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당시 필자는 중학교 3학년 철부지이자 헤비메탈/프로그레시브 음악의 광적인 팬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수입 CD 도 없었고 또 LP 레코드도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던 때라 음악의 소스는 오로지 라디오, 그리고 국내 레코드사들이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발매하는 해외 음반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라이센스 음반이라는 것도 레코드사들이 팔릴 만 한 것만 내놓기 때문에 우리 같은 특정 음악의 팬들에게 선택의 폭이 넓을 리 만무했다. 메탈이나 프로그레시브 록 음반은 나온다 한들 몇 년이 지난 다음이기 일수였고, 또 툭하면 금지곡 천지라 중간중간에 구멍이 숭숭 뚫려 음악적인 가치도 많이 떨어졌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도 금지곡이었고 딥 퍼플의 스톰 브링어도 금지곡이었으며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앨범은 아예 발매 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안 나오는 라이센스 음반들을 기다리다 못해 '빽판' (해적판) 가게로 향하곤 했다. 앨범 자켓도, 음질도 모든 면에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 조악했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그걸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렇게라도 들을 수 있다면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요 금지곡 이야기나 빽판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함 하자...)
그럼 우리나라 음악을 들었으면 되지 않느냐... 라고 할 지 모르지만, 당시 필자는 한국 가요가 정말이지 죽도록 싫었다. 일단 필자가 좋아했던 서양 스타일의 헤비메탈은 존재 자체가 없었고 (시나위가 86년에 1집을 내기 전까지는), 그 외의 음악이란 거는 발라드거나 트로트가 대부분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혜은이나 이은하 같은 가수들이 득세하던 때인데, 하긴 이 분들도 훌륭한 가수들이고 또 배철수가 활동하던 송골매 같은 밴드 음악은 지금 들어보면 나름대로 매력이 있지만 그때는 그저 소위 '빠다냄새' 나는 음악만 찾던 때라 촌스럽게만 들렸다.
이렇게, 좋아하는 음악은 불법으로 밖에 들을 수 없고 이유도 알 수 없는 금지곡이 난무하고 사진이나 비디오로 간혹 접하는 선망하는 외국 밴드들의 공연을 보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으며 테레비에 나오는 가요들은 사운드도 멜로디도 가사도 전부 천편일률적이던 그 시절. 어린 마음에도 '음악 후진국'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환멸과 실망, 상처가 쌓일 대로 쌓여가고 있었다.
들국화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필자와 들국화의 인연은 사실 좀 개인적이다. 헤비메탈 팬이었던 만큼 들국화 같은 이름을 가진 한국 밴드에는 전혀 관심도 가지 않았을 법 했고 실제로 그랬다. 앨?발매 전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 명성을 날렸다고 하지만 누군지도 몰랐으며, 알았다 한들 또 다른 송골매 류의 가요 록 밴드(그때 관점)로 생각하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필자에게 들국화를 가르쳐 준 것은 당시 고 3 이던 누나였다. '친구 사촌오빠가 가수 데뷔를 했다는데 음반을 선물로 주더라... 록이라는 데 함 들어볼래? ' 하며 갖고 온 시커먼 엘피 레코드.
그게 바로 들국화 1집이었다. 앨범 표지를 힐끗 본 필자의 첫 반응은 아마도 '이게 뭐야' 였을 것이다. 비틀즈 'Let it be' 앨범을 흉내 낸 자켓 디자인에 코믹한 건지 진지한 건지 판단이 가지 않는 네 멤버의 표정. 그리고 들국화라는 밴드 이름.
'친구 사촌은 누군데?' 내 질문에 누나는 '이 사람' 이라며 기타리스트 조덕환(사진 오른쪽 위)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몇 년 음악 활동 하다가 결국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며, 마지막으로 앨범 내고 떠난다고 했다. '그래...' 친구 사촌이라니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이라도 할려고 음반을 오디오에 걸고 틀었다. 그리고는 흘러 나온 '행진'.
글쎄다. 솔직히 음반을 처음 들으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이 어땠는지는 20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가물가물하다. '틀자마자 큰 충격을 받았다' 라는 식의 글도 어디엔가 썼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한참 후에 재 조합된 기억인 것 같고, 그보다는 누나하고 앉아서 이런 이야기들을 했었지 싶다.
'이거 증정본이라고 적혀 있네'
'선물 받은 거라니까. 아직 정식으로 안 나왔대'
'친구 사촌은 그럼 이제 밴드 안 해?'
'안 해. 음반 내고 미국 금방 간대'
'머 기타 연주는 많이 안 나오네'
'응...'
'가사를 잘 못 알아듣겠어. 한국말 아닌가?'
'맞을 걸. 여기 가사지 있다'
....
'일반 가요하고는 많이 다르네.'
이것이 '누나의 친구의 사촌' 이 참가했다는 밴드 들국화와 필자의 첫 대면이었다. 물론 20 년이 지난 후, 증정본을 받고 음반이 공식 발매되기도 전에 들어봤다는 이야기를 은근한 자랑과 함께 이렇게 글로 쓰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참고로 들국화 관련된 일부 글에는 조덕환이 86년 밴드가 한참 성공한 후에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났으며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필자의 이런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조덕환 자신은 분명 그 전부터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들국화의 나머지 멤버들도 모르던 것을 내가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누나의 눈치를 보며 비판도 아닌 덕담도 아닌 말들을 중얼거린 지 얼마 안 되어, 필자는 어느새 들국화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있었다. 비록 들국화는 필자가 그토록 선망하던 헤비메탈도 프로그레시브도 아니었지만, 외국 음악의 세련됨에 목말라하던 필자에게 다른 의미의 음악적 가치를 깨닫게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사운드나 연주보다 더 중요한 '감성'의 세련됨이었다.
들국화의 세련미는 화려한 치장이나 어려운 미사여구, 혹은 과거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이 많이 보여준, 거창하고 역사적인 주제의식 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들국화의 모든 노래들은 그저 사는 이야기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자기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걸 표현하는 언어들, 그리고 그걸 실은 멜로디와 목소리가 가진 호소력을 통해 그런 것들을 마치 듣는 사람 자신의 감정인 만큼 전염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그 전까지의 국내 가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무엇이었고, 또 가사를 이해하기 힘든 외국 노래에서는, 설사 원곡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우리로서는 아예 느끼기가 불가능한 어떤 것이었다.
이렇게 들국화는 그 시절에 티비 출연 한번 안 했음에도 입에서 입으로 알려져 음악 팬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고, 몇 달 안되어 필자가 살던 부산 촌구석에까지 공연하러 오게 되었다. 아마도 이 들국화의 공연이 필자가 보러 간 최초의 라이브 콘서트였지 싶다. 이 순회 공연의 공식 명칭은 '추억 들국화'. 들국화를 오래오래 기억해 달라는 의미였단다.
공연 장소는 가톨릭계 사립 고등학교인 이사벨 여고의 강당 '무궁화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공연장이 무척 드물었기 때문에 들국화 공연은 물론 이후의 백두산이나 부활 등 각종 밴드들의 콘서트가 대부분 이곳에서 열렸다.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음향과 무대 의자 등 나름대로 깔끔한 시설로 인해 향후 수년 간 부산의 대표적인 라이브 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날 필자가 본 들국화의 공연은 앨범에서 '소리'만으로 느낀 이미지와 일맥상통했음은 물론이고, 사실 그 느낌을 몇 배나 더 강조해 주었다. 그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깨끗하고 안정된 연주, 그리고 이미 서른을 넘긴 나이였던 전인권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이야기들. 공연을 마치고 '아 이 사람들은 진짜구나' 라는 느낌과 함께, 자부심과 행복함과 따듯한 마음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분명 소박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꿈을 갖고 일상을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 가식적인 언변이 아닌 가슴으로 말하는 음악인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필자가 당시 외국의 메탈 등을 좋아하고 그런 것을 연주해 보고자 아등바등했던 것은 단지 외국 것을 선망해서 이를 모방하고자 했던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위 '빠다냄새' 라고들 했던 외국 음악 분위기의 재현은 그 자체로서 보다는 내가 주변에서 본의 아니게나마 계속 듣고 주입 받아온 고정된 음악의 영향(가요, 트로트 등등)에서 자유로워 진다는 의미가 있었다. 멜로디 하나를 흥얼거려도 거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 어떤 방면에서던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창의적이고자 노력해 본 사람들은 아마 이해하지 싶다. '가요'라는 굴레, 당시 우리나라 음악인들은 발라드를 하던 록 밴드를 하던 일렉트로닉 댄스를 하던 대부분 그 획일성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뻔한 길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 등은 먼 외국의 음악으로 눈을 돌렸고, 그런 쪽의 감각을 키우고 또 음악적으로도 재현해 내고 싶었다. 물론 이것도 진정한 창의성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주입되고 각인된 것에서 해방된다는 차원, 또 당시 불과 중고등학생이던 만큼 언젠가 진짜 내 것을 갖게 되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서의 통과 의례라는 의미가 존재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나타난 들국화는, 창의성이나 표현력과 관련되어 필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일러 주게 되었다. 들국화의 음악은 분명히 일반 가요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빠다냄새 물씬 풍기는 철저한 서양풍 음악도 아니었다. 사운드 면에서 우리나라 다른 음악들보다 많이 나을 것도 없었고, 당시 인기 있던 잉베이 맘스틴 등처럼 초일류의 연주 기교를 선보인 것도 아니며, 국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독창적인 새 쟝르를 들고 나온 것도 아니었고, 어떤 형태의 시각적 혹은 이미지적 충격을 던져 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가지고 나온 것은 소박함과 진실함, 정직함 뿐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예술적 차원에서 가장 높은 경지일지도 모르는 이런 영역을 우리 나라 밴드가, 그것도 금지곡이 난무하는 전두환 치하의, 창의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던 그 시대에 추구했고 또 성취해 냈다는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또 단지 음악 매니아 뿐 아니라 일반 대중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사와 멜로디 등, 데뷔 앨범 자켓에서 엿보이듯 당시 한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비틀즈에 버금가는 음악적 개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국화의 면면을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성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이미 70년대 중반부터 통기타로 잔뼈가 굵은 가수들로 어떤 의미에서는 김민기 한대수 정통 포크의 연장선상에 있던 사람들이다. 전인권에 따르면 그 당시는 한 가닥 한다는 통기타 가수들의 춘추전국시대로 경쟁도 치열했고 심지어 대결도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런 바닥에서 십 년 가까이 무명으로 고생하며 실력을 갈고 닦은 결과가 바로 들국화였던 거다.
카리스마적 목소리와 호소력을 지닌 전인권은 직설적이고 원초적인 감성을, 세련된 감각과 깨끗한 터치의 팝 피아니스트 허성욱은 음악적 정교함을, 그리고 포크 색채가 누구보다 강했던 최성원은 여성적인 섬세함을 제공함으로써 음악적 바탕을 만들고, 거기에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조덕환이 록의 외형과 숨결을, 드러머 주찬권은 강하고 단순한 비트의 박력을 더함으로써 바로 우리가 아는 들국화의 음악이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들국화에는 여러 쟝르의 특성이 동시에 살아 있고, 힘과 부드러움, 우직함과 섬세함이 공존한다. '행진' 이나 '그것만이 내 세상' '아침이 밝아올 때 까지' 같은 남성적인 곡이 있는 반면 '매일 그대와' 같은 목가적인 곡도 있고, 나른하고 실험적인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절절한 '제발', 천진난만한 '또 다시 크리스마스 등 온갖 색깔의 곡들, 그러나 한편 들국화의 특성을 잃지 않는 곡들은 바로 그런 배경 하에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기적은 그리 오래 갈수는 없었나 보다. 바로 그 여러 개성들의 조합이 결국은 음악적 갈등으로서 발목을 잡기 시작하고, 또 공연 때 마다 만원 사례를 이루긴 했지만 '대관료 100만원에 개런티 10만원' 이라는 식의 당시 상황이 초래하는 금전적인 문제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 시절 라이브 콘서트 티켓 값이래 봤자 겨우 2-3천원 수준이었으니 천명이 들어온다 한들 '매출액'이 겨우 이삼백 만원인 실정이었다. 거기에 대관료와 장비 대여료에 각종 비용 다 제하고 기획사 수익 제하고 나머지를 멤버 머리 수대로 나누고 나면 그 돈이 몇 푼이나 되었겠는가.
'성공한 건 분명한데 돈 버는 건 없다...' 라는 느낌은 단지 돈에 대한 욕심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상황은 예술가에게는 일종의 절망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 음악이 길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모두가 환호하고 공연장은 빽빽하게 차는데, 막상 그 자리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생활고는 여전하고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인이 버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고, 또 외형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상대적 박탈감은 오히려 점점 더 배가되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그 기분을 안다. 물론 음악적으로나 유명세로나 들국화 같은 성공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십년 전 한때 인디 바닥에서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 전인권 밴드 및 시나위, 산울림, 넥스트 등과 관객 만 명을 앞에 두고 옴니버스 공연에 출연한 적도 있고, 지금 인디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밴드들과도 여러 번 큰 무대에 섰었다. 합동 공연이긴 하지만 관객 몇 천명이 우습게 보이던 시절이다.
그러나 공연을 마치고 돌아서면 생활을 영위하기는커녕 밴드 멤버들 밥값 챙겨줄 여유도 없었다. 만 명 앞에서 한 공연이 개런티 100만원이었고 나머지는 차비와 식비 수준 외에는 거의 받지 못했으니, 큰 공연을 한 달에 한번씩 계속 할 수 있다고 해도 네다섯 명이 나누고 나면 각자 월 수입은 불과 십여만 원 선이다.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나중엔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또 처음에는 큰 무대 서는 재미로 하던 멤버들도 나중에 익숙해지고 나면 심드렁해지고,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쪽으로 새는 멤버들 - 우리 멤버들 중 일부는 어린 나이에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 을 통솔할 수단도 없다.
유명하지도 않았던 필자가 90년대 중반에 겪은 것이 이러할진대 그보다 십 년 전에 들국화가 놓였던 조건은 훨씬 더 나빴을 것임에 분명하고, 또 유명세만큼이나 박탈감도 수십 배 더 했을 것 아니겠는가.
암튼 그렇게 해서 들국화는 겨우 두 장의 앨범만 내고 불과 2년여 만에 사실상 활동을 접고 말았다. '해체가 아니고 단지 잠시 활동을 쉴 뿐입니다' 라는 그들의 인터뷰를 필자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서 다시 모이기를 이후 몇 년이나 기다렸지만, 그들은 '사랑한 후에' 가 담겨 있는 '추억 들국화' 앨범을 끝으로 - 외형적으로는 전인권과 허성욱의 앨범이지만 사실 모든 멤버가 연주 등에 참여 - 다시는 함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장난처럼 흘러갔다. 그 옛날 삼십 대와 이십 대였던 그들은 어느덧 오십을 넘겨 가고, 철부지 중학생이었던 필자도 이제 사십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세월 동안 전인권은 대마초 사건 등으로 심심찮게 언론에 오르내렸고, 음악판에 있던 내게는 들국화 출신의 모씨가 택시비가 없어 새벽에 하염없이 버스 시간을 기다리더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술에 취해 툭하면 승천과 득도를 이야기한다는 한 멤버의 루머도 들렸다. 게다가 젊고 재능 있는 뮤지션이었던 피아니스트 허성욱은 보행자의 천국이라는 캐나다에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어이없이 돌아가 버린 지 오래다. 한때의 맑고 청량하던 전인권의 얼굴은 이제 늙고 그늘이 드리웠다.
이런저런 생각과 상념이 떠오른다. 그 시절 우리나라의 음악 여건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지금 한류처럼 외국으로 뻗어나갈 기회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외국은 고사하고 공연 관람료를 한 만원만이라도 받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면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어 내가 본 그 어린 시절의 첫 공연, 스테어웨이 투 헤븐의 기타 반주를 피아노로 치던 허성욱의 모습, 잠실 체육관을 수놓았던 그 수많은 풍선들... 어차피 세월은 모든 것을 다 흩어 놓는다고 하지만, 들국화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단 세 장의 앨범을 통해 쏟아낸 명곡들을 생각해 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 커진다. 만약 그들에게 비틀즈처럼 십 년의 세월이 주어졌다면.
물론 그 옛날의 들국화는 그들의 말 만큼이나 이제 추억 들국화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들국화의 추억은 단지 그들의 음악만은 아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의 꿈과 희망, 처음으로 본 라이브 콘서트의 감동, 그리고 가요에 실망하고 외국 음악에만 심취했던 음악 팬으로서 이 땅에서 내 눈앞에서 벌어지던 기적을 바라보던 그 경외감이 모두 뒤섞인 추억이니 말이다.
...필자는 지금 전인권이 2003년에 발표한 앨범 속의 '봉우리'라는 곡을 듣고 있다.
오랫동안 음악 매니아를 자처했고 또 직접 연주도 하지만, 사실 음악으로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는 타입도 아니고 어떤 사람들처럼 음악을 들으며 밤을 지새우는 성격도 못 된다. 그러나 이 봉우리라는 곡을 들을 때는 다르다. 이 곡은 뭔가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깊숙한 내면을 건드리고, 오랜 평론가 및 연주자 생활로 익숙해 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 음악적 분석 따위는 시도도 하지 못하도록 속을 휘집어 버리는 것이다. 간혹 이런 곡을 듣는 것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만큼이나 큰 정서적 영향을 미친다.
물론 전인권은 이제 이십 년 전처럼 젊지 않고, 해맑지도 천진난만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인기 가수도 아니고 라이브 스타도 아니며 그때의 영광을 다시 재현해 낼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한 호소력을 가진 아티스트로 여전히 남아 계속 활동하고 있다.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목소리는 굵게 가라앉고 고음 처리도 예전 같진 않지만, 대신 산 하나를 녹여 삼킬 것 같은 깊이를 젊음과 맞바꿔 얻어낸 채, 그 어떤 외국 유명 가수에게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성의 농도와 진실함을 우리들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들국화는 오래 전에 해체되고 없지만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남아 있고, 또 전인권의 음악적 여정도 계속되고 있다. 김민기가 쓴 이 곡의 노랫말에서 암시하듯, 청년에게는 청년의 꿈과 열정이 있고 나이든 이에게는 또 거기에 맞는 희망과 깨달음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가는 것이 삶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린다. 영광이던 고통이던 모든 것은 흘러 지나가게 마련이고, 우리 앞에는 항상 오늘이라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추억이 의미와 생명력을 갖고 있는 한 그것은 단지 옛 기억에서만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진정한 추억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오랜 친구이자, 내 옛 모습의 거울로서 언제나 새로움을 던져 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부리는 들국화의 팬으로서 그 시대를 살며 그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행복하고도 놀라웠던, 내 삶에서 다시는 올 수 없는 그런 날들이었다.
첫댓글 와~겨우 다 읽었어요~~^^
들국화.. 아주 좋은 노래 많은데.. ^^ 잘 읽었습니다...
형님 안녕하세요~^^ 학교 또 놀러오세요~^^ 이번엔 고기 많이 잡아서 맛난 회를 먹어야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