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TRONG>시인 정끝별</STRONG></P>
<P> </P>
<P>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P>
<P>1988년 <문학사상>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의 시가 당선되었고, </P>
<P>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었다. </P>
<P>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이 있고, </P>
<P>시론집 <패러디 시학>과 평론집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P>
<P>시선평론집 <행복>, 산문집 <여운>을 펴냈다.</P>
<P><XSCRIPT type="text/xxxxxxxxjavascript"></P>
<P> </P>
<P> </P>
<P><STRONG>통속</STRONG> / 정끝별 </P>
<P> </P>
<P><BR>서두르다를 서투르다로 잘못 읽었다 <BR>잘못 읽는 글자들이 점점 많아진다 <BR>화두를 화투로, 가늠을 가름으로, 돌입을 몰입으로, <BR>비박을 피박으로 잘못 읽어도 문맥이 통했다 <BR>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네 살배기 딸도 그랬다 <BR>번번이 두부와 부두의 사이에서, <BR>시치미와 시금치 사이에서 망설이다 <BR>엄마 부두 부쳐준다면서 왜 시금치를 떼는 거야 그래도 통했다 <BR>중심이 없는 나는 마흔이 넘어서도 <BR>좌회전과 우회전을, 가로와 세로를, 종대와 횡대를, 콩쥐와 팥쥐를, <BR>덤과 더머를, 델마와 루이스를 헷갈려 한다 <BR>짝패들은 죄다 한통속이다 <BR>칠순을 넘기신 엄마는 디지털을 돼지털이라 하고 <BR>코스닥이 뭐냐고 하면 왜 웃는지 모르신다 </P>
<P>웃는 육남매를 향해 그래봐야 니들이 이 통속에서 나왔다 <BR>어쩔래 하시며 늘어진 배를 두드리곤 하신다 <BR>칠순에 돌아가셨던 외할머니는 이모를 엄니라 부르고 <BR>밥상을 물리자마자 밥을 안 준다고 서럽게 우셨다 <BR>한밤중에 밭을 매러 가시고 몸통에서 나온 똥을 <BR>이 통 저 통에 숨기시곤 하셨다 </P>
<P> </P>
<P> </P>
<P><STRONG>날아라! 원더우먼 </STRONG></P>
<P><STRONG></STRONG> </P>
<P><STRONG></STRONG> </P>
<P>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BR>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BR>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BR>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BR>타잔 구해줘요 타잔 - 외칠 때마다 <BR>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BR>타잔이 아- 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BR>악어를 물리치고 제인을 번쩍 안아들던 <BR>아 정글 속의 로맨스 <BR>베트맨-. 슈퍼맨- 외치면 <BR>망토자락 휘날리며 날아와 조커와 렉스로더를 해치우고 <BR>마고트 키더나 킴 베신저의 허리를 힘차게 낚아채던 <BR>무쇠 팔 무쇠 다리 육백만불의 사나이들 </P>
<P>그때마다 온몸이 짜릿했어, 헌데 말야 <BR>문 프린세스 헐레이션- <BR>세일러문 요술 봉을 휘두르는 딸아이를 붙잡고 <BR>날 좀 풀어줘- 날 좀 꺼내줘- <BR>허우적댈 때마다 기억나는 이름은 왜 <BR>어떻게든 살아나가 물리쳐야 할 악당들뿐일까 <BR>왜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까, 꿈에조차, 왜 </P>
<P> </P>
<P> </P>
<P><STRONG>천생연분 </STRONG></P>
<P><STRONG><BR></STRONG> </P>
<P>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P>
<P>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P>
<P>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BR>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BR>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P>
<P> </P>
<P> </P>
<P><STRONG>미라보는 어디 있는가</STRONG></P>
<P><STRONG></STRONG> </P>
<P> </P>
<P>미라보 <BR>하면 파리의 세느강 위에 우뚝 선 다리였다가<BR>옥탑방 벽에 붙어 있던 바람둥이 혁명가였다가<BR>물리학자였다가 정치가였다가<BR>당신이었다가<BR>퐁네프의 연인들이 달리는 사랑이었다가<BR>미라보, 미라보<BR>하면 신촌이나 부산 어디쯤 호텔이었다가<BR>파리젠느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였다가<BR>볏은 다리를 감춰주던 침대시트였다가<BR>영등포동에 있는 웨딩타운이었다가<BR>당신 사는 상계동이나 대전의 아파트였다가<BR>엔티크한 삼인용 소파였다가<BR>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보낸 사랑이었다가<BR>미라보, 미라보, 미라보<BR>하면 세면대에서 놓쳐버린 은반지였다가<BR>간곡히 비어 있는 꽃병 속 그늘이었다<BR>꼭꼭 숨어사는 누군가의 ID였다가<BR>마른하늘에 살풋 걸리는 무지개였다가<BR>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BR>미라보, 미라보는 얼마나 격렬한가<BR>이 얼마나 멸렬한가</P>
<P> </P>
<P><BR><STRONG>자작나무 내 인생 </STRONG></P>
<P><STRONG><BR></STRONG> </P>
<P>속 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BR>무엇이 터졌을까 <BR>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P>
<P>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BR>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BR>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BR>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BR>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BR>뼈만 솟은 저 서릿몸 <BR>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BR>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BR>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P>
<P>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BR>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P>
<P> </P>
<P><BR><STRONG>동백 한 그루 </STRONG></P>
<P> </P>
<P> </P>
<P>포크레인도 차마 무너뜨리지 못한 <BR>폐허(肺虛)에 동백 한 그루 <BR>화단 모퉁이에 서른의 아버지가 <BR>우리들 탯줄을 거름 삼아 심으셨던 <BR>저 동백 한 그루 아니었으면 지나칠 뻔했지 옛집 <BR>영산포 남교동 향미네 쌀집 뒤 먹기와 위로 <BR>높이 솟았던 굴뚝 벽돌뿌리와 나란히, <BR>빗물이며 미꾸라지 가두어둔 물항아리 묻혀 있었지 <BR>어린 오빠들과 동백 한 그루 곁에서 <BR>해당화 밥태기꽃 함박꽃 알록달록 물들다 <BR>담을 넘던 이마에 흉터가 포도넝쿨처럼 뻗기도 했지 <BR>동백 한 그루 너머 무슨 일이 있었을까 <BR>아버지 밥상 내던지셨지 그릇들 깨졌지 아버지 서재 오래 비어 있었지 <BR>영산포 이창동 소방도로 되기 직전 <BR>포크레인이 아버지 대들보를 밀어붙이고 <BR>콜타르와 시멘트가 깨진 아버지를 봉인해버렸어도 <BR>탯줄 끝에 손톱만한 열매를 붙잡고 <BR>봄볕에 자글자글 속 끓고 있었지 저 동백 한 그루 <BR>오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BR>가까스로 서 있었지 <BR>나 쉬하던 뿌리 쪽으로 고개를 수구(首邱)린 채</P>
<P> </P>
<P><BR><STRONG>개미와 앨범 </STRONG></P>
<P><STRONG></STRONG><BR> </P>
<P>책장 꼭대기에 쌓여가는 앨범들 <BR>주저앉을 것만 같아 <BR>바닥에 내려놓으려는데 <BR>아이 앨범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BR>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BR>파르르 바닥에 흩어지는 수천의 개미떼 <BR>앨범을 보던 아이가 <BR>먹던 비스켓과 함께 닫아두었나 보다 <BR>먹이를 찾아 몰려든 개미떼들 <BR>식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BR>비스켓을 쏠고 <BR>앨범을 쏠고 <BR>환한 웃음을 쏠며 <BR>아이 얼굴에 주름집을 짓고 있었나 보다 <BR>에프킬러를 뿌린다 </P>
<P>꿈틀거리는 개미 일가들아 <BR>비스켓만 먹고 가지, <BR>휘발하는 검은 시간 벌레들아 <BR>추억만은 놓고 가지,</P>
<P> </P>
<P> </P>
<P><STRONG>옹관(甕棺) 1 </STRONG></P>
<P> </P>
<P><BR>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BR>해묵은 항아리에 세상 한 짐 풀면 <BR>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BR>흙이 되고 길이 되고 <BR>얼마간 뜨거운 꽃잎 <BR>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BR>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BR>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BR>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BR>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BR>둥근 길 <BR>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BR>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BR>내 안에 길이 있다 <BR>내가 가득찬 항아리다</P>
<P> </P>
<P> </P>
<P><STRONG>첫눈</STRONG> </P>
<P><BR>날선 삿대질을 되로 주고 말로 받던 그날밤의 창가에<BR>느닷없는 점령군처럼 함박눈이 내렸것다<BR>서로의 눈이 부딪치고 쨍그랑 겨누던 무기를 놓쳤던가<BR>그랬던가 어둡던 창밖이 우연의 남발처럼 환해지는<BR>저건 대체 누구의 과장된 헛기침이란 말인가<BR>그러자 핸드폰을 귀에 댄 남자가 검은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BR>우산을 옆으로 든 여자가 흔들리는 네온싸인에 사뿐사뿐 제 얼굴을 비춰보고<BR>오토바이를 세운 폭주족 크라운 베이커리 앞에 서서 환한 라이터를 지피고<BR>달리던 자동차가 멈칫 쌓인 눈을 쓸어내리고는 천천히 미끄러져 가고<BR>그렇게 무섭게 굴러가던 것들이 일제히 제 둥근 모서리를 쓰다듬고 있었더란 말인가<BR>누군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내려앉으며 <BR>누군가의 어깨가 누군가의 어깨에 쌓이며<BR>생애 첫눈을 뜬 장님처럼 서로의 눈을 맞추고 말았더란 말인가<BR>염치를 잊고 손을 내밀고 말았더란 말인가, 용서라는<BR>보고 또 보고도 물리지 않는<BR>아 저건 누구의 신파였고<BR>누구의 한물간 낭만적 연출이었던가<BR>그리하여 창밖에 펼쳐진 단막의 해피엔딩이 끝날 즈음<BR>뜨겁게 내리는 저 첫눈에게<BR>그리고 또다시 속아넘어가버리고 말았더란 말인가</P>
<!-- -->
첫댓글 조용히 문 밀치고 들어왔다 벽지에다 낙서하고 싶은 어린 소녀가 연필 뒤로 감추고 뒷걸음치며 돌아 나오는 저를 봅니다. 임의 고운 마음에 꾸벅 절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올린 글을 누군가 관심깊게 봐주는 것...그것이 카페를 굴리게하는 힘입니다.
고맙습니다.가끔 이렇게 흔적만 남기고 갑니다
좋은 시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
웃기도 하다가요, 마음이 찜찜하기도요, 언어(시어)의 한 통속에 솟구치는 위력에 새록새록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