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큰 스승, 큰 한글 지킴이 눈뫼 허웅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이 대로
눈뫼 허웅 교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신 지 벌써 한 해가 다 되었습니다. 이 땅에 살아 계실 때 남달리 한글을 사랑하시고 한글을 지키고 빛내려고 애쓰시던 눈뫼 스승님, 하늘나라에서 잘 계시겠지만 안부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전히 한글과 우리말이 어렵기에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고 바른 길을 알려 주시길 매달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은 이 땅에 안 계십니다. 돌아가신 지 한 돌을 맞이해 선생님을 기리는 문집을 낸다기에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고도 이런 저런 일에 정신 없이 매달리다 마감 날이 다 되었습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한글날 국경일 운동 자료집도 다 만들었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선생님 추모 글을 마무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이 글을 씁니다. 이제 선생님과 얽힌 추억을 더듬으며 선생님이 이 땅에서 몸과 마음을 바치시던, 한글과 우리말을 지키고 빛내는 일을 이어서 더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렵니다.
제가 눈뫼 선생님을 알게 된 때는 60년 대 국어운동대학생회 활동을 할 때입니다. 선생님께서 전국국어운동대학생회 지도 교수님을 맡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동국대학 농대를 다녔지만 40여 년이 다 된 오늘까지 선생님에 대한 학생 때 추억이 있습니다. 언젠가 가을에 구파발 쪽 북한산으로 국어운동학생회 회원들과 들놀이를 갔을 때였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포크 댄스를 추시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멋진 분이라는 생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시골학생이라 그 춤을 잘 몰라 춤추기를 망설였는데 선생님은 학생들과 잘 어울리셨습니다. 점잖으신 교수님께서 춤추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용기를 내어 재미있게 논 추억이 있습니다. 저도 선생님 같은 멋쟁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한번은 동숭동 서울 문리대 앞 식당에서 꼬리곰탕을 사주셔서 맛있게 먹은 기억입니다.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 주최로 문리대에서 가끔 각 대학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체육대회인지 고운 이름뽑기 행사였는지 모임이 끝나고 식당에 갔을 때 찐한 꼬리곰탕을 사주셨습니다. 객지에서 고학을 하며 공부하는 제게 국물도 맛있었지만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와 가르침이 푸근하고 더 맛있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과의 진짜 추억은 시도교수님 때보다 한글학회 회장님으로 계실 때 함께 모시고 한글 지키기 운동을 하면서 많습니다. 80년 대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를 만들고 제가 동문회 회장을 맡으면서 선생님을 모시고 많은 일을 했습니다. 한글을 짓밟으려는 무리들이 싸움을 걸어왔고 한글과 한글학회는 힘들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은 우리 젊은이가 고마우셨는지 남달리 저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저도 선생님을 잘 따랐고 저와 선생님은 손발이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제가 선생님의 서울대 제자인 걸로 착각한 분도 있었습니다.
한글학회 이사 한 분도 저를 그런 줄 알았다고 하신 일이 있지만 동아일보 기자 분도 저를 허웅 교수님 제자로 본 일이 있습니다. 1991년 동아일보에 육군 중장 출신인 이재전(한자교육진흥회 회장)님이 초등학교 한자교육을 주장하는 논단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공병우 박사님이 그의 글을 읽고 저에게 반대 논단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 즈음 제가 한겨레신문에 한글날 공휴일 제외를 반대하는 논단을 쓴 일이 있는데 그걸 본 뒤부터 공 박사님은 저보고 글을 잘 쓴다며 신문에 글을 자주 쓰라고 하셨습니다. 외솔 선생님이 살아 게시면 그런 걸 보면 가만히 있지 않으실 터인데 지금 외솔 같은 사람이 없다고 재촉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아일보에 반대 논단도 실어달라고 전화를 했더니 글과 사진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사로 찾아가니 문화부 차장이란 사람이 저를 반갑게 맞으며 "저도 허웅 교수님 제자입니다. 애쓰십니다. 허웅 교수님께 안부 전해주시지요"하면서 저를 자신과 같은 동문이고 허웅 교수님 제자로 생각하는 거 같았습니다.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장이라니까 당연히 그런 거로 봤는지 모르나 거기서 아니라고 하면 제 글을 안 실어 줄까봐 아니라는 말을 못한 일이 있습니다. 친절한 그 분의 마음을 어색하게 만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기도 했고요.
저는 눈뫼 선생님 덕을 많이 보고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글학회와 눈뫼 선생님이 저를 사랑해주시다가 오해를 당한 일도 있습니다. 10여 년 전 학술원이 대단한 업적도 없는 한자파 교수들에게 해마다 학술원상을 주기에 따진 일이 있는 데 그 때 한자파들은 그 일과 아무 관련 없는 한글학회와 허웅 교수님을 의심했습니다. 허웅 교수님이 저를 앞세워 자신들을 괴롭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바로모임의 젊은이들은 한글을 살리고 지키려고 한글학회도 귀찮게 했음을 밝힙니다.
또 제가 꾸리는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에서 한자파를 우리말 훼방꾼으로 뽑으니 아무 관련 없는 한글학회와 허웅 회장님까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내용증명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선생님이 속상해 하실까 걱정했는데 선생님은 오히려 힘내라고 저를 격려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흰눈이 덮인 큰 산 같은 어른이셨습니다.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중심으로 한글 지키는 일을 20여 년 함께 하면서 제가 본 눈뫼 선생님 모습을 그려봅니다.
선생님은 학자이시지만 큰 한글 지킴이셨고 겨레와 나라를 끔찍하게 사랑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건 학자란 거보다 선생님께서 국어운동을 열심히 잘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선생님께 국어 지식을 직접 배운 건 없어 선생님의 학문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얼마나 우리 한글을 지키려고 애쓰셨고 겨레와 나라를 걱정하셨는지 잘 압니다. 한글학회 회장이시기 때문에 마지못해 한글 지키는 일을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몸과 마음을 바치셨습니다. 한글과 겨레를 걱정하시던 모습을 보며 감동해서 가슴이 짜릿한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한글을 지키고 우리말 살리는 일을 민족독립운동이라 생각했고 국어독립운동이라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애국 애족 운동도 관심이 많아서 하고 싶은 일이 많으나 힘이 모자라 발벗고 참여하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친일파 청산운동은 열심히 한 일이 있습니다. 친일파 청산운동을 하는 반민족문제연구소(소장 김봉우) 초창기에 김봉우 소장이 부탁해서 제가 그 후원회 조직위원장으로 일한 일이 있습니다. 한자혼용은 일제 찌꺼기이고 한자혼용파가 현대판 친일 세력이라 본 저는 친일 찌꺼기를 씻어 내는 일이 한글과 우리 겨레가 일어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한글단체 여러 어른들도 그 일에 참여해주실 걸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다른 분들은 제가 엉뚱한 일에 손대는 거로 보셨으나 눈뫼 선생님은 한마디로 제 뜻에 찬성하시고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꿀 때 고문을 맡아주셨고 그 뒤 적극 그 운동을 밀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머리가 좋은 천재이셨고 뛰어난 국어운동가이셨습니다.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에서 한자파와 상대로 싸우는 일과 정부와 국회에 한글을 살리는 건의나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 때 그 논의를 하는 데 선생님의 예리한 판단력과 지도력이 큰 힘이었습니다. 이사회를 하면 제가 가장 젊은 젊은이였습니다. 제 위로 최기호 교수님과 오동춘 박사님이 젊은 분이셨고 안호상, 공병우, 안송산, 주영하, 전택부, 한갑수, 허웅, 문제안 선생님들을 비롯한 거의 7-80대 어른 들이셨고 김계곤, 이현복, 박종국 선생님 같은 분들도 그 어른들에 비하면 젊은 측이었습니다. 모두 훌륭한 어른들이시지만 나이가 많으셔서 일을 벌이는 걸 힘들어하신 편이었습니다.
그 때 한글날 공휴일 빼는 일부터 시작해 한자파가 낸 헌법소원, 조선일보와 한패가 된 한자 복권운동, 한자병용정책추진, 한글전용법 폐지법안 반대운동 등 한자파와 상대한 큰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관련 대책 회의를 할 때 주제와 관련 없는 말씀을 하시면 선생님이 설득하시고 교통정리를 하셨습니다. 저는 젊은이로서 공격이 가장 좋은 방어란 생각을 가지고 강력하게 싸울 걸 자주 제안했는데 그 때마다 눈뫼 선생님이 들어주시고 젊은이들 뜻대로 결정하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젊은 사람도 돌아가는 흐름을 모르고 엉뚱한 말을 하는 데 선생님의 운동감각과 세상을 보는 눈은 정확하셨고 매우 젊으셨습니다.
10여 년 전 조선일보가 한자파와 손잡고 한자복권운동을 할 때 그 비판 대회를 열자고 했고 말씀할 분을 한글관련 학자만 할 게 아니라 다른 사회단체나 재야 민족운동 세력 인사도 모시자고 제안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이사회에서 국어운동학생회와 바로모임 들 제가 관여한 단체의 젊은이들 뜻을 원로들에게 알리고 반영하는 일을 했습니다. 젊은이들이 백기완선생을 모셔보자고 해서 회의 때 말씀드렸더니 다른 분들은 선뜻 찬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너무 과격한 분이라고 꺼리며 눈뫼 선생님 눈치를 보셨습니다. 눈뫼 선생님은 저를 믿고 찬성해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한글문화단체가 한자파의 음모를 방어만 한 게 아니라 국회의원 한글 이름패 쓰기운동, 한글날 국경일 추진 운동 들 공격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그 때마다 힘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는데 선생님의 지혜와 예리한 판단력으로 무난하게 추진되었습니다. 힘든 일을 앞에 두고 안 될 거로 생각하던가 꽁무니를 빼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머리가 좋으셨기에 길이 보였고 우리가 이긴다는 확신이 있으셨기에 한글운동을 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자시지만 훌륭한 운동 지도자이셨습니다. 무슨 일이 중요하고 또 누구 말이 들어주어야 하는 지 알았고 듣기만 하고 마는 게 아니라 실천하셨습니다. 지도자는 국민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그 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는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귀와 추진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저는 젊은 한글운동가들의 소리와 한자 쪽 정보와 소식을 선생님께 자주 말씀드리고 우리도 일을 벌리자고 건의했습니다. 안호상 회장님은 뵙기 힘들기에 허웅 회장님께 말씀드리면 귀담아 듣고 행동에 옮기셨습니다.
제가 요즘 일본의 마이니찌신문 서울 특파원을 지낸 시게므라 도시미츠가 쓴 '한국만큼 중요한 나라는 없다"란 책을 읽다가 1998년 한국의 외환위기가 왜 왔는가라는 내용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도자로서 자질을 문제삼는 글을 읽었습니다. 외환위기 전에 한국 학자와 관료와 언론은 대통령께 그 대책을 세워야 함을 말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 대책회의 때 40여명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한 뒤 듣기만 하고 "수고 했다. 참고로 하겠다"고 말하고 그냥 나가버리고 아무 실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계화란 헛구호만 큰소리로 외치며 영어 조기교육이나 시행해 겨레말을 죽이고 경제까지 망친 김영삼 전대통령이 허웅 회장님의 지도력을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교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옳지 못한 일을 보고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함께 걱정하고 바로잡으려는 꼿꼿한 선비이셨습니다. 정치인 홍사덕 전 의원이 15년 전 문화방송 라디오를 진행한 일이 있는 데 눈뫼 선생님을 초대손님으로 모시고 "이 시대 마지막 선비 허웅 교수님을 모셨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걸 들었는데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따뜻한 어른이고 우리들의 길잡이셨습니다. 저를 만나면 제가 생업과 가정을 제쳐 두고 너무 한글운동에 매달리다 집안 일이 잘못될까 염려하셨습니다. 고생만 하고 아무 보답을 못해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공병우 박사님도 그런 걱정을 해주신 일이 있는데 눈뫼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이는 힘을 보탤 생각은 하지 않고 이상한 눈으로 보며 힘 빠지는 말을 하는 데 선생님은 힘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제자나 후배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며 무슨 걱정을 하는 지 점쟁이처럼 아시는 거 같았습니다. 저 뿐이 아니라 제자나 후배들 모두 속마음을 들어다보시고 챙기셨습니다.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어른이 어떻게 해야 되고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고 썩은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한글 문제뿐 아니라 세상문제에도 밝으셨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 세계화를 외치며 영어 조기교육을 하겠다고 떠들 때 "나라가 망하려나 보다. 모두 얼빠져 있어!"하시며 한숨을 쉬셨습니다. 신문과 방송이 외국말을 마구 퍼뜨리는 걸 보시고 "일생을 국어공부만 한 나도 한국 언론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 힘드니 일반인은 어떨까? 내가 학생들을 잘못 가르쳤어!"하시며 스스로를 질타하셨습니다. 당신이 가르친 대학 제자들이 그런 일에 앞장서는 것을 보면서 교수였던 당신 탓으로 여기셨습니다. 민족 문제고 나라의 경제, 교육문제이고 돌아가는 통속을 다 아셨고 선생님의 말씀은 옳았습니다.
나라와 세상이 어떤지 한자파와 우리가 어느 현상인지 다 아시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아시는 데 주위에서 따라주지 못하니 힘들어하시고 짜증도 내신 일도 있으십니다. "한글학회와 내 얼굴만 바라보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하면 좋겠다."고 불평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다른 한글단체와 그 대표들이 당신의 판단력과 안목을 못 따라오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돌아가실 날까지 크게 흔들리지 않고 꼿꼿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도 며칠 전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국어운동 동지들에게 짜증을 낸 일이 있는데 선생님의 그 때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생각하며 흔들리지 말고 잘 해야겠다고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이제 한글 운동 선생님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고 선배님들이 늙으시니 제 어깨가 무겁고 일은 많은 데 제 힘은 딸리니 답답합니다. 눈뫼 선생님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짐작이 가고 선생님의 빈자리가 너무 크고 허전합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선생님을 많이 괴롭힌 사람이었음이 새삼 느낍니다. 한글 문제가 있으면 선생님을 찾았고 힘든 일을 벌이자고 졸랐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대로 선생님을 모신다고 마음먹은 게 그거였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한 2년 동안 제가 서정수 교수님과 한글인터넷주소 운동을 하느라고 선생님을 자주 뵙지 못하다가 그 일을 마무리하고 지난해 10월 말경인가 문광부에 들러 한글날 국경일 추진문제들을 의논하고 허웅 회장님과 앞으로 한글단체가 할 일을 말씀드리려 학회로 들렀더니 아직 출근 전이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유운상 사무국장이 "요즘 회장님은 아침도 안 드시고 출근하셔서 근처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혼자 사 드신다"고 해서 현관에서 기다리다가 잘 드신다는 회덮밥을 사드리면서 가슴이 찡했습니다. 이렇게 사모님이 돌아가신 뒤 힘들어하시는 데 아무 위안이 되지 못하고 거기다가 또 힘든 한글날 추진 일을 말씀드려야 하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젊은 제가 더 열심히 뛸 터이니 선생님 건강만 생각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리면서 그간 여러 경위를 보고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이 있으나마나니 이 선생이 하는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과 한글문화연대와 한글학회가 힘을 모아 일을 하는 길밖에 없소.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말고 움직일 수 있는 단체가 힘을 모으도록 이 선생이 앞장서서 다시 잘 해보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제가 마지막 귀찮게 해드린 일이고 마지막 뵌 일이며 말씀이었습니다. 그 날 느낌이 이상해서 학회 현관 주시경 선생님 동상 옆에서 선생님과 둘이 서서 사진도 찍어놨습니다. 그 날 처음으로 스승님께 밥 한 그릇 사드린 게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그 뒤 이봉원, 김두루한, 진용옥교수님과 함께 용인 교수님댁으로 한번 찾아뵙자고 의논만 하고 가 뵙기도 전에 병원에 입원하셨고 그 길로 님은 떠나셨습니다.
보기 드문 큰 어른이신 선생님을 모시고 한글운동을 한 건 제 인생에 큰 영광이고 보람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게 안 보이게 제게 많은 걸 가르쳐주셨고 분에 넘치는 사랑과 칭찬도 들어서 힘든 줄 모르고 선생님만 따르기만 하면 되었는데 선생님이 안 계시니 제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야 하게 되어 외롭고 힘이 듭니다. 바라만 봐도 우러러 보이고 든든하던 선생님의 가르침과 은혜 잊지 않고 선생님의 뜻을 이어서 한글 지킴이, 겨레사랑의 길을 죽는 날까지 갈 걸 다짐합니다. 선생님의 거룩한 삶을 거울삼아 선생님께서 못 다한 뜻을 이루도록 열심히 뛰겠습니다. 하늘에서도 제게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2005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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