 대한 투쟁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나치당 내에도 반프랑스 투쟁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히틀러도 이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민주공화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공격했다. 1923년 9월 26일 독일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수동적 저항을 중지하고 독일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결정에 반대한 극우파는 공화정의 타도를 외쳤다. 바이에른에 있는 극우운동의 공동단체인 '독일투쟁동맹'을 이끌고 있던 히틀러는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의한 베를린으로의 진격, 전독일 우익독재정부의 수립을 제창했으나, 그는 나치당만의 단독정권을 세우거나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반역하여 봉기를 일으킬 의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당이 바이에른 정부에 이용당하고 있으며, 나치당을 전독일 우익독재정권의 수뇌부에서 배제할 의도임을 깨닫자, 1923년 11월 8일 히틀러의 투쟁동맹은 뮌헨에 있는 한 맥주 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 색인 : 비어 홀 폭동). 이 봉기의 목적은 바이에른 정부 수뇌를 포섭하여 지연되고 있던 전독일 우익독재정권 수립에 나치당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바이에른 정부는 처음에는 히틀러에게 협력을 약속했으나 군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봉기를 진압하는 쪽으로 돌아서 이 비어 홀 폭동은 실패로 끝났다.
봉기의 주동자였던 히틀러는 같은 해 11월 11일 은신처에서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히틀러는 모든 책임을 혼자 떠맡고 봉기의 의도를 뚜렷이 표명하는 등 결연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대중적 인기가 높아졌고, 봉기의 유일한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또한 그는 이 봉기로부터 운동의 목적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9개월 동안 란츠베르크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생활은 자유로워서 방문객들과 담화도 하고, 동지들과 식사도 했으며, 마음대로 독서할 수도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반(半)자서전 겸 나치 사상의 해설서인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모리츠와 헤스가 히틀러의 구술을 필기했고, 이것을 매주 토요일 저녁 감옥 내의 나치 동료들이 개최하는 공동집회에서 발표했다. 히틀러가 감옥에서 석방될 무렵 〈나의 투쟁〉의 상권은 거의 완성되어 1925년에 출판되었고, 하권은 막스 아만의 도움을 받아 1927년에 발표되었다. 1930년에는 합본판이 나왔고 1943년까지 총 984만 부가 판매되었다.
히틀러의 사상은 대부분 이전의 저작이나 그가 빈에서 생활할 때 배운 우파의 급진주의에서 채용한 것들로서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인종이나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은 불변적인 자연의 질서이며 아리아인은 인류에서 유일한 창조적 인종이다. 인류의 자연적 단위는 민족이며, 독일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다. 또한 국가는 민족에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러한 국가의 사명을 저버렸다. 모든 도덕성과 진리의 판단기준은 민족의 보호와 그 이익에 있다. 이러한 기준에 근거할 때 민주주의적 정부는 첫째, 있지도 않은 민족간의 평등을 상정하기 때문에, 둘째, 민족의 이익을 투표나 토론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민족의 통일성은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은 지도자에게서 그 화신을 찾을 수 있다. 지도자 아래에서 당(히틀러는 민주적 정당들과 나치당을 구분하기 위해 '운동'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음)은 민족의 가장 위대한 요소를 찾아내야 하며,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 즉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독일민족지상주의, 사회적 다원주의와 민족생존권의 확보, 민족공동체 사상, 의회정치와 계급투쟁에 대한 반대 등을 피력했다. 히틀러에 의하면 나치즘의 주된 적은 이미 붕괴 직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여기에는 민주사회주의도 포함됨)였다. 또한 그에게 유대인은 모든 악의 구현체였다.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치당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그는 나치당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1923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속출했다. 독일의 경제는 통화개혁과 도스 안으로 안정을 되찾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평판도 좋아졌다. 1925년 3월 9일 바이에른에서 시작된 히틀러에 대한 연설금지조치는 프로이센·작센·바덴 등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나치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1926년 2월 당간부회의에서 히틀러는 북부 독일에서 경쟁조직을 이끌고 있던 G. 슈트라서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1926년 1월 히틀러는 친위대(Schutzstaffel)를 설립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돌격대의 재건을 완료했다. 이무렵 도시와 농촌에서 중산계급의 지지를 확보한 나치당은 의회를 통한 합법적인 활동에 의해 대중정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으면 민주공화제를 전복할 생각이었다. 한편 그는 이복누이의 딸인 겔리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1931년 9월 18일 그녀가 자살할 때까지 항상 행동을 같이했다. 겔리는 히틀러가 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1929년 7월에 시작되는 배상에 관한 영 안(Young Plan)에 반대하여 히틀러는 국가주의자인 알브레히트 후겐베르크와 협력했다. 후겐베르크의 국가당 조직과 그 기관지의 도움을 받은 히틀러는 최초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천부적인 선동가의 기질을 발휘하여 정치자금을 통제하고 있는 중공업계의 대자본가들에게 접근했으며, 그들을 이용하여 정부에 대항하는 강력한 우파노동조직을 설립하고자 했다. 또한 이들에게서 나온 정치자금으로 히틀러는 나치당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중하층과 실업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중산계층(특히 대정당이나 압력단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는 계층)·청년·부인들이 무리를 지어 나치당에 입당했는데 이것은 관료와 군부, 그리고 자본가에게 접근하려던 히틀러의 방침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 5월 사회주의적 요구를 정면에 내세우며 히틀러에 대항하던 슈트라서는 당에서 추방되었다.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공격과 대중선동으로 1930년 9월 14일의 총선에서 600만 표 이상을 득표하면서 독일의 제2당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선거직전 라이프치히 최고법정에서는 군대에서 나치 세포를 조직하려다가 체포된 장교들의 군사재판이 있었다. 9월 13일 법정에 출두한 히틀러는 "나치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을 계획이므로 폭력이 필요없다. 나치는 군부를 붕괴시킨다든가, 군부를 대신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치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잡는다면 합법적 수단을 통하여 당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개조할 것이며, 11월혁명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증언하여 군 간부와 독일 지배세력의 호의를 얻었다. 곧이어 독일 금융자본가의 중심 인물 샤흐트도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
1930년 가을 이후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와 연설력에 힘입어 나치당의 당세는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1932년 1월 27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히틀러와 대자본가들의 회담은 나치와 독일 지배세력의 결합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히틀러는 1932년 3월 13일의 대통령선거에서 31.1%, 4월 11일의 결선투표에서는 36.8%의 지지를 얻었으나, 힌덴부르크에게 패배했다. 같은 해 7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를 했고 히틀러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의해 파펜의 연립내각에서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했다. 1932년 11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3.1%를 득표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독일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했고, 1933년 1월 그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1933년 2월 그는 육·해군 수뇌부와 회담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인했고, 이후 자본가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또한 같은 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알려짐)을 이용하여 공산당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들에게 대대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1933년 3월 5일 이러한 상황 속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득표했다. 같은 해 7월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절대적인 독재권을 확립시켜나갔다. 먼저 나치 돌격대 대장으로서 군의 불신임을 받고 있던 에른스트 룀을 체포하여 1934년 6월 29일 재판 없이 처형했다. 또한 슈트라서·슐라이허 등도 함께 숙청했다. 나치 돌격대의 붕괴에 만족한 군부도 히틀러를 지지했다. 이때부터 독일 제3제국은 지배세력과 혼연일체가 되어 군비의 급격한 대확장과 군수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독일의 국력은 순식간에 유럽 제일이 되었다. 1934년 8월 2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통 겸 총서기로 취임했다. 히틀러의 지배 아래 독일은 준전시경제체제를 수립하여 대자본가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 자급자족정책의 확립, 실업자의 감소, 사회보장정책의 실시, 특히 신분제적 특권의 소멸과 각종 구습 및 제도의 폐지, 그리고 중하계급 출신 청년들의 지배기구로의 충원 등의 혁신에 성공함으로써 히틀러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올라갔다. 히틀러가 나타나면 독일 국민은 열광하며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독재정치가 진행되어 국민생활은 획일화되었고, 언론·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사라졌으며, 히틀러의 반대파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살해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눈부신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한 독일은 1934년 1월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1935년 1월에는 자르 지방의 국민투표에서 대승하여 자르의 영유권을 회복했다. 같은 해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제한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으며, 6월에는 영국-독일 해군협정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을 증강시켰다. 1936년 3월에는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지역의 재무장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 반히틀러 운동은 지지자를 잃었다.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관한 뮌헨 협정으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고, 그는 '불세출의 영웅', '일찍이 없었던 위인'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히틀러의 외교적 성공의 배후에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영국·프랑스 등의 지지 또는 묵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1937년 11월 5일 히틀러는 군부와 정부의 수뇌들을 모아 은밀히 전쟁의지를 표명했다. 1938년 2월 4일 이들 가운데 전쟁개시를 주저하는 자를 파면한 히틀러는 자신이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1939년 9월 그는 불시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부의 작전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1940년 5월 대프랑스전에서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1941년 히틀러가 보수파와 군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소련과의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히틀러는 특히 1942년말 독일 제6군단이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에서 포위당했을 때 독일군의 후퇴를 금지시킴으로써 22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게 했다.
히틀러의 점령정책은 매우 가혹했으며, 포로와 점령지 주민, 그리고 유대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거나 강제수용소로 이송·살해했다 (→ 색인 : 전쟁범죄). 또한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물자를 무자비하게 탈취했고, 슬라브 민족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반(反)나치 저항운동이 전유럽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 히틀러의 이민족 억압 및 착취 정책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일의 주요지배계급은 전쟁 말기까지 히틀러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더욱이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의 암살을 기도한 반란조직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히틀러보다 더 반동적이어서 구체제로의 복귀를 희망했다 (→ 색인 : 7월암살음모사건). 즉 독일에서 히틀러 반대세력은 나치가 멸망하는 날까지 극히 적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동지로서 존경했으며,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내부의 친독일파였으므로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외교면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은 스페인 내란 이후 상호협력했으나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실망한 히틀러는 중요한 정책을 무솔리니와 의논하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국가적 이해는 존중했지만 이탈리아와의 동맹관계를 부담스럽게 생각했고, 독일의 패배 또한 대부분 무솔리니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모든 타협을 배척하고 최후까지 전쟁을 수행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에서 음독자살했다(권총자살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최근의 소련 자료에 의해 음독자살로 판명되었음). 그의 시체는 소련군에게 발견되었으나 독일측에 반환되지 않았다.
인물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개인생활은 검소했다.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았지만 남성으로서는 정상적인 체질의 소유자였다. 조카인 겔리가 자살한 후에는 에바 브라운을 사랑하여 그녀를 개인비서로 채용했다. 스포츠와 유행과 가정밖에는 관심이 없는 평범한 부인이었던 그녀는 히틀러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찾아보기도 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1945년 4월 29일 히틀러는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다음날 이들 부부는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의 일상생활은 어딘가 색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매일 한낮이 될 때까지 침대에 누운 채 조간신문을 훑어본 후 직무를 시작했으며, 이튿날 동틀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 예술에 애착을 느낀 그는 특히 제3제국의 기념비로 남을 만한 공공건축물의 건립을 소원했다. 사치나 여성편력 또는 미식가로서의 기질은 전혀 없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부근에 있던 산장에 가서 자신의 사진사·의사·운전수·비서에 둘러싸여 마음 편히 담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이때의 화제는 대개 개 사육법, 최신유행, 예술계의 이야기, 개인생활의 사소한 사건 등 다양했는데, 오페라의 노래를 듣고 여가수의 이름을 알아맞추기 게임을 즐겨 했다. 이 산장에서 각종 정치적 구상을 다듬는 경우도 있었다. 히틀러는 기억력과 직관력이 뛰어났고,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여 능력을 발휘시킬 줄 알았다. 그러나 특정 인물의 지나친 권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2명 이상의 인물에게 같은 일을 배당하여 충성 경쟁을 유발시켰다. 그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독일제국주의의 극단적인 반영이었고, 그 자신은 세간의 평처럼 미친 사람도 성격이상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동방대제국의 건설, 게르만족의 동방에로의 대규모 진출, 열등한 민족의 절멸(絶滅) 및 추방 등 시류에 역행하는 세계관을 고집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마침내 자신도 파멸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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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유태인을 싫어하는 이유......라는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