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명령에 대처하는 5가지 다른 방법.
윤석열 내란 사건의 결정적 순간… “출동을 거부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도.
첫째, 홍장원은 ‘미친 놈’이라 생각하고 거부했다.
- 12월3일 오후 8시22분. 윤석열이 홍장원(국가정보원 1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한두 시간 후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전화기를 잘 들고 대기하라.”
- 전화는 계엄 선포 뒤 10시53분에 다시 걸려왔다.
- “이번 기회에 다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해. 국정원에도 대공수사권을 줄 테니 우선 방첩사를 도와 지원해. 자금이면 자금, 인력이면 인력 무조건 도와.”
- 윤석열이 전화를 끊고 여인영(방첩사령관)이 전화해서 체포 명단을 불러줬다.
-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김민석, 박찬대, 정청래, 조국, 김어준, 김명수(전 대법원장), 김민웅(성공회대 교수), 권순일(전 선관위원장) 등.
- 홍장원은 “‘미친 놈이나’, 생각하고 그 다음부터는 메모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인인이 “방첩사에 있는 구금시설에 구금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했고 홍장원은 “알았다”고 한 뒤 뭉갰다.
- 이틀 뒤인 5일 조태용(국가정보원 원장)이 “대통령이 즉시 경질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사직서를 제출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둘째, 곽종근은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 곽종근(육군 특수전사령관)도 비슷한 시기에 김용현(당시 국방부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 김병주(민주당 의원)와 면담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 “본회의장 안에 있는 의원들을 밖으로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내가 판단했을 때는 명백히 위법사항이고 임무 수행하는 요원들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므로 항명이 될지 알았지만 그 임무를 시키지 않았다.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 곽종근은 사람이 다치는 상황이 절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실탄도 지급하지 않았다. “우발상황 대비용으로 (탄약통을) 가져간 것이고 특정 지역에 뒀고 절대 휴대하지 않았다. 저격수도 절대 없었다.”
- 윤석열이 어디쯤이냐고 확인하는 전화를 걸어서 받았다고 한다. 시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707부대가 국회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 곽종근은 출동 명령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돌이켜 보면 당시 지시를 거부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판단은 군인 입장에서 수명(명령을 따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과 같은 지시가 있더라도 그런 지시는 거부하겠다. 국민께 죄송하다. 작전 투입됐던 특전대원들에게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곽종근과 이상현,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 곽종근의 말은 일부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일단 곽종근과 이상현(특전사 1공수여단장)의 말이 다르다.
- 이상현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곽종근이 실탄을 가져라라고 지시했는데 (대대장들에게) 필요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 김용현이 곽종근에게 지시하고 곽종근이 이상현에게 지기했다. 이상현은 “국회의원들을 끄집어 내고, 안 되면 전기라도 끊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 이상현은 “곽종근이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는데 우리가 정치적 중립을 잃을 것 같아서 내가 부대를 뒤로 물리고 국회로 들어오고 있던 다른 병력은 다시 차량에 탑승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 “결과적으로 우리가 정치의 도구로 이용된 것 같아서 참담한 마음이 든다. 지휘관, 장군급 지휘관들에게 모든 책임을 묻고 현장의 장병들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 실제로 1공수여단은 국회에 진입하지 않고 외곽 경계만 맡았다.
- 곽종근 관할인 707대대는 헬기를 타고 국회에 진입했고 총기를 소지한 사실이 확인됐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실탄이 아닌 훈련용 비살상탄(UTM)을 장착했다고 한다.
- 박선원(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공수 9여단은 출동했지만 인근 버스에서 대기하고 있다 철수했다.
셋째, 이진우는 “총기를 들지 말라”고 지시했다.
- 이진우(수도방위사령관)은 김용현의 지시를 받고 35특수임무대대 대원들을 국회로 보냈다.
- 이진우는 “장갑차는 출동하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군인들에게는 “총기는 차에 두고 빈 몸으로 내려 임무를 수행하라고 했다”고 한다. 박안수에게 보고했더니 “오케이 굿”이라고 했다고 한다.
- 이진우의 말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일부 수방사 대원들이 총기를 비롯해 완전 무장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 실탄을 장착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상당수 군인들이 총기를 들고 있었다.
- 김병주와 인터뷰에서 “불법적이고 부적절한 지시는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이미 국회에 진입한 것부터 내란 동조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 이진우도 0시쯤 “상황이 어떻냐”는 윤석열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넷째, 조지호는 “포고령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 조지호(경찰청장)는 적극적인 내란 가담자로 분류할 수 있다.
- 국회 출입을 통제하라는 명령을 받고 처음에는 “근거가 없어서 못한다”고 버텼다. 그러나 “법적 권한이 없다”는 말을 듣고 국회 관계자들만 열어줬고 포고령이 발표된 뒤에는 다시 출입을 통제했다.
- “포고령이 발령되면 모든 행정기관은 이를 따를 의무가 생긴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랐다는 이야기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헌법학자처럼 완벽하게 이론을 꿰뚫고 법 집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 조지호는 오후 6시20분쯤 대통령실에서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사무실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밤 11시30분쯤 박완수의 전화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미리 국회 주변에 경찰을 배치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 “저희들이 했던 행위가 내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내란죄로 처벌 받을 가능성이 크다.
다섯째, 박안수는 “몰랐다”고 발뺌했다.
- 박완수는 명색이 계엄사령관인데도 아는 게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석열(대통령)에게 직접 받은 명령도 없다”고 했다. 실탄 지급 여부도 몰랐고 포고령 작성자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 “계엄군이 누구 명령을 받고 국회로 들어갔느냐”는 질문에 “김용현이 한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 포고령을 전달 받은 뒤에는 “어떡하냐, 어떡하냐’ 하면서 시간이 좀 지나갔다”고 말했다. “동의할 수 없는 수준이라 법무 검토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면서도 그 포고군에 서명을 했다.
- “아무것도 몰랐다”는 박안수의 말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조지호에게 국회 출입을 통제하라고 지시했한 사람이 박안수다.
- “대통령 담화를 보고 계엄 사실을 알았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 박안수 역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지만 내란죄 핵심 공범으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크다.
5가지 다른 방법.
- 홍장원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 곽종근과 이상현, 이진우는 명령에 따라 국회까지 출동했지만 소극적으로 따랐다. 시민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고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 조지호는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명령에 복종했다.
- 박안수는 책임이 가장 무겁다. 국방부 장관이 계엄사령관을 패싱하는데도 몰랐거나 묵인했고 결과적으로 국회에 계엄군 투입을 방조했다. 김용현의 지시를 받아 경찰에 국회 진입을 통제한 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내란죄다.
“부당한 명령은 불복종해야 한다.”
- 5.18 때 발포 명령을 거부했던 안병하(전 치안감)가 했던 말이다.
- 안병하기념사업회가 성명을 냈다. “민주경찰의 역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국헌문란 내란 공범인 조지호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여러분의 자랑스러운 선배 안 치안감의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을 계승해 달라.”
-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현장의 군인들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 “(1979년의 상황과) 2024년 겨울의 상황이 다른 점은 모든 상황이 생중계돼서 모든 사람이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맨몸으로 장갑차 앞에서 멈추려고 애를 쓰셨던 분들도 봤고,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면서 제지하려는 모습도 봤다. 총을 들고 다가오는 군인들 앞에서 버텨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모습도 봤다. 마지막에 군인들이 물러갈 땐 마치 아들들에게 하듯 ‘잘 가라’고 소리치는 모습도 봤다. 그분들의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뭔가 판단하려고 하고 내적 충돌을 느끼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비상계엄) 명령을 내린 사람들 입장에서는 소극적인 것이었겠지만,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보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던 적극적인 행위였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