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es Scripture Support a Pentecost Rapture?
By T.W. Tramm
WHEN is the Rapture
going to happen?
언제 휴거가 일어날
것인가?
In the wake of the
noneventful fall feasts, it’s the question on every watchman’s mind.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가을절기
이후(테트라드직후를 말함) , 그것은 모든
주님을 오심을 기대하는 자들의
질문일 것이다.
Some, wary of “date
setting,” have stopped focusing on feasts.
날짜를 확정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이 절기에 집중하는것을 막아왔다.
Others are looking
at next fall and the close of the jubilee year.
다른이들은 다음 가을절기를
기대하거나(나팔절?) 또는 희년의 마지막을 기대할
것이다.
Still others,
however, are eyeing what they see as a more immediate possibility:
Pentecost.
그러나 다른이들은 여전히
더 즉각적인 가능성 바로 오순절을 주목하고 있다.
In Leviticus, God
instructs Israel to count off forty-nine days from the day the first grain is
harvested and then observe the Feast of Weeks, or Pentecost.1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첫번째 곡식이 수확된 이후에 49일을 세어
오순절절기를 관찰하라
명하셨다.
One of three designated “harvest” feasts, Pentecost
was a time when every Israelite male was required to appear before the Lord in
Jerusalem.
예정된 3개의 절기중 하나인
오순절은 모든 이스라엘 남성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 했다.
It was a time to
rejoice and give thanks to God for the blessings He had given.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며 기뻐해야 하는
시기였다.
2
After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when the pilgrimage and attendant rituals could no
longer be performed, the focus of Pentecost shifted from the “harvest” to a
defining event in Jewish history that occurred on this day: the giving of the
Commandments at Sinai.
그러나 성전의 파괴 이후
순례자들과 참석자들의 제사가 더이상 행해지기 어려워지면서 오순절의 주목점은 "추수"라는 부분에서 바로 이날에
유대인들에게 발생된 이벤트로 이동하게 되었다. : 바로 시나이 산에서의 언약(십계)의
확립이다.
Christians,
likewise, associate Pentecost with a pivotal historical event: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in 33 AD.
크리스쳔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오순절과 관련된 이벤트로 관심이 이동하게 되었다.
:바로 성령강림 사건이다.
It was on Pentecost
morning, fifty days after Jesus’ resurrection, that God sent the Spirit to the
disciples gathered in Jerusalem.
그것은 바로 오순절 아침에
예수님 부활 이후 50일 지난후에 성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셨다. ^^ (감사합니다.
)
The popular
teaching is that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prophetically fulfilled
Pentecost.
오순절이 성령 강림은
오순절을 예언적으로 성취시켰다는 것이 가장 유명한
해석이다.
Thus, the Feast of
Trumpets, next in line on God’s calendar, becomes the obvious choice for the
Rapture.
그러므로 나팔절이 하나님의
캘린더에서 다음에 위치함으로 다음으로 성취될(휴거)
절기이게 되는
것이다.
Not all agree on
this point, however.
그러나 모두가 이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Citing the harvest
theme, some suggest that the outpouring of the Spirit represents merely a
partial, or preliminary, fulfillment of Pentecost.
추수에 대한 부분을 기억을 떠올리면
성령님의 부어짐은 단순히 부분적이며 예비적인
오순절의 성취를 제안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3 The ultimate
fulfillment awaits the completion of the redemption process at the
end-of-the-age “harvest” we call the Rapture.
오순절의 궁극적인 성취는
추수의 절기를 완벽히 이행하는 소위 우리가 휴거라 부르는 마지막 시대의 구원의 과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And so, from this
perspective, Pentecost, not the Feast of Trumpets, is the Rapture feast.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나팔절이
아니라 오순절이 휴거의 절기라 보는 것이다.
The
Pentecost-Rapture Scenario:
The Church is “betrothed” to the Lord on Pentecost,
marking the commencement of the Church Age.
교회는 예수님과 오순절에
"약혼하고" 교회시대를 시작함
Roughly 2,000
years later, the Church is wed to the Lord, also on Pentecost, marking the
conclusion of the Church Age.
약 2000년 이후에 교회는 주님과
결혼하고 (또한 오순절에) , 교회시대를 마무리함
This parallels the
biblical wedding tradition that consists of two stages:
이것은 성경적인 결혼이 두단계로
구성되는 것과 평행하다
The first stage is
the betrothal, or erusin,
첫단계는 약혼의
단계이다.
at which time the
bride and groom become legally married via a written contract (shitre erusin)
but do not dwell together.
그때에 신랑과 신부는 shitre
erusin(결혼 언약)을 통해서 법적으로 정혼한 사이가 됩니다. 그러나 같이 거하지는
않습니다.
The second stage is
the fullness or consummation (nisu’in), when the nuptials are finalized and the
bride and groom dwell together.
두번째 단계는 충만함과
융합의 단계입니다. 결혼식이 마무리되게 되면 신랑과 신부는
함께 거합니다.
A Pentecost Rapture
is not a new idea.
오순절 휴거는 새로 도입된
해석이 아닙니다.
Many early
Christians believed, based on the fact that Jesus’ ascension occurred around
this time, that He might return in the same season.
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승천하심이 오순절 쯔음 인것에 기초로해서
동일한 시즌에 돌아오신다고
믿었습니다.
Plenty of modern
scholars agree.
많은 현대 신학자들도
동의합니다.
Chuck Missler and
Gary Stearman are among those who teach that Pentecost is a logical, if not
likely, time for the Rapture.
척 미슬러와 게리 스티어맨이 오순절이
논리적인 휴거의 절기라고 가르칩니다.
4
In the following
pages, I will “second that motion” by sharing a series of observations from my
own research.
다음의 페이지에서 나는 나의
조사를 통한 일련의 리서치를 통해서
오순절이 휴거의 절기라는 점에
대해서 동의할 예정이다.
Some of these
observations are common knowledge, and others are not.
이것들중 어떤 조사는 일반적인
지식이고 어떤것들은 아니다.
Some are simple,
and others multifaceted.
어떤것들은 단순하고 어떤것들은
매우 복잡하다.
All, however, are
worth considering, especially in view of the season.
그러나 그 모든 탐구가 가치 있고
특별히 계절에 대한 관점은 더더욱 그렇다.
Am I suggesting
that the Rapture will happen at Pentecost?
내가 지금 휴거가 오순절에
발생할거라고 제안하는가?
I am not.
그렇지
않다.
I am only
suggesting that it could.
나는 오로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The Rapture could
also happen, simply, around this time, or in the fall—or at a time few are
expecting.
휴거는 언제든지 또는
가을절기 또는 소수가 기대하고 있는 언제라도 일어날수 있다.
The point is that
there are multiple plausible rapture/feast scenarios.
요점은 수많은 휴거/절기
시나리오가 있다는 것이다.
So while it’s
interesting to consider a particular one, as we will do in this study, it’s best
to stay focused primarily on the “big picture.”
그래서 특정한 한 관점에
대해서 주목해 보기 이전에 "큰 그림"을 주목해서 보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The big picture is
that we are in a jubilee year.
큰 그림은 우리가 희년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The Jubilee— and
this is key—is designated in Scripture a YEAR of redemption (Lev. 25:10; Isa.
63:4).
희년 은 성경이 구원의
해로 명시하고 있다. (레위기 25장 10절 이사야 63장 4절)
Notice God did not
sanctify a single day but the entire year as a time of redemption and
release.
하나님께서 하루가 아닌 일년
전체를 구원과 속박에서 풀어짐의 해로 신성하게 하신
것을
주목해라
This warrants
setting aside any preconceptions about the feasts and viewing every day as a
potential day of redemption.
이것은 그 어떤 날도
구원의 날이 될수 있다는 사실을 보장해준다.
We are that close!
우리는 거의
다왔다.
Having stated our
purpose (information sharing among watchmen) and issued the requisite disclaimer
vis-à-vis date-setting, let’s get to the main part of the
study.
정보의 공유라는 와치맨들
사이에서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또한 날짜를 정한다는
것에서 권리를 포기하기 위해서
( 돌려서 표현한다는 뜻) 이제 이 연구의 주된
부분으로
넘어가자
PENTECOST IS A
“HARVEST” FEAST
오순절은 추수의
절기이다.
Most of us
associate “harvest” with the fall season, but the Bible actually designates
three annual harvest feasts:1
우리들 중 대부분은 추수를
가을절기와 관련지으려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실제로
매년 세번의 추수의 절기를
가진다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Firstfruits).2 초실절
The Feast of
Pentecost. 오순절
The Feast of
Tabernacles. 장막절
The three yearly
harvest feasts were particularly important in God’s eyes.
세번의 추수의 절기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In Exodus, He
designates each as a time when every Israelite male was to make the pilgrimage
to Jerusalem to present an offering in accordance with the blessing the Lord had
given (Ex. 23:17; Deut. 16: 11-12; 16, 17).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매
세번의 절기마다 이스라엘 남성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물을 드려야만
했다
And so three times a year—once in the spring, once in
early summer, and once in the fall—there was a harvest and requisite gathering
before God.
일년에 한번은 봄에 그리고 이른
여름에 한번은 가을에 추수가 있었고 하나님 앞에
꼭 모여야만
했다.
In the Bible, a
harvest and a gathering before the Lord denotes “resurrection,” or Rapture (Rev.
7:9-14; 14:15; 1 Cor. 15:20; 2 Thess. 2:1).
성경에서 추수와 주님앞에
모이는 것은 부활 또는 휴거를 의미한다.
This is evidenced
by the fact that harvest feasts tend to be fulfilled by
resurrections:
이것은 추수의 절기가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는 경향에 대한 증거이다.
The harvest at
Unleavened Bread (Firstfruits) was fulfilled by Jesus’ resurrection in 33AD.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되었다.
The harvest at
Tabernacles will, many believe, be fulfilled by a resurrection, after the
Tribulation (Rev. 20:4-6).
장막절은 많은 이들이 믿는대로
대환란 이후에 성취될 것이다.
The only harvest
not commonly associated with a resurrection is the Pentecost
harvest.
부활과 공통적으로 관련되지
못한 추수의 절기가 바로 오순절이다.
Why is this? 왜
그런가?
One reason may be
that the original, biblical theme of Pentecost, the wheat harvest, has been
overshadowed by another theme:
원래의 오순절(밀 수확)절기가 다른
테마에 의해서 가리워졌기 때문이 한가지 이유이다.
the giving of the
Commandments at Sinai.
시나이에서의 언약의
주어짐
The shift in
emphasis from harvest to Sinai can be traced to a decision made by the
Sanhedrin.
추수에서 강조점이 이동된것은
아마도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결정으로 옮겨진것으로
추정된다. ( 추수절기 에서
시나이 에서의 언약(십계) )
After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and Jewish dispersion, the ritual of bringing the
loaves to the Temple could no longer be performed.
성전의 파괴 와 유대인들의
분산 이후에 성전으로 빵을 가져오던 것이 더이상
행해지지
못했다.
To keep the
festival alive, the Court convened in 140 AD and determined to shift the focus
from “harvest” to a defining event that occurred on this day in Jewish history:
the giving of the Commandments at Mount Sinai.
축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산헤드린
의회는 기원후 140년에 모집되었고 집중되는
부분을 이날에 일어난 유대 역사에
기초로에서 이동시켰다. 그것은 바로
시나이 산에서의 언약의
수여이다.
The Sinai
association quickly caught on, making the giving of the Law the dominant theme
of Pentecost.3
시나이 관련 포커스는 곧
정착되었고 오순절이 율법의 정립이라는 테마가 정립되었다
(역자주 오순절에 율법이
선포된것을 평가 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추수에 포커스 되었던 절기가
다른것으로 관점이 이동한 것을 설명하는 것 입니다. )
While the giving of
the Law is an important prophetic type in its own right, a valid question is
this:
율법의 주어짐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예언적인 형태이지만 타당한 질문이 가능하다.
Is it possible
that as the original, God-ordained theme of Pentecost has been diminished, our
understanding of its ultimate fulfillment has been diminished as well?
원래의 하나님꼐서 의도하신
오순절의 원래 의미가 사라졌는가? 또한 우리의
오순절의 성취에 대한 관점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사라졌는가?
Pentecost is, after
all, a “harvest” feast. In the Bible, a harvest and a gathering before the Lord
denote “resurrection.”4
오순절은 추수의 절기이다.
성경에서는 추수와 주님앞에 모이는 것은 부활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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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VE OFFERING
흔드는
제사
Two of the Lord’s
feast-days center on a mysterious ritual called a “wave offering”:
여호와의 절기 (초실절
오순절) 의 중심에는 미스테리한 의식이 있다. (흔드는 제사)
The first wave
offering occurred on the Feast of Firstfruits.
첫번째 흔드는 제사는 초실절에
드려진다.
On this day, a
sheaf of the first-ripened grain was harvested and brought to the
Temple.
바로 이날에 첫번째 여문 곡식
한단이 수확되어지고 성전으로 가져온다.
The priest would
lift up the sheaf and wave it before the Lord (Lev. 23:10, 11).
제사장들은 이 단을
들어올리고 주님앞에서 흔든다.
The second wave
offering occurred on Pentecost.
두번째 흔드는 제사는 오순절에
드려진다.
On this day, two
loaves of leavened bread were baked from the first-harvested wheat and brought
to the Temple.
이날에 두개의 발효된
빵(첫번째 수확된 밀로 만들어진)이 성전으로 오게된다.
The priest would
lift up the loaves and wave them before the Lord1(Lev. 23:17,
20).
제사장은 그 빵들을
들어올리고 주님앞에서 그것을 흔든다.
What do the
respective wave offerings represent?
각각의 흔드는 제사는 무엇을
대표하는가?
The Firstfruits
wave offering is understood to be a picture of Jesus’
resurrection.
처음익은 열매의 흔드는 제사는
예수님의 부활의 예언적 계시로 이해되어진다.
2 It was on the Day
of Firstfruits, roughly 2,000 years ago, that the Lord was raised from the dead
and ascended to heaven to stand before the Father.
약 2000년전의 초실절에
예수님께서는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천국으로 올라가 성부 하나님 앞에 계셨다.
The sheaf
represents Jesus, as a sheaf can typify a person or persons in Scripture (Gen.
37:5-11).
단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성경에서는
단은 사람을 주로 나타낸다.
The Pentecost wave
offering is understood to be a picture of the “birth of the
Church.”
오순절의 흔드는 제사는 교회의
탄생의 밑그림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It was on this
day, roughly 2,000 years ago, that God sent the Holy Spirit to indwell the first
believers.
약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처음 믿은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셨다.
The two leavened
loaves represent the two groups (Jews and Gentiles) out of which the Church is
formed.
두개의 누룩있는 빵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하는데 유대인과 이방인을 통해서
교회가
형성되었다.
With the above
explanations in view, a valid question is: knowing that God is consistent, how
does it make sense that the wave offering at Firstfruits symbolizes a
“resurrection,” yet the wave offering seven weeks later, at Pentecost,
symbolizes a “birth,” as in the birth of the Church?
위에서 설명되어진 관점에서,
타당한 질문이 야기될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항상
일관적이신 분인대 어떻게
초실절의 흔드는 제사가 ""부활""을 상징하나 그로부터 7주 이후의 오순절은 교회의 "출생" 을
상징하는가?
Answer: It doesn’t
make sense—at least not from a typological perspective.
말이 되지 않는다. -적어도
예표학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What does make
sense, some suggest, is that the Pentecost wave offering, like the wave offering
at Firstfruits, is a picture of a resurrection:
그렇다면 말이 되는 것은
어떤이들이 주장하듯이 오순절의 흔드는 제사가 초실절의
그것처럼 부활의 예표라는
것이다.
the loaves depict
the just-raptured saints standing before the throne of God (Rev.
7:9).
빵 덩어리는 방금 휴거된 성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있는 것을 묘사한다.
(계시록 7장
9절)
The reasoning
behind this view is that the two wave offerings are linked, or interconnected,
in Scripture, denoting similar or related fulfillments.
이 관점이 이유는 두개의 흔드는
제사가 연결되어 졌으며 , 성경에서 유사하거나
관련된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The first linking
element is the seven-sevens countdown:
첫번쨰 연결점은 7x7의 카운트 다운이다.
The countdown
begins at the former wave offering and ends at the latter.
첫번째 카운트 다운은 이전의
흔드는 제사이며 마지막은 후자의 흔드는 제사이다.
In this way, the
latter is dependent on the former.
이런 방식으로 후자의 흔드는
제사는 이전의 흔드는 제사에 종속된다.
The second linking
element is the nature, or substance, of each wave offering:
두번째 연결점은 각각의 흔드는
제사의 본질 또는 실체이다.
The latter (the
loaves) depends on the former (the sheaf of grain).
후자의 빵은 이전의 처음
익은 열매에 종속된다. ( 처음 익은 열매로
나중의 빵이
구워진다.)
Without the grain,
which is joined together into one “body” and baked, there would be no loaf.
처음 익은 열매 (하나로
결합되어 구어진다) 없이는 빵이 나올수 없다.
And so, in more
than one way, the latter wave offering depends on the former.
그래서 이렇게 한가지 이상의
이유로 후자의 흔드는 제사는 이전의 흔드는 제사에
의존한다.
This is analogous
to how the Church’s resurrection depends on Jesus’
resurrection.
이것은 교회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하다.
Without Jesus
being raised first, as the “firstfruits,” there would be no resurrection, or
Rapture, of the Church.
예수님께서 처음익은 결실로서
부활하시지 않으면 그 어떤 교회의 부활도 휴거도
있을수
없다.
Bolstering the view
that the Pentecost wave offering signifies the resurrection/Rapture, Paul speaks
of the “offering up” of the Gentiles being acceptable to the Lord:
오순절의 흔드는 제사가 부활/휴거라는
관점을 강화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주님께 드려지는 이방인의 위로
바쳐짐을 언급했다.
“I should be the
minister of Jesus Christ to the Gentiles, ministering the gospel of God, that
the offering up of the Gentiles might be acceptable, being sanctified by the
Holy Ghost” (Rom. 15:16).
이는 나로 이방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게 하심으로써 이방인들을 제물로
드리는 일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수 있도록 하심이라.
The Apostle is
using what is, arguably, wave-offering terminology to describe the ultimate
redemption of the Church.3
사도 바울은 교회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전문적인 용어인
흔드는 제사를 사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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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
THE ORDER OF THE
RESURRECTIONS
부활의
순서
In 1 Corinthians,
Paul speaks of multiple resurrections occurring in a particular
order:
고린도서 1장에서 바울은
여러차례의 부활이 특정한 순서에 의해서 발생할 것을
언급한다.
“But now Christ is
risen from the dead, and has become the firstfruits of those who have fallen
asleep….[And so] all shall be made alive [resurrected]. But each one in his own
order: Christ the firstfruits, afterward those who are Christ’s at His coming”
(1 Cor. 15:20, 22, 23).
고린도서 15장 20절 22절
23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느니라.
이는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각자 자기의 서열대로
되리니 그리스도가 첫 열매들이요 , 그 다음은 그리스도꼐서
오실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The first
resurrection mentioned is Jesus’, at the Feast of Firstfruits.
첫번째 부활은 초실절의
예수님이다.
The next
resurrection mentioned is the Church’s, at the Rapture.
두번재 부활은 예수님 오실떄
그에게 속한 교회의 휴거이다.
The question is:
When, or at which feast, might this second resurrection occur?
질문은 언제 또는 어느
절기에 이 두번째 부활이 발생하는가 ? 이다.
Some, citing the
correlations between Firstfruits and Pentecost, believe it will be at
Pentecost.
어떤이들은 초실절과 오순절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오순절이 될거라
믿는다.
They point out the
following:
그들은 다음을
지적한다.
Firstfruits and
Pentecost are both “harvest” feasts.
초실절과 오순절은 둘다
추수의 절기이다.
Firstfruits and
Pentecost both center on a “wave offering” in which the firstfruits of the
harvest are lifted up before the Lord (Lev. 23:16).
초실절과 오순절은 둘다 흔드는
제사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둘다 처음 익은 열매 또는
그 열매로 인한 빵들이 주님앞에 들리워진다.
Firstfruits and
Pentecost are both a time of pilgrimage, during which every man was required to
appear before the Lord in Jerusalem (Deut. 16:11; Ex. 23:14-17).
초실절과 오순절은 둘다 순례의
절기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예루살렘의
주님 앞에 나와야만
했다.
Firstfruits and
Pentecost are linked via the seven-weeks countdown. (The observance of the
latter is dependent on the former.)
초실절과 오순절은 7x7의
카운트다운으로 연결되어 있다. (후자의 관찰은 전자에
예속된다.
)
With the above in
view, some propose that the most logical time for the resurrection following
Jesus’ (Firstfruits) resurrection is at the feast most analogous and the one
next in “order,” namely, Pentecost.
상기 제시된 관점들로 인해서
초실절의 열매이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 다음 순서에 성취될 절기는 아마도
오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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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TRUMP
마지막
나팔
Many assume that
the “last trump” in 1 Corinthians refers to a final trumpet blast sounded on the
Feast of Trumpets.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서의 마지막
나팔을 나팔절의 마지막 나팔로 가정한다.
Seems obvious,
right? 명백해 보인다 맞는가?
But consider the
following:
그러나 다음을
가정해보자
Trumpets are
actually sounded at every feast, not only on the Feast of Trumpets (Num. 10:10;
Ps. 81:3, 4).
나팔은 나팔절에만 불리워진게
아니라 모든 절기에 불리워졌다.
Nowhere in
Scripture is the designation “last trump” assigned to the Feast of Trumpets—or
any other feast.
성경 그 어느 곳에도 마지막 나팔이
나팔절에 배정되었다는 언급이 없다. 또는 그 어떤
절기에도
마찬가지이다.
The point is that,
scripturally speaking, the “last trump” could just as easily be referring to a
trumpet sounded on a feast other than Trumpets.1
요점은 성경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나팔은 절기에 절기에 울리는 나팔일수 있는 것이다.
Of course, just
because something is possible doesn’t make it so. Is there any scriptural reason
to believe the last trump could be referring to another feast?
There is.
물론 무언가 가능하다고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마지막 나팔이 다른
절기를 언급할 가능성이 있는가?
그렇다.
To explain, we need
to first clarify what the term last trump refers to. The “last trump” refers to
the trumpet blast announcing the Rapture and conclusion of the Church
Age.
설명하자면 우리는 마지막
나팔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언급하는지 먼저 분류해야만
한다. 마지막 나팔은 휴거의
순간에 그리고 교회의 완결의 순간에 불리워지는
나팔이다.
This is
critical.
이것이
중요하다.
The “last trump” is
not merely the final blast of a particular day, or of a particular
season.
마지막 나팔은 단순히 특정한
날 또는 특정한 시즌에 불리워지는 마지막 울림이 아니다.
The last trump is,
technically speaking, the final trumpet blast of a period of millennia.
마지막 나팔은 ,기술적으로
말해서 밀레니아 시기(교회시대를 언급하는듯)마무리
하는 순간의
나팔이다.
With this
millennia-long period in view, let’s focus on the final year.
이런 밀레니아 적 관점으로 마지막
해에 주목하자
Knowing that the
biblical year begins at the Feast of Trumpets, the question
becomes:
성경적인 한해가 나팔절에
시작됨을 안다면 질문이 발생한다.
When will the final
trumpet blast of the year be sounded?
그 해의 언제에 마지막 나팔이
울리게 되는가?
Answer: Obviously
not at the Feast of Trumpets.
정답 : 명백히 나팔절은
아니다.
The blasts sounded
at the Feast of Trumpets are merely the first of the year.
나팔절에 울리는 나팔은 새해의
첫 시작을 알린다.
The blasts sounded
on the Day of Atonement are the second, and so on.
대 속죄일에 울리는 나팔은
두번째이다. ....
The final, or
“last,” trumpet blast of the year—and this is the vital point—is sounded about
nine months later, at Pentecost.
그 해의 마지막에 울리게 되는-
이부분이 가장 중요한데 - 9달 이후에 울리게 되는
오순절이다.
From this time
forward, the trumpet will not be heard again until the New Year begins in the
subsequent fall.
이 시점 이후부터는 그 다음해의 새해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다른 나팔이 울리지
않는다.
This perspective on
the “last trump” sheds new light on the various trumpet blasts and their
respective meanings in a hypothetical final jubilee year.
이런 마지막 나팔에 대한
관점은 다양한 나팔의 시점에 대해서 새로운 빛을
비춰줌과 동시에 마지막 희년의
해에 절기마다의 각각의 의미를 더해준다.
The trumpets
sounded on the Feast of Trumpets serve as the initial awakening blasts that
judgment is coming.2
나팔절에 불리우는 나팔은
심판이 다가옴을 일깨운다.
The trumpet blasts
on the Day of Atonement
declare the jubilee
year.
대 속죄일의 나팔은 희년을
선포한다.
Months later, on
Pentecost, the “last trump” of the year marks, perhaps, some culminating event.
몇달이 지난후 오순절에 마지막
나팔이 불리워지면 무언가 절정에 달하는 이벤트가 발생할 수도 있을것이다.
It’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first trumpet sounded in Scripture is the one sounded by God
Himself on Pentecost, as He descended in a cloud on Sinai (a foreshadowing type
of the Rapture).
재미난 것은 성경에서 언급된
첫번째 나팔은 오순절에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불리워진 나팔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나이 산에 구름속에 강림하실때 (휴거의
그림자적 예표)
The only other
place in Scripture we find God sounding the trumpet is at the
Rapture.
성경에서 우리가 하나님
자신이 소리를 내시는 나팔소리는 오직 휴거의 장면에서만 발견된다.
Is it possible
that this second sounding of the “trump of God” will, like the first, be heard
at Pentecost? (Ex. 19: 16, 19, 20; 1 Cor. 15:52; 1 Thess. 4:16).
하나님께서 직접 내시는 트럼펫
소리가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오순절에 들릴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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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ONE KNOWS THE
DAY OR HOUR
아무도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
A popular teaching
is that Jesus’ statement in Matthew 24, “no one knows the day or hour,” is an
allusion to the Feast of Trumpets.
마태복음 24장에 언급된
"아무도 그 때와 시를 알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언급은
나팔절에 대한 비유가 가장
유명하다.
The basis for this
teaching is that the two-day Feast of Trumpets is known as the feast of which no
one knew “the day or hour” it would begin, as its commencement depended on the
sighting of the new moon, which was variable.
이러한 가르침의 근본에는
둘째날의 나팔이 새해의 첫달이 관측된 이후에 불리워지는 데에서 기인되었을 것이다 .
It’s worth noting,
however, that the Feast of Trumpets is not the only feast whose timing is said
to be a “mystery.”
그러나 나팔절의 타이밍 만이
미스터리이지 않을 경우에는 가치가 없을 것이다.
Pentecost has a
similar, mysterious, reputation.
오순절또한 유사한 미스테리한
평판을 가지고 있다.
Unlike other
feasts, which are assigned a calendar date (e.g., Passover is Nisan 14, Trumpets
is Tishrei 1, etc.), Pentecost is assigned no specific
date on the
calendar.
다른 절기( 달력에 날짜가 배정된
유월절은 니산1일 나팔절은 티쉬리 1)와는 달리
오순절은 달력에 그 날짜가 배정되어
있지 않다.
Leviticus merely
states it is to be celebrated fifty days after the offering of the first sheaf
of the grain harvest (23:15-17).
레위기에서는 단지 초실절의 성취
이후에 50일이 지난 후에 기념하라 지시되고 있다.
In an article
entitled, “The Mystery of Pentecost,” Gary Stearman writes:
오순절의 비밀이라 불리우는
게리 스티어맨이 언급했듯이
“Since it is based
on counting the seven weeks following the Feast of Firstfruits,
오순절이 초실절 이후에 7주를
계산해야 하는데 기초를 두기 때문에
the date of
Pentecost is fluid.
오순절의 날짜는
유동적이다.
Thus, when the
Jewish calendar was still based upon visually marking the appearance of the new
moon, Pentecost could fall on the fifth, sixth or seventh of
Sivan.
유대력은 여전히 새해의 첫달에
기초로 하기 때문에 오순절은 시반월의 5일6일 또는 7일이 될수 있다.
The final
determination of the date would depend upon whether or not the months of Nisan
and Iyar were full thirty-day months.
날짜에 대한 최종 결정은
오로지 니산월과 이야르 월이 꽉찬 30일의 달이 될지아닐지에 달려있다.
To this day, if one
calculates the date of Pentecost as actually instructed in the Bible, its
precise timing is always something of a mystery.
이날은 누군가가 오순절의
날짜를 성경에 지시된대로 정확하게 계산한다면
그것의 정확한 타이밍은 항상
미스테리에 쌓여있다.
Symbolically then,
it becomes a perfect model for the Rapture, since its date is also beyond
reckoning.”1
상징적으로 그것은 휴거에
대한 완벽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날짜가 계산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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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FIFTY MEANS
“COMPLETION”
50은 완성을
의미한다.
The word Pentecost
comes from a Greek word meaning “fiftieth.”1
오순절이란 단어는 그리스어의
50번째를 의미하는 어원으로 부터 나왔다.
In his book,
Numbers in Scripture, E. W. Bullinger explains the significance of the number
fifty in the Bible:
성경속의 숫자란 책에서
저자는 성경속에서 50이란 숫자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Fifty is the
number of jubilee or deliverance.
50은 희년또는 구조를
의미한다.
It is the issue of
7 X 7 (72) and points to deliverance and rest following on as the result of the
perfect consummation of time.”2
그것은 7x7 그리고 구조
그리고 뒤따르는 완벽한 부부간이 융합을 의미한다.
According to
Bullinger, “fifty” denotes rest, completion, and deliverance, as in the
Jubilee.
불링거에 따르면 "50"은 휴식,
완성 , 그리고 구조를 뜻한다 희년과 마찬가지로
In the Bible, the
deliverance of Jubilee refers to freedom granted slaves, or release from a task
or burden (Lev. 25:3941).
성경에서는 희년은 묶인자가
풀어지고 그 짐으로부터 해방됨을 나타낸다.
With this in mind,
a valid question for those who believe Pentecost was fulfilled in every respect
by the birth of the Church is this:
이점을 염두에 두고 타당한
질문이 발생 가능한데 그것은 과연 오순절이 교회의
탄생으로 이 모든것을 충실하게
완수 했는가 ? 란 질문이다.
Does the birth of
the Church, with its age-long and challenging task of spreading the Gospel still
ahead of it, embody the themes of completion or release from a task or burden?
교회의 탄생이 그것의 오랜
도전거리인 복음의 전파와 완전케함 또는 어떤
직무로부터의 해방을 완료
시켰는가?
Answer: It does
not. 정답은 그렇지 않다.
The birth of the
Church on Pentecost was not a time of completion or release from a task or
burden; it was, rather, a time of inauguration, when the task of spreading the
Gospel had just begun.
오순절의 교회의 탄생은 해방과
모든것의 완결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낙성식의 시간 같은
것이었다.
It could therefore
be argued that the themes associated with the number “fifty” and/or Pentecost,
namely completion, deliverance, and rest, are yet to be fulfilled by some future
event.
그런 의미에서 "50" 이
나타내는 완결 구조 그리고 휴식의 테마는 미래의 어떤
사건에 의해서 완성되어질
것이다.
Might this future
event be the Rapture of the Church, when its task of spreading the Gospel to the
whole world is completed and the end comes?
어쩌면 이 미래의 이벤트는
교회의 휴거가 될것인데 교회의 목적인 복음의 전파의
완성이 언제 도래할
것인가?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eached in the whole world as a testimony to all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 (Matt. 24:14). 마태복음 24장 14절
직접 찾아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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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Strong’s #4005
2. E.W. Bullinger,
Numbers in Scripture, p.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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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OCH
에녹
Enoch, one of the
biblical patriarchs mentioned in Genesis, is viewed by many Christians as a
prophetic type of the Church.
에녹은 창세기에 언급된
성경적인 족장(원로) 인데 주로 많은 그리스도 인들에게
교회의 예언적인 형태로
해석된다.
The first of four
generations of preachers, his name means “teaching,” which is a primary function
of the Church (Matt. 28:19-20).
네 세대만의 설교자였으며 그의 이름은
가르침을 의미하며 그것은 교회의 주된 기능
이기도
하다.
Additionally,
Enoch was the first individual to be taken up to heaven without seeing death
(Gen. 5:24).
추가적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않고 하늘로 들리운 사람이었다.
1 This “rapture”
occurred before the Great Flood, which is seen by some as a hint that the Church
will be removed from the earth before the Tribulation.
이 "휴거"는 대 홍수 이전에
발생했으며 그것은 교회가 대환란 이전에 지구에서
사라질것에 대한 힌트이기도
하다.
Another intriguing
parallel between Enoch and the Church is that, according to tradition, he was
born on the day that would later become Pentecost.
또다른 재미난 에녹과 교회 사이의
유사성은 -유대전승에 따르면- 그는 후에 오순절
이 되는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Thus, Enoch and
the Church share a Pentecost “birthday” (Acts 2). But it gets more
interesting.
이렇게 에녹과 교회가 같은
생일을 공유한다는 점이 더 재미있다.
The same
traditions hold that Enoch was also raptured on Pentecost, raising the ultimate
question:
동일한 유대 전승에 따르면
에녹은 오순절에 휴거됬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것은
엄청난 질문을 야기
시킨다.
Is it possible that
the Church might be raptured on its Pentecost “birthday” as well?
그렇다면 교회도 그와 마찬가지로
오순절에 휴거될것인가 (교회의 생일에?)
As an interesting
aside to the Enoch/Pentecost/Rapture association, the Bible records that Enoch
was exactly 365 years old when he was taken out of the world (Gen. 5:23, 24). 에녹
/ 오순절 /휴거 관련해서 재미만 이야기가 있는데 성경은 에녹이
세상을 떠나갈떄 365살이
었다고 기록한다.
Some see the number
“365” as an allusion to the Gregorian, or what some term the “Christian,”
calendar, which leads us to a remarkable present-day calendar
alignment.
Coincidence or
Design?
어떤이들은 365를 그레고리안력
(365일) 또는 크리스쳔 캘린더로 보는데 그것은
우리가 요즘 사용하는 달력과
일치한다 . 우연인가 의도된 계획인가?
I have written
previously about an odds-defying mathematical alignment in which there are
exactly 17,640 days (forty-nine 360-day prophetic years) between the Jews’
return to Jerusalem in 1967 and the Feast of Trumpets in 2015.
나는 이전에 유대인이
1967년에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해로 부터
17640 일을 계산해서
2015년의 나팔절과 일치함을 언급한적이 있었다.
2
Some view this
precise, to-the-day alignment as confirmation that the Feast of Trumpets in 2015
marked the endpoint of the “seven sevens” countdown mentioned in Daniel 9:25 and
also the commencement of a jubilee year.
어떤이들은 이런 정확한 정렬이
다니엘서 9장 25절에 언급된 일곱 이레 의 카운트다운과 희년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부분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제가 전에 올렸던 게시글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부부짱에만 공개되어 있습니다.)
Again, this uncanny
alignment is based on the biblical, 360-day year.
다시한번 이런 기묘한 정렬은
성경적인 일년인 360일에 기초로한 해석이었다.
But notice what
happens when we do the same calculation with a 365-day year:
그러나 같은 계산을 우리가
365일에 기초로 해서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주목해보자
Adding exactly
forty-nine 365-day years (17,885 days) to the same 1967 decree-date, we arrive
at June 14-15, 2016—within two days of Pentecost.3
49년 곱하기 365일 하면
17885일이 나오는데 예루살렘이 법령으로 다시 제정받게된
1967년에서 다시 더하게 되면
2016년 6월 14-15일이 나오게 되는데
오순절로부터 2일 이전이
된다.
Two days is a
relatively insignificant gap,4 especially when we consider the many questions
and contentions surrounding the Jewish calendar, including the age-old debate
concerning the correct starting point of the seven-weeks countdown to Pentecost.
이틀이라는 시간은 특히 우리가
유대력에 대해서 논의할떄는 크게 의미를 두지는
못할 차이이다. (정확한
시작점을 찾기가 힘들어 또한 여러 논쟁거리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는
뜻)
Is it coincidence
that Enoch is linked to Pentecost and the number 365, and that there is one
jubilee cycle of 365-day years from the 1967 Jerusalem decree to Pentecost in
2016?
에녹이 365일을 뜻하며
예루살렘이 법적으로 공표된 이후 한 쥬빌리 사이클(50년)
이 지나서 2016년 오순절에
도달하게 되는게 우연인가?
It seems
unlikely.
그런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That said, a word
of caution about date alignments:
그것은 날자의 정렬을 통한
조심하라는 의미이다.
While it’s safe to
assume that a given alignment is not coincidence, it is not safe to assume
something is going to occur on that day.
그날이 우연히 발생한 정렬이
아니라고 가정하는 동안에 또한 그날에 꼭 무슨일이
발생한다고 가정하는 것 또한
안전하지는 않다. (속단하지 말라)
The above
observation, like every other one put forward here, is intended as merely “food
for thought”—a single piece of a larger puzzle to be viewed in light of the
whole.
따라서 상기의 관찰은 위의
다른 논쟁점과 같이 우리가 상고해봐야 할 편린이다.
-전체를 큰 그림으로 볼때
우리가 맞춰야 하는 하나의 퍼즐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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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TH
룻
Since ancient
times, Jews have read the Book of Ruth on Pentecost.
고대에는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룻기를
읽었다.
One reason given
is that Ruth’s story is set in the spring/summer (Pentecost) harvest
season.
한가지 이유는 룻기의 스토리가
봄/여름 시즌(수확시즌)에 발생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Another reason is
that Ruth’s acceptance into the Jewish faith is analogous to Israel’s acceptance
of God’s Law, which occurred on a Pentecost centuries earlier.
또다른 이유는 유대적
믿음으로 인정받은 룻은 마치 한세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모세가
시내산에서)을 받은 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Many Christians
view the Book of Ruth as a remarkable typological illustration of God’s plan of
redemption for Israel and the Church.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룻기서를
유대인과 교회의 구원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주목할만한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본다.
In case you’re not
familiar with the story, here is the Cliffs-Notes version:
당신이 룻기서와 잘 친하지
않은 경우를 대비해서 여기에 간략한 요약을 남긴다.
The Story
이야기
During a time of
famine in Israel, a Jewish family from Bethlehem—Elimelech, Naomi, and their two
sons—emigrate to nearby Moab.
이스라엘에 기근이 있던 시절
베들레헴의 유대인 가족 엘리멜렉 나오미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 이 근처의
모압지방으로 이민을 간다.
Elimelech dies
there, leaving Naomi a widow. The two sons marry but, after a while, also pass
on, leaving their wives widows as well.
엘리멜렉은 거기서 죽고 나오미를
과부로 남겨둔다. 두 아들도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는다. 그리고 그 두 아내를 과부로
남겨둔다.
Naomi and her
daughters-in-law are left penniless and alone.
나오미와 그녀의 두 며느리는 한푼없이
홀로 남겨진다.
As the situation
improves in Israel, Naomi decides to return home.
이스라엘의 기근이 어느정도
해결되자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맘먹는다.
One of her
daughters-in-law chooses to stay in Moab with her “familiar people and gods”
(Ruth 1:15).
두 며느리중 하나는 모압땅에 그녀가
친근한 사람들과 이방신을 위해서 남기로 한다.
The other, Ruth,
resolves to go to Israel with Naomi, where she will worship the God of the
Jews.
그러나 룻은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가 유대인의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간청한다.
Naomi and Ruth
return to Bethlehem at the beginning of the barley harvest, at which time Ruth
goes to work gleaning in the fields.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으로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시점에 이사하게 되고
룻은 들판에 이삭줍기 ( 레위기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밭의 주변은 추수하지 못하게 했음 ) 하러 간다.
As it turns out,
the field Ruth is gleaning in belongs to a man named Boaz, who happens to be a
close relative of Naomi.
후에 밝혀지기로는 룻이
이삭줍기 하던 땅은 보아즈라는 남자의 땅이었고 그는 우연히도 나오미이 가까운 친척이었다.
Appreciative of
Ruth’s loyalty to her mother-in-law (and his close kin), Boaz invites her to
continue gleaning in his fields throughout the remainder of the
harvest.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충직함에
대한 배려로 보아스는 룻을 추수 남은 기간동안에
계속해서 이삭줍기를 할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To understand what
happens next, we first need to be aware of two aspects of Jewish
Law.
다음에 발생하는 일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유대 법의 두가지 법을 깨닳아야만 한다.
First, as
prescribed in the Levitical statutes, when a person loses their land due to some
misfortune (as would be the case with Naomi) a close relative can purchase, or
“redeem,” that land back to the one who lost it (Lev. 25:25).
첫번째로 레위기에 명시된대로
어떤 사람이 불행으로 인해서 그의 땅을 잃어버리게 되면(야기서는 나오미의 케이스가 그렇다)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구매하거나 또른 물러준다. 그래서 그 땅은 원래의 소유주에게 돌아가게 된다.
Second, according
to Jewish custom related to the law of “levirate marriage,” when a woman is
widowed without having borne a son (as was the case with Ruth), a close relative
is obliged to marry that widow to provide an heir to the deceased (Deut.
25:5-6).
둘째로 유대법에 따르면
"수혼" 이라해서 어느 여인이 후손없이 과부가 되면 가까운
친척이 그녀와 결혼해서 그녀에게
후손을 낳아줄 의무를 가진다.
With these two
statutes and Naomi and Ruth’s respective situations in mind, we arrive at the
key moment and climax of the story.
위에 언급한 두가지 케이스가
각각 나오미와 룻에게 적용됨을 마음속에 염두에 두고
우리는 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
도착하게 된다.
Naomi is in need of
a “redeemer” to repurchase her land, and Ruth is a widow who had no son to
inherit the land.
나오미는 땅을 다시 되사줄
구원자가 필요하고 그리고 룻은 아들없는 미망인으로서 그 땅을 다시 물려받을 사람이다.
As a solution to
both dilemmas, Naomi encourages Ruth to approach Boaz, who, as a close relative,
qualifies to fulfill the role of “redeemer.”
이러한 양쪽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 접근 시킨다.
보아스는 그는 가까운 친족이며
구원자의 역활(땅을 다시 사줄) 감당할수 있는 사람이다.
Without getting
into the particulars of how this part of the saga plays out, the ultimate
outcome is that Boaz, who has fallen in love with Ruth, happily
agrees.
결국에는 룻과 사랑에 빠진
보아스는 기쁘게 그 것을 받아들인다.
He redeems Naomi’s
land and takes Ruth as his wife, thus becoming the family’s “kinsmen redeemer.”
그는 나오미의 땅을 만회해주고
그리고 룻을 자기의 아내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가족의
가계의 기업을 무를자가
된다.
The Symbolism
The most striking
aspect of Ruth’s story is how the characters model the key players in God’s plan
of redemption:
룻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어떤 캐릭터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키플레이어의 역활을 하는가 이다.
Naomi, as the Jew
who loses her land and becomes destitute, represents “Israel.”
나오미는 (그녀의 땅을 읽고
극빈자가 된 유대인)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Ruth, a Gentile
bride who willingly accepts the God of Israel, represents “the
Church.”
룻 (이방인 신부 기꺼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받아들인 ) 은 교회를 대표한다.
Boaz, as the
kinsmen redeemer from Bethlehem, represents the “Messiah,” who is our close
“blood relative” and redeemer.
보아스 베들레헴으로 부터 가계를 무를자
는 메시아를 나타내며 그는 우리의 가까운 친족이자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이다.
The story itself is
a picture of God’s plan enacted:
이야기 자체는 하나님의 계획을
나타낸다.
In the process of
redeeming Naomi and her land (Israel), Boaz (Messiah) takes a Gentile bride (the
Church), thereby saving both from a state of destitution.
이스라엘(나오미)과 그녀의 땅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보아스(메시아)는 이방인 신부(교회) 를 받아들이며 그런결과 양쪽의 극빈 상태를 해소시킨다.
(구원한다)
Many wonderful and
detailed commentaries have been written about the Book of Ruth and its prophetic
implications.
많은 놀랍고 상세한 코멘터리들이
룻기와 그것의 예언적인 상황속에 존재한다.
For the purposes
of our Pentecost-centered study, however, I want to focus the reader’s attention
on the three underlying themes:
우리의 오순절 포커스의
스터디를 위해서 나는 우리의 주위를 아래의 세가지로 옮기려
한다.
A Gentile
bride/wedding 이방인 신부/결혼식
Redemption
구원
The wheat harvest
보리 추수
To the
eschatologically informed Christian,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se themes
indicate the Rapture of the Church:
그리스도인들의 종말적론 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교회의 휴거를 제외하고는
논할수가
없다.
The Church is
depicted as the “bride” throughout Scripture (2 Cor. 11:2).
교회는 성경 전체에서 신부로
묘사된다.
A “wedding” is
what occurs after the bridegroom comes for the bride (Matt.
25:10).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에게
오면 일어날 상황이다.
The themes of
“redemption” and “kinsmen redeemer” point to the jubilee statutes in Leviticus
25, which also point to the bridegroom’s, or Messiah’s, coming.
구원이나 혈족으 무르기를
완성할 구원자의 개념은 레위기 25장에 언급된 대로 희년을 언급한다 또한 그것은 신랑의 또는 메시아의 도래를
뜻한다.
Additionally,
“redemption” is the word associated with the renewal of our physical bodies at
the Rapture (Rom. 8:23; Eph. 4:30; Luke 21:28).
추가적으로 구원은 우리몸의
변화와 휴거와 관련이 있다.
This brings us to
the third, underlying, theme of Ruth: the wheat harvest.
이것은 우리는 세번째의 룻
테마로 몰고간다. 밀 추수이다.
The ultimate
question is, why has God chosen to redeem Ruth, a prophetic type of the Church,
against the backdrop of the Pentecost harvest season?
궁극적인 질문은 왜 하나님꼐서
교회의 예비적 타입인 룻을 구원하실때 오순절의 추수 시즌을 배경으로 선택 하셨나 하는
문제이다
Is this aspect of
the story merely incidental, a matter of random circumstance, or is it, rather,
a prophetic clue as to the timing of the Rapture?
이 이야기가 단순히
우연인가? 아니면 휴거의 시기에 대한 예언적인 단서인가?
THE SONG OF SOLOMON
아가서
The biblical book
entitled Song of Solomon is commonly described as “a collection of poems between
a lover and his beloved that beautifully celebrates romantic and physical love.”
솔로몬의 노래 또는 아가서로
알려진 성경은 사랑하는 이들의 로맨스와 육체적인 사랑을 묘사한 시의 모음이다 .
Traditionally, Jews
have considered Song of Solomon to have allegorical value in describing the love
of God.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하나님의 사랑에대한 비유적인 가치로서 이해해왔다.
Christians,
likewise, see allegorical value pertaining to the love between Christ and the
Church.
크리스텬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교호의 사랑으로 아가서에 가치를 둔다.
Many
eschatologically minded believers, however, see a great deal
more.
많은 종말론적인 신앙인들은
그러나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낸다.
They view the Song
of Solomon as a multi-act drama chock-full of prophetic types that point to the
Rapture.
그들은 솔로몬의 아가서를
휴거에 대한 예언적인 형태로 본다.
The most commonly
cited passage in this regard features one of the main characters, a “shepherd,”
coming to gather and spirit away his beloved, a Shulammite (Gentile)
maid.
가장많이 언급 되는 구절은
목자가 그의 사랑하는 술람미(이방인) 여인을 구하는 대목이다.
The passage is
written from the viewpoint of the Shulammite maid observing her shepherd’s
approach:
다음 성경은 술람미 여인이
그녀의 목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는 관점에서 묘사한것이다.
“The voice of my
beloved! Behold, he comes leaping upon the mountains, skipping upon the hills.
My beloved is like a gazelle or a young stag. Behold, he stands behind our
wall; he is looking through the windows, gazing through the lattice. My beloved
spoke, and said to me: ‘Rise up, my love, my fair one, and come away” (Song
2:8-10).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다. 보라 그가
산들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도다
나의 사랑하는 이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Let’s consider the
individual elements seen as typological of the Rapture.
각각의 요소를 휴거에 대한
비유로 고려해보자.
In verse 8, the
phrase, “Behold, he comes,” evokes the similar phrase, “Behold, He is coming
with the clouds,” connected to Jesus’ return in Revelation
(1:7).
8절의 자 보라 그가 온다
는 계시록 1장 7절의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되어진다.
In the same verse,
the shepherd’s approach is characterized as being swift, “like a gazelle or
young stag, skipping upon the hills.” Swift or sudden is how the Bible
characterizes the Lord’s coming at the end of the age (Matt. 24:27; Rev. 16:15;
1 Thess. 5:3).
같은 절에서 목자의 다가옴은
마치 가젤이나 어린 수사슴처럼 들판을 뛴다.
성경에서 말세에 주님의 재림은
신속하고 갑자기 발생하는 일로 묘사된다.
That the shepherd
is said to be behind a “wall…looking through the windows,” is suggestive of one
coming from a separate realm (i.e., heaven), through a door or
window.
목자는 "벽뒤에서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 이것은 분리된 왕국(천국)으로 부터 오는 이를 뜻한다.
The Bible
frequently uses the analogy of a “door” or “window” as an entry point into
heaven.
성경은 문이나 창문을
천국의 진입로로 빈번하게 비유한다.
For instance:
“Behold, a door was opened in heaven (Rev. 4:1), or “I will open the windows of
heaven for you” (Mal. 3:10).
예를들어 계시록 4장 1절의
이일 후에 내가 봤는데 하늘에 열린문이 있는데
말라기서 3장 10절 내가
하늘문을 열고
“Gazing through the
lattice” suggests the shepherd’s being partially revealed/partially concealed,
as one imagines the Lord will appear upon His return “with the clouds” (Luke
21:27; Rev. 1:7).
"창살을 통해서 몸을 내보이는
도다" 는 목자의 부분적으로 나타 내짐과 부분적으로 감추어짐을 상징하고 어떤이는 그가 다시올때 구름과 함께 오시는 것을
상기할 것이다.
Finally, as the
shepherd arrives to gather his beloved, he utters the words:
마지막으로 목자가 그의
사랑하는 자를 데릴러 왔을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Rise up, my love,
my fair one, and come away.”
일어나라 내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The wording calls
to mind rapture-phrases such as “Come up here,” in Revelation and, “Your dead…
shall arise,” in Isaiah (Rev. 4:1; Isa. 26:19).
이 단어들은 계시록의 이리로
올라오라 또는 이사야서의 너의 죽은자들이 다시 일어나리라를 상기시킨다.
Knowing that God is
all about prophetic types in Scripture, it’s easy to see how one might view the
passage in question as an allusion to the Rapture.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얼마나
예언적이신지를 알게 된다면 누군가가 이 구절로부터
휴거를 떠올리게 되는일이 너무나
당연하다.
This brings us to
the second half of the passage and what is, for the purposes of our
Pentecost-focused study, the most intriguing and revealing portion—a series of
patent clues as to the timing of the shepherd’s coming:
이것은 우리의 오순절 중심의
스터디의 중요한 부분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 바로 목자가 오는
타이밍이다.
“For lo, the winter
is past, the rain is over and gone. The flowers appear on the earth; the time of
singing has come, and the voice of the turtledove is heard in our land. The fig
tree puts forth her green figs, and the vines with the tender grapes give a good
smell. Rise up, my love, my fair one, and come away!” (Song 2:11-13).
보라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쳐
사라졌으며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왔도다 산비둘기으 소리가 우리의 땅에서 들리는도다. 무화과나무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Clearly, the
spring/summer (Pentecost) season is being indicated.
명백하게도 봄/여름 (오순절)
시즌이 언급되고 있다.
Not only is it
being indicated, it is being powerfully indicated via a series of
Israel-specific clues.
단순히 묘사된정도가 아니라
다음의 명확한 정보들로 인해 강력하게 제시된다 .
Let’s take a look
at these clues, individually.
다음의 단서들을 제각각
탐구해보자
“The winter is
past”
겨울이
지났다.
“The winter is
past” means spring has arrived.
겨울이 지났다는 봄이 왔다는
소리다.
“The rain is over
and gone”
비가 끝났고
사라졌다.
The reference to
rain is important because in Scripture the Lord’s coming is described as being
like “the former and latter rains” (Hos. 6:3).
비에 대한 언급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비유가 이른비와 늦은비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The former and
latter rains are such definite seasons in Israel that they are actually marked
on the calendars and almanacs that show the various harvest
times.
이른비와 늦은 비는
이스라엘에서는 참으로 한정적인 시즌인데 다양한 추수의 시기를 보여주는 연감이기도 하다.
1 The former
(early) rains coincide with the October-December timeframe.
이른 비는 10월11월
시기와 일치한다.
The latter rains
coincide with the March-May timeframe.
늦은 비는 5월 6월 시기와
일치한다.
Thus, May into
June—the time of Pentecost—marks the beginning of the dry season in Israel, the
time when “the rain is over and gone.”
이렇게 5월 부터
6월이(오순절의 시기가) 이스라엘의 건기의 시작과 함께 일치한다.
아가서에 언급된 비가 그치고
사라졌다와 일치한다.
“The flowers appear
on the earth”
대지에 꽃들이
나타난다.
In Israel, flowers
bloom throughout the year.
이스라엘에서는 꽃들은 한해 동안
계속해서 피고 진다.
Spring, however
(March-June), is the peak season.
그러나 봄이 (3월부터 6월)
가장 피크 시즌이다.
It’s interesting
to note that lilies, specifically, are mentioned in the Song of
Solomon:
백합을 언급하는게 재미나다 특별히
아가서에 언급되어져 있다.
“I am the rose of
Sharon, and the lily of the valleys. Like a lily among
thorns…”
나는 샤론의 장미요 ,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Song 2:1,
2).
According to
sources, the best time to view “lilies among the thorns,” as described in Song
of Solomon, is in the late spring/early summer.2
가시들 사이의 백합화를 볼수 있는
최적으 시기가 늦은 봄과 이른 여름의 시기이다.
“The voice of the
turtledove is heard in our land”
산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서
들리는도다.
The turtledove is a
migratory bird.
산비둘기 (맷비둘기)는 이주하는
새이다.
In Israel, it is
said that by mid-April one can observe clouds of doves feeding on the clovers of
the plain.
이스라엘에서는 5월 중순이
비둘기 때를 보기에 가장 좋은 시기로 알려져 있다.
They overspread
the whole face of the land.
그들은 땅 전체에
퍼져있다.
“The fig tree puts
forth her green figs, and the vines with the tender grapes give a good smell”
무화과 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Green figs and
tender grapes indicate the April-May timeframe in Israel.
초록색 무화과와 부드러운 포도는
4월부터 5월의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It’s typically
around late May or early June that both begin to ripen.
그렇다면 늦은 5월부터 이른
6월은 여물기 시작하는 시간대이다.
The multiple
references to the spring/early summer season leave no doubt as to the general
timeframe of the shepherd’s coming.
수많은 봄/여름 시즌의
예시가 의심의 여지 없이 목자의 다시오시는 시기에 대한
일반적인 타임프레임을 보여주고
있다.
The question is,
are these references merely aesthetic, a convenient backdrop for the romantic
exchange between the shepherd and Shulammite maid?
그렇다면 질문은 이런 배경들이
단순히 목자와 술람이 여인으 사랑을 나누기 위한
배경들인가?
Or are they,
rather, a hint at the season in which the good shepherd we know as Jesus Christ
will come and say to the bride: “Rise up, my love, my fair one, and come away”?
아니라면 우리가 예수님으로 알고
있는 선한 목자가 다시 돌아오실 시기를 알려주는
힌트인가 그리스도는
신부에게 와서 말씀하길 것이다. "일어나라 내사랑 나의 어여쁜자야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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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OUTPOURINGS OF
THE SPIRIT
성령님의 두번
부어지심
According to the
Book of Acts, the first major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occurred on
Pentecost in 33 AD (Acts 2).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령님의
강림하심은 기원후 33년 오순절날 이었다.
According to the
Book of Joel, there will be second great outpouring of the Spirit in the very
last days (Joel 2:27-32).
요엘서에 따르면 마지막 날에
두번째 성령님의 부어짐이 있을것이다.
Assuming that the
second, end-times, outpouring of the Spirit coincides with the Rapture and
commencement of the Tribulation, is it possible that it will—like the first
one—happen at Pentecost?
두번째 성령님의 부어지심이
마지막때라면 휴거와 환란의 시작인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오순절에 성취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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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IRD DAY
셋째날
In John chapter 2
there are two mentions of Jesus doing something on the “third
day.”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셋째날에 무언가 하시는 두가지 언급이 존재한다.
First, He attends
a wedding on the third day (v. 1).
첫번째로 그는 셋째날에
결혼식에 참석하셨다.
Next, He alludes to
the fact that He will be resurrected on the third day (vv.
19-21).
그 다름에 그는 셌재날에 다시
부활하실것을 넌지시 언급하셨다.
And so, in the
same chapter, within a few lines, we have Jesus mentioning both a wedding and a
resurrection taking place on the “third day.”
이렇게 동일한 장에서
단지 몇 구절 차이로 결혼식과 부활이 셋째날에
일어날 것을
발견한다.
With this in mind,
it’s interesting to note that in the Old Testament the “third day” is equated
with Pentecost.
이것을 마음에 가지고
구약에서 세번째 날이 오순절과 동일시 된것을 발견하면
매우
흥미롭다.
In Exodus, it was
on the morning of “the third day” that Moses ascended Sinai to receive the
Commandments from God.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께 언약(십계명)을 받은것은
세번째 날
이었다.
1 Scholars and
commentators agree that, based on the account of events given in chapter 19 (vv.
1-11), the third day would have coincided with Pentecost on the biblical
calendar.2 학자들과 주석가들은 그점에 동의한다. 세째날에 언약이 주어짐과
오순절의 유사성에
관해서
Significantly, the
giving of the Commandments is also symbolically linked to a “wedding” and a
“resurrection.”
의미심장하게도 언약의
주어짐은 결혼식과 부활에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Jews view this day
as the time God betrothed Himself to Israel.
유대인들은 이날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혼한 날로 평가한다.
Christians view
Moses’ going up the Mount as a foreshadowing of the Rapture, or “gathering of
the bride.”
크리스쳔 입장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것은 휴거 또는 신부를 모으는 장면을
연상한다.
And so, in both the
Old and New Testaments, the “third day” is linked to a wedding and a
resurrection. The third day is then equated with Pentecost via the events at
Sinai.
구약과 신약의 관점에서 세째날은
결혼과 부활을 연결한다. 셋째날은 시나이 사
건 이후로 오순절과 동일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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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URES
ASSOCIATED WITH PENTECOST
오순절과 관련된
성경
Dating back to the
days of the Temple, the ancient Scripture readings associated with Pentecost
describe the Lord coming in fire and judgment.1
성전에서 제사 드리던 시대로
돌아가면 고대에 오순절에 성경을 읽는것은 주님께서
불과 심판을 위해서 오는 것을
묘사한다.
In the passages
traditionally read from Ezekiel, God is pictured coming in awesome brightness
(Ezek. 1:1-28; 3:12).
전통적으로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두려운 밝음 속에서 나타나신다.
In the passages
traditionally read from Habakkuk, He is pictured in fire and bright light,
bringing judgment upon the earth (Hab. 2:20 through 3:19).
하박국에서 전통적으로 읽혀지던
구절은 그는 불과 밝은 빛으로 땅에 심판을 가져오신다.
Read the passage
from Habakkuk here:
A legitimate
question is: if Pentecost is merely about the giving of the Commandments or the
birth of the Church, why, since ancient times, have the passages read at this
feast pictured the Lord coming in fire and brightness, judging the earth?
타당한 질문은 이렇다
오순절이 단순히 언약을 주시고 교회가 시작되는 절기라면 왜 고대의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주님의 오심과 땅을 심판하심을
언급하는 구절들을
읽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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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WORTHY MENTIONS
OF THE “SUMMER” (PENTECOST) SEASON IN SCRIPTURE
Matthew
마태복음에 언급된 주목할만한
여름 시즌의 언급
In what is arguably
the most well-known eschatological passage in the Bible, Jesus uses the “summer”
season as a metaphor for the end of the age:
성경에서 종말론학 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은 예수님께서 이땅의 끝을 여름 시즌이란 단어로 은유적으로 사용하신다.
“Now learn this
parable from the fig tree: When its branch has already become tender and puts
forth leaves, you know that summer is near” (Matt. 24:32).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유연해지고 잎이 나오면 여름이 가까운 줄 너희가 아나니
The feast
associated with the summer season is, of course, Pentecost.
여름과 관련된 시즌은 당연히
오순절이다.
Jeremiah
예래미아
In Jeremiah chapter
8, God warns Israel that because they have rejected His word and are blind to
His laws, judgment is coming:
예래미아 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그의 율법에 무지해서 심판이 다가온다
“My people do not
know the judgment of the LORD […] They have rejected the word of the LORD.
[…Therefore,] the things I have given them shall pass away from them” (Jer. 8:7,
9, 13).
내 백성은 주의 심판을 모르는 도다.
그들이 주의 말씀을 거절하였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느냐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것들이 그들에게서 없어지리라
In verse 20, after
judgment has arrived and the land and people are decimated, a cry of anguish and
realization goes up:
20절에서 심판이 도달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으며 그들의 분노와 깨달음이 분출된다.
“The harvest is
past, the summer is ended, and we are not saved!” (v. 20).
여름이 끝나고 추수가 지났어도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도다.
Notice it is the
“summer” harvest that is said to be past, as the Jews lament the fact that they
are “not saved.”
유대인들이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한탄한 추수 시즌이 여름인것에 주목해보자
Could this be an
allusion to a future time when Israel sees the Church redeemed at Pentecost and
comes to the painful realization that they are not?
이것이 장차 오순절에
주님께서 오셔서 교회를 구원한것을 보면서 고통스럽게 깨닫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건가?
Proverbs
잠언
“He who gathers in
summer is a wise son; He who sleeps in harvest is a son who causes shame” (Prov.
10:5).
여름에 거두는 자는 현명한
아들이나, 추수때에 잠자는 자는 수치를 가져오는 아들이니라.
We find this
proverb interesting simply because of the mention of a “son” in relation to the
“summer” harvest.
우리는 이 잠언이 아들과 여름
추수를 언급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Notice also that
“sleeping” at harvest time is associated with shame.
추수때 잠자는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주목해봐라
This reminds one
of the various parables and passages that warn against being caught napping at
the Lord’s return (1 Thess. 5:6; Rev. 16:15; Matt. 24:43; 25:1-13; Luke 12:38).
이것은 주님의 재림때 잠자는 신부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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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NTECOST/JUBILEE CONNECTION: COMMON THEMES, COMMON FULFILLMENT? 오순절과 희년의 연결
관계 / 유사한 테마 동일한 성취?
In Leviticus, God
instructs Israel to observe Pentecost after a countdown of “seven weeks”: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49일을 계산한후 오순절을 관찰하라 명하셨다
“Count off seven
full weeks [from the day of firstfruits] .... then [on Pentecost] present an
offering of new grain to the LORD” (Lev. 23:15-16).
너희는 일곱째 안식일 이튿날 까지
오십일을 헤아려서 주께 새로운 음식제사를 드릴지니라
Later, the Lord
prescribes a similar countdown for the year of jubilee:
“Count off…seven
times seven years….[then] consecrate the fiftieth year and proclaim liberty [a
jubilee] throughout the land…” (Lev. 25:8, 10).
후에 주님께서는 희년의 해에
동일한 계산을 명하신다.
너희는 오십번째 되는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곳의 모든 거민들에게 모든 땅에 두루 자유를
공포할지니라 그것은 너희에게 환희의
해가 되리니 너희 모든 사람은 자기 소유로 돌아가고
너희 모든 사람은 자기 가족에게
돌아갈지니라
Thus, Pentecost and
the Jubilee follow the same “template.”
이렇게 오순절과 희년은
동일한 템플릿을 공유한다.
Both are observed
after a countdown of “seven sevens,” during a fiftieth day or
year.
둘다 7x7=49를 카운트
다운한 이후에 관측된다. 50번째 날이거나 50번째 해이다.
This begs the
question: Why, of all of God’s appointed times, do Pentecost and the Jubilee
follow this particular template?
이것은 질문을
야기 시킨다. 왜? 모든 주님의 정한 절기중에 오순절과 희년이
이런 특정한
템플릿을 따르는가?
The answer may lie
in some shared themes.
대답은 아마도 이전에 공유된
테마에 있을것이다.
The first one is
“redemption.”
첫번째는
구원이다.
Pentecost
Redemption
오순절
구원
For Jews, the
seven-sevens countdown to Pentecost is seen as an expression of Israel’s
anticipation of redemption under God.
유대인들에게 오순절까지의 일곱주의
카운트다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통한 구원에 대한 기대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This association
stems from an historical link to the Exodus.
이것은 출애굽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다.
Scripture records
that the Hebrew flight from Egypt began just after Passover.
성경은 이집트로 부터
히브리인들이 유월절이 지난 직후에 출애굽 했다고 기록한다.
This initial
escape, however, marked just the beginning of Israel’s
redemption;
이 초기의 피난은 구러나 단지
이스라엘의 구원의 처음 시작만을 의미했다.
their redemption
would not be complete until forty-nine days later when they arrived at Sinai and
received the Commandments.
그들의 구원은 49일이 지난후
그들이 시나이 산에 도착해서 언약을 받게 될때
완전해
졌다.
It was only then,
after the countdown of seven sevens, on Pentecost, that Israel was officially
redeemed by entering into a contract (the Law) with the Lord as His chosen
people.
7주를 기다린 이후에야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선택된 백성으로 언약을 맺게 되었다.
Jubilee
Redemption
희년의
구원
The seven-sevens
countdown to the Jubilee is seen as a countdown to redemption for the simple
reason that the Jubilee is identified as the “year of redemption” in
Scripture.
희년까지의 49년의 기다림은
희년 자체가 구원의 해로 성경에 명시되기 때문에
구원을 향한 카운트 다운으로
보여진다.
It was during the
year of jubilee that freedom was granted to slaves, and property was returned to
its original owner (Lev. 25: 24, 48; Isa. 61:1, 2).
희년의 해에는 노예가 매임에서
풀어지며 재산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And so Pentecost
and the Jubilee (the fiftieth day and fiftieth year, respectively) are both
times of “redemption.”
그리고 오순절이나 희년이나
둘다 구원의 시기이다.
Significantly,
“redemption” is the word Paul uses to characterize the transformation of our
bodies at the Rapture:
특별히 구원은 사도 바울이
휴거때 우리의 몸이 변화하는것을 특징화 하기 위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The earnest
expectation of the creature waiteth for the manifestation of the sons of God [at
the resurrection/rapture]….For we know that the whole creation groaneth and
travaileth in pain together until now. And not only they, but ourselves also,
which have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even we ourselves groan within
ourselves, waiting for…the redemption of our body” (Rom. 8:19, 22,
23).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신음하며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 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되는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
The Rapture, or
redemption of our bodies, is known as the time of “harvest” (Matt.
13:39).
휴거 또는 우리 몸의 구속은
추수의 때로 알려져 있다.
The theme of
“harvest,” like “redemption,” also applies to both Pentecost and the
Jubilee.
추수나 구원 은 오순절과
희년의 공통된 주제이다.
Pentecost
Harvest
오순절
추수
Pentecost is a time
of harvest because it is one of the three harvest festivals during which every
man was obliged to appear before the Lord in Jerusalem (Ex. 23:14-17; 2 Chron.
8:13).
오순절은 세개의 추수절기중
하나였으며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예루살렘의
주님앞에 나아가야만
했다.
Moreover, Pentecost
is, historically, the day on which God descended in a cloud upon Sinai and
called Moses up with the sound of a trumpet to receive the
Commandments.
더욱이 오순절은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모세를 십계를 주시기 위해서 나팔소리와 함께 임하시던 시기이기도
하다.
Christians view
Moses’ ascension as a prophetic type of the Rapture, or “harvest,” of the
Church.
모세의 산으로 올라감은 휴거의
타입이고 또한 추수의 모형이기도 하다.
Jubilee Harvest
희년
추수
The Jubilee is a
time of harvest because Christians and Jews, since ancient times, have
associated this once-every-fiftieth-year Sabbath with the coming of Messiah and
the “harvest of humanity.”
희년은 추수의 시기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나 크리스쳔이나 고대이후로부터
이 50년의 한번의 안식년이
메시아의 도래와 인류의 추수라는 의미와 관련된것으로
이해했다.
In the Talmud (a
collection of ancient Jewish writings and traditions), it is written that
Messiah will come in a jubilee year.
탈무드에도 희년은 메시아가 오는 해로
소개되어진다.
1 In the Book of
Daniel, it is written that “Messiah the ruler” will come after a countdown of
“seven sevens,” also denoting a jubilee year.2
다니엘서에는 통치자이신 메시아가
일곱 이래의 카운트 다운 이후에 오실것으로 예언하며 또한 희년을 언급하고 있다.
And so, Pentecost
and the Jubilee are both, prophetically, a time of “harvest” and “redemption,”
the two main themes Christians associate with the conclusion of the Church
Age.
그래서 이렇게 오순절과
희년이 둘다 예언적으로 "추수"와 "구원"의 시대이다.
이 두가지 테마는 크리스쳔들에겐
교회시대의 마무리를 의미한다.
It gets even more
interesting. The numbers of Pentecost and Jubilee (forty-nine and fifty), point
to a conclusion as well. Every Bible-reader knows that “seven” is God’s number
of completion.
이제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
오순절과 희년의 숫자( 49 와 50) 도 결말을 동일하게
지적한다. 모든 성경을
읽는자들은 7이 하나님의 완벽한 수임을 알고 있다.
Thus, seven sevens,
or forty-nine, as in the respective countdowns to Pentecost and Jubilee, denote
ultimate completion.
이렇게 7x7 (49)는
(둘다 오순절과 희년의 수) 궁극적인 완전함을 상징한다.
The number “fifty”
in Scripture, as in the day of Pentecost and year of jubilee, signifies what is
full or complete.3
성경에서 숫자 50(오순절과
희년의 수)은 충만함과 완벽함을 의미한다.
And so, together,
the numbers forty-nine and fifty denote something full, complete, or
ultimate.
그리고 함께 49와 그 다음의
50은 무언가 가득차고 완벽하고 궁극적인것을 말한다.
Question: What
expresses fullness or completeness even better than a fiftieth day or fiftieth
year?
질문 : 무엇이 50번째
날과 50번째 해 보다 더 충만함과 완벽함을 표현할수 있을까?
Answer: a fiftieth
day within a fiftieth year—a “fifty within a fifty.”
정답 " 희년의 해 안에
존재하는 50번째 날 "50안의 50"
(역자주 : 희년안에 존재하는
오순절은 50번째 해이면서 동시에
초실절 이후의 50일째
날이기도 하다.)
A number within a
number reminds us of a fractal, which is a self-similar, repeating pattern or
mathematical set found in nature.
숫자안의 숫자는 우리에게 프랙탈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동일한 모양들이 반복해
서 패턴을 가지게 하는데
자연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Think of a
snowflake.
눈송이를
생각해봐라
Now imagine that
snowflake is comprised of smaller, identical, “snowflakes.”
이제 동일한 눈송이가 동일한
눈송이로 구성됨을 상상해봐라
Now picture these
smaller snowflakes being comprised of even smaller snowflakes that are,
likewise, identical in shape.
이제 이 작은 눈송이가
더 작은 눈송이로 구성됨을 상상해봐라
모양은 동일한데 더 작은
모양으로 말이다.
The result is
that, whether one is viewing the snowflake close up, as through a microscope, or
from a distance, the same shape or configuration is observed. This is a fractal.
결과는 이렇다. 누군가가 눈송이를
현미경을 통해서 관찰해보면 또는 멀리서 봐도
동일한 형태가 관찰된어진다. 이것이
프랙탈이다.
Patterns within a
pattern: notice how the same snowflake shape is repeated at a smaller and
smaller scale within the overall shape.
패턴 안의 패턴 : 어떻게
조그만 눈송이 모양이 반복되어지면서 전체 모양속에서
더 작은 것 안에서 전체적인
모습을 만드는가
Fractals are found
everywhere—in animal coloration patterns, vegetable and plant life—they even
show up in pulmonary vessels, blood, and DNA.
프랙탈은 여기저기서 발견되어진다.
-동물관련 패턴 야채와 식물들
그들은 심지어 폐속의 혈관 피
또는 dna에서도 발견되어진다.
Considering that
God is the Author of both Nature and Scripture, we should not be surprised to
find “fractals,” or fractal-like qualities, in both.
하나님께서 자연과 성경을 둘다
창조하신것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프랙탈 형상을
발견하는것을 놀랄 이유가
없다.
Thus, a fascinating
and consequential question is begged: Is it possible that the Lord was thinking
of a fractal—a “fifty within a fifty”—when He laid out the Pentecost and Jubilee
portions of the biblical calendar?
그렇다면 놀랄만하고도 또한
결론적인 질문이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이 프랙탈을
염두에 두시고 " 50년 안에 50일을 그가 오순절과
희년의 캘린더를
확정하신건가?
In other words,
might the ultimate expression of completeness, as it pertains to God’s plan of
redemption, be expressed via a Pentecost (fiftieth day) occurring within a
Jubilee (fiftieth year)?
다른말로 하면 어쩌면 완벽함의
궁극적인 표현이 , 또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벽하신
계획이 희년안에 존재하는
오순절을 통하여 완결지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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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ALM 67
시편
67장
In Leviticus, God
instructs Israel to “count off” seven weeks from the Feast of Firstfruits and
observe Pentecost.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초실절 이후 일곱주를 카운트한 이후에 오순절을 관찰하라 명하셨다.
1 From this ancient
edict stems the Jewish tradition of carefully observing each day of the
countdown, a.k.a. “Counting the Omer,”2 by saying a special blessing, stating
the day and week of the count, and reciting Psalm 67.3
오멜을 세는것으로 알려진 매일 매일의
셈은 이 고대의 칙령으로 부터 기인하는데
매일매일 매주매주를 시편 67장 을
암송하면서 특별한 축복을 말하게 된다.
Psalm 67 is
selected because in Hebrew it consists of seven verses and a total of forty-nine
words, mirroring the “seven weeks” of the Omer.
시편 67편은 히브리인들에게
일곱의 행과 총 49개의 단어로 구성되어져서 오멜의
일곱주를 반영함으로
선택되어졌다. (우리가 가진 성경이 아니라 그들의 성경이다. -역자주-)
It’s interesting to
note that of the 150 potential candidates in the Book of Psalms, the psalm
chosen to be read during the Omer-countdown turns out to be Psalm
“67.”
시편에는 총 150편의
후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를 세는 카운트 다운으로
시편 67편이 선택죄어진것은
재미있다.
It was during the
67th year of the twentieth century (1967) that the Jews returned to Jerusalem
for the first time in nearly two millennia.
20세기 들어서 67번째 해인
1967년에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두 세기 만에 처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This event, it is
believed, marked the commencement of the “seven-sevens” countdown mentioned in
Daniel:
이 이벤트는 다니엘서의 일곱이레 를
성취시킨것으로 믿어진다.
“Know and discern
that from the issuing of a decree to restore and rebuild Jerusalem until Messiah
the Prince there will be seven sevens [one jubilee cycle]…” (Dan.
9:25).
그러므로 알고 깨달으라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그 명령이 나오는 때부터
일곱 이레가 있을( 한 희년 사이클)
.....
Do you see the
dual, or connecting, patterns of “sevens”?
당신은 이중의 또는 연관된
일곱의 패턴을 발견하는가?
The Psalm-67
relationship with the Omer points to 1967.
시편 67편과 오멜의 연관성은
1967년을 가르킨다.
From this point
begins another seven-sevens countdown (a jubilee cycle) that will culminate in,
according to Daniel, an appearance of “Messiah the Prince.”
바로 이시점부터 또 다른
희년 사이클이 , 다니엘서에 따르면 , 메시아께서 결국
도래하시게
될것이다.
With this amazing
“coincidence” in mind, consider another one. Of the seven total verses
comprising Psalm 67, verse “six” states the following:
이 엄청난 우연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것에 집중해보자
일곱개의 전체 행은 다음과 같은
여섯개의 상태를 나타낸다.
“The land yields
its harvest” (v. 6).
땅은 그 소산을 낼
것이고
“Six” is the number
of the final millennium of the age. A “harvest”—as in a resurrection or
Rapture—is what is set to occur at this time.
6은 이 시대에 시대의 마지막
천년의 숫자이다.
추수는 (부활이나 휴거)는 이
시기에 발생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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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
LINKING PENTECOST TO A POTENTIAL FINAL JUBILEE IN 2015-16
Firstfruits; Then
Forty-Nine Days Till Harvest
다양한 관점 : 오순절을
2015년 부터 2016년의 마지막이 될수도 있을 희년으로
연결시키기 : 초실절부터
수확까지 49일
According to
Leviticus, the wave offering at the Feast of Firstfruits begins a forty-nine-day
countdown that culminates in a “harvest” on the fiftieth day
(Pentecost).
레위기에 따르면 초실절
절기의 흔드는 제사는 49일 이후의 50번째 날인 오순절
의 수확을 완성짓게
된다.
According to
Daniel, the Jewish return to Jerusalem in 1967—a type of prophetic
“firstfruits”2—began a forty-nine-year countdown that may culminate in a
“harvest” in the fiftieth year (Jubilee).3
다니엘서에 따르면
1967년의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 처음열매의 예언적인 성취였다. - 그로부터 49년이 지나서 50번째
희년에 이르는 추수로 연결되는
(역자주 - 예루살렘의 회복과
초실절을 비유했으며 그 이후 50년째의 희년을
오순절의 성취로 연결하고
있음)
Thus, the presumed
jubilee cycle beginning in 1967 mimics the template established by Pentecost:
firstfruits/countdown of forty-nine/harvest.
이렇게 미리 예정된 희년
사이클에 맞춰서 1967년에 시작되어서 오순절로 표현되는
사이클의 모방이다. :
처음열매 로 추수까지 이어지는
Blood Moons After a
Countdown of Forty-Nine
49년의 카운트 다운 이후의
블러드문
It was following a
countdown of forty-nine, on a fiftieth day (Pentecost), that Peter cited a
prophecy about blood moons in the last days:
그것은 49년의 다음의
50번째날(오순절) 베드로가 마지막날에 대한 예언을 한것을
상기시킨다.
“Peter, standing up
with the eleven, raised his voice and said to them, ‘Men of Judea and all who
dwell in Jerusalem....this is what was spoken by the prophet Joel:….The sun will
be turned to darkness and the moon to blood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glorious day of the Lord’” (Acts 2:14, 16, 20).
그때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아, 이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으니 내 말에
경청하라.
이것은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바니
그 위대하고 찬란한 주의 날이 오기전에
해가 흑암으로 , 달이 피로 변하리라
It was following a
countdown of forty-nine,4 in a fiftieth year (2015/Jubilee), that we witnessed
the remarkable final occurrence in a series of exceedingly rare lunar eclipses—a
super blood moon on the Feast of Tabernacles.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해로부터
50년이 되는 2015년 에 우리는 테트라드를
유월절/장막절 유월절/장막절 에
목격했다.
120
The Book of Acts
records that there were about 120 Jews in the upper room on Pentecost when the
Holy Spirit was sent, commencing the Church Age (Acts 1:13-15).
사도행전은 120명의
유대인들이 오순절날 성령님의 강림하심으로 교회시대를
시작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Is it possible that
the “120” Jews baptized at the Church’s first Pentecost is an allusion to the
final (120th) Jubilee—the one that will mark the end of the Church Age, perhaps
also on a Pentecost?
120명의 유대인들이 마지막
120번째 희년 사이클을 의미할수 있으며 교회시대의
마지막을 고하게 될 것도
오순절이지 않겠는가?
David
다윗왕
Tradition holds
that King David was born on Pentecost and also died on a Pentecost, seventy
years later.
유대전승에 따르면 다윗왕은 오순절에
태어나서 70년이 지나서 오순절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The number seventy
(David’s lifespan, from Pentecost to Pentecost) is, interestingly enough, the
number of jubilee cycles that will have elapsed from the time Israel was
originally birthed as a Nation (Sinai) to the end of the age, or final
jubilee.
여기서 숫자 70은( 오순절부터
오순절까지의 다윗왕의 일생) 충분히 재미있는데
시내산에서 처음으로 태어나서
세기말의 희년의 해까지 총 70번의 희년의
사이클을 가지는 유사성이
있다.
5
Thus, there exists
a link (via the number seventy) between Pentecost and the Jubilee, which points
to the end of the age:
이렇게 희년과 오순절은
세기말이라는 유사성을 가진다.
Seventy
Pentecosts from David’s beginning to his end.
다윗왕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70번의
오순절
Seventy jubilees
from Israel’s beginning to the end of the age.
이스라엘의 출생부터 시대의
끝까지 70번의 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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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LUSION AND
SUMMARY
결론과
요약
In this study we
have highlighted numerous scriptural elements (themes, types, and links) that
support a Pentecost Rapture.
이 연구에서 우리는 오순절 휴거를
지지하는 수많은 영적인 요소들을 주목해봤다.
We noted how
Pentecost is one of three harvest feasts; how a number of
typological
passages point to
the spring/summer season; how the numbers of Pentecost (forty-nine and fifty)
denote fullness, or completion.
우리는 어떻게 세개의 추수절기중
하나인지 : 어떻게 예표론적인 관점에서 봄/여름 절기를 가르키는지 : 오순절의 숫자가 충만과 완벽함의 예인지
탐구해봤다.
One of the most
important Pentecost-rapture associations was that of the “wedding,” via
Sinai.
오순절과 휴거의 가장 중요한
유사성은 시내산에서의 "결혼식"이다.
It’s noteworthy
that no similar association exists in the case of the Feast of
Trumpets.
나팔절에는 주목할만한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것이 중요하다.
In fact, the only
event Trumpets is directly linked to in Scripture is the rebuilding of the
Temple altar and reinstatement of sacrifice that occurred upon the Jews’ return
from Babylonian exile (Ezra 3:1-6).1
사실은 성경에서 나팔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부분은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부터
해방되어서 성전을 재건하고
희생제사가 다시 시작된 부분이다.
An especially
eyebrow-raising portion of our study was that which focused on the shared
“template” (numbers and themes) between Pentecost and the
Jubilee.
특별히 우리의 스터디중에서
양미간에 주름이 지어질 정도의 부분은 오순절과
희년의 숫자로서의
유사성이다.
The notion of a
“fifty within a fifty” and “ultimate completion” raised some intriguing
questions about the prophetic significance of the Pentecost occurring within a
final jubilee year.
50안의 50이라는 개념이
특별히 마지막 희년에 오순절 속에서 발생한다는게
예언적인 중요성에서 정말로 중요한
질문을 야기 시킬수 있을것이다.
With the above and
other observations presented here in mind, questions like the following
arise:
이 모든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Is it possible that
Christians who study the ancient festivals have been too quick in assuming
Pentecost is fulfilled, making the feast next in line (Trumpets) the Rapture
feast?
유대절기를 연구하는
크리스쳔들이 너무나 쉽게 오순절이 전부 성취되어진 절기로
이해하고 다음에 성취될 절기를
나팔절로 속단하는게 아닌가?
Is it possible that
the fall feasts have more to do with Israel and the end of the Tribulation than
they do the Church and the end of the Church Age?
가을절기는 교회보다는
이스라엘이 환란의 마지막에 성취시키는 것이 더 타당한것이 아닌가?
Is it possible, and
also mathematically logical, that the Church Age would end on the same day it
began, namely Pentecost?
교회시대가 그것이 시작한 그
동일한 날에 시작과 끝을 맺는것이 논리적인것이
아니지
않을까?
These are just
questions.
이것들은 단지 질문들이다ㅏ.
(탐구의 영역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not to provide the answers or to advance one rapture scenario over
another.
이번 탐구의 목적은 어떤
휴거 시나리오 위에 이것을 놓고자 함이 아니다.
At this point, it
seems more apparent than ever that the Lord is leaving the particulars at least
somewhat a mystery.
이점에서 주님께서는 미스테리함 보다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 오신다고 주목하는게 더 타당해보인다.
Truly, no one knows
the day or hour.
진실로 그 어떤이도 그날과 그
시를 모른다.
Despite the
lingering mystery surrounding the day, we have the Lord’s assurance that we are
not in darkness concerning the general timeframe (1 Thess. 5: 1,
4).
그 날에 대한 오래동안 지속된
미스테리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타임프레임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둠속에 있지 않을거라고 주님의 보장을 가지고
있다.
All indications
are that we are in a jubilee year.
모든 징고가 우리가 희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Just months ago, we
witnessed the final in a remarkable series of solar and lunar eclipse-signs on
feast days.
불과 몇달전에 우리는 해와달의
주목할 만한 징조를 목격했다(테트라드)
A deluge of other
signs in the heavens and in the earth abound, daily.
하늘과 땅에 대한 다른 징조들도
매일 쇄도하고 있다.
Finally, and most
importantly, it has been “seven sevens,” or forty-nine years, since the Jews’
prophetic return to Jerusalem (Dan. 9:25).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It’s time to be
looking up, regardless of the calendar date.
날짜와 관계없이 우리의 구원인
오시는 하늘을 바라볼 때이다.
Our redemption is
drawing near.
우리의 구원이 매우 가까이
있다.
Very, very near!
매우 매우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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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음... 절대 단정적으로 말해서는 안되겠지만 가능성은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