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충전하는 웰 다잉(Well-Dying)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주듯이 잘 쓰인 일생은 평안한 죽음을 준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요즘 우리사회에서 점점 웰 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태어나서 살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병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병이 진행이 되고 누적이 되면 결국 사망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현대 의학이 도입된 다음부터는 병치레를 하더라도 사망까지 기간이 굉장히 길어진다. 그런가 하면 노화와 병치레의 누적을 피할 수 없게 되면 이제 연명치료가 개입을 하게 된다. 이제는 노환을 천명을 다해 죽는 것은 정말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요즘 어르신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고통 없이 죽고 싶다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나 역시 사십대 중반부터 웰 다잉을 고민해왔다. 또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두었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던 33만여 명 중 뜻에 따라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725명에 불과 하다고 한다. 이유는 이 서류 하단의 유의사항에 보면 <여기에 기록된 이 결정은 담당의사와 해당분야의 전문의 1명 모두의 작성자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라고 판단하는 경우에만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라고 판단해 주는 의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큰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보면 분명히 돌아가실 환자인데 누구도 이 분이 임종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의사들의 사망 진단서에는 더 이상 노환이 사망원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어떤 환자의 가족은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는 것과 환자가 입원했을 때 중환자실에 입실 시키지 않은 것을 귀책사유로 담당의를 엄벌할 것을 주장했는데 법조인들은 법률적으로 유죄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죽음에 이르면 인공적으로 연명을 하게 해야 책임을 면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에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의사는 병원에 온 환자의 생명을 살릴 의무가 있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폐가 기능을 상실하면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심장이 기능을 못하면 에크모를 연결한다. 그리고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온갖 줄을 주렁주렁 달고 누워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신체의 기능은 서서히 저하되고 그렇게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일단 인공호흡기나 에크로를 연결하면 보호자의 요구에도 뗄 수 없다고 하니 남아있는 가족들의 부담도 증가하고 임종을 앞둔 환자는 작별인사도 못하고 의식도 없이 죽어가는 일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임종문화의 총체적인 혼란에서 비롯되는 비극인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자연스러운 호흡 리듬에 반해서 기계가 규칙적으로 그것도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압력으로 강하게 공기를 불어 넣은 것이 어떻게 편할 수 있겠는가. 인공호흡기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결국 자발적인 호흡 중추까지 마비되도록 진정제를 투여해서 환자를 깊은 무의식으로 떨어뜨리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병원에 생사 결정권을 넘겨주고 생을 마무리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묏자리를 보고 수의를 마련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현실에서 병원의 죽음비지니스에 속지 않고 원하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 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요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중환자실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환자가 집을 떠나 병원에 옮겨지는 순간 환자는 자동화된 컴베이어 벨트처럼 병원시스템에 끌려간다, 병원에서는 사망과정에 들어선 죽음도 무조건 치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입으로 음식을 삼키지 못하면 콧줄로 영양을 밀어 넣고 숨을 쉬지 못하면 억지로 산소를 공급한다. 내일 죽을 사람을 본인 뜻과는 무관하게 몇 날이고 연명시키는 일도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탈 인간화는 덤이고 돌봄도 덩달아 외주화 되고 있다. 즉 죽음의 외주화는 다시 죽음에 대한 준비의 부재로 이어진다. 병원에서 죽기 전까지 주는 정맥주사는 몸을 죽을 수 없게 하고 수분이 넘치는 상태를 유지 시킨다고 한다 말라가듯 죽을 때 인간은 오히려 죽음의 고통을 덜 느끼는데 병원에서 연명치료에 시달이다가 고통 속에 가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미루어볼 때 현대의학의 죽음 비즈니스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죽음을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가치와 이윤을 쉽게 맞바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화는 치료 가능한 병으로 둔갑하고 죽음은 병원에게 외주가 되었다. 죽음이 치료해야할 질병으로 둔갑한 요즘 중환자실에서 삶을 마쳐야 <할 만큼 하고 재대로 보냈다>는 인식을 함으로써 의사도 병원도 주변인들도 정작 죽어가는 당사자의 고통은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왜 큰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해야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마흔 다섯 살의 어머니를 보내면서 내 아버지는 <원 없이 큰 병원에서 해 볼 것 다 해보았다.>라는 말씀을 했었다. 어머니는 만신창이가 되어 계셨는데 가족들은 왜 생전에는 당연한 듯 살면서 잘하지도 못했으면서 죽음에 이르러 그렇게 해야 했을까? 어차피 위험이 있는 상황이라면 환자나 보호자들은 똑같이 나쁜 결과라도 대형 병원에서의 결과를 의심하지 않고 더 쉽게 승복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의료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 첨단 기계화 설비에 달린 일이라는 생각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정말 죽이는 것과 같을까? 다행히 어머니는 우리 집 안방에서 나와 아버지가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가셨다. 아울러 죽음에 임했을 때도 존엄성과 사생활을 보호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죽을 장소를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임종 시 함께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언제 떠날지 예상하고 작별의 시간을 준비하는 것이다 생명 유지 장치를 쓸 것인지 사전에 결정하고 그 결정을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반면 죽음을 맞이할 준비에 대해서는 지극히 외면하려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 이러다가 나빠지면 병원에 모시고 가면 방법이 있겠지 라고 생각한다. 내가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고 죽을 때 죽는 것이다. 우리가 임종이 다가 왔다는 것은 임종 1주일 전에는 외부 자극에 대한반응이 저하되며 통념과 달리 임종환자는 탈수가 되었다고 해서 갈증을 호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식이 나빠지면 숨을 몰아쉰다든지 긴 시간 숨을 쉬지 않는 무호흡 증상이 나타나면 임종에 임박한 것으로 환자 본인의 통증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또한 임종 환자의 가래 끓는 소리는 의학적으로 임종천명이라고 하는데 임종 약 17-57시간 전에 들린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 시점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환자를 의료기관으로 옮기는 순간 연명치료의 굴레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유학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에서 나오는 오복입(五福入) 육극출(六極出) 에서는 편안하게 늙고 목숨을 마치는 것이 '고종명(考終命)이라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생명연장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죽음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연명치료의 범주를 결정하고 책임질 사람은 바로자신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 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엄마 이렇게 쇠약해진 상태에서 병원의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포박과 학대를 견뎌야 하는 것을 의미해요. 그게 싫으면 병원에 오지 말고 집에 계셔야 하는 거지요.> 뇌종양에 걸려 죽어가는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쓴 에세이이다. 죽음은 어떤 이에게만 벌어지는 특별한 일이거나 천벌이 아닐 뿐더러 병원에서는 죽음을 치료하지 못한다. 다만 죽음의 모습만이 바뀔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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