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살아온 인생길 -----
깊은산속에 외딴집 하나가있다.
그집은 오갈때가없는 어느 한가족이 산지기로들어와 살고있는데.
그가족들은 무엇보다 한끼의 끼니와 처절한 생존의전쟁을
치러야만하는 아주많이 가난한 대가족이였다.
학교....배움....맛있는것...좋은이쁜옷...생각조차할수없고
상상조차도 할수없는처지에 오로지 한끼의 식사가
가장 현안이였고 걱정이였다.
남들이 농사짓어서 수확을 하고나면 온가족은
이삭줍기에 목숨의사활을 걸어야했고 온동네의 고구마밭과
감자밭을 다뒤지며 한겨울을 대비하기위해 이삭줍기에
온가족의 생명을걸고 밤낮없이 이삭줍기에 온통 매달려야만했다.
그집과 그가족이 내어릴쩍의 나의집이였고 내부모형제였다.
국민학교를 온형제.자매가 다니긴했으나 등교하지못하는날이
더많았고 오나가나 앉으나서나 배고픔에 시달려야했던 나는
어린시절에 가난이란것에 한이되었고 배우지못한것이
가슴에 못이돼서 어린나이에흘린 눈물에강은 저하늘에
은하수만큼이나 깊고넒은 눈물의강이되었다.
꿈도 참 많았던 어린시절!
한참먹어야할 때에 배가고파 허기진배를 움켜지고 산과들로나가
머루...다래..깨금..버들강아지...나물...칡뿌리...아카시아꽃...
진달래꽃...찔레순...솔잎...소나무껍질...등등
그것들이 어린시절에 주식이였고 배고픔을 달랠수있었던 끼니였다.
아침에 고구마나 감자가 식사였고 그것도 한사람당 3개씩의
배당받아서 먹어야했다.
점심이란것은 상상할수도없고 점심이란것을 먹게된건
내가 사회생활을하면서 먹게되었다
내가 국민학교5학년때였다.
나는 소년체전에 육상선수로 출전했으나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못한 나는 3000미터경주에서 완주하지못하고
경기도중에 육상그라운드에서 졸도하고말았다.
지금도 아쉬운건 반바퀴만을 남겨둔채.....내가 선두였는데....
나의 학력은 국졸이 전부이다.
어린시절!
꿈도많고 이슬도많았던 나의꿈은 유명한 시인이되는것이 꿈이였고
또하나는 국가대표 마라톤선수가 되는것이였다
그러나. 워낙에 가난한 가정형편때문에 나는 중학교문턱도
들어가지못하고 어린나이에 사회에 뛰어들수밖엔없었다
난. 국민학교를 졸업한 다음날 단돈.2030원을가지고 가출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사회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않했고
상상할수도없는 고통은 끝날줄을몰랐고 인간의인내를 시험하는듯했고
늘 언제나 따라다니는 배고픔은 내곁을 떠날줄 몰랐다.
농공장에 취업한 나는 스승으로부터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하루의눈을뜨면 걱정부터해야했다.
가장먼저 떠오르는것이 오늘은무슨일로 무엇으로 얼마나 얻어맞아야
하루를 무사히 보내나하는것이 걱정이였다.
월급도주지않고 끼니도 재대로주지않는 상황에서 왜그리도
말끝마다 온갖 닥치는대로 두들겨패는지......
스승은 내가 오갈곳이없다는 이유하나로 말끝마다 흉기로...주먹으로...
닥치는대로 인정이란곤 찿아볼수없이 무차별 때렸다.
그래도 나는 도망칠수가 없었다.
기술은 최고였던 스승이였기에 그스승아래에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최고의 기술자가 되고싶었다,
몇년동안 그렇게 병신같이 얻어터지며 기술하나만은 재대로배우고
터득하여 그분야에서는 인정받는 최고의기술자가된 어린꼬마였다
그렇게 어린시절을 보내던나는 우연하게 어느한 신문을 보게됐다.
그신문에는 공무원채용공고의 안내문이있었고 자격란에는
학력제한없음 이란것에 자신감을 갖고 나홀로 독학을 하기시작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얻어 맞지며 기술을배우고 밤에는 홀로공부를시작했다.
내이름 석자도 한문으로 알지못하는나는 그추운한겨울의 엄동설안에서도
반바지와 반티만을입고서 농속에서 웅크리고 공부했다.
그땐....참....많이도 배고팠고 겨울마다 날은 왜그리도춘지....
그렇게 노력한지 5년이 흘러 내나이가 국가공무원시험에
응시할수있는 나이가됐다.
나는 기대하지않고 공무원시험이 어느정도의 수준인가하고 경험삼아
공무원의시험이 난이도가 어느정도인지를 알기위해서 시험에
원서를내고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단한번에 응시로 당당하게도 국가공무원이 되었고
9급기능직이지만 긍지와보람을갖고서 근무를했다.
그것도 기쁨소식.슬픔소식를 전해주는 집배원이였다.
우체부아저씨가 아니라 우체부총각으로 산넘어 외딴집도가고
물건너 두집매도가고 논뚜렁 밭뚜렁길따라 산속오솔길도가고
구석구석를 소식을들고 다니며 그래도 국가의 한구역을
내자신이 담당하고있다는 생각에 자부심도있고 마음이
뿌듯하며 내적성에도 어느정도로는 어울리고 맞는것같아
난 우체부아저씨로 내평생다 바치겠노라고 늘 생각하며
열심히 근무했으며 그시절 시골동네엔 이쁘고....아름답고
지적인 아리따운 아가씨들도 거의 집집마다 한두어명씩은있어
시골 촌뜨기인 난 순진하기가 이를때없는 순맥같은 총각이어서
우체부아저씨라는 이미지때문에 아가씨들과에 거리감이없다보니
수많은아가씨들과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게 너무좋았던것이
내가 우체국에들어가 첫 초년병시절이엿다
어느한 겨울이 시작됐다.
그해겨울은 참으로 눈이 참많이왔다.
시골산길을 내려오던중에 그만 절벽아래로 떨어져 사경을
헤매이는 크나큰 사고를당했다
사고직후....의식불명이 되기전에 난 죽을것만같은 생각이들었다
아....아직 애인도 없는데.....아니 결혼도못햇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그토록 먹고싶은 돼지고기랑 짜장면...더먹어야되는데...
그생각만 난다 그이후 눈을뜨니 병원이였고 이미 3일째란다
병원에서 긴긴 6개월이란 시간을 보내고서야 퇴원했지만
형편이 너무도어려운 처지인지라 쉴수가없어 곧바로다시 우체국에
복귀하여 근무를하던중에 담당하던 시골동네에서
아름다운 한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다.
지금에 내사랑하는 아내가된 그아가씨! 천년묵은 내사랑 독한 여우다.
성질하나는 개떡같으고 자존심하나만은 쇠덩어리이며 키는 난쟁이
나이타돌만한 아가씨가 뭐그리도 이쁘다고....아내는 현명하고
생각이깊은 성품에 여성으로써 난 반햇다....
우린 하루도 거르지않고 매일매일 만나서 데이트를햇다
내가 연애편지를써서 내가 배달하고.......뭐하는짓인지...원...
우린 그렇게 사랑을 키우다가 어느날 갑작기 아내의집에
단독직입적으로 쳐들어가 부모님께 (훗날.장인/장모님) 단판을짓고
결혼승락을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행동으로 취했다
그리하여 내뜻대로 멋지고 아름답고 나에겐 과분한 아내를
얻었고 그이후 곧바로 결혼을했다
내게 참많은 힘이돼주는 아내이다.
물론 지금도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기대고 쉴수있는 포근한아내이다.
아내를 고생시킨 지난날을 생각하면 애리한 비수가되어 아픔이 밀물처럼
밀려와 한밤중에 남몰래 많이운다
나이는 나와같이 동갑인데 때론 친구처럼 대해주기도한다.
우리부부는 아들과 딸을두고서 가족계획을했다.
아들녀석은 완전히 나를 꼭 닮았다.
아주 멋지고 귀엽고 훗날에 한가닥은 할놈이였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전생에 많은 죄가있나보다.
내행복의전부였던 내자식하나가 내곁을 먼저 떠나갔다.
아들녀석이 뺑소니교통사고로 그만 우리곁을 떠나가고말았다.
아내와나는 기나긴세월을 고통속에 헤어날수가없었다.
잠을잘수가없었고 어떤것도 먹을수가 없었다.
범인을 찿아나선지 몇개월이 흘렀지만 도무지 찿을길이없었다.
직장도 그만두고 밤낮없이 범인만 잡기위해 나는 미쳐있었다.
있는돈 없는돈모두 탕진했다.
그러는동안에 우리가정은 거의 파탄에 이르었고
또다시 끼니걱정에 집세도 못내는 거지가됐고 결국엔 거리로내몰렸다.
우린 굶기를 밥먹다시피했다.
거리로 내몰린 우리가족은 이친구집으로 저친구집으로
전전하며 인생을 포기할 생각도 없지는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겐 남아있는 딸아이가 있어 슬픔에만 잠겨있을수가없었다.
할수없이 나는 다시 우체국에 복귀를하여 이를 악물고 낮에는 편지를
배달하며 우체국에서 열심히 근무를하고 저녁과밤으로 장사를했다,
아줌마~~엑스포공식과일!!!
시장통골목길에서 디스코~~막춤~~~고고~~~탱고~~~아리랑춤~~~
원맨쇼에 가까운행동을하며 목청터지라 외쳤다
이쁜 아줌씨는 하나더~~~~
날씬한 아줌씨는 두개더~~~~
목이 터져라 외치고 상인들과도 살벌한 자리다툼 싸움도하며
가난이란 울타리를 벗어나고싶은 마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길바닥에서 과일장사도하고 아르바이트도 아무거나하며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고싶은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비온뒤에 땅이 더욱 굳어진다고했던가?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격은나는 모진 비바람속에서도 두눈을
똑바로뜨고서 앞만보며 뛰고뛰었다.
남들은 배불리먹고 집에서 가족들과함께 행복한 웃음소리내며
행복이란것을 맛볼때 나는 물집잡힌 발바닥의고통에 쓰라린
쓴맛으로 훗날을 기약하며 한겨울에도 땀으로 뒤범벅되어
새벽에 겨우 집에들어와 허리를 필수가있었다.
우체국보험 이란것이있다.
나는무려 우체국보험을 15년연속으로 1등을했다.
우체국에 근무를하면서 우체국보험을 모집하는것인데
모집하면 수당이나온다.
나는 그수당을 벌기위해 휴일도없이 근무했다.
편지배달하면서 보험모집하며.수금도하며 고객관리도하면서
저녁으론 과일도팔며 정말 열심히살았다.
정말 열심히 뛰고.....달리고.....쉬지않고 뛰엇다
내가속한 직원들의수는 무려2800명중에서 15년연속으로 보험모집왕을
차지하며 고객관리대상을 역시 15년연속으로 1위을했다.
체신청지시로 금융실적이 저조한 우체국을돌아다니며 강의도수없이햇다
이렇게 노력한결과로 우체국생활 20여년만에 작은땅도사고 내집마련도했고
크지는않지만 아파트에서 행복함을맛보며 지금에 늦둥이 딸아이를
다시 복원수술로낳아서 행복를 누리고있었다.
그러나 이제것 지금까지의 내가 살아온 인생의길은 평탄한것이고
아주 지극히 행복한 삶이였다.
바로 다쳐온 나의 삶은 참담하기가 이를때가없고 황당하고
견딜수없는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같은 삶을 파란만장한 삶이라했던가?
인생! 삶!.....
그누구도 한치의앞을 장담해서는 아니될것이다.
함부로 인생에대하여 논하지말라고 나는 말해주고싶다.
아무리 자신에 인생이고 삶이라지만
인생의팔자!!
자신인생!!.. 어떻게 진행될지 상상이나 예측하지말라고
나는 분명히 말하고싶다.
1998년부터 2002년8월까지는 나에겐 너무나도 힘든 세월이였고
이세월의 4년이란 가혹하다못해 인간의한계를 정말 시험하는것이였다.
나는 예전에 사고로 다친곳이 재발되어 우체국을 그만두고
연금을 사업의자금으로 쓰기위해 일시불로 신청하여
퇴직금으로받아 가든을 시작하게된다.
그땐. 가족과함께 먹고살기만하면 된다는생각밖엔 큰돈을 벌을려고
욕심낸건 아니였다. 물론 잘되어서 큰돈벌면 더욱좋은거고....
그동안 피땀흘려서 모은전재산을 투자하여 대전유성에다가 땅을사고
건물을짓고 야외시설도 멋지게 꾸미고 화려하게 가든을 차려서
사업에 뛰어들어 종업원을 23명이나두고 사업에 몰두했다.
내땅에 내건물에 모든것이 내것이니 아낌없이 투자를하여
화려한가든을 만들었고 하루매출도 엄청났다.
순수익만해도 하루에 200백만원이넘었고 주말은 순수익이
500백만원이나 되는 큰기업의가든이였다.
나는 이제는 성공했다고 생각했고 매월 순수익에 절반은
내어릴쩍 가난에 시달린게 한이되어 가난한이웃들과 함께 나누어섰다.
학교에도 학용품을 매월전달했고 소년.소녀가장들과 할머니.할아버지만
생활하시는분들과 함께 나누고 정도키워가며 더없는 행복함으로성공했었다.
나머지 절반은 내가든의 시설에 계속해서 분위기시설에 투자를했고
그동안 내가힘들고 어려웠을때 신세를졌던 친구들한테도 보답을나름데로했다.
그러면서도 돈을 욕심 부리지는 않했고 돈이란 앞으로 열심히
장사해서 벌면된다고 생각했고 종업원들에게도
월급외에 성과금을 매달 지급을했다.
월급외에 기분최고수당이란 명목으로 월급외에 별도로 매월 지급했다.
그러던 97년가을.......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내친한친구가 공장을 늘린다고 금융보증을
서달라고 하기에 이세상에 독불장군이 어디있는가 하는마음으로
기꺼이 보증을 썼다. 4억6천만원짜리 담보보증을.........
이게 잘못된것이다.
1998년에 아무도 몰랐던 아엠에프사태가 터진것이다.
남들은 버티지못하고 모두 쓰러지고 부도를내고 하지만.
나는 그럭저럭 유지하는정도의 장사가 되는데. 친구는
하루아침에 몰락하고만것이다,
이친구는 끝까지 나에게 말하지않고서 자신이 해결하려한게
잘못된 결정적계기가 된것이다.
최고장 한통 받지못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해결할수가
도저히없는 상황까지 몰린 친구의울음앞에서 하늘이 무너지는걸
나는 보았고 느꼈고......참담했다.
해결할 시간조차 여유가없을때까지 진행시킨 친구가 그땐
죽이고싶을정도로 미웠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내가 알고난 이후 곧바로 경매에 넘어갔다
내땅..내가든...내아파트..모두다...
하루아침에 또다시 거리로 내몰린 우리가족은 도저히 챙피해서
대전에서는 살수가없었고 그곳이 죽기보다도 싫었다.
아는사람들을 보기도싫었고 만나기도 싫었다.
우리가족은 야밤도주를했다.
개인적인빛은 한푼도없었으나 챙피하고 왠지모르게 그곳이 싫었다.
하루아침에 몰락!
격어보지못한 사람들은 상상할수도 없을것이다.
야밤도주를 하긴했는데 어디로가야하나? 어떻게해야하나?
가진돈이라곤 잔돈까지해야 64만원이 전부이다.
딸아이의 학교는 어떻게하고 정말 미칠것같았다.
공부도 곧잘하고 저혼자 서울가서 영어웅변대회에서
입상하고 돌아오는 촉명한 아이인데....
엄마아빠말도 너무너무 잘듣고 심부름도 잘하는 착한아이인데....
나는 아이의얼굴을 바라볼수가없었다
아이에게 어렵게 말을꺼내봤다 대전에 아빠친구집에서
머물며 넌 대전에서 남으라고....그러면 학교는 다닐수있으니
아빠친구와 아줌마도 그리하자고하니 엄마아빠처럼 생각하고
널 잘 돌봐주실거라며 아이를 설득했지만 아이는 울며
엄마아빠와 같이있고싶고 같이살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리하여 우린 전가족이 말로만듣던 기가막히고 한심스런
노숙자인생이 하루아침에되어버렸다
이곳저곳 아무데로 바람따라 구름따라 온가족이 노숙생활4개월!
노숙자로 온가족이 전락하고 가진돈도 다떨어지고 오갈곳이없다..
나는 아내와 합의했다.
온가족이 동반자살하기로.....
그때 큰딸아이가 눈치를채고 울먹이며 살고싶다고 애원하며
피덩이동생을 끌어안고 한없이 눈물만 흘리는데
도저히 그렇게할수는 없었다.
나는 죽을정신으로 다시한번 인생역전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가족을 여인숙방에다 놓고서 농수산물시장으로 무조건갔다.
농수산물시장에서 배추시레기와 먹을만한것인데 버리는건
모조리 주워모아 탕집식당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몇칠을 그렇게했더니만 농수산물시장에 장사하는 상인들을
몇명은 사귈수도 있었고 그중에 한명으로부터
야채장사를 같이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자신이 차와물건을 댈테니 나보고 단골식당거래처를
만들수가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기회인데 거절할 이유가없고 얼마든지 자신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사람과나는 차를타고서 야채장사를 시작하여
월셋방을 얻어서 다시 일어날수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큰딸아이의 학교문제가 가장 큰문제였다.
큰아이만 퇴거를하여 학교를 보내기로하고 퇴거를했는데
그것이 추적이되어 내가있는곳이 금융채권해결단에게 발각이됐다.
17억 내전재산 몽땅다 날라가고도 금융에 빛이 남았있었다.
기회를달라고 애원하고 통사정하여매달 얼마씩 갚아나가기로하고 한숨돌렸다.
그러나 내입장에서는 장사할수있는 자금부터 모아야만했다.
우리부부에겐 밤낮이없다.
그렇게 98년과99년을 보내고나니 조그만한 식당을 얻을수가있어서
다시 월세식당을 시작했다.
아내와 단둘이서 새벽6시부터 새벽2시까지 무조건 영업을했다.
난생처음으로 가본곳에서 아는사람한명없고 도시도 길도
주변환경도 모든게 낮설고 어색한상태에서 산넘고 물건너에
겨우 집한채달랑있는것이 식당이였다 그것도 영업하지않고
페허가된 옛공사판의 한밭식당건물이엿다 3년이나 페허된집이였다
주인은 보증금없이 그건물을 월30만원에 월세로만 내놓았기에
난 돈이없으니 장사해서 월세를주면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동안에 연구개발한 미꾸라지전문식당으로 오픈을했다
그런데 막상 오픈을하고보니 기가차고 말문이닦쳐버린다
오픈한지 13일동안 추어탕만 겨우 9그릇을 팔았다
대전에서 내가 무너지기전부터 미꾸라지전문가든을 하고싶어서
12년동안동안 연구개발을하여 특허청에 특허출연이되어있는
상태에 갑작기 무너지게된것이였다
나는 수많은생각끝에 진천전화국으로가 상호별전화번호부를
얻어와 리스트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내가게 전화번호와 같은국/(주)라고있는것/팩스번호가있는것/등등
이런것은 일반가정집이 아니니 일일이 자필로 편지를써서
초대겸하소연을 하기로하고 이근처에있는사람들이 이건물이 아직까지
영업을한다는걸 아는사람이없으니 광고도할겸해서 편지를써서
보내기로하고 한달동안 무려 2000여통을써서 발송했다
아는사람이없으니 무조건 회사나공장으로 발송하며 000부장님
000과장님귀하 해서보냈는데 그편지를받아보고 사람들이온다
그편지의내용은 사실그대로 아엠에프 피해자인데 음식은자신잇으니
이편지를갖고오시는 손님에겐 무료제공을하겠습니다....였다
물론 내처지를 소상히 밝혔고 어려움도 밝혔다
그리하여 산넘고 물건너에있는 폐허된공사판식당에서 우리부부는
3개월만에 하루매출 70~~~120만원이되는 식당으로 키웠고
그일대에서 가장 잘되고 유명한식당으로 3개월만에 이루엇다
아내는 하루가 멀다고 쓰러지고 코피를 매일매일 쏟았다.
2000년을 그렇게 정신없이 장사하여 재기할수있나보다 했더니만
장사가 좀 잘되니깐. 주인이 나가란다.
자신이 하겠다고 비우라하니
또다시 어디로 가야한단말인가?
사정하고 애원했지만 소용이없어 청주로 내려왔다.
대전이 그립기도하고 대전하고 가까운 청주로와
죽을때로죽은 조그만한가게를 얻었다 물론 보증금은없이....
그러나. 청주로 내려와서 아무리 노력해도 청주의경기가
워낙에 바닥이라서 너무도 힘든나머지
그만 갖고있던 몇푼마져 다까먹고 버틸수있는힘이 이젠없다.
다시 꺼꾸러지는 느낌에 몇개월동안을 잠못이루고 먹지도못하였더니
내가 불치의병에 걸리고만것이다.
신경성 급성 당뇨라는 아주 무서운 병이다.
걸린지 불과 28일만에 치아가무려 17개나 자연적으로 빠지고
눈시력이 떨어져서 아내도 거리가 조금만있어도 알아볼수없고
혈액순환이 안되다보니 온몸에 쥐가자주나고 빈혈로인하여
기절졸도를 수십번을하고 배고픔과 갈증으로 인하여서
잠을 이룰수가없어 고통스러웠다.
왜그렇게도 온몸이 가려운지...
너무 가려워서 손으로 글거버리면 글은곳에서 단물이나와
온통 온몸에는 솔개미와해충들이 내살이 보이지 않을만큼 달라붙었고
아내는 울면서 모기약인 홈키파로 뿌려 죽이곤했다
밥을 먹을려고 할땐 손이떨려 국물같은건 아내가 먹여줘야했고
건데기는 이가없어 먹을수없으니 참 괴로운 나날에 차라리
아무도몰래 죽고싶은 심정밖엔 없었다
한많은 인생....
서럽고 원통하여 남몰래 울기도 참많이 울었고
너무도 견딜수가 없어 인생을 포기하려한 순간도 수십번
그 순간마다 눈에 발히는 내어여쁜 새끼 내자식들...
살아가자니 희망도...여력도...의지도...건강도없다
아내는 밤낮없이 일하러 다니고있었다
김밥집으로만 다니는데 시간제로뛴다
하루에 3군데를뛰는데 아침에9시부터오후2시까지 한군데
오후3시부터 저녁8시까지 한군데. 밤10시부터 새벽4시까지
아내도 자살을 헤아릴수없이 했었다고 훗날말했다
난 더이상 살고픈맴도없고 의지도잃었버렷고 희망도없다
난 아내와 아이들 얼굴조차볼 면목도없고 어린막둥이를보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아려서 같이함께 살수는 없겠다는
바보같은 생각만이 자꾸만 들어 난 떠나기로 결심햇다
죽음이란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해본적없다
나는 차라리 가족몰래 한많은 생을 떠나는것이 가족도좋고 나에게도
고통에서 해방될수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당뇨병...주위에서 많이봤고 현대사회에서의 당뇨병은
흔한 성인병으로 별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고 대단한줄은 상상도못했다
나는 내 이빨모두를 내손으로 빼냈다
저절로 다 빠지는 이빨에 .... 하루가 몰라보게 빠지는 머리에
하루에도 수십번씩 손과팔....그리고 다리와 발가락은 쥐가난다
눈은 빠질듯이 아프고 운동을 할려고해도 합병증으로 인한
천식이 심해 걷기조차 힘들다
내가 뭔 죄를 지었다고 이런고통 안겨주나....하늘만 원망했다
가난이 죽도록 싫고싫어 죽도록 살아온것이 죄인데
그 죄....치곤 너무나 가혹하다
죽으려하니....막상 죽으려고 제초제를 사 들었으나
못죽겠다....용기도 나지않고 내새끼....이쁜 내 막둥이와 딸들...
자살하는 사람들을 항상 욕했다....죽을용기 갖고서
열심히 살면되지 죽긴 왜죽느냐고....난 이젠 이해한다
죽더라도 버티어보는 떼까진 한번 해보자 생각했다
그러곤 기초적인 당뇨공부를하며 당뇨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희망!!!
희망이없는 삶!...인생은 참으로 가혹하며
참으로 불쌍하다는걸 난 안다.
난 사후세계도 4번이나 갔다왔고 마음이 약해서인지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는 나에게 운명에 장난인가?...아니면
내가 이렇게 살아가야할 삶인가?
희망이 전혀 보이지않던 나에게
이른아침 붉은 해가 힘차게 떠오르듯이 희망이 생기고
행복이란맛을 참오래만에 맛보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더 열심히산다
육류고기/물/인스턴트음식/운동/야채와나물
당뇨병환자가 철칙으로 지켜야할 그 모든것들을 자연스레 이루며
지키게 되었고 당뇨와의싸움이 처절하도록 임했으며 내가 내자신에 몸을
임상실험까지 3번씩이나 실행하며 이 악물고 싸웠다
임상실험을 할땐 사실 목숨을 포기했었다
그렇게 1년여~~~~앞이 보인다 서서히.....그리고 그 모든몸이
정상적으로 빨른속도로 원활하게 된다
혈액순환도 잘되고 갈증....배고픔...가려움증....다좋아졌다
당뇨병도 1년여만에 정상이되었고 눈시력도 뒤찿아 정상이되고
여기 저기서 체험강의요청이 쇄도하고 내삶이 보통의평범한
삶은 아니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인생역경에대해 강의요청이
수도없이 쇄도하여 난 전국을다니며 컨벤션 센타 같은곳에서
또는 큰 연수원같은 곳에서 수천명을 앉혀놓고 강의를하게된다
주로 일반인들이 많치만 환자나가족/전문의/병원원장/의사/약사
박사/등등등 전문의들도 무척많고 매스컴도 나를 주시했다
난 3년여동안 강의를하고..... 이젠하지않는다
이곳 청주에 특허음식인 미꾸라지전문가든을 오픈하여 인생재기에
온갖 심혈을기우리며 오시는손님마다 만족감을 주기위해
열심히 장사에만 몰두한다
내음식중에 미꾸라지숙회는 만드는데만 걸리는시간이 무려
2시간이나 소요되는 음식이라고하기보다 하나의예술작품이다
12년동안 갖은 고생과역경을 격으며 연구개발한 음식이다
얼마전에 SBS 에 고향이보인다...이라는프로에 내가게와 숙회가
방영되었다 MBC에도...YTN뉴스에도 보도가되고 그 프로를 본 시청자들이
전국에서 물어물어 온다. 청주 행시모 모임(행복한 시인들의모임)에
편집국장으로 문학활동도한다 CJB 청주지역 방송에도
자주 나오게되면서 자연스레 가게와음식자랑이 되었고
그런 방송을 보신 시청자들이 물어물어 찿아온다
그후 메스컴은 참많이 탔다...텔레비젼 라디오 신문 시사지......
그러나 예약하지않고 그냥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라 숙회는 먹지못하고
추어탕만 먹고가는게 아쉽다
난 앞으로 분점을낼 생각이다 이지구상에 없는 내음식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미꾸라지를갖고 이런맛과 이런음식도
가능하다는걸 보여주고싶다
희망도 그어느때보다 크고 확실하게 생겨서 생기가 돈다
아내와 나는 희망에 부풀어 힘든줄도 모르고 정말 열심히했다
그런데 나는 이대로 삶을 끝내야만하나.....
가게가 장사가 잘되니 내가 견디지못한다 혈당은 관리가 되지않고
기술은 오직 나만갖고 있는데 주방을 맡아볼 사람이없다
아내도 나의 기술수준에 따라올려면 힘들다 당장에 주방을
책임지고 음식을 기술적으로 만들고 해야하는데 지금당장 더는
주방일을 할수가없다. 혈당이 너무 높아서 주방에서 쓰러지길
한두번이어야지 쉬엄쉬엄 한다하지 더는 할수가없다
평생을 음식연구만하고 요리개발을 해온 나와 아내는 살아갈
앞날이 불안하고 힘들다 가게를 할수만있다면 돈은 엄청벌수있는데
몸때문에 건강때문에 아무것도 할수가없다
이대로 다 포기해야하나....이렇게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도전를하고 비젼을 갖고싶다 마지막이라해도 좋다
기회가 분명 올텐데....난 비가와도 눈이와도 걷는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걷는다 2시간씩을 아침저녁으로
하루 4시간을 걷는다 난 당뇨박사다....난 당뇨엔 일인자다
내 당뇨는 내가 조절하기로했다
그렇게 다시 당뇨하고 제2의 싸움을 시작했다
지금도 사람들을 기피하고 피한다 내 얼굴 모습이 싫다
치아가 다 빠지고 없다보니 내 얼굴이 아니다
먹고싶은 음식도 먹을수가없다 마음것 배불리 먹을수도없다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걷기운동을 안할수가없다
이건 살아있음에도 숨을 쉬고있음에도 죽어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고 힘들다 남들은 그래도 삶의재미가있어
힘들어도 살고있지만 나는 죽을수가없어 산다
내가 과연 살아있다는 감회를 끌어안고 울수있는날
펑펑 가슴 시원히 울어볼수 있는날이 올까
울고싶어도 울수가없고 웃고싶어도 웃을수가없는 불쌍하다못해
가련한삶이다....이젠 다 잊기로했다
오로지 내삶을 조금더 조금만 더 연장하는것에 목표를둔다
죽음이 두려워서 아니다 무서움도 아니다
내 너무나 이쁜 내딸들이 조금만 더 컸을때까지다
아빠가 세상의 굴레에서 삶의 무거운 짐을 모두 다 내려놓고
먼 길을 떠나 갔어도 굳굳이 자랑스럽게 살아갈수있고
홀로 살아갈수만 있다면 난 내삶에 감사한다
난 일어서기위해 또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기위해
오늘도 걷고 또 걷습니다 걷다보면 때론...
길가에서 다리가 너무 심하도록 쥐가나서 쓰러져
119에도 실려가고 지나는 행인들에의해 구조받기도하지요
그래도 걸어야만 살아요...식의요법/운동요법/균형유지건강법....
3가지가 유지되고 실행이돼야 합병증의 공포에서 해방됨니다
1 . 혈당수치 관리
2 . 식의요법과 운동요법을 매일 실행
3 . 인체내의 영양 불균형을 어떤식으로 영양공급할것이며
떨어져만 가는 면연역을 어떤 방식으로 유지할것인가.
4 . 혈액순환이 갈수록 원활하지 못해지는것을 어떤식으로 유지할것인가
5 . 배고픔과 허기짐을 무엇으로 해소할것인가.
이것 5가지만 유념하세요....저는 현재 건강유지 하고있어요
미지와 미로 올림
첫댓글 너무도 가옥한 인생입니다 더 이상생각조차 하기싫은 삷이군요 우리남은인생 건강하면 행복이겠군요
기구한 운명 이지요 우리 인생 누구나 속털어놓고 말하지않아서이지 누구든 모진 수난 의 연속 이며 앞으로도 어떤 길을갈지아무도 모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